로웬
백업하면서 새삼 다시 읽었는데 생각보다 좋은 문장이 많아서 놀랬다...
밑의 세 개는 릴레이. 내가 쓴 부분만 백업. 엄청난 스압 주의... 로렌스 좋아해...
굳이 적어두자면 순서는 Act of killing - 무제 - -1 - 인력 - Signal fire - Missing link - 조각
이 순서대로 보면 둘의 감정의 흐름이 잘 보여서 좋다.
……고장 난 흰건반 대신 반음 올려 검은건반을 치며 목이 하얀 네가 말했습니다 그 방 창문 옆에서 음지식물처럼 숨죽이고 있던 내 걸음을 길과 나의 접(椄) 같은 것이었다고 말하고 싶지만 덕분에 너의 음악을 받아 적은 내 일기들은 작은 창의 불빛으로도 잘 자랐지만 사실 그때부터 나의 사랑은 죄였습니다*
오웬은 그 구절을 책에서 읽었다. 서재에 있던 낡은 시집 중 하나였다. 그는 낡아서 노랗게 번진 책의 가장자리를 접어두었다. 그 당시 그에게는 여자친구가 있었고, 이런 구절을 보여주면 좋아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그 책은 결국 보여주지 못했다. 그들은 얼마 지나지 않아 헤어졌기 때문이다. 고개를 숙이면 금색 머리카락 사이로 보이는 목이 길고 희던 여자아이였다. 하지만 오웬은 그 아이의 이름을 제대로 기억하지 못한다. 그와 마찬가지로 그는 자신이 시의 한 구절을 접어 두었다는 것을 꽤 오래 잊고 있었다. 그 시가 문득 떠오른 것은 아주 최근의 일이다. 그는 똑같은 시집을 도서관에서 발견했다. 익숙한 페이지들 사이에, 접은 자국이 없는 장. 그는 그 시를 다시 한 번 읽었다.
그는 중학생 때 두 명의 여자친구를 사귀었었는데, 둘 다 이름을 제대로 기억하지 못했다. 제시였는지, 제니퍼였는지, 제인이었는지, 조앤이었는지. 어쩌면 제니였을 수도 있겠다. 그 나잇대의 여자아이들은 감정이 빨랐다. 오웬은 그네들이 반짝반짝 빛나는 유리구슬 같다고 생각했다. 반짝반짝거리지만 만지면 차갑고, 반짝이는 것들은 유리안에 갇혀 있어 만질 수가 없는 그런 것. 그는 기본적으로 자의식이 강한 사람이었다. 타인을 자신의 안에 들이지 않는 것은 그에게 익숙한 행동양식이었다. 관계라는 것은 학습이었고, 그는 오랫동안 타자를 멀리하는 법을 학습했지만 한 번도 가까이 두는 것을 학습해본 적은 없다. 그네들과 오래가지 못한 것도 항상 크게 보자면 그런 이유였다.
목이 흰 것 같지는 않은데. 그는 책이 듬성듬성 꽂힌 서가 사이로 건너편을 내다보았다. 그는 자기 자신이 꽤 침착하다고 느꼈다. 그가 그것, 을 깨달은 것은 얼마 되지 않는다. 신기하게도 그는 그것을 아주 자연스럽게 받아들였다. 물론 부수적인 고민들은 컸지만서도, 영화의 큰 반전, 그런 것들에서 오는 압도감, 그런 느낌과는 거리가 멀었다. 그때 그는 담배를 피고 있었다. 대로변에 서서 버스가 오기를 기다리며 오랫동안 텅 빈 도로를 쳐다보았다. 초여름의 늦은 햇빛이 아스팔트 위로 드문드문 떨어졌다. 담배 연기가 아지랑이처럼 천천히 피어올랐다. 그는 그 사람, 의 눈동자를 생각하고 있었다. 손가락, 이라든가, 어깨, 라든가. 곧, 생각이 끊기고, 그는 담배를 발치에 떨어트렸다.
"아, 시발."
두 개피째의 담배였다. 장초를 떨어트렸다는 아까움과 이상한 피곤함이 몰려왔다. 그는 꽁초를 주우려 몸을 수그리다가 그 자세 그대로 쭈그리고 앉았다. 그의 뒷덜미에 더운 해가 쏟아지고 있었다. 그는 팔안에 이마를 대고 오랫동안 생각했다. 참, 합리적이지 못한 일이었다. 어느 모로 보나 그랬다. "아…… 정말 싫다." 침묵. 그는 지나가던 사람이 그를 돌아볼 때까지 오랫동안 쭈그리고 앉아 있었다. 그는 한참 후에 자리에서 일어나 바짓단을 털었다. 곧 버스가 왔고 그는 사람이 적은 버스의 가장 앞좌석에 앉았다. 눈을 감았다. 버스가 흔들리고 있었다. 덜컹, 덜컹. 그의 생각도, 마치 그릇에 담아놓은 물처럼 흔들리고 있었다.
그는 그 감정이, 앞에서도 말했다시피 합리적이지 못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회의주의자이자 냉소주의자였다. 그는 여러가지 생각을 했다. 이유를 찾으려는 시도는 그 중 하나였다. 그리고 실패했다. 그는 그가 그 동안 읽어온 수 많은 고전과 로맨스들을 약간은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이 되었다. 물론 그는 로미오도 베르테르도 아니었으므로, 불타는 열정에 빠지거나 깊은 실의에 빠지거나, 그 두 가지 행동양식은 모두 그에게는 해당이 없었다. 다만 그는 그것이 어느 순간에 끝나거나 할 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가 오랫동안 참아 온 분노와 우울처럼, 겉으로 드러내지 않는 것은 역시나 익숙했다.
그러나 익숙하다는 것은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했다. 그는 훌륭한 연기자였고 겉으로 드러내지 않을 수는 있었지만 그 사람의 목소리나 마른 손목에 대해서 생각하는 것을 멈출 수는 없었다. 지랄맞은 일이라고 그는 자진해서 평가했다. 어쨌거나 그 사람은 참, 여러 곳에 존재했다. 읽다 만 책의 한가운데에서, 도서관의 책장과 혼자 보는 영화와, 연노랑색 담배곽과, 신발코, 무수히 사라지는 연기처럼, 많은, 그러한, 상념들.
그는 문득 울고 싶다고 생각했다. 물론, 울지는 않았다.
그는 책을 손바닥으로 밀어 틈새를 가리웠다. 그 사람의 옆얼굴이 책들 사이로 사라졌다. 책의 나열번호를 적어둔 쪽지를 뒤집자 흰 면이 나타났다. 주머니에 넣어놨던 볼펜을 꺼내 시의 구절을 받아적었다. ……나의…… 죄였습니다. 벽에다 대고 쓴 글씨는 어딘가 삐뚤빼뚤했다. 그렇게 올곧은 마음도 아니니 상관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쪽지를 반듯하게 접어 손바닥 안에 쥐었다. 시집을 책꽂이 위에 올려 놓고 책장들 사이를 빠져나왔다. 그 사람은 카운터 앞에 앉아 있었다. "선배." 부르고, 불쑥, 주먹쥔 손을 들이밀자 올려다보는 눈동자가 까맣다.
"선물이에요. 가져요."
당연하게도 의아한 얼굴을 하면서도 손바닥을 내밀었다. 그 위에 종잇조각을 올려놓자 표정이 어딘가 미심쩍게 변한다. "쓰레기 버려달라는 건 아니지?" "설마." 그는 자신이 이 사람의 이름과, 시의 구절과, 같이 본 영화와, 찻잔의 무늬와, 어깨와 머리카락, 목소리와 손가락을 기억하리라고 확신할 수 있었다. 그래서, 그랬다. 그래서와, 그랬다, 사이에 존재하는 무수한 행간에 대하여는 굳이 적지 않아도 좋을 것이다. 그는 보폭이 큰 걸음으로 도서관을 빠져나오며, 시의 첫 구절을 떠올린다. 나는 걸어가기엔 멀고, 무얼 타기엔 애매한 길을, 누구보다 많이 갖고 있다.
* 청파동3ㅡ관음 /박준
그러니까, 오웬은 사실 깊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는 단순한 예상을 했다. 로렌스 우는 그 자신만큼이나 타인을 알아차리는데에 기민한 사람이었고, 둘러 가는 시구들 사이에서 그 진의를 알아차리지 못할 정도로 우둔하지는 않았다. 그의 행간은 자명했다. 수없이 많은 행간들이 존재했지만 어쨌거나 그는 구구절절히 변명하는 대신 에둘러 가는 방법을 택했다. 오웬은 쪽지가 몇 번 더 접혀 쓰레기통에 버려지는 상상을 했다. 별로 놀라운 상상은 아니었다. 그리고 앞으로는 마주쳐도 살갑게 인사하는 대신 눈을 피하게 될 것이다. 기숙사와 학년이 달라서 부러 찾지 않으면 마주칠 일도 없으니, 그건 차라리 잘 된 일이었다. 뭐…… 아마도 로렌스는 신사이니, 이것을 소문내거나 하는 일은 없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답지 않는 막연한 생각이었지만 어쩐지 믿을 만한 구석이 있었다. ㅡ그는 도서관에서 기숙사까지 오는 짧은 길목에 그런 생각들을 했다. 그저, 테이블 위에 다 먹은 음료수 병을 하나씩 올려놓는 것처럼 이상할 정도로 일상적이고 차분한 기분이었다. 그는 초록색 문으로 들어가 익숙한 복도와 계단을 지나쳐 자신의 방으로 들어갔다. 세 명이 같이 쓰는 방에는 사람이 없었고 불이 꺼져 있었다. 오웬은 불을 켜지 않은 채로 방문을 닫자마자 1층에 있는 제 침대 위로 풀썩, 엎어졌다. 빤 지 얼 마 되지 않은 시트에서 표백제 냄새가 났다. 베개에 코를 처박고 길게 길게 이어지는 생각들을 잘라내어 하나씩 정리해둔다. 그의 안에서 이제 합리적이지 않은 것은 없다.
라고, 생각하고 있을 즈음 노크 소리가 들렸다. 그는 깜빡 잠에서 깬 것 같은 기분으로 고개를 들었다. 노크 소리는 정중했다. 똑, 똑, 두 번. 오웬은 이상하게도 그것이 누구인지 문을 열기도 전부터 알고 있었다. 영화에서는, 도망가는 사람이 있으면 쫓아가는 사람도 있는 법이다. 클리셰라는 말이 현실에서도 해당이 될 줄은 몰랐다. 그는 문을 열었다. 거기에는 로렌스가 있었고 오웬은 문고리를 붙잡은 채 문간 위에 섰다. "왜 왔어요?" 그 말은 참 여러 가지 의미를 담고 있었다. 그게 단순히 왜 당신이 다른 기숙사에 있느냐, 라는 말이 아님은 그도 상대도 알았다. 로렌스는 그의 생각보다도 더 신사였던 것 같다. 굳이 친절한 거절의 말을 들려주러 여기까지 왔다. 오웬은 그 일련의 과정이 피곤하다고 느꼈다. 졸음이 왔다. 그리고 침묵이 길었다. ……그의 생각보다.
오웬은 자신이 생각할 수 있는 모든 부정적인 대답들에 대해서 상상하고 있었는데, 그 가운데 문득 떠오른 것은 언젠가 유진이 한 말이었다. "너는 의외로 로맨티스트구나, 오웬." 오웬은 그 말에 지랄 같은 소리, 라고 대꾸했던 것 같다. 유진의 논리는 그러했다. 타자에게 방어적이고 부정적인 사람들은 사실은 감성적인 사람이 많다. 그들은 자신을 방어하는 용도로 부정적인 생각들을 사용한다. 기대하고 상처받는 그 과정 자체가 싫기 때문이다. "하지만 무언가를 기대하지 살 수 있는 사람은 없는 법이지." 그렇게 말하는 유진이야말로 대단한 로맨티스트였다. 오웬은 그 말을 반쯤 수긍하고 반쯤 흘려들었다. ……왜 지금 이런 생각이 떠오르는 것일까?
"뭘 그렇게 웃어요."
그 말꼬리가 딱딱하게 끊어진 것은 그런, 생각들 때문이었던 것 같다. 아 이게 다 유진 때문이야, 인생에 도움이 안되는 형 같으니……. 그의 상념을 끊어내며 문득, 손이 눈앞으로 다가왔다. 머리카락을 쓸어내리며 헤집는 손길. 의외의 스킨쉽에 오웬은 눈을 잘게 깜빡였다. 아주 어렴풋한 체온이었다. 그러니까 딱, 손바닥 한 개 분량의 체온. 그러나 그는 왠지 지금까지 자신이 했던 모든 생각들이 부질없다고 느꼈다. 그제야 상대의 눈이 보였고, 그가 그 시선에서 무언가를 느끼기도 전에, 뒷말이 먼저 따라나왔다. "담배 끊을래?" 반사적으로 대답했다. "싫어요." "너무 단호한 거 아냐?" "싫은 걸 어쩌라구요." 오웬은 알고 있었다. 지금 문을 열지 않으면 영원히 열 수 없다는 것을.
그리고 그 뒤는 그의 예상과는 상관 없는 일이었다. 오웬은 잠깐 방 한가운데 서 있다가 로렌스의 옷소매를 끌어당겨 침대의 모서리에 앉았다. 여전히 불은 켜지 않아 방안이 조금, 어둑했다. "손님 대접 같은 건 못해요." 방안은 딱 남자애들 셋이 사용하는 공간만큼 무질서했으므로 로렌스 역시 그런 것을 기대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오웬은 잠시 망설였다. 나란히 앉아서 침묵하는 모습이 유쾌하지는 않았다. 그는 불쑥 손을 내밀었고 로렌스가 곁눈질로 그의 행동을 보았다. 그는 손바닥으로 로렌스의 손목을 감싸듯이 쥐어본다. 얇지는 않지만, 도드라진 뼈대가 손바닥 안의 오목한 부분에 닿는다. 그는 손가락으로 그의 손등을 툭툭 두드리다가, 손가락을 매만져보기도 했다. 매끈한 손톱의 감촉이 손끝에 걸린다. 오웬은 그제서야 자신이 줄곧 이렇게 하고 싶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눈동자와 어깨, 손가락과 발끝.
"뭐 하는 거야?"
"감상이요."
그는 짧고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그리고 거기에 아주 많은 예상들을, 버려두었다.
"어차피 졸업만 하면 이런 건 할 필요도 없을 텐데." 이것은 수학에 대한 문과계 사람들의 흔한 변명이다. 오웬은 그걸 알면서도 그 말을 입안으로 주워섬겼다. 그는 연습문제가 빼곡하게 적혀 있는 프린트를 성마르게 손등으로 밀어내며 의자 등받이에 몸을 기대었다. 그것을 다시 반듯하게 책상 한가운데로 끌고 온 것은 로렌스였다. "졸업까지 한참 남은 신입생이." 로렌스는 인내심이 강했다. 최소한 오웬 토너의 그것보다는 갑절은 셀 것이었다. 오웬은 그 낯에 여상하게 걸려 있는 웃음을 보며 펜 뒤쪽을 이빨로 잘근잘근 깨물었다. "그러는 그쪽은 노땅이잖아요." 말은 앞니에 걸려 뭉개지듯이 나왔다. "살면서 열여덟에 노땅 소리는 처음 들어보네." "아 나도 빨리 나이나 먹었으면. 졸업하고 싶다고요." "네가 3학년 과제량을 보면 그런 소리가 안 나올 걸." 로렌스의 손가락이 그의 손등을 툭툭 쳤고 그제야 오웬은 삐뚤게 의자에 기대어 있던 자세를 고쳐 앉았다.
해는 점점 짧아지고 있었다. 여름은 지구를 반 바퀴 비스듬히 돌아 북반구로 흘러가고 있었고, 오후에서 저녁으로 넘어가는 그 애매한 간극에는 푸른 빛과 붉은 빛이 기묘한 비율로 공존했다. 수업이 다 끝난 교실 안에는 사람이 없었다. 제각기 삐뚜름한 각도를 가지고 놓여 있는 책상들, 텅 빈 의자들. 오웬은 창틀을 타고 흐르는 불그스레한 햇빛을 곁눈질했다. "……듣고 있어?" 솔직히 안 듣고 있었다. 오웬은 눈을 느리게 몇 번 깜빡이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로렌스는 한숨을 내쉬었지만, 그것은 그렇게 깊은 한숨은 아니었다. "알려달라고 한 건 너잖아." "아니, 문제 푸는 법을 알려달라고요. 이론 말고." 과연 성질 급한 사람다운 대답이었다. 그러나 앞서 말했다시피 로렌스는 인내심이 강했고, 그는 조급한 반응을 보이는 대신 주의를 집중시키려는 듯 책상을 몇 번 두드리며 상체를 약간 앞으로 수그렸다. 그의 태도는 사뭇 진지했다. "잘 들어봐, 오웬." 여기서부터 오웬은 이미 감이 좋지 않았다. "고대 그리스에서는 철학자들이 수학을 했다는 걸 알아?" "안 궁금해요." "수학은 숫자와 기표로 이루어진 일종의 철학이야…… 수학만큼 적확하면서도 깔끔한 학문이 없지. 숫자의 개념은 어쩌면 인류 이전부터 존재했을지도 몰라." "안 궁금하다니까요." 고대 그리스인들은 수학으로 영원한 이데아를 꿈꾼거야." 오웬은 정말로 궁금하지 않았지만 로렌스는 끈질겼다. 한참을 철학과 숫자와 그 외 기타 등등의 것들에 대한 예찬을 늘어놓던 그는 이내 "그러니까, 책의 서문을 읽고는 그 안의 내용을 짐작할 수 없듯이 수학도 문제 풀이만 배워서는 그 아름다움을 익힐 수 없다고." 하며, 결론을 내렸다. 물론, 태생이 문과생이자 문학도인 오웬의 귀에는 한편의 훌륭한 개소리였다. "……그래서 이건 어떻게 푼다고요?" "안 알려준다." "젠장." 로렌스는 익숙한 욕설을 듣고도 모른 척 하는 것 역시 잘했다.
성미가 다급한 오웬에게는 그리 적절한 교육 방식은 아니긴 했지만 어쨌거나, 로렌스는 설명을 잘 했다. 그의 샤프펜이 종이 위를 천천히 따라가며 몇 가지 기호를 그렸고 오웬은 수학을 싫어하긴 했지만 뭐든지 들은 것은 금세 익힐 수 있을 정도로 영민했다. 삐뚜름하게 턱을 괸 채로 한참 동안 설명을 듣던 오웬은 문득 로렌스의 고개 숙인 정수리를 보았다. 검은 머리카락 아래의 이마와 콧등에 얹힌 안경, 그 너머의 눈동자가 기울어진 각도로 보였다. 반질반질하고 까만 눈동자. "안경 도수가 몇이에요?" 로렌스가 문득 고개를 들었다. "글쎄, 예전에 맞췄던 거라 잘 기억은 안 나는데." "안경 벗으면 안 보여요?" "아무래도……" 오웬은 그가 말을 끝맺기도 전에 손을 뻗어 그의 안경을 비스듬히 밀어올렸다. 한 겹 유리막이 없어진 눈동자는 더욱 새까맣게 보였고, 로렌스는 미간을 좁히며 게슴츠레한 표정을 지었다. 그 표정이 조금 우스워 오웬은 목 안쪽으로 잘게 웃었다. "나 눈 나빠." "그래 보이네. 내 얼굴 보여요?" "잘 안 보이는데." 오웬은 고개를 조금 숙여 얼굴을 가까이 가져다 댔다. "아직도?" "……눈이 어디있는지는 알겠다." 문득, 숨소리가 가까웠다. 우리는 종종 까먹곤 하지만 사람의 살갗은 일정한 온도를 가지고 있어서, 가까워지는 순간을 기민하게 깨닫게 되는 것이다. 마치 어떤 종류의 인력처럼. ㅡ그게, 어느 책에 나온 구절이었는지. 오웬은 생각난 것을 행동으로 옮기는데 별로 거리낌이 없는 성격이었다. 그건 지금 순간에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가볍게 고개를 뻗어 그의 입술에 입술을 가져다 댔다.
그것은 아주 찰나였다. 그리고 오웬은 별 다른 제스쳐 없이 다시금 그의 안경을 콧등까지 밀어 내려주었다. 거리가 다시 멀어지는 순간 불현듯 붉은 빛이 선득하게 시야 위쪽을 스쳤다. 어느새 완연한 석양, 이었다. 그는 고개를 들어 교실 한편에 걸린 시계를 올려다 보았다. 눈 깜짝할 새에 여섯시가 넘어 있었다. "밥 먹으러 갈래요?" 그의 목소리는 여전히 높낮이가 없었고 필통 안에 지우개와 펜을 차곡차곡 집어넣는 동작 역시 마찬가지였다. 연습문제 프린트는 대충 접혀 그의 주머니로 들어갔다. 자리에서 일어나려는데 로렌스가 문득 그의 손목을 잡았다. 그는 유쾌한 것인지 놀란 것인지 알 수 없는 표정을 하고 있었다. "……나 지금 되게 설렌 거 알아?" 오웬은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며 웃었다. "그래요?" "응, 엄청." 그는 잡힌 손목 너머로 상대의 손목을 마주 잡으며 가볍게 잡아당겼다. 의자가 끌리는 소리. 오웬은 그러한 류의 접촉이 어색하지 않은 사이라는 것이 새삼스러웠다. 그는 이전에도 몇 번, 그런 류의 접촉에 대해 상상해본 적이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상상에 그칠 것을 미리 염두에 둔 것이었으므로 작은 상자에 담아둔 유리구슬들과 다를 바가 못되었다. 그러나 실제는 상상과 달랐고, 상상보다 더 괜찮은 것 같았다. 그는 어딘가 유쾌한 기분으로 텅 빈 교실의 문을 닫았다. 밤이 화살처럼 빠르게 찾아오고 있었다.
오랜만에 꿈을 꾸었다. 담배를 줄였기 때문인지는 알 수가 없다. 우범지역의 뒷골목처럼, 기름때가 묻은 높다란 벽이 양쪽으로 서 있었고 그 사이로 난 길은 몹시 좁았다. 해가 잘 들지 않아 어둑했고, 시멘트칠을 한 지 오래된 듯 갈라진 회벽 사이로 드러난 붉은 벽돌이 동물의 내장처럼 날 것으로 보였다. 오웬은 길앞에서 오랫동안 생각했다. 그는 이것이 꿈임을 알았다. 그는 이러니저러니해도 좋은 집에서 나고 자란 도련님이었으므로, 이런 길을 제 눈으로 본 기억은 별로 없었다. 그렇다면 이 길은 어느 길인 것일까. 골목의 안쪽은 아주 어두워서 그 끝을 짐작하기가 힘들었다. 오웬은 다른 길을 갈 수 있다면 좋을 것 같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이 길 말고 다른 길은 모른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리고 그게 아주…….
그는 잠에서 깼다.
자신의 방은 아니었지만 익숙했다. 이곳이 킹스버리의 독방임을 깨닫기까지 약간의 시간이 필요했다. 걷어놓은 블라인드 아래로 늦은 오후의 고즈넉한 햇빛이 창틀과 벽을 타고 흘러내려 그의 이마까지 다가왔다. 소리가 적었다. 간간히 책장이 넘어가는 소리와 팔꿈치가 시트에 스쳐 나는 바스락거리는 소리, 그리고 숨소리. 오웬은 그게 자신이 내는 소리가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더블싱글 침대는 다 큰 남자애 둘이 나란히 누워 있기에는 다소 비좁았지만 그래서 어깨와 팔이 맞닿고 발이 엇갈려 놓여있는 것은 나쁘지 않았다. 이불을 덮은 기억은 없었는데 목까지 이불이 올라와 있었다. 깨끗한 섬유유연제 냄새가 났다. 정갈한 취향의 벽지 무늬와 침대 옆의 낮은 서랍장. 그가 몸을 조금 뒤척이자 로렌스가 물었다. "깼어?" 그는 언제나 타인의 기척에 기민했다. 대답하지 않자 손이 자연스레 얼굴 위로 올라왔다. 말라서 마디가 도드라진 손이 그의 이마와 눈꺼풀을 가볍게 스친다. 오웬은 손바닥이 드리운 얕은 그림자 아래에서 눈을 여러 번 깜빡였다.
그는 꿈에서 본 좁고 긴 길을 떠올렸다. 방은 그와 대조적으로 밝았고 익숙한 타인의 냄새가 났다. 타인, 글쎄, 어쨌거나 그런 식으로밖에 표현할 수 없는 것이다. 그는 문득 그게 아주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예를 들자면 자신이 읽다 놔둔 책이 타인의 방에 놓여 있는 일이라든가, 누군가가 자신이 좋아하는 과자를 서랍속에 넣어두는 일, 혹은 누군가가 그의 잠의 처음과 끝을 알아차리는 일. 그는 자신이 그런 종류의 일에 몹시 결핍되어 있었다는 것을 최근에야 알았다. 그는 몸을 돌려 베개를 팔꿈치 아래에 두었다. 잠이 덜 깬 탓인지 나른했다. 로렌스는 여전히 책을 읽고 있었다. 그는 손바닥을 턱, 펼친 책 한가운데에 내려놓았고 그제야 시선이 올라왔다.
"왜?"
"그냥."
이불을 끌어안아 턱 아래에 대며 눈을 감았다. "더 자거나 내가 책을 읽게 내버려 두거나, 둘 중 하나만 하는게 어때?" "싫은데." 오웬은 몸을 옹송그리며 웅얼거리듯이 대답했고 로렌스는 이런 사소한 문답에서는 항상 져주는 편이었다. 책장을 덮는 소리가 들렸다. 이내 매트리스 한쪽이 가볍게 가라앉았다. 로렌스가 몸을 편하게 뉘인 탓이다. 손끝이 자꾸만 장난스럽게 툭툭 뒷목에 닿아왔다. "그래서 왜?" 그가 거듭 물었다. 오웬은 잠시 말을 골랐다.
"싫은 꿈을 꿨거든요."
싫은 꿈, 이라고 소리내어 말하자 오히려 말은 가벼워지는 느낌이었다. 로렌스는 그 말의 의미를 잠시 생각해보는 것 같았다. 타인과 타인의 사이에는 언제나 그런 것들이 존재했다. 말하지 않으면 알 수 없는 것들. 목덜미에 닿아있던 손이 관자놀이로 올라왔다.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걷어내며 눈을 굴린다. 오웬은 감고 있던 눈을 떠서 곁눈질로 그를 쳐다보았다. "어떤 꿈이었는데?" 로렌스는 손이 조금 찬 편이었다. "……산더미처럼 쌓여있는 삶은 버섯을 먹는 꿈이라든가." 그가 소리내어 웃었다. "버섯 싫어해?" "씹는 느낌이 불쾌해요. 냄새도 별로고." "편식하면 안되지. 안 먹는게 또 뭐가 있는데?" "중국요리는 먹으면 토해요." "그래?" "어렸을 때 먹다가 토한 이후로 계속 그래요."
"그래서 진짜는 뭔데?"
오웬은 머리 위에 올라가 있는 손을 잡아 깍지를 꼈다. 마른 손가락들이 헐겁게 얽혀든다. "까먹었어요." 그렇게 말하자 어쩐지 정말로, 까먹은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한번도 잊어버린 적이 없는 꿈임에도 그랬다. 손을 잡고 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거짓말이지?" 잡힌 손에 아프게 힘이 들어간다. 아, 그만 좀. 그가 짜증스럽게 중얼거리고는 덧붙였다. "나중에 생각나면 말해줄게요." 그제야 손마디에 천천히 힘이 풀렸다.
"나중에."
"네, 나중에."
남은 말들이 아주 많았다. 오웬은 셈을 하는 것처럼 다시 눈을 감았다.
2
영화관에서 처음 보는 사람이 말을 거는 것은 그리 흔한 일이 아니다. 그리고 오웬은 그 상대가 누구든, 타자에게 그리 살가운 성격이 못되었다. 아니, 이것은 좀 완곡한 표현이고, 그는 확실히 남을 대할 때 좀 까탈스럽고 무뚝뚝한 구석이 있는 성격이었다. 오웬은 흘긋, 눈동자만 들어 제 옆에 서 있는 소년을 곁눈질했다. 소년은 저와 키가 엇비슷했고, 안경을 끼고 있었다. 새까만 머리카락과 또렷한 이목구비가 인상적이었다. 그러나 금발의 미인이 말을 걸어와도 시큰둥할 판에 제 나이 또래로 보이는 남자애가 말을 걸었다고 엄청나게 반가울 일은 없다. 오웬은 청바지 주머니에 양손을 쑤셔 넣은 채로 어깨를 으쓱 했다. "처음 보러 온 건데. 돈 아깝게 뭐하러 영화관에서 영화를 두 번이나 봐." "왜, 좋은 영화는 그러기도 하지 않나. 이거 꽤 괜찮은 영화라고?" 소년이 검지 손가락으로 툭툭, 포스터를 두들겼다. 오웬은 잠시 동안 게슴츠레한 눈으로 보라색 포스터를 쳐다보다가, 고개를 들었다. 소년은 안경 너머의 눈동자 역시 검었다. 오웬은 그 눈을 쳐다보며 바지 뒷주머니에서 연노랑색 담배곽을 꺼내들었다. 오는 길에 산 것이라 아직 곽을 버리지 않았다. 그가 그 중 한 개피를 꺼내 입에 물며, 뱉어내듯이 물었다.
"……할일 없냐?"
그것은 너 존나 한가해서 나한테 말이나 걸고 있냐, 의 축약된 버전이었다.
4
끈질기네. 사회화가 정상적으로 이루어진 사람이라면 그가 지금과 같이 온몸으로 꺼지라는 메세지를 보낼 때는 대부분 순순히 물러나기 마련이었다. 그러나 눈앞의 소년은 이상하게도 그의 억양 없는 말투에도, 잔뜩 웅크린 몸짓에도 전혀 굴하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 오웬은 소년이 사회화가 덜 된 것인지 아니면 튕기는 사람을 보면 물불 안 가리고 덤벼드는 이상한 성격의 소유자인지, 둘 중 어느쪽일까 고민하기 시작했다. 물론 오웬은 둘 다 싫었다. 그는 저를 귀찮게 하는 것이라면 대천사의 축복도 마다할 인간이었다. 오웬은 시계를 한 번 쳐다보았고, 고개를 숙여 제 신발 끝을 쳐다보다가 다시 눈을 들었다. 소년은 그때까지도 여전히 바둑알처럼 맨질맨질한 눈으로 그를 쳐다보고 있었다. 그 눈에 어린 것은 호기심에 가장 가까워 보였다. 어쩌면 그것은 묘한 오기일지도 모른다. 그 안색을 살피던 오웬은 문득, 담배꽁초를 엄지와 검지 끝으로 집어 입에서 빼내었다. 그는 입꼬리를 끌어올려 소년에게 빙긋 웃어보였다. 그가 좀처럼 짓지 않는 상냥한 웃음이었다. 갑작스러운 미소에 소년이 의아한 표정을 지을 틈도 없이, 그는 훅, 깊게 빨아들였던 연기를 소년의 안면에 뱉어내었다. 소년이 자연스레 얼굴을 찡그렸고, 오웬의 웃음은 조금 더 짙어졌다.
"담배도 못 피는 샌님이."
그가 다시금 담배를 입에 물며 목구멍 안쪽으로 작게 킬킬거렸다.
6
영화는 소년의 말마따나 괜찮았다. 오웬은 어딘가 냉소적인 기분이 되어, 영화관 쓰레기통에 담배곽을 버리고 나머지 담배들은 주머니 속에 쑤셔 넣었다. 영화관 밖으로 나오자 어느새 하늘이 뉘엿하게 붉어져 있었다. 푸른빛을 몰아내며 황혼이 천천히 가라앉고 있었다. 영화를 보고 난 뒤나 두꺼운 소설책을 다 읽었을 때 해가 질 무렵, 조용한 자정과 아침이 오기 전의 찰나, 그런 시간들에는 이상하게도 현실감각이 무뎌지는 느낌이 들었다. 그는 버스 정류장에 서서 낮은 건물들의 정수리들을 눈으로 훑었다. 퇴근 시간이라 하기에도 저녁 시간이라고 하기에도 애매한 시간, 버스 정류장에는 사람이 적었다. 그러므로 소년과 다시 마주치게 된 것이 그리 놀랍지는 않았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살갑게 아는 체를 할 기분이 들었냐하면 그건 또 결코 아니었다. 그는 두 개피째의 담배를 입에 물며 딴청을 부렸다. 삼 분 정도 뒤에 버스가 도착했고, 그는 버스를 타려 몸을 틀었다. 그보다 더 먼저 소년이 버스 앞문으로 뛰어들었다. 오웬은 멀뚱한 눈으로 소년의 검은 뒷통수를 쳐다보았다. 이 버스는 GCS로 곧장 향하는 몇 안되는 버스였다. 그는 왠지 모르게, 추리 소설에서 안 좋은 복선을 발견한 것만 같은 기분이 되었다.
8
오웬은 잠시 동안 고민했다. 자존심을 세우기 위해 전과 똑같이 싸가지 없는 태도를 고수할 것인가, 아니면 그깟 자존심 한 수 접고 앞날의 안위를 도모해볼 것인가. 물론 그의 대답은 후자였다. 그의 인생 모티브는 가늘고 길고 귀찮지 않게, 였으므로. 그는 눈을 약간 아래로 내리깔며 가라앉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오웬 토너." "그래?" "이 학교 다니…… 십니까?" 소년은 그의 어미가 정중해진 것을 알아차리고는 키득, 짤막하게 웃었다. 오웬은 갑자기 목덜미가 뜨끈해지는 것을 느꼈다. 그는 속으로 시발존나시발 왜 한 시간 거리에 있는 극장으로 영화를 보러 다니고 난리야 시발, 하고 다분히 제 얼굴에 침 뱉는 생각을 하고 있었으나 물론 그 무례함이 얼굴에까지 티가 나지는 않았다. "물론, 다니지. 나는 널 본 적이 있는데 말이야. 아는 얼굴이 아닌 걸 보니 1학년인가 2학년인가, 했지만." "……3학년?" "빙고." 비록 싸가지 없음을 얼굴로 티를 내지는 않을 지언정 입에서 쏟아지는 한숨까지 막을 수는 없었다. 뉘엿하게 저무는 노을이 그의 시야 아래, 발치에 맴돌았다.
"그, 저, 그러니까."
"그러니까, 뭐?"
"……아까는."
"아까는 뭐."
……무례하게 굴어서 죄송했습니다…… 그가 고개를 숙인 채 속사포처럼 빠르게 뱉어내었다. 아, 시발 인생 살기 힘들다.
10
오웬은 일단 귀찮은 일이라면 기본적으로 질색하는 성정이었으므로, 제 눈에 띌 때마다 득달같이 쫓아와서 전생에서부터 안 사람처럼 친근하게 인사를 하거나 훈수를 두는 상대가 반가울 리가 없었다. 오웬은 제가 몸치라는 사실을 아주 잘 알고 있었고 그걸 딱히 고치고 싶다는 생각도 크게 해 본 적이 없었다. 사람이라면 뭐, 못하는 것도 한두 개쯤 있고 그래야 인간답지 않은가.(오웬은 확실히 자기 자신을 높게 평가하는 타입이었다.) 그리고 그러는 가운데 그는 소년의 이름을 자연스럽게 알게 되었다. 소년의 이름은 로렌스 우, 라고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따박따박 우 선배님, 이라고 부르는데에서 그 심리적 거리감을 짐작할 만도 했으나, 로렌스는 참으로 굴하지 않는 정신을 가진 것 같았다. 전생에 독립투사이기라도 했던 것일까.
오웬이 그를 가장 자주 마주치는 장소는 도서관이었다. 2층짜리의 제법 오래되고 넓은 도서관은 그가 학교에서 가장 좋아하는 공간 중 하나였다. 로렌스가 도서위원이라는 사실은 그에게는 조금 얄궂은 운명의 장난 따위로 느껴졌다. "도서위원이라면서 일 안하십니까." 그가 낮고 소곤거리는 목소리로 제 옆에 선 소년에게 중얼거렸다. 그는 도스토예프스키의 죄와 벌, 을 찾고 있었다. "도서위원일 그렇게 안 빡빡해. 해볼 생각 있어?" "……별로." 그는 고개를 약간 꺾어 책장 위쪽을 쳐다보았다.
12
로렌스는 오웬이 다음 서가로 향할 때까지도 쫓아왔다. 이미 익숙해진 행동양식이므로 내버려두었다.(사실 내버려두는 것 말고 할 수 있는 것도 없었다. 망할 선후배 관계.) 도서관에서만 나는, 특유의 오래된 책 냄새가 문득 코를 찔렀다. 서점에서는 이런 냄새가 나지 않는다. 그곳에 있는 책들은 누군가의 손에 들린 적이 없는 새 책들이기 때문이다. 오직 오래된 책에서만 이런 냄새가 났다. 손때 묻은 종이, 오래 묵어 닳아진 잉크자국, 나달나달해진 책머리, 그리고 그런것들이 가지고 있는 고유한 내음과 역사. 그래서 그는 도서관을 좋아했다. 오웬이 서가의 윗부분을 눈으로 훑는 사이, 로렌스의 팔이 먼저 뻗어왔다. "여기 있네." 과연 도서위원이라 그런지 빨랐다. 오웬은 정중한, 그리고 전혀 친근하지 않은 태도로 그 책을 받아들었다. "감사합니다." 책의 표지는 어두운 초록색이었다. 고전이란 것들이 으레 그렇듯이 타인의 손을 많이 탄 흔적이 있었다. 그가 책의 닳은 모서리를 손가락으로 매만지는 사이 로렌스가 입을 열었다. "라스콜니노프, 의 이름은 라스콜에서 따왔지. 주인공의 이름 말야." 오웬이 문득 고개를 들었다. "라스콜이 무슨 뜻인데요?" "분열." 대답하며 그가 문득, 빙긋 웃었다.
14
"너는 창녀한테서 구원을 찾기엔 너무 눈치가 빠른 것 같거든." 그 말의 의미는 책의 거의 말미에서나 알 수 있었다. 오웬은 확실히 운명론에도, 일반적인 도덕에도, 종교적 함의에도 관심이 없었다. 소냐는 라스콜니노프의 인생을 구원했지만 그 자신의 인생은 한 번도 구원받은 적이 없었으므로, 겪어본 적 없는 것은 믿지도 않는 냉소주의자 특유의 감각으로 오웬은 코웃음을 쳤다. 그리고 조금 자존심 상하는 일이지만, 로렌스가 골라준 책들은 확실히 그의 구미에 맞았다. 사람 대신 늙어가는 초상화와 쓰레기 같은 인간이 만들어낸 위대한 예술. 그는 서머싯 몸의 소설을 몇 권 더 빌려야겠다는 생각을 하며 도서관을 찾았다. 로렌스는 여전히 그곳에 있었다. "금방 다 읽었네. 재밌었나보지?" 로렌스가 네 권의 책을 양손으로 받아들며 물었다. 짐짓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 묻는 것은 조금 얄궂었지만. "뭐…… 안목이 좋으신 것 같다는 생각은 했습니다." 인정할 건 인정하고 넘어가자 싶었다. 로렌스가 빙긋, 다시금 웃었다. 오웬은 이상하게도 딱딱한 기분이 조금 누그러지는 것을 느꼈다. 그러니까 뭐, 취향이 잘 맞는 사람에게 느끼는 동질감이라고 해야할까, 그런 것이 어렴풋이 느껴지는 기분이었다.
16
오웬은 타인의 행간, 에 아주 기민한 사람이었고 그러므로 그 말이 무엇을 가리키는지 모르는 것은 아니었지만, 제대로 대답하는 대신 그는 미국 근대시가 꽂혀 있는 서가 안으로 휙 들어갔다. "어어, 못 들었어?" 목소리와 발걸음이 뒤따라왔다. 뒤를 돌아보자 로렌스는 여전히 웃고 있었다. 그 웃음이 어딘가 오연한 기색을 띠고 있는 것 같아서 오웬은 부러 낯빛을 굳혔다. "뭘요?" "뭐, 글쎄. 예를 들자면 추천이라던가, 자문이라던가." 오웬은 대답 대신 침묵했다. 로렌스가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그정도면 됐잖아?" "뭘요." 오웬은 똑같은 질문을 거듭 반복하는 제가 어쩐지 멍청이 같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다. "사람을 밀어내는 거 말이야." 그렇게 말하는 로렌스의 까만 눈동자가 안경 너머에서 반들반들 빛나고 있었다. "더 거절하면 나도 상처받을 거야." 웃기시네… 라는 말이 혓바닥 위까지 올라왔으나 맛 없는 오트밀을 삼키는 것처럼 꾸역꾸역 목구멍 안쪽으로 집어넣었다. 오웬은 오랫 동안 고민했고, 이내 짧게 한숨을 뱉어냈다. 그가 몇 걸음 로렌스에게로 다가갔다. 로렌스의 표정이 마치 처음으로 망아지 새끼를 길들이는 소년 같은 흥미진진한 표정이라 조금 마음에 안 들었으나, "부탁해요." 손등으로 툭, 무례하지 않을 정도로 가볍게 그의 가슴팍을 치며 말했다.
18
"건방지게 굴기로 작정한 거야?" "전 원래 이래요." 시큰둥하게 대답하며 오웬은 반들반들하게 손길을 탄 양장본의 표지를 손바닥으로 쓰다듬었다. 느낌이 좋았다. The great Gatsby. "영화는 안 봤었는데." "영화도 괜찮아. 시간나면 한 번 봐봐." 오웬은 형이상학적인 무늬가 그려진 표지를 내려다보며 흡사 낭독가나 아나운서 같은 로렌스의 완벽한 영어 발음을 곱씹었다. 유진도 비슷한 방식으로 발음을 했던 것 같다. 오웬은 배우지 못한ㅡ이라기보단 않은ㅡ 어떤, 상류층의 교육. "전 좀, 청개구리 기질이 있어서." 그가 툭, 던지듯이 말을 이었다. "학교에서 읽으라는 책은 다 안 읽었거든요, 그러니까, 한참 질풍노도 때? 그래서 To kill a mocking bird도 읽어본 적 없어요." "그으래?" 로렌스가 손을 쑥 뻗더니 그의 등 뒤, 세번째 칸에서 책 한 권을 꺼내들었다. 푸른색으로 흉내지빠귀새가 인쇄된 표지. " …여기 있는 책들을 다 외우고 계십니까?" "그런 건 아니지만, 이것도 좀 좋아해서. ㅡ난 네가 뒤뜰에 나가 깡통이나 쏘았으면 좋겠다. 하지만 새들도 쏘게 될거야. 맞출 수만 있다면 어치새를 모두 쏘아도 된다." "아, 저기요." 그가 버릇없이 말꼬리를 잘랐지만 로렌스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ㅡ하지만 흉내지빠귀(mocking bird)를 죽이는 건 죄가 된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로렌스의 눈동자가 사금처럼 반짝이고 있었다. 오웬은, 뭐랄까, 어떤 주문을 들은 사람처럼ㅡ로렌스의 발음이 너무 우아해서 그럴지도 모른다ㅡ 물었다. "왜, 죄가 되는데요?" "흉내지빠귀는 아무 잘못도 없으니까." 말하며, 그가 오웬의 팔위에 그 책도 얹어주었다.
20
"남자한테 데이트 신청은 안 받습니다만." "아, 짜게 굴지 말고." 말하며 로렌스는 제법 친근한 제스쳐로 그의 팔뚝을 툭, 쳤다. 오웬은 무의식중에 팔을 움츠러트리며 눈을 치켜떴다. 언제부터 이렇게 친했다고… 라는 말이 반사적으로 목구멍까지 올라왔지만 저도 좀 전에 상대의 가슴팍을 친 적이 있었으므로 그만두기로 했다. 그는 잠시 동안 머릿속으로 영화잡지에서 보았던 신작 목록을 훑어보았다. "Any day now…… 는, 아직 영화관에서 안 내렸으려나." "처음 들어보는데." "저도 아직 안 봤는데, 다들 괜찮다고 하길래요." 오웬이 가볍게 어깨를 으쓱하며 팔안에 끌어안은 책 두권을 고쳐 쥐었다. "사실 저도 내용은 잘 몰라요. 영화 보기 전에 스포 찾아보는 거 안 좋아해서." "흠, 그럼 데이트 신청은 안 까인 거 맞지?" "징그러우니까 그런 표현은 그만두시죠." 그는 미미하게 눈을 찌푸리며 대답하고는, 한 박자 말을 멈췄다가 한숨처럼 덧붙였다. "책, 은, 잘볼게요." 로렌스가 다시금 빙긋 웃었다. 오웬은 그 웃는 얼굴이 조금 마음에 안 든다고 생각했다.
제목을 따라해 보았다>_<
1
오웬은 한 손에는 폭죽을, 다른 한 손에는 빈 물통을 쥔 채로 하늘을 올려다 보았다. 손바닥 자국 하나 내지 않은, 투명한 유리창 같은 하늘이었다. 주변이 소란했다. 여러 사람이 동시에 말을 하면 소리가 겹쳐 웅웅거리는 소음으로 느껴진다. 그 가운데서 누군가가 목소리를 높이거나 악을 쓰는 소리가 들리지 않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에게는 의미가 없는 소리였으므로 그 소리들은 그의 귓바퀴를 타고 슬그머니 빠져나갔다. 그는 관중석을 거슬러 올랐다. 로빈훗의 모자를 쓴 한 무리의 사람들. 초록색 옷자락 때문에 눈이 아팠다. 하루 종일 땡볕 아래에 서 있는 것은 그에게는 일상적이지 않은 일이었으므로, 그는 단 한 종목도 참가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ㅡ그의 평소 운동신경을 생각해보면 당연한 일이었다ㅡ 다소 피곤하다고 느꼈다. 오웬은 뻐근한 눈가를 한쪽 손바닥으로 누르며 거침없이 인파를 헤치고 나아갔다. 그는 경기 내내 아치볼드 관중석 왼쪽 구석에 앉아 있었고 그 자리에선 상대편 관중석이 잘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잘 보이지 않더라도 맨 앞에 서서 붉은 망토를 두르고 스태프를 휘두르고 있는 사람이 누구인지 알아보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이쪽 편 관중석에서는 끊임없이 야유가 터져나왔다. 뭐, 그건 저쪽에서도 마찬가지였지만. 기숙사장이라는 건 참 피곤한 직책이야. 생각하며, 그는 빈 물통을 쓰레기통에 버리고는 보폭이 큰 걸음으로 사람들 비집고 들어갔다. 행사가 파할 무렵의 소란이 이곳저곳에서 들끓었다. 이르게 터지는 누군가의 폭죽 소리, 짧은 비명과 소리 높여 부르는 누군가의 이름과, 아직 끝나지 않은 구호…… 그리고 오웬은 킹스버리 응원석 끄트머리에서 찾던 이를 발견했다. 눈이 마주친 순간, 오웬은 자신도 모르게 폭죽을 쥔 손을 들어 흔들어 보였다.
3
한껏 몰린 사람들의 정수리 위로 로렌스의 왕관이 허공에 뜬 등불처럼 동동 떠다녔다. 오웬은 손목을 잡았던 손바닥의 감촉을 한 번 떠올리다가 이내 재게 걸음을 놀려 그 뒷모습을 쫓았다. 아직 벗지 않은 망토의 끝자락이 붉게 너울거렸다. "멋있던데요, 하루 종일." 그는 그리 크지 않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지만 상대는 용케도 그의 목소리를 알아들은 듯 했다. "그거 농담이지?" "뭐, 반 농담 반 진담. 오늘 욕 많이 먹어서 오래 살겠어요." "아무래도 이백 살까진 살 것 같아." 그 둘의 발걸음은 인파가 없는 곳을 찾아 한참을 헤매었다. 자연스레 스태디움에서 빠져나와, 문득 고개를 들자 낮은 건물들의 옥상이 눈에 들어왔다. "들어갈 수 있을까?" "들어가 보면 알겠죠." 오웬은 한손에 든 폭죽을 기세 좋게 붕붕 휘두르며 걸음을 빨리했다. 다행히도 건물은 열려 있었고 불이 꺼진 계단에서 오웬은 다시 한 번 로렌스의 손을 잡았다. 로렌스가 문득 뒤돌아 보다 말고 웃었다. 맞잡은 손바닥은 햇빛에 달궈놓은 듯 뜨뜻했고 약간 땀에 젖어 있는 것 같기도 했다. 오웬은 마주 웃는 대신 손에 힘을 줘 꽉 쥐었다.
옥상 문을 열자 하늘이 한 눈에 들어왔다. 늦은 오후, 하늘이 위쪽에서부터 조금씩 불그스레해지고 있었다. 불꽃놀이가 목전이었다. "날씨가 좋네요." 문득, 말하고 나자 오늘 하룻동안 날씨가 좋다, 는 생각을 한 것이 지금이 처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루 종일 구름 한 점 없이 쨍한 날이었다.
5
신입생인 오웬으로서는 첫 육상대회였고 첫 불꽃놀이였다. 그런 것치고는 행사 자체에는 큰 감흥이 없기는 했지만, 일정은 모두 끝이 났고 견디기 힘든 더위는 천천히 식어가고 있었으며 하루 종일 부대끼던 사람들이 없어서 그런가 공기가 깨끗하게 느껴졌다. 또, 별로, 부러 나서서 인정하고 싶지는 않았지만 같이 있는 것이 좋은 사람이 옆에 있었다.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오웬은 양손으로 잡은 난간 끝을 검지와 중지로 두드리며 무의식중에 노래의 박자를 맞췄다. 툭, 툭, 툭. 손끝에 닿는 쇠의 서늘한 느낌. 폭죽은 엇박자로 터졌다. 음의 끝자락마다 붉고 노랗고 푸른 불빛들이 이른 저녁의 하늘을 눈 시리게 수놓았다. 그리고 시선이 있었다. 오웬은 언제나 타자의 기척에 기민했다. 가만히 옆얼굴에 와닿는 눈길을 알아차리는 것은 그에게는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불꽃놀이 안 봐요?" 그가 고개도 돌리지 않은 채 물었다. 대답은 반 박자 느리게 돌아왔다. "보고 있어." 펑, 초록색 불꽃이 머리 위에서 요란한 소리를 내며 사그라들었다. 오웬은 불꽃의 끄트머리를 쫓아 시선을 드는 척 턱을 당기다가 이내 고개를 돌렸다. 눈이 정면에서 마주쳤다. "거짓말." 그 목소리에는 드물게도 웃음기가 섞여 있었다. 푸른색 불빛이 안경테를 덧그리며 번득였고 그 너머의 눈동자는 여전히 검었다.
7
로렌스는 넘어지려는 듯 몸을 조금 휘청했지만 넘어지지는 않았다. 타닥, 타닥. 폭죽이 타들어가는 소리가 귓전을 간지럽혔다. 어스름이 내리고 있었다. 만물의 경계가 어둠속으로 흐려진다. 오웬은 반팔 체육복 아래로 잘게 돋아난 소름을 손바닥으로 쓸었고 로렌스는 문득, 여태까지 두르고 있던 망토를 벗었다. "아, 됐는데." "가만히 있어봐." 팔이 등 너머로 뻗어와 그의 어깨에 천을 둘렀고 오웬은 농담처럼 "진짜 왕자 같겠네." 하고 중얼거렸지만, 아주 사소한 접촉, 그러니까 팔 안쪽이 어깨를 스쳤다던가 하는 일들이 새삼스럽게 느껴져서, 그러니까 언제까지나 새삼스러울 것 같아서, 눈을 깜빡였다. 그는 언제나 생각한 일을 행동으로 옮기는데 망설임이 없는 사람이었고, 한 번 한 일을 두 번 하기는 어려운 것이 아니었다. 폭죽을 쥐지 않은 손으로 상대의 뺨과 턱 언저리를 감싸자 문득, 그제야 손바닥이 서늘하다는 것을 알았다. 고양이가 물을 마시는 것처럼 혀를 내어 아랫입술을 핥았고 호흡은 곧잘 섞였다. 혀끝을 아프지 않게 물고 숨을 삼킨다. 키스는 이번에는 좀 더 길었다. 단 것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폭죽 다 됐다." 코끝이 스칠 것 같은 거리에서 듣는 목소리는 소리가 아니라 진동처럼 느껴졌다. 오웬은 눈만 아래로 내려 까맣게 타들어가고 남은 흔적을 쳐다보았다. 재 냄새가 났다. 그러나 여전히 귓가가 간지러웠다.
9
얕은 어둠속에서 핸드폰의 불빛이 파랗게 깜빡였다. 손에 쥔 것을 전부 바닥에 내동댕이 쳐놨던 것이 문득 우스워 오웬은 목구멍 안쪽으로 짧게 웃었다. 그는 살면서 제가 남자와 손을 잡거나 키스를 할 수 있다는 생각을 근 한달 이전에는 한 번도 해 본적이 없었다. 과연 사람 일은 어떻게 될 지 모르는 거란 말이야. 생각은 무상하게 흘러나왔고, 옥상은 바다의 밑바닥처럼 서늘하고 현실감이 없었다. 오랫동안 가라앉은 것만 같았다. 자꾸만 깜빡이는 핸드폰 스크린이 등대처럼 보이기도 했다. 낯 간지러운 짓 그만 하고 현실로 돌아가라는 의미 없는 이정표. 아쉬운 말을 하기에 그는 붙임성이 없었고 전화는 끊임없이 울려대고 있었다. 거, 시끄럽네. 기숙사장 없으면 어디 큰일이라도 나나. 그런 고까운 생각이 여실히 표정에 드러난 것인지 이번에는 로렌스가 가벼운 소리를 내며 웃었다. 그는 평소에도 잘 웃는 편이기는 했지만 웃음에도 종류가 있는 법이다. 오웬은 그의 얼굴을 쳐다보았고 찬 공기에 식은 손끝이 불현듯 뺨 아래쪽에 가닿았다. 엄지로 도장을 찍듯이 그의 귓불을 꾹 누르자 로렌스가 순간 놀란 얼굴을 한다. 그 표정 역시 마음에 들었다. "조금만 더." 쭈그리고 앉은 종아리에 쥐가 날 것 같았지만 아쉬운 소리는 생각보다 쉽게 나왔다. 그제야 전화가 끊겼고 남아 있는 파르스름한 불빛에 턱선의 윤곽이 문득 비쳤다.
11
오웬은 타인과의 접촉이 기분 좋다고 느낀 적이 별로 없다. 그의 부모는 아무리 좋게 말해줘도 아이들을 잘 안아주거나 손을 잡고 걷는 부모는 아니었고, 습관이 되지 않은 것은 언제나 낯설었으며 낯설은 것을 기꺼워하기에 그는 다소 보수적이고 회의적이었다. 그러나 뺨에 간지럽게 와닿는 손바닥의 감촉은 싫으냐 좋으냐 둘 중 하나로만 묻자면 좋은, 것 같기도 했다. 물론 그건 아주 단순화된 화법이었다. 감정에는 수없이 많은 가닥이 있었다. 그 가닥마다 이름을 붙인다면 사전에 적어넣지 못할 정도로 별처럼 숱한 단어가 필요하리라. 그래서 오웬은 말을 고르는 것을 그만뒀고 침묵은 일정한 온도를 가지고 그들 사이를 떠돌았다. 어색하지 않은 침묵이었다. 오웬은 무릎에 턱을 대고 여러 번 눈을 깜빡였다. 눈을 감았다 뜰 때마다 눈꺼풀에 손끝이 스친다. 속눈썹을 간지럽히는 손바닥의 감촉이 낯설었다. 어느 것 하나 익숙하지 않았고, 어느 것 하나 예상하지 못한 일이었다. 아주 사소한 접촉까지 그랬다. 그것에 일일이 감동하거나 기억에 새겨두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그렇지만 순간들은 이따금씩 풍선처럼 부풀었고 그가 알지 못하는 어딘가에 닿을 것처럼 느껴졌다.
손바닥이 멀어졌고 오웬은 잠에서 깬 사람처럼 느릿한 말투로 말했다. "갈래요?" 말을 하고 나서도 찰나의 망설임이 있었다. 그러나 로렌스가 먼저 몸을 일으켰고 자연스럽게 손을 내밀었다. 오웬은 약간 비틀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바짓단을 털고 고개를 들었다. 스태디움의 불빛이 멀게 느껴졌다.
13
"춤 잘 춰." 그 말은 듬성듬성 끊겨서 들렸지만 못 알아 들을 정도는 아니었다. 오웬은 로렌스가 띄엄띄엄 뱉어낸 말 사이에 있는 것이 무엇인지 곧잘 알아차렸다. 그러나 에둘러가는 그 쑥스러움이 낯간지러워서 저 혼자 주먹을 한 번 꽉 쥐었다가 놓고는 이내 얕은 한숨을 내쉬었다. 걸음을 멈추고 잠시 얼굴을 들여다보며 기색을 살피고 싶은 기분이었지만 안타깝게도 주위엔 사람이 너무 많았고, 발을 부지런히 옮기지 않으면 금방이라도 사람들 사이로 쓸려갈 것만 같았다. 그들이 잠깐 침묵하는 와중에도 기숙사장님을 알아보며 연호하는 구호나 야유 소리는 옆쪽에서 끊임없이 들려왔다. 망토에 왕관까지 쓴 눈에 띄는 모양새이니 그럴 만도 했다. 로렌스는 고개를 돌리며 눈살을 찌푸려 시선을 피했고 댄스파티의 음악소리는 이제 몹시 가까운 곳에서 들리고 있었다. 오웬은 문득, 뒤돌아 섰다. 그는 보폭이 큰 걸음으로 몇 걸음 떨어진 곳에서 뒤따라오던 그에게로 걸어갔다. 시끄러운 비트가 고막을 찌르듯이 파고들었다. 오웬은 사람들 사이로 낮게 손을 뻗어 그의 양손을 꽉 쥐었다. 좀 전에 저 혼자 주먹 쥐던 손, 딱 그 정도의 힘으로. 로렌스가 안경 너머로 잘게 눈을 깜빡였지만 오웬은 금세 그 손을 놓았다. 눈썰미가 어지간히 좋지 않은 사람이라면 알아보지 못할 정도로 찰나였다.
"나중에."
그는 그 말만 했다.
1
오웬은 오래된 청바지 뒷주머니에서 그것, 을 찾았다. 그는 기억력이 좋은 편이었다. 그는 담배 개피들을 여러 책 사이에 하나씩 끼워두면서도 그것들이 어디에 있는지, 마치 퍼즐 조각을 맞추듯 전부 기억하고 있었고 그것은 담배가 아니어도 마찬가지였다.
늦은 주말의 기숙사 복도는 다소 소란했다. 자유 시간이 끝나기까지는 아직 두어 시간정도 남아 있었다. 오웬은 버릇처럼 발소리를 죽였다. 아는 얼굴을 마주쳐도 당황하지 않는 것은 습관이 된 여상함 때문이었다. 사소한 인사가 오가는 와중에 그의 주머니 안에서 비닐 조각이 바스락거리는 소리를 냈다. 그 소리가 남에게 들릴 리가 없는데도 그는 손끝을 한껏 오므렸고 문득 어지럽다고 느꼈다.
그는 익숙함이 경멸을 없애주는 것은 아니지만 최소한 줄여준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한 달 반 만에 찾아간 집은 참 빠르게도 낯설었다. 오웬은 모든 장소에 대해 소속감이 희미했지만 집, 이라는 곳에는 차라리 반감에 가까운 감정을 가지고 있었다. 마음대로 멀어질 수 없는 공간이라서 더욱 그러했다. 그는 주말 내내 방에 틀어박혀서 영화를 보았다. Little Miss Sunshine, 희극적인 가족상을 그린 인디영화였다. Whatever happen, we are family. 영화에서…… 드웨인은 그와 동갑이었고, 그는 눈 감았다 뜨면 열여덟이 되길 바란다고 여러 번 말했다. 오웬은 소파에서 눈을 감고 그 대사를 곱씹었다. I just wish I could go to sleep until I was eighteen and, skip all this crap.
화장실 문을 닫았다. 소음들이 희미해졌다. 그는 느리게 숨을 들이켰다. 흰 가루들이 그의 호흡에 천천히 섞여들었고 그는 그것을 뱉어내지 않도록 조심하며 천천히, 더, 어지러워졌다.
눈을 감았다 떴을 땐 형광등 불빛 때문에 눈이 시렸다. 그는 모든 불빛들이 그의 눈꺼풀 아래에 있는 것 같다고 느꼈다.
그는 문을 열었다. 잠금장치를 푸는 손이 몇 번 덜걱거리며 헛돌았다. 휘청거리지 않도록 신중하게 걸음을 내딛었다. 그의 방까지는 그렇게 멀지 않았다. 그의 룸메이트들은 대부분의 경우에 조용했고, 이불을 뒤집어 쓰고 누워 있으면 아무도 건들지 않을 것이었다. 세상이 소리 없이 흔들리고 있었다.
3
서로에게 그만큼의 거리를 허락했으므로, 모든 상황에 있어서 가장 부정적인 가능성을 전제로 하는 오웬은 이런 상황을 상상해보지 않은 것도 아니었다. 그러나 그것이 정말로 현실이 될 줄은 또 몰랐다. 생각들은 뒤집어서 쏟아놓은 퍼즐 조각처럼 그의 발치에 나뒹굴었고 그는 담요 아래에서 열린 문틈으로 희미하게 들어오는 빛을 보며 계속해서 감겨오는 눈꺼풀을 또렷하게 뜨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그러나 생각대로 제대로 된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자꾸만 시야가 흐렸다. 물 위를 걷는 것처럼 몸에 중력이 희미했다. 오웬은 평소에 그 부유감을 즐겼지만 지금의 경우에는 아니었다. 그는 상대의 이목구비를 제대로 쳐다볼 수가 없었지만 그래도 그게 누구인 지는 알았다. "어디 아파?" 하고, 물어오는 목소리가 어딘가 기묘했다. 대부분의 경우에, 다른 사람이라면 당황할 만한 경우에도 여상하게 들리던 목소리가 이상한 기색을 띠었다. 불온한 기색이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약에 취해 있기 때문에 잘못 들은 것일지도 몰랐지만. 오웬은 베개에 얼굴을 처박은 채 상대에게 들리지 않을 정도로 작게 씨발, 하고 중얼거렸다. 그 짧은 욕설조차 혀 아래에서 뭉개지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로렌스는 눈치가 빨랐고, 기민했고…… 오웬은 그의 문자를 확인하고도 답장을 보내지 않았던 일이 떠올랐다. 꼬박 반나절 전의 일이었다. 괜찮은 척하는 것은 에너지를 소모하는 일이다. 괜찮지 않은 모습을 보여주기에 그는 누구와도 멀었고 어디에도 닿을 수 없었다.
"……안 아, 파요."
목소리는 제가 듣기에도 어눌하게 꺾여 나왔다. 누가 들어도 괜찮지 않은 목소리였다. 오웬은 자꾸만 멀어지는 현실감각 속에서도 이 상황이 정말 개같다고 생각했다.
5
감각이 한 박자씩 느렸다. 일어나는 기척과 가벼워지는 침대 한쪽, 문이 여닫히는 소리와 멀어지는 발소리. 오웬은 그 모든 순간을 놓쳤고 그가 자리를 떠난 것은 발소리가 아주 멀어지고 나서야 알았다. 그는 이불 아래에서 몸을 둥글게 말아 웅크렸다. 시트 자락이 끈적한 껍데기처럼 몸에 엉켜왔다. 눈꺼풀 아래에서는 빛이, 점멸하고 있었다. ……남과의 체면치레에 신경쓰는 로렌스가 기척이나 인사 없이 자리를 뜨는 일은 좀처럼 없었다. 로렌스가 그의 상황을 정확하게 읽어낸 것처럼 오웬도 그의 생각을 어느 정도 읽어냈고, 그것은 정말이지 유쾌하지 않은 일이었다. 하지만 냉정하게 생각을 가다듬기에는, 그의 눈꺼풀 아래에서는 끊임없이 불빛이 터지고 있었고 오래달리기를 하는 사람처럼 계속해서 숨이 찼다. "…으." 그는 열병에 시달리는 사람처럼 숨을 토해냈다. 열 오른 호흡 안에 미처 토해내지 못한 감정들이 정신없이 섞여들었다. 그러나 그것들은 언제까지고 그의 자리에만 고여있었다.
정신을 차렸을 때는 한밤중이었다.
새벽, 이라고 부르는 것이 좀 더 정확할 것 같기도 했다. 그는 자신이 잠에 들었었다는 사실조차 알지 못했다. 무서울 정도로 사위가 적막했다. 그는 눈을 희게 떠 어둠속을 노려보았다. 언젠가…… 꿈에서 깨었을 때 이런 적막을 느낀 적이 있었다. 눈이 어둠에 익숙해지자 시야 저편에서 사물들의 윤곽이 천천히 떠올랐다. 생각도 꼭 그만큼 천천히 떠올랐다. 오웬은 어물어물 손을 뻗어 머리맡 어딘가에 놓아두었던 핸드폰을 집어들었다. 세 시가 조금 넘어 있었다. 답장하지 않은 문자를 다시금 확인하다가, 그만두었다. 그는 예전에, 느꼈던 감정이 불안, 이라는 것을 다시 상기했고…… 지금도 별로 다르지 않다는 걸 이내 깨달았다. 역시나 유쾌하지 않았다. 그는 다시 눈을 감았다.
7
오웬은 뭐든지 결정이 빨랐다. 예를 들자면, 그는 신발을 살 때 빨간색 스니커즈와 검은색 단화 가운데서 망설이지 않았고 식당에 가면 항상 5분 이내로 메뉴를 결정했다. 그는 길을 잘못 들었다는 것을 안 순간 지하철에서 내리거나, 막다른 길에서 망설이지 않고 몸을 돌리는 것과 같은 행동을 잘하는 편이었다. 아침에 잠에서 깼을 땐 기분이 몹시 텁텁했다. 햇빛이 눈꺼풀을 할퀴는 것 같은 느낌에 눈을 뜨기가 어려웠다. 약을 하고 난 뒤여서인지 아니면 꿈자리가 사나워서인지는 잘 모를 노릇이었다. 오웬은 비몽사몽한 가운데서도 몸에 밴 버릇대로 교과서를 챙기고 옷을 갈아 입고 세수를 했다. 치약을 묻힌 칫솔을 입안으로 밀어넣으면서 그는, 어디 아파, 하고 묻던 목소리를 문득 떠올렸다. 그 목소리가 귓바퀴에 달라붙어 있기라도 한 것만 같았다. 그는 헛구역질을 하듯이 치약 거품을 뱉어내고 나서야 머리 한구석으로 결정을 내릴 수 있었다. 줄을 먼저 당기는 사람이 되지 않겠다, 고. 그에게는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그는 언제나 밀어내는 사람이었지 당기는 사람은 아니었다. 덜 닦아낸 얼굴이 축축했다.
시간은 평소와 똑같은 속도로 흘렀다. 3교시는 영어였다. 그는 원래부터가 타인의 기척에 기민한 편이었지만 그 정도는 언제나 관계의 밀도와 비례했다. 그러니까, 소란한 복도의 저편에 있는게 누구인지 그는 오래 쳐다보지 않고도 금방 알았다. 시선을 옮기다 눈이 마주쳤다. 안경 너머의 까만 눈동자. 그는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 것에 익숙했다. 다만, 이유 없는 얕은 긴장감에 목 뒤가 당겼다.
9
"주말 잘 보냈어?"
그 상투적인 물음에 대한 솔직한 대답이라면 아주 좆같고 기분이 더러웠어요, 가 되어야 하겠으나, 오웬은 직접적인 화법을 피해가기로 했다. "내내 영화 봤어요." "무슨 영화?" "Little Miss Sunshine이라고……." 대화는 유리창 위의 물방울처럼 표면 위를 매끄럽게 흘러갔다. 그것이 지금 하고 싶은, 혹은 해야하는 이야기가 아님은 서로가 알았다. 몇 번 주고받은 말의 끄트머리에서 잘못 박은 못처럼 튀어나온 침묵은 아마 그런 이유에서일 것이다. 로렌스는 잠깐, 숨을 들이켜며 들고 있던 책을 뒤집어서 책상 위에 내려놓았고 오웬은 멀거니 선 채로 차라리 인사를 하지 말 걸 그랬나, 하는 생각을 했다. "주말 동안 무슨 일 있었어?" 로렌스가 다시금 물었다. 그것은 앞선 질문과 비슷해 보이지만 전혀 다른 질문이었다. 오웬은 가볍게 인상을 찌푸렸다. 예상하지 못한 질문은 아니었다. 그러나 오웬은 그 주제가 정말로 달갑지 않았다.
"별로."
"오웬."
그의 이름은 둥근 부분이 많았고 입안 어디에도 걸리지 않은 발음이었지만 오웬은, 로렌스의 입에서 듣는 제 이름이 어쩐지 잘라낸 쇠조각 같다는 생각을 했다. 로렌스는 아주 천천히 말을 골랐다. 신중하려는 것 같았다. 그 신중함은 무엇을 위한 신중함일까. "말하고 싶지 않다면 말하지 않아도 괜찮아." 오웬은 발작적으로 눈을 깜빡였다. "하지만 문제가 있다면 내가 도울 수 있도록 해줘." ……무엇을? 불현듯, 생각이 멀어졌고 오웬은 차게 식은 서재의 카펫과, 대리석으로 만들어진 재떨이의 모서리, 검지 끝이 무뎌질 때까지 두드렸던 피아노의 건반과 꿈속에서 보았던 좁고 먼 길…… 그것들을 차례로 떠올리며, 책상 가장자리를 짚고 있던 손에 문득 힘을 주었다. 거기에는 타인이 도울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렇다면, 타인이 간섭할 수 있는 일도 아닐 것이었다.
"언제부터야?"
"…그쪽이, 신경쓸 일 아니에요."
말은 머리에서가 아니라 혀끝에서 튀어나온 것 같았다.
11
"다시 한번 말해봐, 토너."
오웬은 그 목소리에서 억양이 사라진 것을 놓치지 않았다. 토너, 그 발음은 부러진 나뭇가지마냥 딱딱하게 나왔다. t 발음을 정확하게 내는 영국식 악센트 때문만은 아닐 것이었다. 뒷목이 누군가가 부러 한계까지 당겨놓은 활처럼 뻣뻣해졌다. 그는 아주 잠깐 망설였지만, 대답은 그런 망설임이 무색할 정도로 반사적으로 튀어나왔다. "신경쓸 일이 아니라고 했어요, 선배님." 그리고 침묵. 그 침묵은 칼로 벼려낸 단면처럼 아주 예리했다. 상대의 한계점을 건드리고 있다는 것을 서로가 알았다. 자존심을 세우는 것은 역시나 그에게는 익숙한 행동양식이었다. 그는 한번도 누군가가 자신에게 간섭하도록 내버려둔 적 없었고 그와 타인의 거리는 언제나 일정하게 멀었다. 마치 구심점을 두고 같은 거리를 덧그리며 맴도는 동심원 같이. 그에게 다가온 사람들은 언제나 그 선 바깥에서 머물거나 아니면 서성이다가 이내 뒷걸음질쳐갔다. 오웬은, 이번에도 다르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생각했지만.
"너는 그러면, 누가 너한테 '신경쓸' 수 있다고 생각하는데?"
그렇게 묻는 목소리는 여전히 억양이 없었지만 오웬은 그가 화를 내고 있음을 알았다. 그리고, 그 자신 역시 화가 나 있었다. "아무도." 오웬은 그가 멀어져가기를 바라지 않았다. 빌어먹게도. "아무도 나에게 간섭할 수 없어요." 그러나 그의 안에는 별처럼 무수한 것들이 존재했다. 여러 번 개처럼 두들겨 맞았고 욕을 먹었고, 그가 중요하다고 여기는 것은 언제나 깎아내려졌으며 누구도 그의 말을 곱씹어 생각해주지 않았다. 그것들은 버릇처럼 존재했고, 그래서 오롯이 그의 버릇이 되었다. 또한 그것들은 언제나 그의 자리에만 머물렀다. 그가 힘들었던 순간에는 언제나 아무도 없었고…… 그래서 그는 일찍이 결정했다. 그 누구도 그에게는 필요없다고. 오웬은 말을 하면서 점점 뒷목께가 뜨거워진다고 느꼈다.
"나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잖아요."
그 말을 뱉어내자 목덜미가 아주 뜨거웠다. 반대로, 목소리는 제 귀에 듣기에도 퍽 냉정했다.
13
오웬은 행간이라는 말에 대해서 다시 한번 떠올렸다. 그를 이루고 있는 수 없는 개체들의 합, 1과 2와 3과 4를 더한 것은 10과 같지 않은. 오웬은 눈앞에 있는 사람에 대해 몇 가지 사실을 알았다. 눈이 많이 나빴고, 수학을 잘하며, 책을 좋아했고, 영국식 악센트를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또? 또 무엇이 있었더라. 열 오른 머리는 알고 있던 사실들도 자꾸만 바깥으로 밀어냈고 오웬은, 모랫알을 쥐려는 어린아이처럼 손을 꽉 오므려 주먹을 쥐었다가 이내 폈다. 누군가에 대해 아는 사람이 있을 수 있다고 생각해? 그런 사람은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손을 잡고 살갗을 맞대고 입을 맞추어도 그들 사이가 멀어져갈 수 밖에 없는 이유는, 알려주지 않았고, 알려고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오웬은 그 사실을 모를 정도로 멍청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그는 한번도 누군가를 가까이 하는 법을 배운 적이 없었고, 그것은 그의 잘못이 아니었다. 왜 모든 사람들은 뒷걸음질 치기만 하는 것일까? 오웬은 화가 났고, 그러면서도 그 화가 어디서부터 시작한 것인지는 당최 알 수가 없다는 생각을 했다.
"없죠. 그런 건."
냉정하게 말했다가, 입을 다물었다. "…씨발." 익숙한 욕설이 뒤따라나왔다. 로렌스의 눈동자가 문득 올라왔다. 오웬은 무언가를 걷어차고 싶은 기분이 되었다. 걷어차고 깨부셔 놓으면 속이 시원할 것 같았다. 그러나 그의 말들은 여전히 혓바닥 위에 있었고 생각보다 더 자연스럽게 흘러나왔다.
"없어요. 애초에 기대도 하지 않았고, 그래서 안되는 거겠죠."
15
오웬은 화가 나 있었고, 화가 난 사람들이 흔히 그렇듯이 상대를 더 화나게 할 말들을 찾고있었지만, 그 한마디에 불현듯 말을 잊었다. 왜, 라는 질문이 자연스레 뒤따라 나왔다가 역시나 혀끝에서 사라졌다. 막연하게 느끼고는 있었지만 굳이 언어로 구체화하려 하지 않았던, 다른 말로 하자면 오랫동안 기만하고 있었던 생각이었다. 오웬은 남과 일정 거리 이상 가까워지지 못하는 자기 자신을 알고 있었다. 그럴 때마다 사람들의 거리는 행성과 다른 행성 사이만큼이나 멀었다. 지금 이 순간, 대화를 나눌 수 있을 정도의 짧은 거리는 한 순간 보이고 나서 사라지는 혜성만큼이나 빠르게 멀어져가고 있었다. 상대는 자신과 비슷한 종류의 사람이었다. 가벼운 말투와 농담 같은 제스쳐들 사이에서 그것을 알았다. 알고 있었다. 알고 있었는데……. 오웬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작한 자기 자신이 이상하다는 생각을 문득 했다. 먼저 손을 내민 것은 자신이었다. 그는 머리위에 꽂혀 있는 책을 집기 위해 위로 뻗은 손끝을 만져보고 싶다는 생각을 한 적이 있었다. 아직 여름이 끝나기 전이었고, 그게 시작이었다. 그리고 이제 시작은 보이지 않는 곳으로 멀어졌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친 순간 오웬은 울컥, 목구멍으로 넘겼던 화가 다시 치미는 것을 느꼈다.
쾅.
그가 발끝으로 카운터의 아래쪽을 걷어찼다. 굉음이 났고, 도서관 안의 사람들이 모두 그를 돌아보았다. 숨을 몰아쉬자 시야가 흐렸다. 덕분에 상대의 표정이 잘 보이지 않았지만 우습게도 그 편이 더 나았다. 신발 안쪽의 발가락이 찌르르하게 아파왔다. 그는 아랑곳 않고 시선들로부터 도망치듯이 보폭이 큰 걸음으로 도서관을 나섰다. 이제는 가을이었고, 겨울이 곧이었다.
17
한번 치솟았던 화는 아주 느리게 가라앉았지만 한나절을 넘기지 않았고, 일단 머리가 식고 나자 감정들은 앙금처럼 침잠했다. 자신에게 간섭한 데에 화가 났었다. 그리고 몇 마디 말에 너무나도 쉽게 멀어져버린 것에도. 오웬은 그 모순된 나열을 알아차리지 못할 정도로 아둔하지는 않았다. 뒷걸음질쳐 간 사람들을 탓했지만 결국에는 그가 밀어낸 것이나 다름없었다. 막다른 길에서 뒷걸음질하지 않을 사람은 없다. 그의 잘못은 아니었지만, 결국에는 그의 일이었다. 도서관에 가지 않는 오후는 아주 길었고 며칠 째 생각들은 그런 흐름을 따라가고 있었다. 침대에 누워, 나는 걸어가기엔 멀고, 무얼 타기엔 애매한 길을, 누구보다 많이 가지고 있다, 그런 시구를 외워보는 오후는 더욱 길었다. 그리고 그 생각들의 끝에서는 복도에서 종종 마주치고 하는 눈동자나 뒷모습이나 발끝을 되새겨보곤 하는 것이다. 순간들은 붙잡지 않으면 그렇게도 쉽게 스쳐지나갔다. 발 아래에 넣은 압정처럼 따끔거리는 찰나였다. 어느 날 문득 신발을 벗어 확인해본 엄지발가락 끝에는 시퍼렇게 멍이 들어 있었다. 발톱 끝이 갈라져 너덜거렸다. 그의 생각들도 꼭 그만큼 너덜거렸다. 그는 발가락이 신발 안쪽에 닿지 않도록 조심해서 걸음을 걸었다. 조심하는 순간마다 압정 끝 같은 생각들이 끼어들었음은 굳이 말하지 않아도 좋을 일이었다.
그리고, 문자를 받은 것은 늦은 오후였다. [기숙사 옆 벤치에 있어. 잠깐 나올래?] 오웬은 답장하지 않은 문자 아래로 또 다시 온 문자가 어쩐지 생경하다고 생각했다. 그는 그 문자를 오랫동안 쳐다보았다. 어떤 시구를 외우는 사람처럼 그랬다. 오웬은 느리게 벗어두었던 스웨터를 다시 입고 기숙사방을 나섰다. 몇 걸음 걷지 않아 벤치가 눈에 보였고 로렌스는 무언가를 들여다보듯 유심한 눈으로 아래를 쳐다보고 있었다. 딱히 부르지도 않고 다가가 서자 자연스럽게 시선이 올라왔다. 눈이 마주쳤다. 그리고는 침묵이었다. 로렌스는 그의 얼굴을 올려다보기만 했다. 그래서, 오웬도 그냥 그의 얼굴을 내려다보기만 했다. 목구멍 안쪽에서 말과 말이 되지 못한 감정들이 벌레처럼 와글거리는데도 그랬다. 오웬은 눈치가 빨랐지만 상대의 시선이 어떤 온도를 가지고 있으며 어떤 말들을 숨기고 있는 지 눈빛만 보고도 알아차릴 만큼 기민하지는 못했다. 결국에는 말하지 않는 것들은 알 수 없는 것이었다. 이상하게도 오웬은, 그 순간 그것을 깨달았고 납득했다. 아주 사소하고 이상한 일이었다.
로렌스의 시선은 몇 번 달싹였다. 손을 쥐었다 폈다 하는 사소한 움직임이 반복되었다. 어쩐지 먹먹한 기분이 드는 것은, 상대가 그런 표정을 하고 있기 때문인지 아니면 그가 그런 기분이기 때문인지 알 수가 없었다. 구분하는 일에 능하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알 수 없는 일들은 자꾸만 늘어갔고 침묵하는 동안 공기는 서늘해졌다. 어렴풋이 해가 지고 있었다. 오웬은 그의 손끝에 시선을 두었다. 이 순간에도 저 손끝을 잡고 싶다는 생각을 하는 자신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아직도 감정은 앙금처럼 남아있었고 압정처럼 뾰족했다. 그래서 우리가 잘될 수 없는 거야. 그 말은 묘하게 납득이 가는 구석이 있어 더욱 날카로웠다. 그래서 더 화가 났던 것이리라. 그러나 결국에 화의 반대편은 무언가가 되고 싶은 마음과 맞닿아 있다고 생각하면 조금 더 쉬웠다. 그는 주머니에 손을 넣은 채로 오랫동안 망설였다. 이번에도 결국 손을 먼저 내미는 것은 그였다. 불쑥 팔을 뻗어 그 손목을 쥐자 갑작스런 접촉에 어렴풋이 놀란 얼굴을 한다.
"일어나요."
오래 침묵한 사람처럼 목소리가 낮았다. 말을 하는 법을 잊어버릴 것 같다는 생각에 어지러웠다.
19
맞닿은 손바닥이 서늘했다. 손이 찬 편이구나, 하는 사실을 그때야 알았다. "나는 네가 약을 하는게 싫어." 말은 발끝에 채이는 돌부리처럼 툭, 튀어나왔다. "알아요." 명징한 것에 대답하는 일은 어렵지 않았다. 어스름이 내린 운동장은 손을 잡고 몇 바퀴를 돌아도 남 눈치가 보이지 않을 정도로 아주 어둑했다. 더 이상 운동장을 몇 바퀴를 돌았는지 셈을 하기가 어려워졌을 즈음, 체온이 옮아간 듯 상대의 손이 천천히 따스해졌다. 그게, 그 느낌이, 아주 조금 그의 마음을 누그러뜨렸다. 긴 한숨이 입에서 빠져나와 연기처럼 흩어졌다.
"나는……"
대화의 서두를 여는 일은 어려웠다. 그는 한 번도 그런 종류의 일을 해본 적이 없었으므로 더욱 그러했다. 그는 평소 말을 잘하는 편이었다. 어떤 단어가 어디에 존재해야할 지 원래부터 알고 있는 사람처럼 그랬다. 그러나 이 순간 그가 알고 있던 단어들은 이곳저곳으로 흩어졌고 오웬은, 땅에 떨어진 낱알들을 주워모으는 사람처럼 말을 골랐다.
"가끔…… 화가 나서 견딜 수 없을 때가 있어요."
얼굴을 보지 않자 말을 하는 것은 한결 쉬웠다. 다만 기척이 가까웠다. 가끔씩 소매끝이 스쳤고 손끝이 손등에 닿아있었다. 오웬은 그것을 놀라우리만치 기민하게 느끼고 있었다. 이걸 밀어낼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다. 그는 자신의 생각을 수정하는 일이 거의 없는 사람이었지만, 지금 이 순간만큼은 아니었다. 뭐든지 생각한 것과는 달랐다. 말은, 한 음절씩 끊어져 나왔다.
"이유를 모르잖아요."
문득 맞잡은 손에 힘이 들어갔다. 오웬은 걸음을 멈췄다. 로렌스의 걸음도 따라 멎었다. 오웬은 뒤를 돌아보았다. 파랗게 어두워진 저물녘에 하늘이 까마득히 높았고 학교의 오래된 건물들이 정수리를 낮추며 어둠속에서 천천히 잠들고 있었다. 밤의 첫머리에서 운동장은 경계를 알 수가 없어 광막하게 넓어보였고 그럼에도 몹시, 가까웠다. 희미하게 떠오른 이목구비의 윤곽과 그 너머의 눈동자를 쳐다보았다. 밤의 색깔을 닮아있었다. 그리고 생각을 알 수 있을 것 같다는 착각이 들 정도로 가까웠다.
"……지금부터 들으란 얘기였어요."
그의 목소리가 나직해졌다. 가까이 있지 않다면 알아듣기가 어려울 정도였다.
21
오웬은 자신 외의 것들을 구분하고 판단하는데 능한 사람이었다. 하지만 그 잣대를 자기자신에게 들이대본 적은 한번도 없었으므로, 그는 말의 첫머리를 찾기 위해 아주 많이 고심해야만 했다. 인생의 전반을 차지하고 있는 것에서 시작을 찾기란 참 힘든 일이었다. 그는 맞닿은 손바닥과 헐겁게 엉켜있는 손가락, 손등에 닿아있는 가슴팍을 감촉으로 느끼며 그런 식으로 서투르게 이어져 있음에 대하여 생각해보았다. 살면서 그런 식으로 누군가와 이어져 본 적이 있느냐고 물으면 한번도 아니었다. 그래서 그게 몹시 어색했고, 어색한 한편 이상할 정도로 먹먹했다. 오웬은 잡힌 손끝을 몇 번 옴작거리다가 이내 다시 한 번 긴 한숨을 뱉어냈다.
"……부모님이랑 사이가 안 좋은데,"
그렇게 운을 뗐다. 목소리가 자신의 것이 아닌 것처럼 귓바퀴 안쪽에서 웅웅거렸다.
"글쎄요. 그걸 그냥 안 좋다고 표현해도 될지 모르겠어요. 안 맞는 사람이라는 건 부모자식간에도 존재할 수 있는 거거든요. 그리고 부모라는 건 최소한 아이가 성인이 될 때까지는 절대적인 대상이니까."
남의 이야기를 하는 것처럼 말은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게, 무덤덤한 어조로 나왔다. 그러나 익숙치 않은 일을 한다는 것을 자각하기라도 하듯 이상하게 목 뒤쪽이 뜨거웠다. 그는 말들이 목구멍 아래에서 바글바글 끓고 있다고 생각했다. 로렌스가 그의 손가락을 엄지로 부드럽게 쓸어내렸다.
"내가 그 사람들 돈으로 밥을 먹고 학교를 다니는 동안은 나는 내 손으로는 아무것도 선택할 수 없는 거겠죠."
23
평소에 하는 말들이 한 줄로 매끄럽게 꿰인 구슬목걸이라면 지금 하고 있는 말들은 줄을 끊어낸 파편들 같았다. 자신의 얘기를 한다는 것은 그토록 낯설었다. 그는 그것이 낯설다는 것을 처음 자인했고, 어린 사람 특유의 오만으로 모든 것을 제대로 알고 있으리라 믿었던 것이 문득 부끄러워질 정도였다. 오웬은 조각난 말들이 제대로 가닿았는지 자신하지 못했다. 그가 듣기에도 말들은 어눌했고 종종 멈추기도 했으며 말과 말 사이는 행간을 알 수 없을 정도로 멀었다. 그래도 로렌스는 유심하게 그 말을 들었다. 모래알 사이에서 사금을 골라내는 사람처럼, 그랬다. 그들은 서늘한 그림자 아래를 걸었고 그가 뱉어내는 말들도 점점 더 서늘해지고 있었다. 혓바닥이 말라 붙어서 몇 번이나 신 침을 삼켰다.
마침내 말이 끝났을 때 오웬은 이상하게 울고 싶다고 생각했다. 그는 매번 자신에게 온 것들을 눈물 없이 감내해냈다. 그것이 그가 내세울 수 있는 몇 안되는 자존심이었다. 하지만 솔직하게 울 수 있었다면 많은 것들이 달라지지 않았을까? 문득, 그런 생각이 뒷목 언저리에서 들었다. 코를 훌쩍이고 나서 변명하듯이 익숙하지 않아서요, 라고 말하자 로렌스가 빙긋 웃었다.
"나는 무서웠어. …네가 사라질까봐."
나, 와 네가, 오웬은 그 말들이 어렵다고 생각했다. 우리는 제대로 우리, 가 될 수 있을까. 자신이 없었다. 그에게 습관이 된 관계들과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는 상황들이 머리 위에 드리워진 그림자처럼 높았다. 오웬은 툭, 그의 어깨에 머리를 기대었다. 사소하고 덤덤한 동작이었다. 걸음이 멈췄고, 로렌스가 문득 반대편 손을 들어 그의 눈가에 가져다댔다. 있지도 않은 눈물을 훔쳐내는 것처럼 그랬다.
"안 사라져요."
"그래."
"……안 사라져요."
"알았어."
"정말로." 다짐하듯이 말을 되새기며, 오웬은 그의 손바닥 아래에서 천천히 호흡했다. 밤이 어두웠고 아무도 그들을 보지 못할 것이었으며 공기는 서늘하고 손바닥은 차가웠다. 달라지는 것은 아무것도 없을 것이었고 그들은 앞으로도 몇 번이나 서투를 것이었으며 확신할 수 없는 것은 무엇도 없었다. 그래도 서투르게 옭아맨 손가락과 맞닿은 어깨, 눈꺼풀에 와닿는 살갗이 있었다. 그것으로 되었다. …정말로, 그것으로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