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차

도이와 키리마루

OHNN 2015. 10. 1. 23:51

 


 키리마루는 이따금씩 자리에서 멈춰설 때가 있다.
 그런 순간들은 길가를 걷는 도중이나 저녁을 먹고 난 뒤 빈 접시들을 치울 때, 다 마른 빨래를 거둬들일 때나 삭은 나뭇가지를 꺾을 때 등 아무런 개연성도 없이 찾아들었다. 그는 넉살이 좋은 아이였으므로 그 찰나의, 맥락에 맞지 않는 공백을 대개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넘길 수 있었다. 누군가가 왜 그래? 하고 물으면 손바닥에 벌레가 붙었어, 라든가, 옷소매에 먹이 묻었네, 하고 말하면서 씨익 웃으면 되었고, 그러고 나면 그 순간은 정말로 아무 것도 아닌 일이 되었다. 그의 또래 아이들은 대개 그 공백의 원인을 알 수 없었으므로, 그다지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겨울의 창백한 햇살이 그의 무릎 위에서 어룽거리고 있었다. 키리마루는 가만히 무릎을 꿇고, 방의 구석에 앉아, 아주 잠깐 무언가를 기억해냈다. 도이와 시답잖은 대화를 나누던 와중이었다. 새 책은 빳빳하고 냄새가 좋았다. 글씨를 눈에 담지 않고 책장을 후루룩 넘겨 보던 와중에 날이 서 있는 종이의 가장자리에 손끝이 스쳤다. 따끔했고, 피가 가늘게 배어나오는 손가락을 반사적으로 입에 넣다가 문득, 그랬다. 바로 옆에 앉아있던 도이가 그를 돌아보는 것이 느껴졌다. "……아, 종이에 베였어요." 손끝을 입에 물고 말하자 소리가 이 뒤쪽에서 뭉개졌다. 괜찮아? 하고 바로 물어올 줄 알았는데, 아무런 말도 돌아오지 않아서 키리마루는 멀거니 고개를 들었다. 도이는 의아해하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의 의심이 책의 가장자리나 가느다랗게 벌어진 상처 따위에 머물고 있지 않다는 것을 순간 알아차렸다. 사람과 사람이 나누는 소통의 박자는 아주 기민해서, 때로는 사소한 것으로도 많은 것을 말할 때가 있다. 그런 순간이었고, 키리마루는 혀끝에서 비릿한 맛을 느끼며 손가락을 입에서 빼냈다.

 

 "왜 그래?"

 

 도이가 물었다. 키리마루의 시선이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한 번, 굴러갔다가 다시 돌아왔다. "……상처가 나면요." 그런 류의 말을 할 때 그는 이상할 정도로 덤덤해졌다. "바로 입에 넣곤 했거든요. 소독해야한다고." 그는 무의식중에 젖은 손끝과 손끝을 비볐다. 얄팍한 상처가 싸르르해서 어깨가 흠칫했다. 그는 느리게 말을 골랐다. "어머니가요." 어머니, 와 엄마, 사이에서 조금 망설였다. 말의 끝을 무겁게 누르기라도 하듯, 그가 입을 다물자마자 침묵이었다.

 

 "그냥 그랬다고요."

 

 얇은 종잇장처럼 가볍고 바삭거리는 말투로 덧붙였다. 키리마루는 그런 종류의 침묵을 좋아하지 않았다. 누군가가 그를 불쌍히 여기는 것도, 어렵게 해야할 말을 찾아내는 것도 딱 질색이었다. 도이가 그를 마냥 불쌍하게 여긴다면, 조금은 비참하게 느껴질 것도 같았다. 키리마루는 좀 전에 나누던 실없는 대화의 끝머리를 떠올리려고 애를 썼다. 그런 그의 머리 위로 불현듯 툭, 손바닥이 올라왔다.
 "그랬구나." 도이는 딱 그 말만 했다. 그는 딱히 해야할 말을 찾은 것 같지는 않았다. 그 손은 머리카락을 헤집지 않고 정수리만 가볍게 쓸어내렸다. 키리마루는 목구멍 아래에서 왁자하던 것들이 잠잠해지는 것을 느꼈다. 젖은 손끝을 옷자락에 문질러 닦으며 시선을 내렸다. 숨을 내쉴 때마다 내려가는 어깨가 점점 무거워졌다. 어쩐지 몸이 그대로 앞으로 쏟아질 것만 같았다.
 그가 고개를 완전히 떨어트리기 전에, 도이가 다시 입을 열었다. 그가 그랬던 것처럼 아주 덤덤한 말투였다.

 

 "나는 이제 그런 게 기억이 잘 안 나."

 

 키리마루는 벽에 부딪혀 튕겨나간 공처럼 퍼뜩 고개를 들었다.
 도이의 옆얼굴에도 희뿌연 햇살이 조금씩 스몄다. 키리마루는 저도 모르게 그 얼굴을 찬찬히 들여다 보았다. 마치 처음 보는 사람의 얼굴을 쳐다보는 것처럼 그랬다. 한 해 내내 숱하게 보아온 그 얼굴이 낯설어서, 키리마루는 문득, 제가 알지 못하는 것들을 되짚어보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누군가가 감히 그를 짐작할 수 없는 것처럼, 그 역시도 눈앞에 있는 사람을 짐작할 수 없을 것이다. 그는 눈앞에 있는 사람이 어떤 식으로 살아왔는지 전혀 알지 못한다.
 나는 만약ㅡ 이 얼굴을 계속 기억할 수 있을까?
 키리마루는 암기하는 것처럼 계속해서 그 얼굴을 응시했다. 숱이 많은 곱슬머리와, 얄쌍한 눈썹과, 둥근 얼굴선. 그의 시선이 오랫동안 한자리에 머물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