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차

야마미츠

OHNN 2018. 8. 12. 23:12


 정신을 차려보니 열두 시가 다 되어가고 있었다. 숙소는 그날따라 유난히 조용했다. 소고는 심야 방송의 게스트로 나갔다고 했고, 이오리와 타마키는 학교 시험이 다가와서 (강제로) 일찍 잠에 든다고 말했으며, 나기는 녹화해 둔 애니메이션을 정주행한다고 했다. 그 옆에 끼고 갈 오늘의 희생양으로는 리쿠가 점지되었다. 니카이도 야마토는 손에 든 얇은 대본을 말아쥐며 조용히 복도를 가로질러갔다. 행여나 요란한 인기척을 내서 희생양2가 되는 일은 웬만해서는 사양하고 싶기 때문이었다. 거실의 불은 꺼져 있어 가구들의 윤곽만이 어둑하게 보였다. 유일한 광원은 부엌 식탁 위의 노란 전조등이었다. 그 어렴풋한 불빛 아래에서 누군가가 이리저리 움직이고 있었다. 얼굴을 확인하지 않아도, 그림자의 크기로 누구인지 짐작할 만했다.

 야마토는 구태여 그를 부르거나 말을 붙이는 대신 조용히 다가가 그의 어깨 너머를 내다보았다. 도마 위에 가지런히 썰려 있는 야채들과 큰 냄비. "스튜?" 그렇게 묻자 이즈미 미츠키는 별로 놀라는 기색 없이 대답했다.

 

 "카레야."

 "이 시간에?"

 "나 내일 아침부터 스케쥴 있는걸. 카레 데우는 것 정도는 다들 알아서 하겠지 싶어서."


 "하긴, 바쁠 때는 카레가 최고지." 야마토는 식탁 가장자리에 앉았다. 그는 대본을 살피는 척 고개를 숙인 채로 미츠키가 요리를 하는 것을 지켜보았다. 무언가를 썰고 볶고 꺼내고 집어넣고, 그렇게 바지런히 움직이는 모습을 보고 있는 것은 꽤 즐거웠다. 도와주려면 도와줄 법도 했으나 미츠키는 혼자서 할 수 있는 일은 혼자서 하고 싶어했고, 특히 요리를 할 때는 남의 방해를 받고 싶지 않아하는 것 같았다.

 냄비 안에 루를 풀어넣자 단숨에 익숙한 카레 냄새가 부엌을 메웠다. "아, 배고파지는 냄새."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는데도 빠르게 질문이 되돌아왔다. "야마토 씨, 밥 안 먹었어?" "그러고보니 저녁을 안 먹었네. 아까 촬영장에서 애매한 시간에 밥을 먹었더니." "그럼 지금 조금 먹을래? 이거 거의 다 됐고, 냉동실에 얼려놓은 밥 있으니까." "그럴까."

 어느새 정신을 차려 보니 적은 양의 밥과 막 끓인 카레가 눈 앞에 놓여 있었다. 야마토는 사양하지 않고 숟가락으로 밥을 가득 퍼서 입에 집어넣었다. 음식을 만들어놓은 사람들이 으레 그렇듯 미츠키는 짧은 순간 그의 표정을 살폈고, 야마토는 알기 쉽게 말로 해주기로 했다. "맛있네, 카레." "그래?" "응. 맛있다." 강조하듯이 재차 말하자 미츠키가 턱을 괸 채로 배시시 웃었다. 야마토는 천천히 밥을 먹었다. 조용한 사위와 희미한 불빛, 넓은 식탁에 가까이 붙어 앉아 있는 일이나 작은 소리로 주고받는 대화 같은 것들이 제법 마음에 들었기 때문이었다.


 "평소에는."

 "응?"

 "그, 뭐랄까. 애인…… 이 만들어준 밥을 먹고 있다는 실감이 별로 안 났는데, 지금은 좀 그런 기분이네."


 그 대목에서 미츠키가 몇 번 눈을 깜빡였다. 그가 조금 목소리를 높여 지적했다.


 "왜 애인이라는 말을 그렇게 뜸을 들여 하는 거야?"

 "글쎄……."

 "이상한 데서 부끄러움을 탄다니까, 이 아저씨."


 그 말에는 대답할 만한 말이 없었다. 할 말이 궁색한 대화는 피하는 것이 최적이다. "미츠는 어디 가서 굶어죽지는 않겠어." "그럼, 요리 잘하는 애인이 얼마나 귀한데." ……미츠키에게는 우회하는 것이 잘 먹히지 않는다는 사실을 이렇게 종종 까먹곤 했다. 이제는 반쯤 놀리는 것에 가까운 얼굴로 웃고 있는 그 얼굴을 보고 있자니, 불쑥, 마음 속에서 오기가 머리를 치켜들었다.

 야마토는 숟가락으로 밥과 카레를 푹 떠 미츠키 쪽으로 내밀었다. 미츠키가, 이게 뭐하는 짓이냐고 표정으로 물었다.


 "왜, 애인다운 행동."

 "아저씨, 취했어요?"

 "아닌데. 나 완전 제정신. 아- 해봐. 아-"


 미츠키가 난생 처음 보는 괴상한 표정을 지었으나 야마토는 뻔뻔함을 고수하기로 했다. 약간 손바닥 안쪽이 간지러운 것 같기도 했고, 질색을 하는 것인지 쑥쓰러워하는 것인지 알 수 없는 얼굴로 눈을 굴리는 모양을 보고 있는 것이 즐겁기도 했고, 대체 뭐에 이긴 것인지는 알 수 없으나 아무튼 이겼다는 애매한 승리감도 동시에 들었다. 적당히 그러다가 말려고 했는데, 그 다음 순간 미츠키가 고개를 약간 숙여 숟가락을 입에 넣었다.

 쇠의 표면이 이빨에 달그락거리며 걸리는 느낌까지 이상하리만치 선명하게 느껴졌다. 미츠키가 입에 든 것을 우물거리며 그를 쳐다보았다.


 "……."

 "……."


 그리고 이내 꿀꺽, 삼켰다. 뻔뻔함의 스위치가 내려가자 불현듯 지금 하고 있는 행동들이 엄청나게 낯간지러운 짓이라는 실감이 들었다. 그 실감이 가장 잘 느껴지는 대목은 미츠키의 얼굴이었다. 전조등의 노란 불빛 아래에서도, 그의 얼굴이 이마까지 불그스레해진 것이 눈에 잘 들어왔다. 그들은 서로의 눈을 쳐다보며 잠시 침묵했다. 곧, 미츠키가 오연한 목소리로 물었다.


 "내가 이겼지?"

 "……그래, 그래라……"


 애인을 이겨서 뭐에 쓰려는 건데…… 라는 말은, 하지 않는 쪽이 좋을 것 같았다. 어느새 자정, 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