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웬은 쉬는 날이면 언제나 점심 무렵에 느즈막히 일어나곤 했다. 그날도 눈을 떴을 때는 이미 한낮이었다. 일을 할 때는 밤을 새가면서 각본을 쓰고 휴일에도 나가서 리허설을 보는 것이 그의 일상이었지만 1년 365일을 그런 식으로 달릴 수 없다는 것은 본인이 더 잘 안다. 그러니 쉴 때는 게으른 고양이처럼 푹 퍼져서 아무렇게나 시간을 보내는 것이 좋았다. 얼마 전 로렌스가 사온 새 이불 커버와 베갯잇은 맨살에 닿는 감촉이 유난히 좋았고 얼굴을 비비고 있으면 잠이 다 깬 뒤에도 몇 시간쯤 더 잘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그가 빈 베개를 끌어안으며 몸을 뒤척이자 발치에서 웅크리고 자고 있던 고양이(진짜 고양이)가 도망가는 소리가 들렸고 총총 멀어지는 작은 발소리를 들으며 오웬은 크게 하품을 했다. 그는 뒷목을 긁다가, 자리에서 느릿느릿 일어났다. 시계를 보았다. 문지방을 밟으며 방 밖으로 나왔다.
여름이 가까워지고 있었다. 그것을 증명이라도 하듯 반쯤 열어둔 블라인드 사이로 떨어지는 햇빛이 선명했다. 오웬은 배가 고프다고 생각했다. 서랍장을 열어 두번째 칸에서 시리얼을 꺼내고 커피 원두를 찾았다. 로렌스는 영국에서 나고 자란 사람답게 커피보다는 차를 좋아했지만 오웬은 반대였고 그래서 그들의 집에는 언제나 원두와 찻잎이 나란히 자리하고 있었다. 커피 머신의 전원을 키며 다시 한 번 하품을 했다. 진한 커피와 시리얼 그릇을 양 손에 들고 거실로 나와 블라인드를 완전히 열었다. 베란다에 나가 있던 강아지(라고 부르기에는 이미 너무 커버렸지만, 어쨌거나 로렌스는 항상 그 개를 강아지라고 불렀다.)가 발치에 와서 납작하게 엎드렸다. 오웬은 자신의 발가락을 핥으려는 강아지의 혀를 피해 거실의 낮은 테이블에 발을 올리고 커피를 한 모금 들이켰다. 로렌스가 보면 예의 없어 보인다고 할지도 모르겠지만 오웬은 혼자 있을 때에도 없는 사람을 신경쓰는 사람은 아니었다.
"윽."
시리얼을 한 입 털어넣은 오웬이 안 좋은 소리를 냈다. 무가당이었다. 세상에 무가당 시리얼 같은 걸 먹는 사람들은 지옥에서 온 사람들밖에 없을 것이라고 생각하면서 살았는데 로렌스가 바로 그런 사람이었다. 오웬이 거기에 대해 뭐라고 말할 때마다 로렌스는 일반 시리얼에 얼마나 많은 당이 들었으며 그것이 사람 몸에 어떤 영향을 끼치는지ㅡ너는 운동도 안 하잖아? 로렌스가 그렇게 말하면 항상 할 말이 없어졌다ㅡ에 대해 유창하게 설명했으므로 오웬은 자신의 동거인이 지옥에서 온 사람임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저번에 분명 카트에 들어 있던 무가당 시리얼을 다른 것으로 바꿔치기 했던 기억이 있는데 그걸 또 언제 로렌스가 알아차렸는지는 모를 일이었다. 오웬은 돌을 씹는 것 같은 표정으로 달지 않은 시리얼을 씹어삼켰고 커피를 벌컥벌컥 들이켰다. 그가 소파 등받이에 머리를 기대고 멍하니 창밖을 바라보았다.
소파 팔걸이에 반으로 접은 조간 신문이 걸려 있었다. 오웬은 아무 생각 없이 신문을 펼쳐 헤드라인을 훑었다. 첫 페이지에는 별로 흥미로운 기사가 없었다. 오웬은 주로 인터넷 신문으로 뉴스를 확인하는 편이었으므로, 신문을 집어든 것자체가 실로 오랜만의 일이었다. 그리고 두번째 장을 펼쳤을 때 오웬은 문득 입에 대고 있던 머그잔의 가장자리를 이빨로 깨물었다. 소파 등받이에 기대고 있던 머리를 들고 몸을 약간 앞으로 기울여 기사를 읽었다. 그는 다음 장으로 신문을 한 번 넘겼다가, 다시 앞 장을 보고는 흠, 소리를 내면서 신문을 다시 접어 옆으로 밀어두었다.
왠지 신문이 소파 팔걸이에 놓여 있던 것마저 계획적인 것처럼 느껴졌다. 실제로 그런지 아닌지는 모르겠지만, 어쨌거나 오웬은 그 기사가 의미하는 바를 알았고 맛없는 시리얼을 천천히 씹으면서 참 새삼스럽다는, 생각을 했다.
케이시는 오웬이 속한 극단의 유일한 사무직원이었다. 그녀는 점심 때 나가서 사온 것이라며 여러 가지 종류의 쿠키가 든 상자를 다과로 내밀었고 그가 자리에 앉자마자 말했다.
"동성 결혼이 합법화 되었다면서요? 축하해요."
오웬은 가방에서 극본을 꺼내다말고 어정쩡하게 대답했다. "어… 고마워요." 그의 태도가 애매했으므로 케이시가 조심스럽게, "혹시 그 사이에 남자친구랑 헤어진 건 아니죠?" 하고 물어본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지난 크리스마스에 로렌스가 극단에 다녀간 이후로 극단 사람들은 모두 오웬의 오래된 남자친구에 대해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 직접적으로 축하의 말을 들으리라는 생각은 못했다. 조금 놀라기도 했고, 그 말이 게이 커뮤니티에 속한 사람에게 보내는 축하인지 그가 곧 결혼을 할 것이라 짐작하고 보내는 축하인지 알 수 없어서 애매하게 대답을 한 것이었다. 그는 고개를 가로젓고는 쿠키 상자에서 라즈베리 쿠키를 하나 집어들었다.
"혹시 딱히 결혼 생각은 없는 거에요?"
"그런 건 아닌데, 뭐랄까……"
뭐라고 말해야할까. 오웬은 잠시 생각해보았다.
"실감이 안 나네요."
오웬은 원래부터 화나 짜증을 제외하고는 감정을 겉으로 드러내지 않는 편이었으므로 적당히 대답했다. 그는 쿠키 상자에서 땅콩 쿠키를 골라내며(그는 땅콩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핸드폰을 확인했다. 원래 그는 오늘도 쉬는 날이었지만, 다음 시즌에 올릴 공연의 각본을 좀 수정하고 싶다는 주연 배우의 말에 따라 극단에 나온 것이었다. 수정본을 이메일로 보낼 수도 있었지만 좀 더 고칠 부분이 있으면 그 자리에서 듣고 바로 고치는 것이 더 빠를 것 같았다. 앞길에서 사고가 나서 15분 정도 늦는다는 배우의 메세지를 확인한 후 오웬은 바로 다음 메세지를 확인했다.
[오늘도 쉬어?]
로렌스가 보낸 메세지였다.
[밖에 나왔는데 저녁 땐 집.]
간단하게 답장을 보냈다. 케이시가 그가 일렬로 구석에 세워둔 땅콩 쿠키들을 보고는 짧게 웃었다.
오웬은 말하자면 기다리고 있었다. 그가 먼저 스크랩한 기사를 들이대면서 이제 결혼할 때가 된 것 같다고 선고하듯이 말하는 것은 쉬웠다. 하지만 10년 넘게 알아온 누군가의 성격으로 미루어 짐작하건대 지금은 기다려야하는 타이밍이었다. 로렌스는 무언가를 준비하고 계획하는 것을 무척 즐겨하는 성격이었고 이러한 삶의 전환점ㅡ이라고 해도, 크게 달라지는 것이 있을까? 오웬은 무신경하게 생각했다.ㅡ에 제대로 된 방점을 찍는 것을 유의미하게 생각할 것이 분명했다. 그것은 오웬 나름대로의 관대함이었고, 사실 오웬은 로렌스의 그런 점이 좀 성가시지만 재밌다고 생각하기도 했다.
그날 집에 돌아왔을 때 그 생각은 더 견고해졌다. 노트북 파일들을 뒤적거리면서 늦은 저녁에 볼 영화를 고르고 있는데 로렌스가 말했다.
"오웬, 혹시 목요일 저녁에 시간 있어?"
오웬은 올 게 왔다고 생각했지만 노트북 화면에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 대답했다.
"있는데, 왜요?"
"내가 저번주에 직장 근처에서 괜찮은 레스토랑을 발견했거든."
발견한 것이 아니라 찾아낸 것이 분명했지만 그 점을 지적하지는 않기로 했다. 오웬은 짐짓 차분하게 물었다. "이탈리안?" "프렌치야." 오웬은 흠, 하고 턱을 괴고 고민하는 척을 했다.(솔직히 재미있었다.) "드레스코드 있는 데에요?" "아닌데, 그래도 바람막이는 입지 말아줘." 로렌스가 말을 하면서 엄지 손가락으로 그의 뒷목 뼈대를 꾹꾹 눌렀고 그 느낌이 간지러워서 오웬은 키득거리면서 웃었다.
"좋아요."
그의 간단한 대답에 이번에는 로렌스가 웃었다. 그가 핸드폰을 집어들면서 말했다. "그럼 7시로 예약할게." 오웬은 대답 대신 눈을 내리깔고 마우스패드를 쳐다보았다.
와인은 세 잔째였다. 화이트와인 한 잔과 레드와인 두 잔. 오웬은 기분이 조금 좋아졌다. 밥은 맛있었다. 언젠가, 재작년이던가? 맛있는 걸 먹겠다고 다른 도시까지 차를 몰고 갔다가 눅눅해진 빵과 질긴 고기를 먹고 돌아오는 길에 대판 싸운 것을 떠올려보면 직장 근처에 있는 레스토랑을 고른 것은 확실히 좋은 선택이었다. 디저트로는 타르트 타탱과 바닐라 아이스크림이 나왔다. 달짝지근한 사과조림을 입 안에 굴리면서 와인을 한 모금 더 마셨다. 오웬은 로렌스가 오늘 공들여서 머리를 넘겼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그가 하고 있는 푸른색 넥타이는 올해 생일에 오웬이 선물한 것이었다. 오웬은 숨은 그림을 찾는 것처럼 그런 것들을 하나 둘 씩 알아차렸고 모르는 척했지만 사실은 로렌스도 오웬이 알고 있다는 사실을 눈치채고 있을 것이다. 눈치가 빠른 사람들의 교류란 대개 그런 법이다.
그래서 디저트 그릇이 빈 뒤에 테이블 위에 붉은 색 재질로 만들어진 반지 상자가 올라왔을 때 오웬은 놀라는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오웬은 반지를 보자마자 대답했다.
"좋아요."
"뭐가?"
"좋다고요, 뭐든."
흠, 로렌스가 작게 소리냈다. 테이블 위에 달린 노란 조명에 그의 까만 눈동자가 반짝거리고 있었다.
"내가 이거 받고 헤어져달라고 하면 어쩌려고?"
"재미없거든요?"
오웬이 왼손을 내밀었다. 로렌스가 그의 약지에 반지를 끼워주었다. 반지는 그의 손가락에 꼭 맞았다. 로렌스가 대체 어떻게 그의 약지 사이즈를 알았는지 알 수 없었지만, 아무래도 좋았다. 오웬은 손을 들어 불빛에 반지를 비춰보았다. 반지는 얇았지만 백금인 것 같았고 세련된 물결 무늬가 음각되어 있었다. 세심하고 심미안도 높은 로렌스는 어떤 물건이 오웬에게 어울릴지를 오웬보다 더 잘 알았다. 그는 손을 이리저리 뒤집으며 반지를 보다가 문득 벌어진 손가락 사이로 자신을 쳐다보고 있는 로렌스를 마주보았다.
아주 예전에, 그러니까 10년도 더 전에 도서관의 서가에서 빈 책장 사이로 그를 지켜보던 일이 문득 떠올랐다.
"왜 웃어?"
"좋아서요."
뭐가? 로렌스가 눈치없는 사람인 척 물었고, 오웬은 솔직하게 대답해주기로 했다.
"당신이 좋아서요."
그것은 말하자면 완벽한 승낙이었다.
글이 왜 이렇게 느끼한 할리퀸 소설처럼 써졌지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1 약혼반지는 세련된 걸로 골라놓고 결혼반지는 다이아몬드 큼직하게 박힌 패물같은 것 들고올 것 같은 로렌스 (po중국wer)
2 혼인신고만 올리자고 지랄했는데 결국 결혼식에서 로렌스 사돈의 팔촌까지 다 만나게 되는 오웬 (po중국wer2)
이 두 가지 생각하면서 웃는 중. 어쨌거나 오웬은 로렌스 사랑하니 괜찮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