익숙하지 않은 천장을 올려다보며 눈을 느리게 한 번, 두 번 깜빡거렸다. 잠이 덜 깬 머리는 제대로 맞물리지 않은 톱니바퀴처럼 삐걱삐걱 느리게 돌아갔다. 어둠에 익숙해진 눈이 침대 머리맡과 높은 천장의 모양새를 어렴풋이 인식하고 나서야 그는 몇 가지 사실을 떠올릴 수 있었다. 이 집은 크고 넓었지만 주변에 이웃이 적은 탓에 한밤중에는 무서우리만치 적막했다. 손님방과 화장실이 멀리 떨어져 있는 것도 문제라면 문제였다. 볼일을 보고 나서 길고 어두운 복도를 되짚어 가던 와중 그는 덜컥 겁이 나기 시작했고, 바닥에 깔려 있던 카펫에 발이 걸려 한 번 넘어지고 나서는 일단 아무데나 눕고 싶다는 생각 또한 들었다. 치하루는 문득, 좀 더 가까운 곳에 코하쿠의 방이 있다는 것을 떠올렸다. 고민은 길지 않았다. 밤이 새벽으로 넘어가는 시간이었다. 그는 발뒤꿈치를 들고 조용히 움직였다. 복도 끝으로 살금살금 걸어가 방 문을 슬쩍 열어 보았을 때, 그 안은 마치 사람이 없는 방처럼 적막했다.
공간을 아낄 필요가 없는 널찍한 방 한가운데에 넓은 침대가 있었다. 두 명이 누워도 자리가 남을 법한 침대에서 코하쿠는 정자세로 잠들어 있었다. 치하루는 이불의 가장자리를 들추고 그가 할 수 있는 한 가장 조심스러운 동작으로 그 밑으로 기어들어갔다. 구석에 몸을 구기고 누워서 옆을 돌아보는데 문득, 눈이 마주쳤다.
"어……"
잠을 안 잤다기보다는, 자다가 깬 듯한 표정이었다. 코하쿠는 왜 여기 있냐든가 지금이 몇 시냐든가, 그런 질문을 하는 대신 눈과 눈썹 사이를 약간 좁히고는 어둠 속에서 그를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왜 그렇게 가장자리에 누워 있어요……" 졸음에 겨운 말끝이 조금 뭉개졌다. 그가 손으로 제 옆자리를 토닥이듯이 몇 번 두드렸다. 치하루는 그 사인을 냉큼 알아들었다. 무릎 걸음으로 걸어가 그의 옆에 바짝 붙어서 눕자 그제야 소년이 다시 눈을 감았다. 머리를 베개에 뉘이자마자 때늦은 수마가 눈꺼풀을 짓눌렀다. 그것을 의식하기도 전에 잠에 들었던 것 같다.
그런데 왜 지금 깼을까.
마치 물에서 건져내듯이 자연스러운 기상이었다. 시간을 잘 짐작할 수 없었지만 사위가 어두운 것으로 보아서는 아직 한참 새벽인 것 같았다. 그는 잠시 천장에 매달려 있는 형광등을 올려다보다가, 뒤척거리는 소리가 나지 않도록 조심하며 몸을 돌려 누웠다. 창문 너머로 희붐하게 비쳐 들어오는 빛이 유일한 광원이었다. 고작 사물의 윤곽 정도만 인식할 수 있는 시야에, 가만히 잠들어 있는 소년의 옆얼굴이 보였다. 치하루는 가만히 그 얼굴을 구경해보았다. 그는 언제나 치하루보다 일찍 일어나기 때문에 좀처럼 볼 수 없는 얼굴이었다. 코하쿠는 정물처럼 잠들어 있었다. 배 부근에 양손을 올리고, 고개를 기울이거나 몸을 뒤척인 기색도 없이, 그렇게. 어둠 탓인지, 달빛 탓인지는 모르겠으나 그 낯빛이 유난이 흰 것 같았다.
아니, 창백한 것일지도 모른다.
그렇게 생각하자 불현듯 그가 숨을 쉬고 있는지 아닌지 알 수가 없었다. 그것은 아주 순간적이고 막연한 기분이었다. 막연하기는 하였으나, 근거가 없는 감상은 아니었다. 아주 근거가 없지는……
그 순간 덜컥, 무언가가 내려앉는 소리가 들린 것 같았다.
본래 모든 공포는 막연하기 마련이다. 그 누구도 손에 잡을 수 있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기 때문에, 그렇기 때문에 사람들은 자신의, 혹은 타자의 죽음을 두려워하기 마련이고…… 홀로 남겨지는 것을 무서워하게 되는 것이다.
그 기분 앞에서 엔도 치하루는 자연스럽게 닫힌 문과 아무도 찾지 않는 반나절을 떠올린다.
그는 거의 무의식적인 동작으로 손을 들어 소년의 코 밑에 가져다대었다. 낮고 희미한 숨결이 손끝에 닿을 때까지의 그 찰나의 순간이 무척이나 길게 느껴졌다. 코하쿠는 거의 몸을 들썩이지 않고 숨을 쉬었다. 치하루는 그제야 제 쪽이 한참동안 숨을 참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어쩐지 손끝이 녹아내릴 것만 같은 기분에 한숨처럼 길게 숨을 내뱉었다.
코하쿠는 아무래도 잠귀가 밝은 것 같았다. 아니면, 손 그림자가 눈 앞에서 몇 번을 왔다갔다 해서 그런 것일지도 모른다. 그는 잠이 든 얼굴만큼이나 조용히 잠에서 다시 깼다. 자던 와중에 몇 번이나 깨고도 짜증 한 번 부리지 않고 가만히 이쪽을 올려다보는 그 얼굴에 대고, 깨워서 미안하다고, 다시 자라고 말해야 하는데 어쩐지 그 말이 잘 나오지 않았다.
"무슨 일 있었어요?"
코하쿠가 나직하게 먼저 물어보았다. 치하루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무 일도 없었다. 아무 일도 없었기 때문에.
그는 몸을 웅크리듯이 모로 뉘였다. 고개가 소년의 어깨 쪽으로 가까이 붙었다. 그가 중얼거리듯이 대답했다.
"아무 일도 없어서 다행이야."
낮고 모호한 말이었으나 해명을 요구하는 질문은 돌아오지 않았다. 어쩐지 모든 것을 이미 알고 있는 듯한 그 침묵에, 치하루는 무슨 일인지 한결 더 서러워졌다. 그 서러움이 제 것이 아님을 알면서도 반사적으로 눈물이 났다. 살면서 한 번도, 기쁨이나 슬픔을 숨겨야겠다는 생각은 한 적이 없는데, 지금은 그래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소리를 죽이고 조금씩 울기 시작했다. 관자놀이 옆이 금세 축축해졌다. 숨을 들이키는데 무심코 호흡이 얕아졌다. 안타깝게도 그는 무언가를 숨기는 데 재능이 없었다.
아마 코하쿠가 이불 위를 더듬어 그의 손을 찾아 쥔 것은 그래서였을 것이다. 말이 없는 그 손은 이런 상황에 이미 익숙한 것 같기도 했다. 그래서 치하루도 말할 수 없었다. 네가 없는 건 무섭다고. 더 이상 혼자 있는 건 싫다고. 죽으면 안된다고. 여기 있어달라고. 그런 건 그의 마음대로 할 수 없는 일이니까. 누구의 마음대로도 할 수 없는 일이니까.
아, 말들은 얼마나 무력한지.
치하루는 무력한 말을 하는 대신 그의 손을 맞잡아 쥐고 눈을 감았다. 아직 남은 새벽이 길었다.
유리는 술병을 받아들자마자 익숙한 손길로 병목을 잡고는 두 시 방향으로 꺾듯이 흔들었다. 초록색 소주병 안에서 작은 소용돌이가 일었다. 무재가 턱을 괴고 그 모양을 지켜보았다. 까득, 병을 따는 소리. "형 내가 따라줄게." 그렇게 말하면서 유리는 조심성 없이 병목을 잡은 손을 불쑥 테이블 중간으로 내밀었다. 덕분에 가장자리에 놓여 있던 티슈 꽂이가 병 뒤축에 밀려 바닥으로 떨어졌고 무재는 익숙하다는 듯 한숨도 쉬지 않고 몸을 숙여 떨어진 물건을 집어올렸다. 덕분에 그가 입고 있던 도포 자락이 바닥에 끌려 테이블 사이를 돌아다니던 점원이 흘끗 그를 돌아보았지만 그는 신경쓰지 않았다. 그 사이 유리가 무재 앞에 놓인 잔에 넘치도록 술을 따랐고, 무재가 채 허리를 펴기도 전에 제 잔에도 직접 술을 채웠다. 유리가 방긋 웃었다.
"오늘은 형이 사주는 거야?"
"너는 돈도 많은 애가 왜 그러냐……"
"에에이, 나 이제 백순데."
엊그제 대학원의 졸업식이 있었다. 유리는 한동안 석사 논문을 쓰느라 바빠서 어디에도 낯을 내비치지 못했다. 사람을 만나는 것을 좋아하는 그가 몇 날 며칠을 연구실에 틀어박혀 있었는지 모르겠다. 그 꼴에서 해방되고 나니 후련하기는 후련했지만 마냥 좋아할 상황도 아니었다. 두 달 여 전 조교들의 술자리에서 일어난 일 때문이었다.
대학가 앞 술집은 어느 때나 북적거렸고 그때도 마찬가지였다. 모두가 한창 아무 일 없이 술을 마시던 와중이었다. 열한 시 무렵이었나, 상석에 앉아있던 교수가, 그러니까 이미 소주를 댓 병은 까고 나서 벌개진 얼굴로, 옆자리도 아니고 한참 떨어진 자리에 앉은 유리에게 갑자기 삿대질을 하며 자리에서 일어난 것이다. 처음에는 그 눈치를 모르고 옆에 앉아 있던 연구실 동기의 접시에 담긴 안주를 뺏어먹던 유리는 교수가 "야!" 하고 쩌렁쩌렁 소리를 지르고 나서야 고개를 돌렸다.
"너 내가……"
술자리가 벌어진 지 네 시간이 지난 때였으니 교수는 이미 얼큰하게 취해 있었지만 유리는 더 없이 매우 말짱했다. 학부 시절에는 생명공학과의 밑빠진 술독이라 불리던 그였다. 그는 고학번 때도 눈치 없이 총엠티에 따라가 신입생들 잔에 술을 따라주며 여럿 죽여놓고는 본인은 취기의 ㅊ도 없는 말짱한 얼굴로 새벽 다섯 시까지 자러 들어가려는 사람 바짓가랑이를 붙잡고 놓아주지 않기로 유명했다. 유리가 멀뚱히 입에 든 노가리를 씹어삼키는 사이 교수는 무어라고 큰 소리를 내며 그에게 삿대질을 했는데, 거리가 좀 떨어져 있을 뿐더러 한참 취해서 뭉개진 발음으로는 무슨 말을 하는지 도통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그쯤되면 보통 사람이라면 내가 무슨 잘못을 했나 눈치를 봐도 한참 볼 상황이었지만 유리는 그저 그 상황이 어리둥절할 뿐이었다. 그가 무의식중에 제 앞에 놓여 있던 감자튀김을 하나 집어 입에 털어넣자(마치 영화관에서 팝콘이라도 집어먹는 마냥), 안 그래도 큰 소리를 내고 있던 교수가 벼락 같이 외쳤다.
"너 내가 이 바닥에 발 못 붙이게 만들어버릴 줄 알아!!!"
그러고 교수는 테이블 위에 쓰러졌다.
그리고 침묵이었다. 그 자리에 모인 모두의 시선이 교수 앞으로 쪼로록 모였다가 흩어졌다가 이내 유리에게로 다시 모였다. 교수가 그런 말을 한다는 것은 문자 그대로 의도가 자명했다. 너 내가 좆되게 만들어줄 거야. 유리는 두 개째의 감자튀김을 집어 입에 넣고 씹었다. 좌중의 시선이 모두 자신에게 쏠려 있는 것은 별로 개의치도 않는 표정이었다. 잠시 멀뚱하고 골몰한 얼굴로 앉아있던 그가 옆자리 동기를 돌아보며 물었다.
"내가 뭐 잘못했나?"
유리는 지금 앉은 술자리에서도 똑같이 무재에게 물었다. 물론 무재야 교수가 유리의 무엇에 그렇게 열을 냈는지 알 길이 없었지만 어떤 상황인지는 불 보듯 뻔했다. 박유리의 주변에 있는 사람들은 대체로 그에 대해 정해진 반응을 보였는데, 그를 아주 좋아하든지, 아니면 아니면 싫어하든지 둘 중 하나였다. 예쁘장한 얼굴에 성격도 살갑고 곰살맞으니 미워하기가 쉽지 않겠다 싶다가도 교수가 술자리에서 악을 쓸 정도로 저를 싫어하는데 그 이유를 짐작조차 못하는 망한 눈치와 선을 지킬 줄 모르는 성격은 복잡한 인간관계 사이에서 미움을 사더라도 어쩔 수가 없었다. 그나마 본인이 그런 것에 전혀 신경을 쓰지 않는 것이 다행이라면 다행이었다.(아니, 과연 다행인가?)
어쨌거나 그러한 연유로 유리는 대학원에서 쫓겨나듯이 졸업했다. 원래는 박사 과정을 밟고 유학을 떠나는 것도 염두에 두고 있었으나 그 좁은 바닥에서 윗사람에게 미움 받는 것은 곧 앞길이 구만 리라는 의미였다. 어딜 가나 마주칠 거고, 어딜 가나 일이 꼬이겠지. 그의 연구실 동기들은 졸업이 코앞이니 석사만 따고 박사과정은 그만두는 것이 낫겠다고 그에게 삼백 번도 더 넘게 말을 했고 유리는 뭐, 아마도 그게 현명한 선택인가보다, 하고 생각했다. 뻔히 정해놓았던 앞길이 대번에 꺾였는데도 유리는 태평했다. 원체 그런 것에는 집착이 없는 그였다.
"이제 다른 일이라도 찾아봐야겠네. 취업할 거야?"
"음……"
유리가 술잔 가장자리를 입에 물고 앞니로 깔짝거렸다. 생각해보지도 않은 취업을 고려하자니 그 또한 구만리였고 그렇다고 해서 당장 다른 길이 명확하게 떠오르냐면 그런 것도 아니었다. 그는 느긋한 성격답게 아직까지는 아무 생각도 없었고 십 년이 넘게 알아온 무재의 눈에는 그 속이 빤하게 들여다보였다. 그는 유리가 무념무상으로 연거푸 자작을 하는 것을 막고는 그 술잔에 술을 한 잔 따라주었다.
"너는 사주에 역마살이 두 개나 있으니 이런 거에 좌절하면 앞으로도 힘들어."
"그런가아……"
사주니 역마살이니 누가 들으면 코웃음을 칠지도 모르는 일이었지만 유리는 무재가 말하는 것은 대체로 다 믿었다. 거짓말도 넙죽넙죽 믿는 판국에 사주팔자라고 못 믿을 일도 없었거니와 무재가 하는 말이 틀리는 경우는 별로 없었으니까. 그리고 무엇보다 말하는 사람이 무재니까, 유리는 그 말들을 믿었다. 그러나 믿는다고 해서 깊이 염두에 두고 신경을 쓰는 것도 아니어서 앞날을 알려줘도 고꾸라지는 경우가 종종 있었지만 그거야 뭐 유리의 잘못이었다. 유리가 기본 안주로 내어 놓은 눅눅해진 팝콘을 한움큼 입에 넣고 우물거리는데 문득 무재가 그를 불렀다.
"송현아."
송현松賢은 무재가 그를 부르는 이름이었다. 팝콘 그릇을 뒤적이며 탄 옥수수를 골라내던 유리가 고개를 들었다. 그때까지 의자 등받이에 몸을 기대고 있던 무재가 불쑥 상체를 약간 수그렸다. 이름을 부르던 목소리나 그 눈빛이 은근해졌는데 말하자면 누군가를 설득하려는 기색이 완연했다. 다르게 말하자면 약 파는 약쟁이 같은 기색이었다.
"사실 이번 봄에는 신월이 들거든."
"그래?"
"새로운 일을 시작해볼 때야."
그렇구나, 유리가 영문도 모른채 고개를 주억거렸다. 여전히 입에는 팝콘 알을 가득 문 채였다. 무재가 몸을 약간 수그린 채 씩 웃었다. 그리고 물었다.
"네 운명에서 벗어나보지 않을래?"
그때 문득 유리가 눈을 깜빡였다. 어두운 술집, 머리 위에 매달린 알전구 빛에 눈이 부신 것처럼 그랬다.
이내 그가 덩달아서 씨익 웃었다.
"그 말, 오랜만에 듣네."
유리는 미취학 아동일 때 겪었던 열병의 기억을 아직 가지고 있었다. 기억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면 곧잘 까먹고 잃어버리는 그로써는 드문 일이었다. 살면서 그만치 아파 본 일이 더 없기도 했거니와 그때가 처음으로 무재를 본 때이기도 했기 때문이었다. 유리는 그때, 정말로 아팠다. 아파서 시야가 오락가락하고 이명이 들렸다가 사라졌다가 살갗이 뜨거웠다가 한기가 들었다가 그러기를 꼬박 며칠을 반복했다. 처음에는 그저 환절기마다 걸리는 감기려니, 독감 예방주사는 맞았으니 독감은 아니려니 하던 그의 무심한 부모님도 하루가 지나서는 놀라서 병원에 데려갈 정도였다. 유리는 병원 천장의 격자무늬가 자꾸만 흐려졌다가 겹쳐졌다가 여러 개로 찢어졌다가 하는 것을 올려다보다가 어지러워서 눈을 감기를 반복했다. 왼쪽 귀의 이명이 사라지지 않아서 속이 울렁거렸고 열 오른 살이 아파서 울고 싶었는데 울 기력조차 나지 않았다.
그러던 와중, 흐릿한 시야에 불쑥 나타난 것은 한 어린애였다. 어린애라고는 해도 유리보다는 대여섯살 많아 보이는, 이목구비가 또렷하고 눈동자 색이 밝은 아이였다. 물론 유리는 그때 시야가 흐려서 그 무엇도 제대로 분별하기도 힘들었으므로 그 얼굴 어디에도 명확하게 시선을 두지 못했다. 소년은 열에 들떠 온통 붉은 유리의 얼굴을 내려다보다가 유리의 침대 옆에 걸려 있는 이름이나 병명을 쓴 표를 한 번 들여다보고는 끌끌 혀를 찼다.
"그러길래 얘 이름은 이렇게 지으면 안된다니까…… 유리라니, 너무 깨어지기 쉬운 이름이잖아?"
소년은 유리가 누구인지 이미 알고 있다는 투였다. 그 말투가 도통 어린아이 같지가 않았다. 쌕쌕 거친 숨을 뱉던 유리가 한 번 눈을 꽉 감았다 떴다. 그제야 시야가 명징해졌고 소년이 제법 걱정스러운 얼굴로 그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유리가 그 투명한 눈동자를 들여다보며 "누구……" 하고 간신히 물었다.
"나는 네가 태어날 무렵에 신병을 앓았었는데,"
무재가 에둘러가며 대답했다.
"그때 꿈에서 네 사주가 들여다보이길래 이름을 지었다. 네 부모는 들은 척도 안했지만……"
네 팔자는 살면서 죽을 고비가 네 번 있는 팔자인데 그중 한 번이 지금이라고 무재가 조곤조곤 말했다. 어디서 들으면 어린 놈이 사기를 친다고 역풍을 맞을 소리였으나 유리는 어렸고, 예나 지금이나 별 이유 없이도 남의 말을 잘 믿었으므로 그렇구나, 라고 생각했다. 죽을 고비가 네 번이나 있구나, 그러면 꼼짝없이 죽을 가능성이 더 높지 않나. 그렇게 생각하니 어린 마음에도 속이 아파 아까까지는 나오지도 않던 눈물이 비질비질 나왔다. 죽음이 무엇인지 제대로 알 나이도 아니었으나 생각보다 두려움이 더 먼저 앞섰다. 새카만 벽을 앞에 두고 있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유리가 아픈 와중에도 찔끔찔끔 울기 시작하는 것을 지켜보던 무재가 불쑥 물었다.
"네 운명에서 벗어나보지 않을래?"
응? 송현아. 그렇게 무재가 처음으로 그의 이름을 불렀다.
유리는 눈물로 다시금 부얘진 시야로 그를 올려다보며 무슨 말인지도 제대로 모르면서 고개를 주억거렸다.
뉴욕행 비행기 티켓을 예약해준 것은 유진이었다. 오웬은 주말 내내 피아노가 있는 방에 처박혀 있거나 침대에 누워 영화를 보았고, 그러다 보면 사람을 마주칠 일이 거의 없었지만 유진은 항상 제 동생들의 일에 관심이 많았다. 그는 사적인 공간에 민감한 오웬이 제 방에 들이는 몇 안 되는 사람이었다. 유진이 시내에 나갔다가 사온 과자를 그에게 건네면서 물었다. “콜롬비아 대학에 관심이 있어?” 그의 시선은 노트북 화면에 가닿아 있었다. 오웬은 노트북 스크린을 조금 몸 쪽으로 당기면서 애매하게 눈을 굴렸다. “썸머 스쿨 프로그램이 괜찮은 것 같아서.” “나쁘지 않지. 그런데 아마 아버지가 별로 안 좋아 하실 걸. 이번 여름엔 가족여행이라도 계획하시는 것 같던데. 스페인이라든가, 이탈리아든가.” 그 말에 오웬이 혀를 내밀며 구역질하는 제스쳐를 취했다. “내가 거기 따라갈 거라고 생각해?” “물론 아니지만.” 오웬은 바스락거리며 과자 봉투를 열었다. 달착지근한 라즈베리 쿠키를 혀에 올리고는 천천히 씹었다.
“단 걸 좋아하는 줄은 몰랐어.”
“별로 안 좋아해.”
그 단호한 대답에 유진이 문득 웃었다. 그 웃음이 묘해서 오웬은 침대 등받이에 몸을 기댄 채로 눈을 들었다. 유진은 때로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 남에게 관대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멍청한 것은 절대 아니었다. 그는 오웬만큼이나 눈치가 빨랐고 가끔씩 그보다 더 영민할 때도 있었다. 그래서 다음 말을 들었을 때 오웬은 답지 않게 어색한 동작으로 시선을 떨어트릴 수밖에 없었다. “억양이 좀 특이해진 것 같아.” 그 말은 반 박자 느리게 다가왔다. “뭐?” “영국인 친구라도 사귀었나봐?” 유진이 손가락으로 입을 가리키며 웃었다. 오웬은 자판 근처에 시선을 둔 채로 그 말을 곱씹었다. 오래 생각할 필요는 없었다. 누군가와 가까워지는 일은 그렇게 하나씩 흔적을 남기는 일이었다. 자각하지 못한 흔적을 남에게 지적받는 것은 몹시도 떨떠름했다. 오웬은 괜시리 어금니로 과자를 우적우적 씹으면서 스크롤을 올렸다 내렸다 반복했다. 유진의 시선이 한 번 더 화면에 가닿았다 떨어졌다. 의미 없이 사소한 동작이었다.
그리고 유진에게 전화가 온 것은 며칠 뒤였다. “썸머 스쿨이면, 한 이틀 전에 도착하면 되려나?” 오웬은 결코 말귀가 어두운 편은 아니었지만 유진의 말은 그렇게 몇몇 행간을 뛰어넘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그는 멍청하게 되물었다. “뭐?” “비행기 표 예약해야할 거 아니야.” “예약 해주게?” “너 돈 있어?” “없진 않… 을걸.” “학기 중에 굶고 살 예정이라면 말리진 않겠지만, 거기서 살이 더 빠지면 내가 널 병원에서 보게 될 것 같아서 말이야, 오웬.” 아무래도 밤 비행기가 나으려나? 비행기 안에서 잘 수 있어? 난 상관없는데 넌 좀 잠자리를 가리니까…… 떠벌떠벌 이어지는 그런 식의 말들을 들으며 오웬은 잠시간 침묵했다. “항상 좀 궁금했던 건데.” 그가 말의 중간을 잘라먹으며 입을 열었다.
“왜 그렇게 항상 내 일에 신경을 쓰는 거야?”
공을 주고받기라도 하듯 이번에는 전화기 너머에서 얕은 정적이 이어졌다. 침묵은 생각보다 길었다. “음…” 유진이 이내 길게 끄는 듯한 입소리를 냈다. 그것은 할 말이 없어서라기보다는 제가 할 말을 고르고 있는 것처럼 들렸다. 유진이 뱉어내는 말들은 대개 물살에 오래 부대낀 조약돌처럼 둥글었고 그만큼 신중했다. 그의 둥그스름한 말들은 그의 낮은 목소리와 잘 어울렸다. “좀 이상하게 들릴 지도 모르지만.” 그가 천천히 말들을 혀끝에 올렸다.
“나는 그렇게 하고 싶은 게 명확한 사람이 아니거든, 오웬.”
오웬은 눈을 감고 그 말을 들었다. “그래서 나는 견디는 게 어렵지 않았어. 무슨 말인지 알 거야, 그렇지?” “어.” “그래도 나도 가끔은 정말 싫을 때가 있었거든. 정말…… 엄청나게…… 싫을 때가 있었어. 그래도 나는 딱히 나 자신에게 다른 길을 제시할 수 있을 만한 사람이 아니었고, 그런대로 잘 견디면서 살았지만.” 오웬은 2층 침대의 바닥을 올려다보며 불현듯 이상한 기분을 느꼈다. 유진과 그는 나이차이가 제법 났고 그래서 오웬은 그들이 같은 유년을 공유했다는 자각이 별로 없었다. 유진은 언제나 우등생이었고, 한 번도 삶에 부대껴본 적이 없는 것처럼 다정했다. 오웬은 그의 다감함이 어떤 기반 위에 세워졌는지 알지 못했다. 그 이야기를 지금 듣고 있는 것이다. 그는 문득, 나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잖아요, 하고 말했던 일을 떠올렸다. 말하지 않는 일들은 그의 인식 바깥에서 그렇게 무수히 존재했다.
“하지만 넌 아니잖아.”
“응.”
“열한 살 때 처음으로 같이 연극을 보러 갔던 거 기억해?”
“기억해.”
그는 그때 샀던 프로그램 북을 아직도 가지고 있었다. 그의 클리어파일 사이에 오랫동안 잠들어 있는 물건 중 하나였다. 손이 탄 모서리가 닳아 너덜너덜해졌지만 버리지 않았다. 그는 그때 처음으로 몹시 갈망을 느꼈다. 그것은 새 운동화나 멋진 양장본을 가지고 싶은 욕구와는 전혀 다른 갈망이었다. 빛이 있었고, 그 빛을 쫓아가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거기에서부터 시작했다. 한 번도 입 밖에 내어 말해본 적이 없었지만 유진은 알았다. 그의 열네 살 생일 때 티켓북을 선물해준 것도 유진이었다. 그것은 부모님으로부터 받은 만년필이나 넥타이핀 같은 것보다 훨씬 마음에 들었다.
“그래서 나는 그냥 네가 하고 싶은 일이 있다면 하게 해주고 싶어.”
그 말은 아주 느리게 스몄다. “하지만 내가 해줄 수 있는 건 많지 않아. 기껏해야 비행기 티켓을 끊어주던가, 코피 좀 닦아주는 정도겠지.” 유진의 말투가 문득 가벼워졌다. 오웬은 손등을 이마에 댄 채로 조금 망설였다. 익숙하지 않은 말을 하는 것은 여전히 어려운 일이었다. 그는 자신이 처음부터 그런 종류의 일을 배워온 사람이라는 것을 자인했다. 그것을 지금부터 조금씩 배워나가야 한다는 것도 알았다. 그래서, 말은 한 음절씩 천천히 나왔다.
“……고마워.”
쇠구슬을 입에 문 것처럼 낯설었다. 전화기 너머에서 유진이 조용히 웃는 것이 느껴졌다.
2.
“…라고 하긴 했지만 말이야, 오웬.”
유진의 목소리는 덤덤했지만 오웬은 그가 웃고 있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다. 그는 침대 모서리에 앉아 이마를 감싸 쥐었다. 유진은 정말로 눈치가 빨랐다. 필요치 않을 정도로 빨랐다. 2학기가 시작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서였다. 방학 내내 질리도록 붙어 다녔어도 주말이면 꼬박꼬박 함께 스트랫필드를 돌아다니곤 했다. 유진을 마주친 것은 서점 근처에서였다. 이 근처에 일이 있어서 왔다가여기다뭐쓰려했지
“영국인 여자친구라도 생긴 줄 알았지, 남자친구라고는 생각 못했어.”
“아, 시발.”
“중학교 때 여자친구도 몇 명 있었잖아?”
“그걸 어떻게 안 거야. 아, 진짜 시발.”
이
뒤
는
안 쓸 것 같네요~ 하지만 스트랫필드에서 유진과 마주친 오웬과 로렌스 썰은 재밌다고 생각해요
꽃을 직접 사 보는 것은 처음이었다. 진회색과 하늘색 포장지로 감싼 작약 무더기를 들고 꽃집 앞에 서서 우인은 잠시 이상한 나라에 갔다 온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베고니아나 히아신스 같은 말은 어느 먼 나라의 주문 같지. 꽃은 생각보다 가짓수가 많고, 예쁘고, 그리고 비쌌다. 졸업식이나 입학식 때나 받아본 적 있는 꽃다발들을 떠올리며 그는 개당 3천원씩이나 하는 분홍색 꽃을 조심조심 옆구리에 꼈다. 부디 혼자 꽃다발을 들고 서성거리는 스스로가 너무 이상한 사람처럼 보이지는 않길 바랄 뿐이었다.
대학로의 골목에는 모퉁이마다 하나씩 극장이 있어서 곧잘 길을 헤매게 된다. 걸을 때마다 옆구리에서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나서 신경이 쓰였다. 비싸고 성가시고 예쁘지만 얼마 안 있으면 시들어버릴 물건이라니 세상의 이치에 어긋나는 것만 같아 또 기분이 이상해진다. 핸드폰을 켜서 지도를 확인하면서 같은 모퉁이를 세번쯤 돌고 나서야 목적지를 찾을 수 있었다. 턱을 들어 극장 이름을 확인하고 유리문을 밀고 들어갔다.
입구부터 안쪽까지 줄지어 붙어 있는 포스터를 유심히 쳐다보았다. 아래쪽에 흰 글씨로 쓰여 있는 이름이 익숙한 것 같기도 하고 낯선 것 같기도 했다. 잠깐 고민하다가 핸드폰 카메라를 켜서 사진을 찍었다. 이런 건 기념이니까. 그렇게 생각하자 조금 쑥쓰러운 기분이 드는 것 같기도 했다.
"표를 보여주시겠어요?"
직원의 시선이 슬쩍 옆구리의 꽃다발에 가 닿았다 떨어지는 것을 느끼며 우인은 느릿느릿 지갑 안에 넣어두었던 표를 꺼냈다. 공연이 시작하기 전, 어스름하게 켜둔 불빛들을 지나 제일 앞자리로 향했다. 첫 공연이니까, 보러 올 거면 표를 주겠다고도 했었는데, 거절을 한 것은 우인 쪽이었다. 직접 돈을 내고 표를 사고 싶었다. 그냥 그런 기분이었다. 비싸고 성가시고 곧 시들어버릴테지만 예쁜 것처럼, 세상의 이치에 맞지 않는 기분이 종종 있는 법이다. 그는 자리에 앉아 꽃을 무릎 위에 올려두었다. 좌석과 무대의 거리가 생각보다 가까웠다.
대학에 올라와서 공연을 보는 것이 처음은 아니었는데, 그럼에도 가끔 자신의 자리가 좌석이 아니라 무대 뒤편의 조명 기계 뒤에 있어야하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할 때가 있었다. 그때는 무대의 뒤편에 서서 배우들의 뒤통수를 쳐다보는 일이 익숙했다. 조명을 돌리다 보면 사람들이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 것인지, 어떤 동작을 하고 있는지는 정작 잘 알 수가 없었으므로 그가 함이슬의 연기를 처음부터 끝까지 보는 것은 엄밀히 말하자면 지금이 처음이었다. 좌석의 등받이에 머리를 기대고 후, 길게 한숨을 내쉬자, 그게 어떤 신호인 마냥 모든 불이 꺼졌다.
등이 좌석에 붙박힌 것처럼 우인은 눈만 돌려 모든 흐름을 따라갔다. 이슬의 배역은 2막부터 나왔다. 암전, 적막, 빛은 무대의 정가운데 위쪽에서부터 떨어졌다. 우인은 문득 숨을 참았다. 이슬은 무대 가운데에 서 있었다. 태연한 표정이었다. 하지만 조금 긴장했나? 오랫동안 보아온 사람만이 알 수 있는 그 미묘한 기색은, 그가 입을 열자 이내 없던 일처럼 사라졌다.
무대의 조명은 희고 밝았다. 우인은 환영을 보는 사람처럼 눈가를 조금 찌푸렸다. 그는 빛의 한가운데에 서 있었다. 그 순간, 몇 년 전 긴 밤을 지새우며 나눴던 대화를 떠올리는 것은 아주 이상한 일일 것이다. 행복해지고 싶지 않다는 말을…… 들었었는데. 그 말의 단절된 어감을 기억한다. 그런데 그는 지금 가장 밝은 빛 아래에 서 있다. 흰 조명이 그의 높은 정수리부터 반듯한 어깨를 타고 내려와 손끝까지 비추고 있었다. 마치 여기서 가장 빛나는 사람은 그라는 듯이. 예전에도 그랬고 앞으로도 그럴 것처럼.
어라, 기분이 이상하네.
극의 내용은 전혀 그런 게 아니었는데, 어쩐지 울고 싶은 기분이 들었다.
우인은 목도리 안으로 턱을 파묻었다. 무대 아래쪽을 쳐다보며 흘러가는 대사를 귀로만 들었다. 이런 기분이 들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살아 있다는 것은 때때로 상상하지 못한 기분들과 마주치는 일이구나. 세상이 정말로 끝장나버리는 줄 알았을 때는 알지 못했던 일이다.
"하지만 기쁘지 않나요?"
배역의 대사였다. 그 또렷한 발음, 대사. 우인은 그의 목소리를 들으며 가만히 그 기분이 지나가기를 기다렸다.
"나 주려고 산 거야?"
이슬은 아직 무대 화장이 덜 지워진 얼굴로 반색을 했다. 우인은, 그럼 너 주려고 샀지 버리려고 샀겠냐…… 하는 말을 굳이 덧붙이면서 그의 품에 떠넘기 듯이 꽃다발을 안겨 주었다. 꽃은 그에게보다 이슬에게 훨씬 잘 어울렸다. 빈 손으로 오지 않기를 잘했다고 생각하며, 겹겹이 모인 꽃잎의 모양새를 신기하다는 듯 쳐다보는 이슬에게 말했다.
"너 솔직히 처음에 조금 긴장했었지."
그러자 이슬이 정곡이 찔린 듯 어색하게 웃는다.
"티 났어?"
"그냥, 그런 생각이 들어서."
하지만 나 잘했다고 생각하는데. 학생 공연이 아닌 건 이번이 처음이잖아. 이슬이 뻔뻔하게 말하고는 고개를 약간 숙였다. 그런, 제스쳐가 아닌 걸 알면서도 저도 모르게 손을 뻗어 머리를 매만져보았다. 무스를 발라 고정시킨 머리카락의 감촉이 뻣뻣하게 손에 감긴다. 손바닥에 관자놀이가 부드럽게 스친다. 이슬이 칭찬을 받는 아이처럼 가만히 눈을 감았다 떴다.
"어, 너 잘하더라. 네가 잘해서…… 좋았어."
솔직하게 말해보았다. 그러자 이슬이 웃었다. 의뭉스럽거나 어색한 웃음이 아닌 그냥 웃음이어서 그게 또 좋다는 생각을 했다.
얼굴 자체는 유순하게 생긴 편이나 표정이 뚱해서 인상이 애매하다. 희다기보다는 창백해서 혈색이 없는 낯빛. 짧고 단호하게 말하는 편.
전체적으로 병약하다. 별명이 문창과의 걸어다니는 종합병원. 체력도 약하고 악력도 약하고 잔병치레도 잦고 빈혈과 기립성저혈압으로 대표되는 가지각색의 지병을 가지고 있음. 덕분에 종종 학교를 빠지고, 가끔 갑자기 코피가 터지거나 일어나다가 쓰러지거나…… 한다. 옆에서는 놀라는데 본인은 익숙해서 잘 안 놀란다.
추위를 많이 타서 겨울에 밖에 나갈 때는 꼴사나울 정도로 껴입고 다닌다. 초봄과 초가을에도 목도리를 한다. 환절기 때마다 감기를 달고 산다.
당이 떨어지면 큰일 나기 때문에 항상 사탕이나 껌 초콜릿 같은 것을 자질구레하게 들고 다닌다. 최근에 좋아하는 것은 딸기맛 포키.
전공은 소설보다는 시. 외부 대회에서 상을 받은 경험이 몇 번 있다. 부지런히 글을 쓰기 때문에 선생님들에게는 예쁨받는 편.
동아리 내 포지션
후배들에게는 까탈스럽고 대하기 어려운 선배. 평소에는 조용히 있다가 무언가를 할 때가 되면 갑자기 잔소리가 많아진다. 사소한 것까지 그냥 넘어가지를 않기 때문에 어딘가 꼬장꼬장한 이미지. 한마디로 잔소리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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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 19
캐릭터 설정
말수가 적고 얌전해서 정적인 이미지이나 알고 보면 예민한 성격. 기본적으로 네거티브하고, 호보다 불호가 더 강하다. 짜증이나 성을 잘 내서 까탈스러워 보인다. 그러나 은근히 소심한 구석이 있어서 진심으로 화를 내는 경우는 별로 없음. 항상 지나치게 생각이 많아 성격이 대범하지를 못하다. 시원시원하게 일을 처리하거나 덮어두고 넘어가는 것을 잘 하질 못한다. 한마디로 요령이 별로 없다. 본인도 스스로의 그런 성격에 대해 잘 알고 있고, 피곤하다고 생각한다.
살갑다거나 정이 많은 성격은 아니지만, 맺고 끊는 것을 잘 못해서 다가오는 사람을 밀어내지도 못하고 한 번 친해진 사람을 쉽게 내치지도 못하기 때문에 실제로 친해지기가 어려운 성격은 아니다. 안 그래 보여도 옆에 있는 사람에게는 신경을 많이 쓴다. 짜증을 내다가도 상대가 저어하는 것 같으면 슬쩍 눈치를 보거나, 남들은 별로 신경쓰지 않는 부분에서 골머리를 썩는 경우가 종종 있다.
생각이 많은 사람들이 으레 그렇듯 의외로 감상적인 편이나 그런 면을 겉으로 드러내는 것을 싫어한다.
오래 전부터 부모님이 사이가 안 좋았다. 부모가 둘 다 자신의 일이 중요하고 자기만 아는 사람들인지라 철이 일찍 들었으나 대신 성격을 좀 버렸다…… 네가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나면 이혼을 할 것이라는 얘기를 들은 것이 작년 말. 그 후에 누구를 따라갈지는 네가 정하라는 말에, 참 지긋지긋하고 싫은 기분을 느끼며 누구도 따라가지 않고 양쪽에서 돈을 받아서 혼자 살기로 마음을 먹었다. 그러기 위해서 서울에 있는 좋은 대학을 가야지, 하고 생각 중.
입부 계기
입학 당시 <소년 B가 사는 집>이라는 연극을 보고 인상에 남아, 연극부가 있다는 것을 알고 친구와 함께 비교적 가벼운 마음으로 입부했다. 아직까지 남아 있는 이유가 뭐냐고 묻는다면 한 번 시작한 일을 스스로는 잘 그만두지 못하는 성격 때문.(같이 입부한 친구는 진작에 그만뒀다.) 이러니저러니해도 어딘가에 소속되는 것을 좋아하는 것 같기도…
정다민/1
좋아하는 것들에 대해 말하다 보면 곧잘 말이 길어진다. 지나치게 말을 많이 한 것 같아. 우인은 머쓱한 기분을 느끼며 책장에서 흰 색 표지의 얇은 책을 꺼내들었다. 매끈한 재질의 표지가 손에 쉽게 달라붙는다. 시를 좋아한다고 말하는 것은 장미를 좋아한다든가 파란색을 좋아한다든가 하는 말들과는 달리 어떤 자의식을 갖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예를 들자면 긴 머리를 좋아한다고 말하는 게 아니라 긴 머리를 가지고 목소리가 상냥한 옆반의 A를 좋아한다, 라고 말하는 것과 비슷한 일 같다. 책상에 걸터 앉듯이 기대어 책장을 가볍게 넘겨 보았다. 공부를 하느라 곳곳에 붙여 놓은 색색깔의 포스트잇들을 하나씩 뗐다. 이런 건 보이면 부끄러우니까…… 책장을 휙휙 넘기면서 포스트잇을 떼다가 서평 바로 앞, 가장 마지막에 실린 시를 읽었다.
밤에는 눈을 감았다
사랑해도 혼나지 않는 꿈이었다
왠지 이런 구절을 좋아할 것 같네…… 그렇게 생각하며 손에 덕지덕지 붙어 있던 포스트잇들 중 파란색 인덱스를 그 페이지에 붙여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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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과 후에 우인은 부실에서 어렵지 않게 정민을 찾았다. 수업이 끝난 직후의 동아리실에는 사람이 적었다. 그는 넓은 테이블 앞에 가만히 혼자 앉아 있는 정민에게 뭔가를 말하는 대신, 다짜고짜 책을 내밀었다. 정민의 옅은 푸른색 눈동자가 아래에서 위로 느릿하게 올라왔다. 언제나처럼 약간 졸린 것 같기도 하고 웃는 것 같기도 한 얼굴이었다.
"빌려 달라며."
앞뒤 주어 없이 그렇게 말하자 정민은 천천히 기억을 더듬다가 곧 아아, 하고 입소리를 냈다. "네가 꼭이라고 말했으니까……" 저도 모르게 그렇게 덧붙였는데, 말하고 보니 굳이 덧붙이지 않아도 될 말을 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왠지 부끄러워졌다. 그런 그의 기분과는 상관없이 정민은 선선하게 책을 받아들었다. 그의 손끝이 파란색 인덱스의 가장자리를 스치고 책의 모서리를 집어들었다. "고마워. 친절하구나……" 그 말에 불쑥 대답이 튀어나왔다. "친구한테 물건 빌려주는 게 그렇게 친절한 일인가?"
정민이 그를 쳐다보았다. 우인은 엉겁결에 말을 흐렸다.
"네가 친구하자며……"
어쩐지 두 배로 부끄러워졌다.
*황인찬-무화과숲
함이슬/1
좋고 싫음 이전에 주어지는 것들이 있는데 부모 자식 관계라는 것이 대체로 그러했다.
불이 꺼져 어두컴컴한 방이나 난방이 돌아가지 않는 바닥, 열어두지 않은 커튼이나 시커멓게 시들어 빠진 화분 같은 것을 볼 때면 기분이 이상해졌는데 그것도 중학교 1학년 때까지였다. 우인은 어떤 기대를 버리는 것이 빨랐다. 그의 두 살 어린 여동생은 그보다 한참 늦되었다. 그녀가 기대와 실망을 엇갈려서 반복하는 모양새를 보고 있으면 아주 어릴 때의 스스로가 떠올랐기 때문에, 우인은 동생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결국 가족들 중에 그가 좋아하는 사람은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인 셈이다.
글을 쓰기 시작한 것은 딱 그 무렵부터였다. 그는 무언가를 쓰는 행위에 쉽게 빠져들었다. 바깥에 중요한 것이 생기자 나머지는 아무래도 상관없다고 생각할 수 있었다. 많이 쓸 때는 하루만에 공책 한 권을 다 채워낸 적도 있었다. "하지만 네 글은 너한테 천착하는구나." 그렇게 말한 것은 중학교 때의 국어선생님이었구나. 문장은 좋지만 서사가 부족하다는 얘기를 들은 것이 여러 번이었다. "시를 한 번 써보는 게 어때?" 고등학교에 들어가자마자 시 담당 선생님은 그렇게 권했다. 그녀는 시집을 한 번 읽어보라며 박준을 추천했는데, 순전히 그가 몸이 안 좋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별 다른 기대 없이 서점에 가서 갈색 표지의 책을 집어들었다. 책장을 넘겨가며 가볍게 훑는데 어떤 문장을 발견했다.
아무것에도
익숙해지지 않아야
울지 않을 수 있다*
그리고 그는 시를 쓰기 시작했다. 시의 화자는 언제나 자기자신이었으므로.
"싫어? 그런 관계인 게?"
그래서 결국 그 질문에는 어떤 대답을 찾아야하는지 아리송해졌다. 우인은 저도 모르게 손톱으로 손바닥 안쪽을 긁으면서 잠시 생각했다. 자른 지 얼마 되지 않은 손톱의 날카로운 부분이 손금을 스쳐서 상채기가 나고 나서야 우인은 문득 정신을 차렸다. 이슬은 그의 대답을 기다리고 있었고, 뜸을 들인다는 것은 행간을 점점 더 무겁게 만들고 있었다. 그리고 그것은 그가 그다지 원치 않는 결과였다.
"그게 싫다기보다는,"
급하게 입을 열자 말은 느끼는 그대로 흘러나왔다.
"아예 타인이 될 수는 없다는 게 싫어."
……조금 완곡하게 말하는 것이 나았으려나. 이슬의 표정을 보니 그런 생각이 들었다.
*박준-문병
최남이/1
"……이게 삽소리로 들리냐? 개새끼야."
그 말을 듣자마자 떠오른 것은 이상하게도 중학생 때의 기억이었다. 늦가을이었나, 그랬는데, 차게 식은 부엌 바닥이 맨발에 달라붙어와서 발이 시리다는 생각을 했었고, 문지방을 밟고 서서 한참동안 물소리를 듣고 있었다. 저기, 하고 운을 뗀 것은 개수대의 물소리에 묻혀 잘 들리지가 않았다. 이내 그 소리가 멎었다. 그는 억양 없이 빠르게 말했다. "나 하광예고에 원서 쓸 거야." 허락을 구하는 것도 동의를 구하는 것도 아닌, 정해진 결론으로만 수렴하는 말투였다. 엄마가 눈만 돌려 흘긋 그를 돌아보았다. "그래." 허락을 구하는 것도 동의를 구하는 것도 아니었으므로 대답 역시 그런 것들과는 동떨어져 있었다. 한 집에 살고 있으면 관심이 있든 없든 서로에 대해 조금쯤은 알게 되기 때문에, 그녀는 이따금씩 책상 위에 놓여 있는 상패나 메모 쪼가리들을 보면서 그가 글을 쓰고 있다는 것을 알았을 것이다. 그럼에도 그것에 대해 한 번도 물어보는 일이 없는 것이 그녀다웠다.
우인은 소리 없이 문지방에서 내려와 방문을 닫았다. 그리고 발바닥으로 다른 쪽 발목을 비비면서, 올해 겨울은 유난히 추울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그런 기억 때문인지 우인은 멀어지는 기분이 들었다. 실수를 했다는 느낌도 아니고, 욕을 들어서 화가 난 것도 아닌 그저 지극히 침착한 기분이었다. 지금의 상황은 말하자면 말실수를 한 것일테다. 사과를 해야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생각이 들었는데, 별로 그러고 싶지 않았다. 왜 그러고 싶지 않은지는 스스로도 설명할 수가 없었다. 어떤 것들은 잘 알고 있지만 인정하고 싶지 않기 때문에 모르는 것으로 생각될 때가 있다. 남이는 오연하게 웃고 있었다. 그는 웃고 있기 때문에 더 화가 나 보였다. 그 새파란 분노에 공감할 수 없다는 생각을 하자, 기분은 점점 더 멀어졌다. 우인은 시선을 약간 내려 발치를 쳐다보았다. 신발과 신발. 아스팔트 바닥. 말은 생각보다 먼저 흘러나왔다.
"부럽네, 위해주는 사람이 있다는 건."
비꼬거나 농담을 하는 것도 아닌, 덤덤한 말투였다.
장혜리/1
나한테 의외성이 없다고 말한 사람이 누구였나, 아마 오영영인가, 그랬을텐데. 우인은 대형서점의 시집 코너 앞에 서서 그렇게 생각했다. 여름의 끝무렵이었다. 계절을 쉬이 보내지 않겠다는 듯 더위는 끈덕졌고 서점 안으로 들어서는 순간 찬 기운과 더운 기운이 마구잡이로 섞여 유리문에 김이 서리는 것이 느껴졌다. 베스트셀러와 장르소설 취미 여행 서적을 지나 제일 안쪽에 있는 시집 코너까지 천천히 걸어들어갔다. 갈색의 책장에 색색의 얇은 책들이 가지런히 꽂혀 있는 모습은 높이를 맞춰 자른 정원수나 키가 같은 형제처럼 안정감이 느껴졌다. 에어컨이 바로 머리 위에 있어서 조금 춥다는 생각을 하며, 신간부터 하나씩 꺼내 읽기 시작했다.
키가 크고 머리가 검은 후배는 남한테 베푸는 것을 좋아하는 듯 종종 먹을 것이나 입을 것 같은 것을 동아리 사람들에게 선물하고는 했다. 그런, 살가운 행동이 기껍고 자연스러운 것도 일종의 재능이다. 저를 생각하면서 선물해준 거면 다 좋아요. 그런 말은 조금 귀엽다고 생각했다. 생각, 생각이 중요한 것이다. 선물이라는 것은 결국 다 그렇다. 예쁘고 살가운 게 좋을까. 표지는 문학동네가 제일 예쁘지…… 딸기 우유 색의 표지가 손끝에 걸렸다.
함께 놀아요. 보리수꽃차 나눠 마시고 어리광 피우기 놀이해요 나만의 부티크 갖고 싶고, 여섯 배는 느리게 움직이지만 자꾸 멍이 들죠. 난 유일의 목소리를 가졌고 비밀이 많아! 외쳐보지만 행복해지진 않아요, 걸스카우트 매듭을 배웠는데 제대로 묶는 게 하나도 없죠 어리광 좋아해요 사랑 얘기만 하고 세상을 몰라요*
이렇게까지 작위적인 건 아마도 시의 자의식이다. 세상에 예쁘기만 한 것은 없겠지. 그 애도 아마 그럴 것이다. 플루트는 계속 하고 있는 걸까…… 책을 들고 계산대로 다가가며 주말인데 서점에 사람이 적다는 생각을 했다. 책을 사고 읽는 것은 멸망을 앞두고서는 너무나 수고로운 행위일지도 모른다는, 막연한 고민을 하며 아무도 없는 계산대에 서서 지갑을 꺼냈다.
서점을 나서자 햇빛이 이마를 짓누르는 것 같았다. 그는 핸드폰을 꺼내 책의 표지를 찍었다. 자꾸만 손이 흔들려서 몇 번 더 찍었다. 문 앞에 서 있는데도 비키라고 하는 사람이 없었다.
이거, 표지 예쁘지 않아?
사진과 함께 문자를 보냈다.
*박상수-닌나난나
함이슬/2
말에도 진폭이 있다고 가끔씩 생각하는데, 그 질문은 진폭이 깊고 넓었다. 우인은 문득 턱을 괴고 있던 손을 내렸다. 손바닥 가운데가 얼얼해서 기분이 이상했다.
질문에 대한 선택지는 사지선다형이 아니었으므로 대답은 여러 가지가 될 수도 있었다. 아무도 치우지 않는 깨진 컵과 빈 식탁 문지방을 넘어야 들어갈 수 있는 방과 새카맣게 마른 화분 불이 꺼진 부엌과 인적이 없는 버스 정류장 가만히 앉아서 몇 대의 버스를 지나쳐 보내는 일이나 우울증의 병력은 유전이 된다는 것을 처음으로 알았을 때 인기척이 없는 문 앞에 서 있는 일 계절마다 꼬박꼬박 찾아오는 열병과 한바탕 앓아누운 침대 머리맡에서 한 며칠 괜찮다가 꼭 삼 일씩 앓는 것은 내가 이번 생의 장례를 미리 지내는 일이라 생각했다*는 시구를 떠올리는 것…… 그런 일들은 너무나 사소하고 사적이어서 어떤 방식으로도 에둘러 표현할 수가 없었다. 줄글 사이에는 숨길 수 있어도 말과 말 사이에는 숨길 수 없는 것들이 있다. 우인은 잠시 입을 다물었다.
그 시의 다음 구절이, 나는 자면서도 누가 보고 싶은 듯이 눈가를 자주 비볐다* 하고 끝나는 것을 떠올리고 나서야 입을 열었다.
"……난 의외로 외로움을 타나 봐."
말로 이뤄놓고 보니 어린아이 같은 대답이라 우인은 부러 큰 동작으로 의자에 기대었다. 창문 밖에서는 길어진 낮과 밤이 천천히 반복되고 있었고 세상은 어쩌면 멸망하는 중이었으므로 그의 사소한 대답이 어떤 식으로 이루어지는지는 그다지 중요한 문제가 아닐 수도 있다. 그는 마치 피곤한 사람처럼 눈가를 손바닥으로 성마르게 문지르며 느릿느릿 단어를 골랐다.
"혼자 있으면 안 좋은 생각이 들어서."
손금을 따라 눈꺼풀이 사각거리는 소리를 내는 것 같았다. 이런 말을 남에게 해본 적이 거의 없다는 것을 문득 깨달았다. 그래서인지 대답을 하는 스스로의 목소리가 타인의 것처럼 조금 낯설게 들렸다. 알고 있었지만 굳이 말로 하려 하지 않았던 일들이라서 그런 것일지도 모른다.
"동아리 계속 하는 것도 그런 이유 때문일지도 몰라. 집에 있는 거 별로 안 좋아하거든."
그런 거였나…… 말하면서 스스로도 납득했다. 말이란 참 이상하다는 생각을 새삼스레 하면서.
*박준-꾀병
방국봉/1
마지막을 앞둔 사람의 행동은 두 가지로 나뉘는 것 같았다. 태연하거나, 태연하지 않거나.
국봉이 바스락거리는 소리를 내며 꺼낸 초콜릿들 중 하나를 집어들며 우인은 스스로 태연해질 수 없다는 생각을 했다. 겨울 날 주머니 속에 오래 넣어둔 초콜릿은 단단하고 차가웠다. 포장지를 바로 뜯어 잇새로 밀어넣으면서, "이렇게 물질적인 걸 나눠달라는 얘기는 아니었는데." 하는 괜한 얘기를 덧붙였다가 입을 다물었다. 그는 항상 단 걸 들고다녔지만 단 걸 좋아하는 건 아니었다. 그건 중학생 때 당이 떨어져서 학교에서 쓰러진 이후로 생긴 습관 같은 것이었는데, 습관이라는 건 이상해서, 단 걸 좋아하는 건 아니라고 줄곧 생각해왔는데도 어느 새 편의점의 매대 앞에 서서 좋아하는 사탕이나 초콜릿을 집어드는 자기 자신을 발견할 수 있었다.
생각이라는 것도 결국 습관이라고 생각한다. 마지막은 믿지 않기에는 너무 목전에 왔고 남은 시간을 어떻게 보내느냐 하는 것이 중요한데, 머리로는 알고 있으면서도 습관이 된 생각들이, 마지막을 의식하고 그 다음으로 넘어가지 못하는 생각들이 있어서 자꾸만 기분은 처졌고 덩달아 몸까지 아래로 가라앉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우인은 단단해진 초콜릿이 천천히 녹아 혀 아래에 달라붙는 것을 느끼며 천천히 한숨을 내쉬었다. 그는 여전히 생글생글 웃고 있는 국봉의 얼굴을 쳐다보다가 입고 있던 패딩 주머니에 손을 집어넣었다.
"하나 더 먹어도 되는데. 기분은 좋아졌어요?"
그렇게 물어보는 목소리는 태연하다. 부러 노력하는 기색이나 의연함 같은 것은 없는 것 같다.
"어……"
말꼬리를 흐리면서 대답했다. 우인은 왠지 예전부터 이런 것에는 이길 수가 없었다. 노력하지 않아도 자연스러운 것. 태연한 것. 그런 사람들. 스스로가 가지지 못한 소양이라서 그런 것일지도 모른다. 손을 좀 더 깊숙히 밀어넣자 주머니 안쪽에 있던 사탕이 손가락 끝에 걸렸다. 포장지에서 사각거리는 소리가 났다. 아마도 딸기 맛과 레몬 맛이었던 것 같다.
"……이거 너 줄게."
너 머리색이랑 닮았으니깐…… 그렇게 말하며 노란색 포장지의 사탕을 꺼내 여전히 펼쳐져 있는 국봉의 손바닥 가운데에 올려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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쨍그랑
컵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가장자리에 토끼 무늬가 있는 분홍색 유리잔이었다. 그러니까 이건, 그가 학교에 들어가기도 전, 아주 예전의 기억이다. 그는 깨진 파편 사이로 노란색 내용물이 울컥 쏟아져 나와 넘쳐흐르는 것을 쳐다보고 있었다. 엄마는 동생을 안고 식탁 의자에 앉아 있었는데, 그녀의 시선이 식탁 모서리를 타고 천천히 흘러내려 바닥으로 내려와 깨진 컵으로 향하던 그 소리 없는 동선을 기억한다. 파편을 하나하나 주워담기라도 하듯 바닥을 쓸던 시선이 이내 다시 위로 올라왔다.
"이제는 정말 안 되겠어."
그 말의 억양은 독특했는데, 이제는, 하고 길게 내뱉다가 한 번 숨을 참고 나머지는 빠르게 뱉어내는 말투였다.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나서 동생을 의자에 내려두고 문, 그러니까 현관문을 열고 나갔다. 그것은 너무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기 때문에 우인은 문이 닫히는 순간까지도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몰랐다. 그녀는 맨발이었다.
그 뒤에 벌어진 것들은 전부 나중에 전해들은 이야기이다. 맨발로 동네를 정처없이 걸어다니던 여자를 붙잡은 것은 경찰이었고, 그때 그녀의 발은 이미 피투성이었고, 그녀는 병원에 가서 파상풍 치료와 함께 우울증 진단을 받았다. 마치 허공을 둥둥 떠다니는 풍선처럼 그와 그의 동생은 영문을 모른 채로 할머니 댁에 맡겨졌고 꽤 오랜 시간이 지난 후에 집에 돌아왔을 때는 무언가가 분명 달라졌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엄마는 그를 낳기 전 그만뒀던 일을 다시 시작했고 아빠는 집에 들어오지 않는 시간이 좀 더 길어졌고…… 아…… 그리고 어땠더라?
어떤 식으로 그것들을 포기했더라.
그들이 나에게 무관심하다는 것을 어떤 식으로 받아들였었지. 한때는 화가 났던 것 같기도 하고 한때는 울었던 것 같기도 하고 한때는 쓸쓸했던 것도 같은데 이제는 전부 아리송하다. 불이 꺼진 방과 계절이 지나도 여전히 걸려 있는 여름 커튼, 인기척이 느껴지지 않는 거실과 아무도 말을 하지 않을 때 들을 수 있는 창밖의 바람 소리 같은 것들에 익숙해지는 것은 쉬웠다.
……쉬웠나?
쉬웠었나.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
다만 그가 정말로 용서할 수 없는 것은……
2
손바닥이 가장자리부터 안쪽까지 차가웠다. 그는 천천히 주먹을 쥐었다 펴면서 바닥을 내려다보았다. 손가락이 손바닥 안쪽으로 굽어들 때마다 배가 아픈 것 같기도 했고 머리가 아픈 것 같기도 해서, 그는 저도 모르게 몸을 옹송그리고 무릎에 이마를 댔다. 긴장하면 안되는데. 모의 면접을 볼 때는 전혀 떨리지 않았다. 하지만 여기가 1지망이고, 수상 실적도 있고, 아마 붙을 확률은 제일 높을 테니까…… 이러는 와중에도 낮과 밤은 점점 고무줄처럼 길어지고 있고, 멸망이 목전에 있는 것 같기도 한데, 바보 같은 일처럼 느껴지다가도 문득, 관자놀이가 당기듯이 머리가 아프고, 생각은 다시 제자리로 돌아오고, 수시로 붙어야 하는데, 나는 정시까지 가면 답이 없는데…… 붙어야 하는데……
그래야지만 그 사람들과 타인이 될 수 있는데.
3
발을 바닥에 딛고 의자에서 몸을 떼는 순간,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예를 들자면 물건을 떨어트리기 직전에 아, 떨어지겠구나, 하고 아는 것. 그런 느낌.
고개를 들자 형광등 불빛이 눈 바로 앞에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시야가 조금씩 흔들리는 것 같았다. 어지러웠다. 기시감이 들었다. 예전에도 이런 적이 있었는데, 언제였지. 중학교 때, 체육 시간에, 오래 달리기를 하다가 쓰러졌을 때. 그때 꼭 이런 느낌이었는데. 이렇게, 식은땀이 나다가, 발끝부터 무너지는 것처럼, 이렇게, 몸이,
바닥으로……
4
그 뒤 며칠 동안 열이 났다.
올 한해 겪지 않은 감기를 한꺼번에 겪기라도 하듯 열병이 길었다. 침대에 누워 열 기운에 몽롱한 가운데 자다 깨다 하고 있으면 낮과 밤이 아주 천천히 지나가고 있는 것이 느껴졌다. 나흘째 되는 날에는 그럭저럭 열이 떨어졌지만 그 후에도 그는 학교에 가지 않았다. 아프지 않은데도 학교에 가지 않는 것은 처음이었다. 아프지는 않았지만 어쩐지 손 하나 까딱할 수 없는 기분으로 누워서 불 꺼진 천장에 창틀 그림자가 어리는 것을 쳐다보고 있으면 여러 가지 생각이 들었는데, 그 생각들은 대체로 그를 더 무력하게 만들었다. 마치 뱀이 자신의 꼬리를 물고 돌 듯 생각이 생각을 부르고 또 생각이 부른다. 그는 졸리지도 않은데 눈을 감았다.
5
신발 밑창에 모래가 들어간 것 같았다. 지난 여름에 왔을 때도 신발에 모래가 들어갔었다. 그런 성가심을 감수하고서도 바다에 오는 이유는 뭘까. 수인은 깊은 생각이 있어서 자신을 이곳으로 데려온 것은 아닌 것 같았다. 그래도 그런 얄팍한 위로에 기대어서 무언가를 말해버리고 싶은 충동은, 여기가 바다이기 때문에 그럴지도 모른다. 우인은 신발을 벗어서 모래를 털어내는 대신 말을 털어냈다.
"내가 왜 대학 가는 데 집착하는 줄 알아?"
왜냐고 거듭 묻기도 전에 뒷말이 먼저 따라나왔다.
"집에서 나가고 싶어서. 우리 부모 사람한테 정말 관심이 없거든. 근데……"
뒤꿈치에서 까끌거리는 느낌이 났다. 그는 고집스럽게 말을 이어갔다.
"이혼한다더라. 나 고등학교 졸업하면."
말로 이루어놓고 나니 문득 목 아래가 뜨뜻미지근해졌다. 어두워서 수인의 표정이 잘 보이지 않는 것이 다행이었다. 그는 빠르게 말했다.
"그러고서 나보고 둘 중 한 명 정해서 따라오래. 이 사람들 미쳤나? 싶더라. 정말로 내가 둘 중 한 명을 고를 거라 생각한 거야? 나한테 관심도 없으면서? 왜 결국 자식은 부모한테 속해 있을 수밖에 없는 거야. 왜 나는 매번 나한테 관심도 없는 사람들 사정에 휘둘려야하는 거지. 정말 지긋지긋하다고…… 그래서…… 난 혼자 살려고 했는데……"
그랬는데…… 뒷말은 쉽게 침묵에 묻힌다. 입을 다물자 파도 소리가 단숨에 귀를 덮쳐 오듯 크게 들렸다.
6
문득 시선이 바다 쪽으로 향한다. 어두워서 윤곽이 불분명한 시야에도 새까만 물살이 발치까지 밀려왔다가 밀려나가는 것은 잘 보였다. 밤이…… 몇 시간 째지? 백사장 뒤편으로 도로를 등지고 있는데도 지나가는 차 소리를 한 번도 듣지 못했다. 헤드라이트의 불빛도 등대도 지나가는 사람도 없는 늦가을의 바닷가는 정말로 어둡고 쓸쓸하고 황량해서, 그런데도 아무 것도 할 수가 없어서…… 마치 그들이 앞둔 것은 온통 그런 것들뿐이라는 듯이. 새까만 수평선과 젖은 모래알과 금방이라도 빨려들어갈 것 같은 어둠뿐이라는 듯이.
"……아니."
그는 조용하고 단호하게 대답했다.
어린왕자
일시적인 존재가 뭐예요? 말끝에서 문득, 침묵. 우인은 자신이 대사를 까먹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이런, 젠장. 그가 속으로 뇌까렸다.
자의식이 강한 사람은 두 가지 종류로 나뉘는데 하나는 자의식이 강해서 주목 받기를 좋아하는 사람, 다른 하나는 그래서 오히려 주목 받기를 싫어하는 사람이었다. 우인은 후자였다. 그래서 내가 하기 싫다고 그랬는데…… 키 작고 똘망똘망한 1학년의 부탁은 생각보다 거절하기가 쉽지 않은 것이어서, 정신을 차려보니 그는 벽에 머리를 박은 채 대본을 손에 쥐고 대사를 외우고 있었다. 하고 싶지는 않았지만, 한다면 실수를 하고 싶지 않았다. 않았지만, 그게 어디 뜻대로 되는 일인지.
그래서 무슨 대사였더라.
일시적인 존재? 어떤 일시적인 존재. 일시적이라는 말은 어떤 예언 같다. 명백한 끝을 암시하는…… 그래…… 나는 이 부분을 처음 읽을 때, 무슨 생각을 했더라.
멸망과도 비슷하다는 생각을 했었지.
푸른 하늘 랩소디
조명 기계 옆에 서서 우인은 무대를 바라보고 있었다. 막은 이제 막 끝나려고 하고 있었다. 그는 매화가 대사를 말하는 것에 맞춰 천천히 속으로 되뇌었다. 이제는 그 마음들의 근원을 알고 있습니다. 소리 내어 말하지 않아도, 무척이나… 선명하게…… 여기서 조명은 천천히 꺼져야 한다. 버튼을 내리자 빛은 서서히 옅어지는가 싶더니, 파르르 흔들리기 시작했다. 좀 전부터 기계가 말을 잘 듣지 않았다. 끝이 다가왔기 때문일 것이다. 빛이 흔들리자 마치 시야가 흔들리는 것 같아서, 우인은 눈살을 찌푸리며 눈을 한 번 감았다,
떴다.
그리고 그는 저도 모르게 비틀거리면서 무너지듯이 기계 옆에 쭈그리고 앉았다. 눈가가 온통 축축했다. 그는 그제야 자신이 울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끝이었다. 무언가가 될 수도 있었을 것 같고, 무언가를 할 수도 있었을 것 같은데, 이제는 정말로 끝이었다. 가능성이나 내일이나 다음이나 기대 같은 단어들이 철저하게 무용해지는 순간이 오고 있다. 그는 이 다음을 생각하는 대신, 아주 오래 전 읽었던 구절을 떠올렸다.
먹물이라도 부어놓은 듯 새까만 머리카락. 결이 얇고 직모에 잘 뻗친다. 운동부치고는 머리가 긴 편. 뒷머리가 뒷덜미를 거의 덮는다. 앞머리 아래의 눈썹은 일자에 조금 짙다. 인상을 쓰면 어쩐지 고집스러워보이기도 하는데, 쌍꺼풀 없이 길고 얇은 눈매와 올라간 눈꼬리가 그런 인상을 무마시킨다. 웃으면 눈꼬리가 샐쭉하게 휘어지는 것이 특징. 항상 어딘가 웃고 있는 듯한 얼굴인데 신기하게도 상냥하다거나 대하기 편하다는 느낌은 전혀 들지 않는다. 눈동자도 아주 새까맣다. 오른쪽 눈 밑에 네임펜으로 찍어놓은 듯, 눈에 띄는 점이 하나 있다. 아침마다 썬크림을 떡칠하는 것이 참으로 무색하게도 적당히 해를 본 태가 나는 낯빛. 자세히 보면 귓불에 귀를 뚫은 자국이 있는데 머리카락에 가리워서 잘 보이지가 않는다. 입술을 물어뜯는 버릇 덕분에 아랫입술이 항상 너덜너덜하다.
키로 보나 체격으로 보나 기골이 장대하다는 느낌은 들지 않지만 옷 위로 보는 것보다 체구가 다부지다. 특히 어깨가 탄탄하다. 교복 안에는 항상 짙은 색 티셔츠를 입고, 교문을 통과하면 단추를 전부 풀고 있곤 한다. 매일 다른 색의 손목밴드를 하고 다닌다. 은근히 사소한 소품에 신경을 쓰는 편. 타석에 설 때는 유니폼 위에 무릎 보호대를 한다. 약간 낮고, 긁힌 듯 허스키한 목소리.
성격 :
'성격이 나쁘다'는 평가를 자주 듣는다. 그 나잇대 남자애치고도 입이 험한 편인데, 비속어도 잘 쓰지만 사람 성질을 긁는 말을 잘한다. 절대로 없는 말은 안하지만 있는 말은 두세 배쯤 기분 나쁘게 할 줄 아는 재주가 있음. 항상 웃는 얼굴에 말투가 다소 가볍고 여상해서 말투만 들으면 욕 안 같이 들리는 것이 또 이상하다. 욕이 아니더라도 말이 참 많고 쓸데없이 넉살도 좋은 편인데 무슨 생각을 하고 사는지는 잘 모르겠다는 느낌이 든다. 대놓고 정색하는 경우가 거의 없는데 그래서 더 무서움. 머리 회전이 빠르고 눈치가 좋지만 야구와 관련된 일이 아니면 크게 상관하고 싶어하지 않는다. 비슷한 논리로, 야구와 관련된 일이 아니면 남의 심사를 들쑤셔놓는 일도 잘 없으니 위에 서술된 재수 없는 성격은 야구부 내, 특히 후배들을 향한 것이라고 보면 된다.
언사나 행동거지가 껄렁해서 살짝 양아치처럼 보이지만 교칙은 철저하게 준수하고 보기보다 성실하다. 자신이 결정한 일에는 최선을 다한다는 것을 모토로 현재는 야구에 가장 집중하고 있지만, 노력한다는 듯한 인상을 주는 것을 싫어한다. 요령이 좋은데, 요령만으로 되지 않는 일이 있다는 것도 언제나 생각하고 있다. 겉으로 보이는 것보다 생각이 많고 진지하다. 하지만 진지한 사람으로 내비치느니 차라리 죽고 말지 라고 생각하고 사는 듯하다…….
특이사항 :
☆부주장★
후배들을 대체로 잘 갈구지만, 3학년치고는 체구가 작아서 키 큰 신입생을 보면 괜히 한 번 갈굴 걸 두 번 세 번 갈구는 경향이 있다. 못하는 것도 싫어하지만 열심히 하지 않는 걸 세상에서 제일 싫어한다.
약간 팔자걸음. 걸음걸이가 유난히 껄렁하다.
기숙사생. 집이 가까운데도 기숙사를 고집한다. 본가에서는 고양이를 한 마리 기른다.
위로 8살 차이 나는 사회인 형이 있다. 사이가 그다지 좋지 않다.
옷차림에 신경을 쓰는 편인데 역시나 꾸민 티를 내는 걸 싫어해서 안 꾸민 듯 스타일리쉬한 느낌 선호. 방에 사다놓은 패션잡지를 무슨 야한 잡지보다 더 꽁꽁 숨겨놨다.
야구부치고 성적은 나쁘지 않다. 벼락치기의 화신. 요령이 좋다.
방학 때 귀를 뚫었고 귀걸이도 몇 개 샀는데 매일같이 야구부 연습만 하다보니 좀처럼 하고 다닐 기회가 없어서 구멍 막히게 생겼다.
뭔가를 생각할 때 입술을 물어뜯는 버릇이 있다. 덕분에 입술이 항상 하얗게 떠서 너덜너덜하다.
가장 좋아하는 음식은 콜라. 싫어하는 음식은 조개류 전반.
경기 스타일 :
타자로서, 타교에서의 평가는 총체적으로 '짜증나는 타격을 하는 타자'. 장타력은 그저 그렇지만 선구안이 좋아서 타율이 높고 자신이 노리는 곳으로 공을 보낼 줄을 안다. 배트 컨트롤이 좋은 편. 투수의 마음을 짐작하고 경기 전체의 흐름을 파악해서 거기에서 자신이 어떤 역할을 해야하는지를 잘 알고 있는 선수. 타석에 오를 땐 안타를 치지 못한다면 끈질기게 달라붙어서 투수의 기력이라도 빼놓아야지, 하는 마음으로 임한다. 의외로 징크스에 집착하는 편이어서 타석에 서기 전에는 반드시 손목과 무릎을 푸는 버릇이 있음.(전에 무릎을 안 풀고 그냥 달렸다가 굴러서 염좌가 온 적이 있다.) 수비를 할 때는 눈치가 빠르고 기민해서 도루를 쉽게 허용하지 않음. 못 잡을 것 같은 공도 악착같이 붙들려 든다.
창문을 열자 후덥지근한 바람이 들어왔다. 방 안에서 누군가가 고개를 드는 기척이 느껴졌다. 루가인지 다인인지는 모르겠지만 그 누군가는 아 창문 좀 닫아, 라고 말하려다가 문을 연 것이 은재라는 것을 확인하고 입을 다문 기색이었다. 권력이라는 게 참 좋지. 그런 생각을 하면서 은재는 창틀에 머리를 기대고는 방 안으로 눈길을 돌렸다. 고작 운동부 아이들 몇몇이 옹기종기 모여 자는 기숙사에는 에어컨이 나오는 일이 별로 없었다. 그것은 열흘 째 열대야니 뭐니, 역대급 폭염이라느니 하는 뉴스를 등지고도 변함이 없는 사실이어서, 밤 10시가 넘어간 시간인데도 찝찝한 공기가 방 안이고 방 밖이고 할 것 없이 굴러다녔다. 몇 시간 동안이나 땡볕 아래에서 달리고 구르고 흙먼지를 뒤집어 쓴 덕분에 샤워를 하고 나면 항상 졸음이 쏟아졌다. 은재는 교과서나 준비물 같은 자질구레한 것들을 챙긴 뒤에는 일찌감치 자리에 누워 잠에 드는 편이었지만, 오늘은 아니었다.
기말고사가 사흘 앞으로 다가와 있었다. 그것은 좀처럼 공부를 하는 모습을 본 적이 없는 루가나 다인이 참고서를 들고 엉거주춤 책상 앞에 앉아 있는 이유이기도 했다. 거의 입던 옷을 벗어서 걸쳐 놓는 옷걸이로나 쓰이던 책상 의자가 가까스로 본연의 쓰임을 찾는 꼴을 보고 있자니 어쩐지 웃음이 나와 은재는 부러 낄낄거리며 얄미운 소리를 냈다. "야, 뭐 모르겠으면 물어봐라." 그것은 그치고는 관대한 말이었다. 우은재는 야구부 내에서는 썩 공부를 잘하는 편이었다. 야구부 내에서 공부를 잘한다는 말은 뭐랄까, 그래도 Apple이 사과라는 것과 2x9가 18이라는 것 정도는 알고 있다는 말과 비슷했으므로 그다지 자랑할 만한 수식어는 못 되었다. 하지만 그는 최소한 합숙에 갈 수 있을지 없을지를 걱정할 필요는 없었고, 저 둘은, 말하자면, 매우 걱정스러운 수준이었다.
다인이 번쩍 손을 들었다.
"선배."
"왜?"
"이 문제 답 좀 알려주세요."
은재가 다인의 책상으로 다가갔다. 의자 등받이에 삐딱하게 몸을 기대고 내려다보니, 다인이 가리키고 있는 것은 작년도 수학 모의고사 기출 중에서도 1번 문제였다. 문제지의 가장자리는 풀려고 시도한 흔적도 없이 희고 깨끗했다. 은재가 손을 들었다. 그는 친절하게 샤프를 쥐는 대신 다인의 뒷목을 잡았다. 경식 공을 쉼없이 잡고 놓고 던지는 손은 악력이 세서 목덜미를 누르는 힘이 제법 위협적이었다. 다인이 의자 위에서 펄쩍 뛰었다.
"아! 선배!"
"야, 너는 내가 답지로 보이냐?"
하지만 다인은 폭력에 굴하지 않았다. "답지가 너무 무거웠다고요, 선배." "말 같지도 않은 소리 한다 진짜…… 머리는 무거워서 어떻게 들고 다니냐?" 그런 식의 살벌한 문답이 두어 번 더 이어진 후에야 은재는 그 문제를 풀었다. 다인은 문제를 푸는 과정에는 전혀 관심이 없고 답이 무엇인지만 알면 됐다는 표정이었다. 푸는 법을 익히느니 차라리 문제랑 답을 외워가겠다는 의지가 엿보였지만 은재는 뭐, 솔직히 말해서 남의 성적에는 크게 관심이 없었다. 주전 투수가 합숙에 오지 못한다면 그거야 큰일인 노릇이었지만 야구랑 직결된 문제도 아닌데 지지고 볶고 할 만한 성의가 그에게는 없었다. 그는 책상 모서리에 손을 짚고 고개를 들었다. 루가가 쭈뼛거리며 그의 뒤에 서 있는 모양이 보였다.
"너는 또 왜?"
"모르는 문제 있어서……"
자기 일은 자기가 좀 해라, 어? 너네 스스로 어린이 모르냐? 그런 말들을 아무렇게나 뇌까리며 루가의 책상 근처로 슬렁슬렁 다가가는데 그의 눈에 책상 아래쪽을 빠르게 지나가는 무언가가 보였다. 무언가, B씨라고 말해보자. 까맣고 작고 더듬이가 있으며 다리가 여러 개인 그 친구 말이다. 그 친구는 정리정돈이라고는 씨알도 모르는 남자애들이 우글우글 모인 운동부 기숙사에서는 종종 보이는 친구였다. 은재는 반사적으로 책상 위에 있는 아무 것ㅡ루가의 참고서ㅡ을 손에 쥐고는 말았다. 루가의 눈이 휘둥그레해지는 것이 시야 가장자리에서 보였지만 아랑곳 않았다. 그가 빠르게 몸을 수그려 B씨를 아작내는 데까지는 채 3초가 걸리지 않았다. 과연, 테이블세터다운 민첩하고 훌륭한 움직임이었다.
"아 존나 여름되니까 벌레 엄청 나오네……"
그렇게 중얼거리며 그는 B씨의 잔해가 묻은 부분이 책상에 닿지 않도록 조심하며 루가의 참고서를 다시 책상 위에 올려놔 주었다. 루가의 동공이 사정없이 흔들렸다. "선배 이거," "어, 니 참고서 좀 썼다." 우은재는 한없이 뻔뻔했다. 루가가 참으로 할 말이 많은 얼굴로, 그러니까 뭐부터 말해야할지 고민하며 느리게 상황을 판단하는 동안 은재는 약싹빠르게도 나 잠깐 화장실 좀 다녀온다, 하고 말하며 방을 빠져나왔다. 텁텁한 공기를 얼굴로 맞으며 문을 열고 나오자마자 닫힌 문 안에서 분노의 울부짖음이 들렸다.
새벽 한 시 삼 분이었다.
우은재는 이마에 손을 대고 눈살을 찌푸린 채 핸드폰 화면을 들여다보았다. 왜 지금 눈이 떠졌지. 그는 한 번 잠에 들면 좀처럼 잠에서 깨는 법이 없었다. 하루 종일 연습을 하고 자정이 넘으면 곧장 잠들었다가 아침이 되자마자 벌떡 일어나는 것이 그의 일반적인 생활이었다. 오랜 기숙사 생활 덕분에 잠자리를 가리는 일도 없었는데, 왜 지금 잠에서 깨었는지 짐작이 가는 바가 없어 은재는 골몰하면서 핸드폰을 바닥에 내려놓았다. 몸을 조금 뒤척여 모로 눕자 창문 쪽이 내다보였다. 212호의 창문 밖에는 바로 가로등이 하나 있었다. 가로등이라기보다는 사위를 겨우 밝힐 정도의 애매한 불빛이었지만, 옆에 있는 사람의 윤곽을 충분히 알아볼 정도는 되었다. 그의 왼쪽 옆에는 다인이 누워 있었고, 오른쪽, 그러니까 창문과 가까운 쪽에는 호현이 누워있었다. 은재는 여전히 이마를 손등으로 누르며 호현의 자는 얼굴을 쳐다보았다.
얇은 여름 이불 속에 파묻혀 있던 손을 들어올린 것은 충동적인 일이었다. 은재는 검지로 호현의 오른쪽 뺨 아래쪽을 쿡 찔렀다. 호현이 으, 하고 짧은 소리를 내며 고개를 돌렸다. 그는 호현이 깰 때까지 계속해서 집요하게 호현의 뺨이나 턱을 쿡쿡 찔렀고 결국 호현이 "아 뭐야…" 하고 잠긴 목소리로 중얼거리며 눈을 떴다. 은재는 자는 사람을 깨운 것을 미안해하는 기색도 없이 손가락을 접고는 호현을 내려다보며 물었다.
"출출하지 않아?"
그건 한참 자다 깬 사람에게 묻는 질문치고는 다소 실없었는데, 그래서인지 호현은 그 질문을 알아듣기까지 시간이 좀 걸린 것 같았다. "나 가방 속에 사탕 있는데…" "아, 그놈의 할매 사탕 말고." 그때 다인이 잠결에 크게 숨을 들이마시며 몸을 뒤척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은재는 잠시 말을 멈추고는, 어깨 너머로 곤히 잠든 다인과 찬영을 확인하고 나서야 다시 입을 열었다.
"잠깐 나갔다 오자고."
지호현과 우은재는 3학년이었다. 게다가 주장과 부주장이었다. 그들을 혼낼 사람은 감독이나 코치가 아니고서야 없다는 얘기였다. 그다지 모범이 될만한 행동이 아니라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우은재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그렇듯 타인보다는 자기자신에게 관대한 편이었고 지호현이 그의 말에 쉬이 어울려주리라는 것을 예상할 수 있었다. 은재는 호현에 대해 잘 알았다. 그래서 그는 호현이 주장의 책무와 그의 제안을 저울질하도록 잠시 내버려두었다. 턱을 괴고 짧게 하품을 하고 있자니, 호현이 목소리를 낮춰서 대답했다.
"그래, 잠깐 나가자."
다인과 찬영의 손이나 머리를 밟지 않도록 조심하면서 잰걸음으로 방을 빠져나왔다. 조심스레 문을 닫고 발소리를 죽여서, 그러나 부리나케 합숙소를 빠져나오는 것은 제법 스릴이 있는 일이었다. 밤이 늦은 시간이었고, 시골이었고, 도로 위에는 차가 한 대도 없었다. 대여 버스에 몸을 싣고 합숙소로 들어올 때는 잠을 자고 있었던 탓에 주위에 뭐가 있는지 잘 짐작이 가지 않았다. 드문드문 서 있는 가로등 외에는 불빛이 없었다. 도로 저 멀리를 내다보자 마치 빨려들어가는 것처럼, 시야 저 너머가 어둠 속에 파묻혀 있었다.
"걷다 보면 편의점이라도 있지 않겠냐?"
한참 두리번거리던 은재가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 호현은 그의 말에 별 다른 이견을 제시하지 않았다. 그들은 오른쪽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도로의 가장자리와 풀숲 위를 번갈아 밟으며 천천히 걸었다. 풀을 밟을 때마다 풀 냄새가 났다. 은재는 종종 삭은 나뭇가지며 풀잎을 뚝뚝 꺾으면서 걸었다. 호현이 주위를 쳐다보며 "야 진짜 어둡다," 라고 말했다. 은재가 대답했다. "시골은 어두워." "우리 중학교 때 합숙 갔던 데는 어디였더라?" "몰라…… 가평이었나. 맨날 같은 데 가지 않았나." "그때도 언제 한 번 밤 중에 나온 적 있었던 것 같은데." "어, 2학년 때." 마주 보는 방향에서 차가 한 대 다가오고 있었다. 은재는 반사적으로 입을 다물었다. 헤드라이트의 불빛이 그들의 윤곽을 스치고 지나갔다.
"아 벌레 존나 많은 것 같아."
"벌레 스프레이 가져오는 걸 깜빡했네, 그러고보니."
입을 다물자 쓰으, 쓰, 하고 낮은 소리로 우는 벌레 울음소리가 들렸다. 여전히 가게의 불빛이나 뭐 그런 비슷한 것도 보이지 않았지만 은재와 호현은 서두르는 기색 없이 걸었다. 대화는 이따금씩 끊겼다가 다시 이어졌다. 내용은 대체로 실없었다. 너네 팀 누구가 번트를 잘 대지 않냐느니, 4번 타자의 타율이 어쨌냐느니 하는 그런 말들은 종종 불평이 되었다가 자랑이 되기도 했지만 결국은 의뭉스럽게도 중요한 내용을 말하는 일은 없었다. 호현이 그래서 너네 팀 선발은 16강 때랑 변함이 없냐고 묻다가, 실없는 일이라는 것을 알고는 입을 다물었을 때 문득 은재가 말했다.
"시간 되게 빠르다."
호현이 반 박자 늦게 대답했다.
"그러게."
"야 너랑 내가 3학년이야. 웃기지 않냐 진짜?"
뚝, 은재가 또 하나의 나뭇가지를 부러트렸다. 곳곳에서 여름 냄새가 났다. 밤이 되어도 걷히지 않는 습하고 미적지근한 공기와 풀 냄새와 벌레가 우는 소리와 축축한 흙 같은 것들. 은재는 종종 마지막 여름이라는 단어에 대해서 생각했는데 그 말을 굳이 입밖으로 꺼내놓지는 않았다. 그러나 아마 호현도 같거나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으리라는 것을 알 수 있어서, 은재는 멀거니 어둠 속을 노려다보며 여름의 끝을 가늠해보았다. 누군가가 지거나, 누군가가 이기는 끝에 대해서 말이다.
"중학교 때는 너랑 같은 팀 갈 줄 알았는데."
마디가 부러진 나뭇가지를 풀숲에 툭 던지며 말했다. 호현이 웃었다.
"너 그 말 삼백 번쯤 한 것 같은데."
"아! 지금 생각해도 어이가 없네. 어떻게 너만 해신을 붙고 난 떨어질 수가 있냐? 존나 세상은 불공평해. 시발 내가 뭐가 모자라다고."
이제는 해묵은 얘기들을 괜시리 욕을 섞어가며 아무렇게나 주절거리다가 고개를 들었을 때, 다른 펜션인지 게스트하우스인지 모를 건물 앞에 붙어 있는 자판기 하나를 발견했다. 여전히 가게 같은 것은 보이지 않았다. "너 동전 있어?" "아니. 만원짜리 밖에 없는데." "그럼 갚아라." 은재는 천원짜리 두 장을 넣고 콜라 두 개를 뽑았다. 잔돈들이 부딪혀 쩔그럭거리는 소리를 냈다. "너 내가 사이다 더 좋아하는 거 모르냐." 호현이 손을 내밀며 웃음기 섞인 목소리로 말했고, "아 그럼 먹지 말든가." 은재가 짐짓 짜증스러운 목소리로 휙 손을 뺐다가 이내 낄낄거리면서 호현의 주머니에 콜라 캔을 넣어주었다. 캔은 무척 차갑고 서늘했다.
핸드폰을 켜 보니 두 시가 다 되어가는 시간이었다.
"아, 정말 시간 빠르네."
그렇게 중얼거렸다.
우은재의 집은 학교에서 버스로는 두 정거장, 걸어서도 30분이 채 안 걸리는 거리에 있었다. 은재는 가는 길에 편의점에 들러서 콜라와 아이스크림을 샀다. 날씨가 점점 더워지고 있었다. 부러 가로수 아래의 그늘을 골라 걷는데도 해를 받을 때마다 땀이 배어나왔다. 해가 밝아서 그림자가 짙었고 은재는 마치 피아노 건반처럼 선명한 볕과 그림자를 번갈아 건넜다. 봉투 안에 든 아이스크림은 점점 물러지고 있었다. 은재는 바스락거리는 비닐봉지를 반대 손으로 바꿔 쥐었다. 집 앞에 있던 까페가 어느새 피아노 학원으로 바뀌어 있었다. 그걸 보고는, 그러고보니 집에 오는 것도 두 달 여만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익숙한 아파트의 현관을 통과해 4층까지 걸어서 올라갔다. 잠깐 비밀번호가 헷갈려서 어물거리다가 이내 안으로 들어갔다.
오래간만에 집에 온 것이 무의미하게도 부모님은 집에 없었다. 집에 온다고 말을 할 걸 그랬나 싶었지만, 기껏해야 양말하고 체육복이나 좀 챙겨가려고 온 것인데 굳이 그런 통보가 필요한가도 싶었다. 얼굴을 보면 집에 자주 좀 오라는 소리나 들을 것 같았으므로 오히려 잘됐다 싶기도 했다. 거의 반쯤 녹아내린 아이스크림을 냉동실에 넣고, 미지근해진 콜라 캔도 냉동실에 잠깐 넣어두기로 했다. 서랍장을 뒤적거려 양말과 체육복 바지를 편의점 비닐봉투에 넣었다. 그의 집은 북향이어서 한낮에도 해가 잘 안 들었다. 쭈그리고 앉아서 고무줄이 헐거워진 양말들을 골라내고 있다가 문득 고개를 들었다.
은혁과 눈이 마주쳤다. 은혁은 창문을 등지고 서 있었다. 지금까지 자고 있었던 것인지 산발을 한 머리에 민소매 실내복 차림이었다. 은재는 인사를 할 생각도 하지 않고 골라낸 양말을 쓸어담아 비닐봉지에 담았다. 왜 집에 있고 지랄이지. 대기업 들어가서 존나게 바쁘다더니 주말 근무는 안 하나? 그런 생각을 얼굴로 티를 내지는 않았다. 은혁이 벽에 몸을 비스듬히 기댄 채 그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졸린 것인지 아니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인지 무표정한 얼굴이었는데, 생각한 것을 겉으로 티내지 않는 것은 그들 형제의 공통점이었다. 은재가 무릎을 펴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는 은혁을 지나쳐 부엌으로 가 냉동실에서 차가워진 콜라 캔을 꺼냈다.
"집에 왜 왔어?"
은혁이 물었다. 은재는 그를 돌아보지 않고 대답했다.
"봤으면서 왜 물어?"
양말이 든 비닐봉투를 흔들면서 콜라캔을 땄다. 은혁이 뒷덜미를 긁적이면서 하품을 한 번 하고는 다시 말했다.
"야구는 잘 돼가냐?"
아니 왜 그런 걸 새삼 묻고 지랄이세요. 은재가 이번에는 딱 그런 표정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은혁이 웃었다. 은재와 은혁은 나이 차가 여덟 살이나 남에도 불구하고 눈매 모양이나 이목구비가 누가 봐도 형제라고 할 정도로 닮았는데, 그래서 은재는 그가 웃는 것이 말하자면 비웃음에 가깝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은재가 어 씨발 존나 잘되어간다, 라고 대답을 할까 존나 뭔 상관이세요, 라고 대답을 할까 고민하고 있는데 은혁이 다시 물었다.
"너 졸업하고도 야구 계속 할 거야?"
이번에야말로 대답을 하기로 했다.
"존나 뭔 상관이세요."
"물어보면 안되냐?"
"알아서 뭐에 쓰게?"
"안 그만두나 싶어서."
은재는 은혁이 그런 식으로 말을 하는 이유를 알고 있었다. 알고 있었지만, 아는 것과 이해하는 것과 수용하는 것은 각기 다른 문제였으므로 빈 콜라캔을 소리 나게 식탁 위에 내려놓고는 어깨를 으쓱했다. 일 년 전 쯤인가 비슷한 이유로 멱살을 잡고 드잡이를 하다가 은혁이 테이블 모서리에 종아리를 갖다 박아 피를 본 이후로 은재는 그와 대거리를 하는 것을 웬만하면 피하려고 했다. 그들은 생김이 닮은 만큼 키도 비슷했으므로, 체구 차이가 나던 어렸을 때라면 모를까 지금에 와서는 은혁이 몇 년 씩이나 운동을 한 은재를 이길 가능성은 거의 없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솔직히 말해서 은재는 은혁을 팰 기회가 있으면 강냉이를 털지 않을 자신이 없었던 것이다.
"그만두는 게 낫지 않아? 지금까지 실컷 했으니까."
저거 내가 치면 존나 한 주먹감인데. 은재가 그런 생각을 하며 눈을 가늘게 떴다. 대답을 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며 식탁 위에 올려져 있는 세금 고지서며 전단지 같은 것을 대충 손으로 쓸어내며 딴청을 부리는데 은혁은 계속해서 혼자 주절거렸다. 너 네가 프로 선수가 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해? 그림으로 그린 듯 꼰대 같은 말들이었다. 돈 벌어먹고 사는 게 그렇게 만만한 것 같냐. 공부만 한 나도 돈 버는 거 존나 힘들어. 프로가 돼서 주전으로 뛰는 사람이 일 년에 몇이나 있을 것 같아? 너 그렇게 야구 잘해? 너네 학교도 우승할 만한 학교는 아닌 것 같던데. 너 고등학교도 원하는 데로 못 갔잖아. 열심히 한다면서? 열심히 하는 만큼 잘하고 있어? 그냥 밥 벌어먹고 살기에도 힘든 세상이야. 이제 애새끼도 아닌데 현실을 볼 때가 되지 않았냐? 너 야구한다고 부모님 다 늙어서 뒷바라지도 몇 년씩이나 시키고, 야구하는데 돈이나 안 들면 또 몰라.
너 네가 정말로 할 수 있다고 생각해?
그렇게 묻는 목소리는 어쩐지 속삭이는 것처럼 들렸다. 은재는 이를 악물고 대답했다.
"그러는 너는 할 수 있는 것만 하고 살았냐, 이 씹새끼야."
"그렇지."
은혁이 그를 쳐다보았다. 그는 여전히 웃는 얼굴이었다.
"나는 할 수 있는 것만 하고 살았으니까 이렇게 말하는 거 아니야, 병신 새끼야."
은재는 손에 쥔 것ㅡ전단지인지 세금 고지서인지ㅡ을 아무렇게나 은혁에게 던지고 현관으로 나섰다. 운동화에 대충 발을 구겨넣고 문을 열고 나오자 복도 창문으로 들어오는 햇빛이 너무 밝아 눈이 부셨다. 얼굴을 한껏 찌푸리며 계단을 날듯이 뛰어내려가는데 1층 문 앞에 서니 문득 화를 내는 것이 무의미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왠지 몹시 허탈해졌다. 그는 문 앞에서 허리를 숙이고 마구 구겨진 운동화의 뒤축을 손으로 갈무리했다. 잠시 그대로 허리를 숙이고 있었다. 아래를 쳐다보고 있자니 피가 정수리로 몰려 오히려 머리가 차가워졌다.
말하자면 저것은 자격지심이다.
은재는 알고 있었다. 부모님은 여덟 살 차이나는 형에게는 유독 엄했다. 늦게 태어나 막내로 자란 은재에게는 그보다 몇 배나 관대했다. 그 자신이 하고 싶은 야구를 하는 동안 은혁은 고등학교에서 명문대로, 명문대에서 대기업으로 기를 쓰고 자리를 옮겨가고 있었고 그건 말하자면, 당연한 일처럼 여겨졌다. 은혁에게는 아무도 뭘 하고 싶었는지 물어보지 않았다. 은재는 처음부터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선택했다. 은혁은 그가 본격적으로 야구를 시작하고부터는 그의 얼굴을 볼 때마다 빈정거리지 않으면 죽는 사람처럼 굴었다. 어렸을 때는 이해할 수 없었고, 지금은 알고 있었다. 그래서 더 화가 나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의 말에는 결정적으로 틀린 구석이 없었다. 할 수 있는 것과 할 수 없는 것에는 분명, 차이가 있었으니까.
은재가 허리를 폈다.
"좆같네……"
그렇게 중얼거리면서 아파트를 빠져나왔다.
1회 초, 1번 타자는 4번, 4번 우은재 선수.
우은재는 자신을 호명하는 목소리를 듣고는 무릎 위에 올려만 놓았던 보호대의 벨트를 잠궜다. 배터 헬멧을 푹 눌러 쓰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는 서두르지 않으며 덕아웃의 그림자 밖으로 천천히 걸어나갔다. 문득 뒷통수가 따끔거리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덕아웃과 관중석, 그리고 수비를 보는 모든 이들의 시선이 꼬리표처럼 그를 따라오고 있었다. 은재는 시합 초반의 이, 낚싯줄처럼 팽팽하게 당겨놓은 긴장감이 싫지 않았다.그는 체구 때문인지 경기 스타일 때문인지는 몰라도 거의 항상 테이블세터였고, 요령이 좋은 만큼 1번 타자의 자리를 꿰차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 긴장을 깨트리고 판을 까는 것이 그의 역할이었다. 그리고 그는 항상 자신의 역할을 잘 아는 선수였다.
배터 박스 바깥에 서서 몇 번 무릎을 구부리며 스트레칭을 했다. 배트를 가볍게 휘휘 휘두르면서 타석에 들었다. 고개를 틀어 마운드 위를 쳐다보자 바로 직선거리에 결한이 있었다. 우은재는 고결한을 잘 알았다. 송진 가루를 손끝에 비비며 타석 쪽을 쳐다보는 결한의 무표정한 얼굴이 또렷하게 보였다. 그는 마치 마운드에 서기 위해 태어난 사람처럼, 내야수들과 경기장의 모든 풍경을 등 뒤에 두르고 그렇게 서 있었다.
그런 게 참, 마음에 들지 않았다.
결한의 머리 위로 내다보이는 하늘이 아주 파랗고 높았다. 문자 그대로 구름 한 점 없었다. 날씨가 좋았다. 오늘 얼굴 좀 타겠는데. 그런 생각을 하면서 타격 자세를 잡았다. 결한이 송진 주머니를 바닥에 던지고는 고개를 들었다. 그가 천천히 팔을 들어올렸다. 와인드업. 은재가 반사적으로 배트의 손잡이 부분을 꽉 잡아쥐었다. 공이 허공에 흩뿌려지기 직전 아주 찰나의 순간, 은재는 눈에 힘을 주고 마운드를 노려보았다.
은재가 마운드에 선 결한을 본 것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었다.
고결한은 처음부터 눈에 띄었다. 여기서 말하는 '처음'이라는 것은 중학생 때를 의미했다.
결한이 처음 중학교 야구부에 들어왔을 때 한 번 왁자하게 소문이 난 적이 있었다. 우은재는 솔직히, 누구 배우의 아들이라느니 동생도 아직 어린데 엄청 예쁘다느니 하는 그런 얘기들에는 관심이 없었다. 아예 없었다면 그것도 좀 거짓말인 것 같기는 했지만 배우고 연예인이고 나발이고 야구 실력과는 하등 관련이 없는 얘기였다. 시시껄렁한 잡담으로 한 번씩 입에 올리기는 좋지만 그러고 나면 별 다른 의미가 없어지는 것들. 오히려 은재는 앳되고 순해보이는 생김과는 달리 고집스러운 표정 같은 것들을 기억했다. 투수랬나, 그래, 마운드에 잘 어울리는 표정이네. 처음에는 그렇게만 생각했던 것 같다.
정말로 처음은 결한이 시범 투구를 하는 것을 보았을 때였다.
투수 포지션으로 들어온 아이들은 실력을 가늠하기 위해 모두 한 번씩 시범 투구를 보여야만 했다. 부원들이 모두 나란히 앉아 그 모양을 지켜보는 것이 관례였다. 은재는 앞에 앉은 호현의 등에 팔꿈치를 올리고 턱을 괸 채 마운드를 내다보았다. 애티도 벗지 못한 중학교 1학년들의 투구 실력이란 대개 고만고만했다. 제일 처음으로 던진 아이의 투구 실력은 형편 없었다. 은재는 그것이 조금 지루하다고 생각했다. 그가 호현의 뒷목을 손바닥으로 탁탁 두드리며 이거 끝나면 떡볶이나 먹으러 가자고 작은 소리로 종알거리고 있는데 결한이 마운드에 올랐다. 그는 공을 몇 번 손 안에서 만지작거리다가, 이내 망설이지 않고 공을 뿌렸다.
공이 포수의 미트로 빨려들어가는 궤도가 깔끔했다.
"빠른 것 같은데?"
옆에 앉은 누군가가 중얼거렸다. 은재는 문득 잠에서 깨어난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는 호현의 등에 손을 올려놓은 채 멀거니, 결한이 두 번째 공을 던지는 것을 지켜보았다. 빨랐다. 아마도, 주전 투수보다 빠른 것 같았다. 폼에 흐트러진 구석이 없어 더 눈에 띄었다. 어느새 모두가 결한이 공을 던지는 것을 유심하게 쳐다보고 있었는데, 결한은 그런 것은 아랑곳하지 않는 눈치였다. 세 번째 공을 던질 때도 폼이 흐트러지지 않았다. 미트에 공이 기분 좋게 달라붙는 소리가 조용한 운동장에 울렸다.
흙무덤을 발로 툭툭 두드리며 자세를 바로 하는 모습이 마치 아주 예전부터 거기에 서 있었던 사람처럼 보였다. 눈에 띄는 사람이란 그런 것이었다. 거기에 없다면 퍼즐 조각이 하나 빠진 것처럼 아주 비어보일 것만 같은, 그런 느낌이 드는 사람.
어깨가 좀 풀린 것인지 네 번째 공은 처음보다 조금 더 빨랐다. 다섯, 여섯, 일곱.
은재는 그가 마운드에서 내려오고 나서야 자신이 그를 노려보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우은재가 고결한을 좋아하지 않을 이유는 차고 넘쳤다. 결한은 눈에 띄었고, 고집이 셌고, 어떻게 보면 건방지기도 했다. 처음에는 아무 생각이 없는 줄 알았던 집안 환경이나, 흰 옷을 즐겨 입는다는 사실마저도 왠지 마음에 안 들었다. 세상에는 숨만 쉬어도 싫은 사람이 있는데, 은재는 결한이 그런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좋고 싫음에는 원래부터 합리가 없는 법이니까, 그러니까……
사실은 그런 게 아닌 줄은 알고 있었지만.
깡, 공이 배트 가장자리에 맞는 소리가 울렸다. 네 번째 파울볼이었다. 결한이 고개를 돌리고 모자를 고쳐썼다. 첫 타석부터 이렇게 길어지는 일은 좀처럼 드물었다. 초반의 긴장감은 깨질 줄 모르고 점점 높아지기만 했다. 은재는 배트를 단단히 고쳐 쥐고 마운드를 쳐다보았다. 그 다음은 볼이었다. 그리고 또 볼.
결한이 크게 숨을 내쉬는 모습이 보였다. 일곱 번째 공을 던지기 직전, 그와 눈이 마주쳤다. 눈가를 일그러트리고 사납게 노려보는 표정이었다. 조금 짜증스러워 보이기도 했다. 은재는 시선을 피하지 않고 그를 마주 노려보았다. 공을 고쳐 쥐는 손끝이 아주 선명하게 보였다. 다시 한 번, 와인드업.
공에서 시선을 떼지 않고 배트를 휘둘렀다고 생각했는데, 공은 배트 밑을 통과해서 포수의 미트로 빨려들어갔다. 팡, 경쾌한 소리가 났다. 스트라이크! 심판이 큰 소리로 외쳤다.
"이런……"
씨발. 차마 심판 앞이라서 욕을 하지는 못했다. 그는 타자 대기석에 쭈그리고 앉아 있는 루가 쪽은 쳐다보지도 않고 덕아웃으로 성큼성큼 되돌아갔다. 자리에 앉아서 헬멧을 거칠게 벗어던졌다. 벤치에 헬멧이 부딪혀 울리는 소리가 컸던 모양인지 후배들이 흘끔, 이쪽을 돌아보는 것이 느껴졌다. "뭘 봐, 앞에 봐. 경기 중이잖아." 그가 그렇게 뇌까리자 그제야 시선들이 거두어졌다. 표정 관리가 잘 되지 않았다. 평정심이 없는 건 딱 질색인데. 그는 장갑을 낀 채로 얼굴을 문질렀다. 평소라면 아웃을 당한 것 정도로 이렇게 열을 내지는 않는다. 그러니까 이건, 순전히 고결한 때문에 짜증이 나는 것이었다.
결한은 여전히 좋은 투수였다. 초장부터 파울볼을 쳐대면 리듬이 흐트러질 줄 알았는데, 흐트러지다가도 다시 제 호흡을 찾을 줄 알았다. 그런 정신력이나 집요함 같은 것들은 타고 난 재능 위에 덧붙여져 더 빛을 발했다. 아마도 그는 자신의 자리가 없을 것을 걱정해본 적은 한 번도 없을 것이다. 그런 생각이 들자, 그를 좋은 투수라고 인정해버린 앞 생각이 덩달아 아니꼬와져서 은재는 벤치에 길게 등을 기대고 위를 올려다보았다.
경기는 여전히 한참 진행되고 있었다.
시합이 끝나고, 부활동을 마지막으로 갈무리하는 합숙도 끝났다. 기숙사에서 챙겨가야할 짐은 적었다. 꼭 챙겨야할 짐은 그날 그날 입을 옷과 교과서 정도로, 박스 하나와 백화점 쇼핑백 하나에 꽉꽉 쑤셔넣으니 그런대로 모두 정리가 되었다. 은재는 박스를 옆구리에 끼고 쇼핑백을 손에 들고 백팩을 등에 맨 채 버스에 올랐다. 어디 이사라도 가나 싶은 궁금증이 실린 버스 기사의 눈길이 무심하게 와닿았다가 금방 거두어졌다. 버스 안은 시원했다. 창가에 바짝 붙어 앉아 앞머리를 날리는 에어컨 바람을 맞으며 창문에 머리를 기대었다. 지난밤에는 잠을 잘 자지 못했다. 뒤척거리는 소리를 내고 싶지 않아 일부러 바르게 누워 천장을 뚫어져라 쳐다보다가 잠깐 선잠에 들었는데 그마저도 두 시간이 지나지 않아 금세 깼다. 뻑뻑한 눈가를 손등으로 문지르며 창밖을 보고 있는데 전화가 왔다. 발신인의 이름을 확인하고 전화를 받았다. 아버지였다.
"지금 집에 가고 있어요."
은재는 간단하게 대답했다. 오늘 저녁에는 고기라도 구워 먹을까, 라고 아버지가 말했고 은재는 별 생각 없이 그러자고 대답했다. 그리고 전화를 끊고 상자를 끌어안은 채 다시 창밖을 보았다. 피곤했는데, 정확하게 무엇 때문에 피곤한 것인지는 잘 알 수가 없었다. 버스는 도로를 느릿느릿 나아갔는다. 날이 너무 밝았고 지나다니는 차들의 창문에 비친 반사광 때문에 자꾸만 눈이 시렸다.
집에 도착하자 어머니가 말했다. "시합, 아쉽구나." 은재는 박스에 붙은 테이프를 맨손으로 뜯으며 대답했다. "그러게요."
옷가지들과 잔 짐을 대강대강 정리하고 나서 이른 저녁을 먹었다. 이미 말한 대로 식탁에 불판을 놓고 고기를 구웠다. 밥을 먹으면서는 별로 대화가 없었다. 원래부터 그렇게까지 살가운 가족도 아니었고, 승자에게는 물어볼 것이 많아도 패자에게는 물어볼 말이 궁색한 법이니까. 은재는 딱히 그것이 어색하다고도 아쉽다고도 생각하지 않으며 쉽사리 모든 것을 이해했다. 대각선 자리에 앉은 은혁은 별 말이 없었다. 다행인 일이었다. 기름진 고기와 양파를 꾸역꾸역 입에 쑤셔넣으며 그렇게 생각했다.
여름의 해는 느리게 졌다. 그의 방에는 아직 두꺼운 겨울 커튼이 쳐져 있었다. 두툼한 천 너머로도 빛이 배어나올 정도로 아직 창밖이 밝았다. 그는 침대에 털썩 누웠다. 머리가 매트리스에 닿자마자 졸음이 그의 이마와 눈꺼풀을 꽉 짓눌렀다. 그는 깜빡, 깜빡 거리다가 눈을 감았다.
9회 말, 투 아웃, 만루.
배터박스에서 보는 풍경이 또렷하게 떠오르는 것은 몇 번이나 거기에 서봤기 때문인지 아니면 그 상황의 특수성 때문인지 모르겠다. 결한의 손끝에서 공이 흩뿌려지는 장면이 선명하게 다시 떠올랐다. 방망이가 돌아가는 순간 은재는 깨달았다. 공의 각도, 속도, 타이밍, 그리고 결한의 표정. 몇 천, 몇 만 번의 배트를 휘둘러 본 사람만이 알 수 있는 직감이었다. 그는 이 공을 때릴 수 없었다. 그리고 그것은 3년 후가 되든 5년 후가 되든 10년 후가 되든…… 별로 다르지 않을 것이었다.
아,
정말로 지쳤다.
은재는 눈을 떴다.
잠깐 눈을 감았다고 생각했는데 잠을 잔 모양이었다. 누운 채로 손만 뻗어 커튼을 걷어 보니 어느새 밤이었고, 밖이 캄캄했다. 몇 시인지 잘 가늠이 되지 않아 눈을 가늘게 뜨며 몸을 뒤척이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입과 목구멍이 바짝 말라 있었다. 문을 열고 나가 소파 팔걸이와 거실 서랍장에 종아리를 부딪혀가며 부엌으로 비척비척 다가갔다. 냉장고에서 보리차 병을 꺼내 컵에 따르고 홀짝거리며 입을 축였다. 잠이 덜 깬 것인지 시간 감각이 이상하기 때문인지 머리가 멍했다.
컵을 싱크대 안에 내려놓고 몸을 돌렸을 때 타이밍 좋게 맞은편 방 문이 열렸다. 은혁이 방에서 나오다 말고 은재를 보고 눈을 가늘게 떴다. 은혁은 안경을 끼고 있었다. 그의 눈이 점점 나빠지고 있다는 얘기를 저녁 먹을 때 들었던 것이 문득 떠올랐다.
"너 이제 어쩌려고?"
그가 불쑥 물었다. 그 물음에 한 템포 느리게 대답했다.
"뭐."
은재는 식탁 모서리에 손바닥을 댄 채 몸을 조금 숙였다. 여전히 졸렸다.
"프로 지명 못 받을 것 같던데."
아니나 다를까 비꼬는 말이었다. 그 말을 들었을 때 문득 떠오른 것은 이상하게도 아주 예전에, 처음으로 야구를 시작할 무렵의 기억이었다. 연습 시합에서 처음으로 플라이를 잡았을 때 미트 안으로 공이 쑥, 하고 빨려 들어와 손바닥을 메우던 감촉. 그는 그것이 정답인 것 같다고 생각했었고, 말하자면 선택을 한 것이었다. 이것으로 하겠다고. 이 느낌으로 하겠다고. 그때는 야구를 계속할 수 있을지 없을지에 대한 생각은 전혀 하지 않았었다.
그가 대답을 않고 있자 은혁이 거듭 입을 열었다.
"너 이제 정말……"
"나 야구 그만둘 거야."
그 말은 마치 그 순간 그 말을 하기로 정해진 것처럼 자연스럽게 나왔다. 칼로 잘라낸 것처럼 대화가 뚝 끊겼다. 은재는 고개를 숙인 채 속사포처럼 말을 뱉어냈다.
"지긋지긋해. 너랑 이런 씨발 좆같은 말다툼이나 하는 것도, 늘지 않는 기록도 키가 자라지 않는 것도 아무리 노력해도 칠 수 없는 공이 있다는 것도 존나 지긋지긋하다고. 말마따나 나는 할만큼 했고, 그래, 안되는 건 안되나보지. 씨발 이런 개 같은 말을 내 입으로 하게 될 줄은 몰랐네."
고개를 들었다. 은혁은 방 문을 등지고 서있었는데, 방에서 흘러나온 불빛에 눈이 부셨다.
"만족해?"
그때 은혁은 정말 이상한 표정을 짓고 있었는데, 무표정한 것 같기도 했고 뭔가 꺼림칙한 것 같기도 한, 아주 알 수 없는 표정이었다. 무어라고 한마디라도 덧붙일 것 같았던 그는 아무런 대답도 없이 방으로 다시 들어가 문을 닫았다. 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린 후 집 안은 다시 조용해졌다. 은재는 식탁에 기대어 선 채 닫힌 방 문을 노려보았다. 한참을 그러고 있다가, 아무런 생각도 없어질 때쯤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8년이었다. 그는 머릿속으로 지나간 시간을 셈해보다가 언젠가 달렸던 너른 운동장과 새로 산 스파이크와 단단한 공의 감촉 손바닥 안 배트가 닿는 자리를 따라 새겨진 굳은 살과 깡, 하고 배트와 공이 맞닿는 순간 청명하게 울리는 소리 수비 위치에서 올려다보던 하늘 밍밍해진 스포츠 드링크의 맛과 한여름의 흙 냄새 같은 것들을 차례로 떠올렸다.
숱은 많지만 결이 가늘어서 차분하고 정돈이 잘 되는 고동색의 직모. 단정하게 목덜미를 덮지 않을 정도로 잘랐다. 앞머리는 이마를 약간 드러낼 정도로 짧은데, 아무래도 이미지 변신을 시도하려다가 실패한 것 같은 냄새가 난다. 전체적으로 스타일은 학생 커트. 쌍꺼풀이 생기다 만 것 같은 엷은 눈매와 길지는 않지만 가지런한 속눈썹. 눈동자색이 약간 옅다. 눈에 띌 정도는 아닌데 빛 아래에서 보면 채도가 낮은 갈색에 가깝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단정하지만 선이 뚜렷하지 않은 이목구비. 생김새마저 그림으로 그린 듯한 초식남이다. 어느 모로 봐도 기가 세 보이는 구석이 없는 인상. 웃으면 본인 기준으로 오른쪽 뺨에 보조개가 패인다. 혈색이 잘 도는 낯빛. 항상 어딘가 반쯤은 웃는 듯, 반쯤은 멋쩍은 듯한 표정을 짓고 있다. 키도 평균, 발이나 손 크기도 평균. 마르고 호리호리한 체형. 골격 자체가 크질 않아서 통을 줄이지 않은 교복이 지나치게 넉넉해 보인다. 왼쪽 팔꿈치 아래부터 거의 손등 위까지 큰 화상 흉터가 있는데, 오래된 흉터인지라 많이 옅어졌지만 크기가 크다보니 눈에 띄어 한여름이 아니면 반팔은 잘 입지 않는다. 다른 겉옷을 입기보다는 교복 마이를 입는 쪽. 구두보다는 운동화. 시계는 불편해서 잘 하지 않는다.
성격
평범하고 모난 구석이 없는 성질이지만, 좋게 말해주자면 섬세하고 나쁘게 말하자면 소심하다. 사소한 말 실수를 오래 마음에 담아두거나 남들은 신경쓰지도 않는 것을 혼자 기억하고는 시시때때로 괴로워하는 인생이 조금 피곤한 타입. 감정을 있는 그대로 표를 내는 성격도 아닌지라 혼자서만 속으로 담아두다가 속병이 나곤 한다. 스트레스에 취약하고, 상처를 잘 받는다. 겉으로 드러나는 학습된 행동양식은 둥글둥글하지만 실제로는 꽤 예민하고 감성적인 편. 이런저런 생각이 많고, 사실 눈물도 많은 편이지만 남 앞에서 우는 것은 웬만하면 사양하고 싶다. 뒤끝도 길어서 알고 보면 조금 성가신 성격. 그 나잇대 남자애 답지 않게 타인에게 살뜰하게 마음 쓰곤 하는 세심한 면도 있다. 이 역시 나쁘게 말하자면 남의 눈치를 좀 본다고 해석할 수도 있다. 자신을 내세우기보다는 상대에게 맞춰주는 것이 익숙한 수동적인 인간형. 약간 우유부단해서, 반드시 자기 의견을 피력해야만 하는 경우에는 꽤 긴장하거나 당황한다. 그다지 살갑거나 부러 치대는 성격은 아닌 반면 외로움을 많이 타고 혼자 있는 것을 싫어한다. 정해진 규칙은 좀처럼 어기지를 못하는 원칙주의자. 덕분에 어디서든지 무던한 모범생 취급을 받는다(그런 것치고 성적은 그저 그렇다.).
상세설정
반: 4반
제2외국어: 스페인어
장래 희망: (뭐라도 적으려고 엄청 노력했으나 실패한 흔적만이 남아 있다.)
총무부 부장
운이 나쁜 편이다. 뒤로 넘어져도 코가 깨진다는 것은 이런 사람을 두고 하는 말인 것 같다. 다 같이 한 일도 혼자 걸리거나 새로 산 옷을 입은 날 우산도 없는데 비가 오거나 길 가다가 공사판 시멘트에 발을 처박거나…… 하여간 말하자면 좀 길다.
가사에 능숙하다. 빨래, 청소, 요리 등등 전반적으로 잘한다. 좋아하는 것 같기도 하다. 본인이 말하기를, "과일을 깎거나 물걸레질을 하다 보면 아무 생각도 없어져서 좋아."라고 함.
위장이 예민하다. 스트레스를 받으면 신경성 위염이 온다. 입맛은 좀 할아버지 같다. 나물 반찬에 생선구이 매우 좋아함. 달거나 느끼한 걸 잘 못 먹는다. 기름진 걸 많이 먹으면 위가 아프다…
눈이 약간 나쁜 편인데 일상생활에는 지장이 없어서 수업시간에만 안경을 낀다. 알이 큰 빨간 테 안경. 안경을 끼면 인상이 많이 달라서 눈썰미 없는 사람들은 못 알아보기도.
최근에 즐겨 하는 취미는 스도쿠. 스도쿠 책을 한 권 샀다.
담배를 싫어한다. 드물게도 불호를 아주 명확하게 드러내는 요소 중 하나.
새로 맞춘 교복은 어딘가 몸에 꼭 맞지가 않아 느낌이 이상했다. 남자아이니까 키가 더 자랄 것이라고, 한 사이즈 정도는 크게 사야 한다고 부득불 이빨을 털던 교복점 점원의 말을 곱씹으며 은수는 교복 소매 끝을 당겨 자신의 손목을 보았다. 겨우내 희어진 손목 위로 낯익은 흉터가 희미하게 드러난다. 앗차 싶어 다시 옷끝으로 손등을 덮으며 고개를 들었다. 괜시리 손바닥을 쥐었다 폈다 하면서 앞을 응시했다. 어색하네. 그러게, 어색하다. 말이라는 것은 몹시 이상해서, 어색하다, 고 생각하자마자 갑자기 앉아 있는 자세가 의식이 되었다. 부러 허리를 펴고, 목을 빳빳하게 세웠다. 익숙하지 않은 체육관의 내부도 옆에 앉아 있는 이름 모를 아이도, 또, 남학생과 여학생이 섞여 앉아 있다는 것도(그는 남중 출신이었다.), 한바탕 추운 계절이 지나갔다는 것도 역시 어색했지만 무엇보다 서먹하게 느껴지는 것은 그 사이에 껴 있는 자기 자신이었다. 은수는 마치 스스로가 신발 밑창 위의 모래알 같다고 생각하며 한숨을 쉬듯이 길게 숨을 뱉어냈다. 그러자 어깨가 풀썩 아래로 내려앉는 것만 같은 느낌이 들었다.
체육관은 볕이 잘 들지 않았지만 창가에 은은하게 머무는 햇빛은 밝았다. 제법 긴장이 되는 것과는 별개로 입학식의 순서라는 것이 그리 집중하기 좋은 내용은 아니어서, 단상 위쪽이나 창가를 쳐다보며 멍하니 정신을 놓는 사이 어느새 차례는 교장 선생님의 말씀까지 흘러가 있었다. 그때, 주머니에 넣어둔 핸드폰이 울렸다. 그는 눈을 굴리며 잠시 옆사람의 눈치를 살폈다. 약간은 양심의 가책을 느끼면서 최대한 눈에 띄지 않게 핸드폰을 꺼내자, 밝아진 액정 위에 보이는 발신인의 이름은 익숙한 것이었다. 정말로 안 가봐도 되겠어? 엄마가 보낸 문자였다. 은수는 실없이 웃었다. 바쁘잖아 뭘. 부러 짧게 답장을 보냈다. 답신이 다시 돌아오지 않는 것을 보니 쉬는 시간이 끝난 모양이었다. 혼자 입학식에 오게 되었지만 그것이 딱히 섭섭하다거나 아쉬운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아쉬워하려면 중학교 졸업식에도 혼자였었다는 사실이 아쉬워야할 것 같았지만, 그것도 그다지 마음에 두지는 않았다. 바쁜 것은 바쁜 것이고, 바쁘다는 것은 그가 느끼는 막연한 쓸쓸함이나 생경함보다 훨씬 구체적이고 사실적인 것이었으니까.
입학식은 어느새 끝나가고 있었다. 그가 딴 생각을 하는 사이 학급 담임을 소개하는 순서는 지나가버린 것 같았다. 어라, 나 우리 담임 누군지 못봤는데……. 그가 늦된 아이처럼 천천히 눈을 깜빡거렸다. 그러나 앞뒤 양옆에 앉아 있는 낯모를 누군가에게 물어볼 생각은 들질 않아 그냥 식이 완전히 끝나기를 얌전하게 기다리기로 했다. 곧 입학식이 끝났고, 뒷줄부터 차례로 체육관 밖으로 나가달라는 친절한 안내에 따라 학생들은 서서히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덩달아 자리에서 일어났다. 등을 떠밀리듯이 걸었다. 줄을 따라 체육관 밖으로 나서자 갑자기 시야가 환해졌다. 날씨가 유난히 좋았다. 저번주까지만 해도 어딘가 흐릿하게 보이던 길가나 나무들의 윤곽이 또렷하게 보였다.
"아……"
봄은 봄이네……. 누가 불러내거나 잡아당긴 것도 아닌데 계절은 때마다 찾아오고 또 그것이 때마다 신기하다. 그의 그런 감상과는 상관없이 무리는 자연스레 본관으로 향했다. 중학교 때부터 친했던 아이들은 자연스레 저마다 모여들었고 앞서 가는 2학년과 3학년의 무리도 보였지만, 은수는 여전히 낯섦을 떨쳐내지 못하며 다른 사람들과 조금 거리를 두고 걸었다. 그는 말하자면 학년이 올라갈 때마다 제 무리를 찾는 일에 신경을 쓰는 타입이었다. 그런 것이 마냥 자연스럽게 되면 좋은데 꼭 그렇지만도 않았다. 그래도 혼자 있는 것은 싫고, 눈치 보이고, 그러니까. 사람을 사귀는 일은 어렵지만 쓸쓸한 것은 어려운 것보다 더 싫었다. 그런 생각을 하며 천천히 눈을 감았다 떴다.
하지만 날씨가 좋네.
당장의 고민이나 어색함 같은 것은 아무 상관도 없다는 듯, 날씨가 좋았다. 이마에 내려 앉는 햇빛의 온도가 미지근하고 밝았다. 하늘이 높고 새파랬다. 그게 조금은 무심하다고 생각하며 발걸음을 재촉했다.
꿈을 꿨다.
그는 버스 정류장에 서 있었다. 이상하게도 꿈 속에는 그와 정류장 표지판밖에 없었다. 정류장에도, 길에도 사람이 없었다. 아니, 길이라는 것이 있는 것일까? 인도와 차도가 구분되는 경계가 눈에 보이지 않았지만 그냥 길, 이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시간도 구분이 되지 않았다. 아주 이른 시간인지, 아니면 아주 늦은 시간인지, 어두운 것도 아닌데 밝지도 않았다. 마치 아침이 되기 직전의 흐릿한 어둠처럼. 몇 분 간격을 두고 파란색, 녹색, 빨간색 버스가 정류장에 잠시 멈췄다가 지나갔다. 그가 기다리는 버스는 아니었다. 그런데 나는 몇 번 버스를 기다리고 있는 거더라. 그는 자기가 기다리는 버스가 무슨 색인지도 모르면서 버스를 기다렸다. 아주 오랫동안 버스는 오지 않았다. 문득, 계절도 모르는데 춥고 쓸쓸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학기 초의 기분이란 이상했다. 누군가가 살갗 아래에 손을 집어넣은 것처럼 간질거리고 막연한 감각. 혹자는 그것을 설렘이라고 말할 수도 있겠지만 은수는 그것이 초조함이라고 생각했다. 모든 것들이 제자리를 찾지 못하고 조금씩 어긋나서 붕 떠 있었다. 어울리지 않는 친구와도 대화를 했고 교복은 여전히 잘 맞지 않았고 새로 산 필통에는 종종 펜이 없어졌고 새 교과서를 하나하나 비닐로 싸는 일은 번거로웠다. 왜 사람은 공들여서 자기 자리를 만들어도 때가 되면 새로운 것들을 맞딱뜨리게 되는지 생각하게 된다. 그런 생각을 하다보면 며칠 전에 꾼 꿈에 대해서도 떠올리게 되는데, 그는 한참동안 고민하다가 그것이 소속감에 대한 꿈이라고 결론을 내렸다. 사람마다 그런 게 있잖은가. 딱히 그러려고 그런 것도 아닌데 가장 중요시하게 되는 감정들이. 은수에게는 소속감이라는 것이 그런 것이었다. 의자 놀이라도 하는 것처럼 자기 자리를 찾아 주변을 빙빙빙빙 맴도는 것은, 그런 초조함은, 살면서 너무 여러 번 느껴본 것이어서 그런지는 몰라도 피곤하고 쓸쓸했다.
야간 자율학습이 끝나고 집에 왔을 때 안쪽 방에 불이 켜져 있는 것을 발견했다. "엄마." 부르자 그녀가 뒤를 돌아보았다. 그녀는 화장을 지우고 있었다. 은수는 가방을 내려놓고 화장대 옆에 무릎을 꿇고 앉아 그녀를 올려다보았다. "오늘 야간이라고 하지 않았어?" "응, 낮 근무하는 사람이 좀 바꿔달라길래." "어쩐지 오랜만에 보는 것 같아." "그러게, 시간이 잘 안 맞아서 그러지. 고등학교 들어가니까 야자한다고 바쁘고. 야식이라도 좀 해줄까?" "아니……" 화장대에 머리를 기대고 눈을 깜빡이자 어쩐지 졸리웠다.
"왠지 제자리를 못 찾고 있는 것 같아."
문득 그렇게 말하자, 엄마는 조금 웃었다.
"너는 매번 비슷한 걸로 고민하더라."
"그런가?"
"그런 건 찾으면 어떻게든 생기는 거야."
그런가…… 늘어지게 대답을 하고 나자 왠지 정말로 그런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엄마가 손을 뻗어 그의 옆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손바닥이 관자놀이에 닿는 감촉이 가칠했다.
그가 학생회에 신청서를 넣은 것은 그로부터 사흘 뒤의 일이었다. 학생회에 들게 되면 내신에도 도움이 될 거고, 자소서에도 한 줄 더 쓸 수 있을 거고, 나는 성적도 별로니까…… 같은 이유들을 차례로 떠올렸지만 사실은 그런 게 아닐지도 몰랐다. 여전히 막연하고 간지러운 감각에 손톱 밑을 긁으면서 학생회실을 나섰다. 햇빛이 한층 밝아져 있었다. 봄은 봄인가보다, 했다.
1
"아 난 죽어도 고등학교는 공학 간다."
중학교 다닐 시절 애들은 입버릇처럼 그 말을 달고 살았다. 1학년 때부터 고장난 라디오처럼 반복되던 그 말은 3학년쯤 되니 거의 밥 먹었니? 오늘 날씨가 참 좋구나, 같은 말과 동급으로, 툭 치기만 하면 튀어나오는 문장이 되었다. 은수는 '죽어도'라는 부분의 간절함에는 그다지 동의할 수 없었지만 기왕이면 공학을 가면 좋겠지, 라고 생각했다. 딱히 큰 이유가 있는 건 아니었고, 그냥, 또 남학교는 다니기 싫다는 뭇 남자애들의 감정에 편승해서였다. 여자애들이랑 같이 학교 다니면 좋나. 좋겠지. 연애하는 애들도 있겠지…… 고등학교 1학년 첫날, 맨 뒷자리의 구석에 앉아 은수는 그런 생각들을 되짚어 보았다. 입학식 날부터 수업이 있다니 과연 고등학교는 달라…… 같은 교실에 여자아이들이 있다는 사실이 여전히 조금 어색하게 느껴져서 괜시리 제 손을 매만지다가 핸드폰을 쳐다보기를 반복했다. 앞자리에 나란히 앉은 여자애들은 아마도 같은 중학교에서 올라온 것인지 둘이서 재잘재잘 말이 많았다. 오는 길에, 날씨가, 선생님이, 교복이, 스타킹이, 급식이, 선배가…… 핸드폰을 쳐다보며 그 목소리를 귀로만 듣고 있는데 갑자기 옆에서 쿵, 하는 소리가 들렸다.
앞자리 여자애들과 은수가 동시에 그쪽을 돌아보았다. 그 소리는 누군가가 책상 위에 가방을 내려놓는 소리였다. 그녀는 소리가 크게 나는 것은 전혀 신경쓰지 않고 의자를 잡아끌었다. 의자 다리가 교실 바닥을 긁으며 끼긱거리는 거슬리는 소리를 냈다. 그녀가 풀썩 자리에 주저 앉았다. 그제야 얼굴이 보였다. 선이 또렷한 이목구비와 눈매. 예쁜 애네, 라는 생각이 들었다. 저도 모르게 그 옆얼굴을 멀거니 쳐다보고 있었던 것 같다. 그녀가 끼고 있던 이어폰을 잡아 빼더니 홱, 이쪽을 돌아보았다.
"뭘 봐."
…….
"어…… 미안."
어라 나 왜 사과하고 있지…… 은수는 황급히 다시 핸드폰으로 시선을 내렸다. 어느새 앞자리 여자애들의 대화가 멈춰 있었다. 그녀는 다시 귀에 이어폰을 꼈다. 은수는 속으로 생각했다. 엄마 옆에 좀 무서운 애가 앉은 것 같아요……. 그는, 말하자면 기선제압을 당했다.
3
너 남중 나왔지. 그런 게 티가 나나 보다. 은수는 왠지 모르게 뒷덜미가 화끈해지는 것을 느끼며 살짝 몸을 틀어 제 명찰을 보여주었다. 안나는 조금 웃는 듯, 그러나 크게 관심이 있지는 않은 듯한 얼굴로 그의 명찰을 흘끗 보고는 다시 펜을 잡았다. 아 교과서에 샤프도 아니고 펜으로 글씨를 쓰다니 내 교과서…… 같은 말을 하기에는 그는 너무 용기가 없었다. [너 아까 왜 거짓말해줫어?ㅋㅋ] 은수는 눈만 들어 교탁 앞에 서 있는 선생님 눈치를 살피고는, 아, 이미 진도가 몇 페이지쯤 넘어간 것 같았는데 이 대화의 흐름을 끊는 것은 예의가 아닌 것 같아서, 들고 있던 샤프로 그 아래에 글씨를 이어 썼다. [그냥] [그냥?] [그냥.] 그냥은 그냥이었다. 공연히 일이 커지는 것도 눈에 띄는 것도 싫었으니까, 아니 사실은 그런 생각이 들기도 전에 먼저 말이 튀어나왔으니까. 둥글둥글하게 넘어가는 것을 좋아하는 습관의 반증이었다. 그러니까 왜냐고 물으면 할 말은 별로 없었다. 그가 곤란한 듯이 손에 쥔 샤프를 반대쪽 손으로 바꿔 쥐자 안나가 알았다는 듯이 다시 웃었다. 그 얼굴은, 기분이 좋아 보인다기보다는 어쩐지 조금 비웃는 듯한 기색이었다. 은수는 직관적으로 깨달았다. 앗 나 왠지 얕보인 것 같아…… 깨달았다고 해서 딱히 할 수 있는 일이 있는 것도 아니다. 슬픈 일이었다.
[너는 이름이 뭐야?]
예의상 반문해보았다. 그녀가 아까부터 계속 엎드려 있었던 덕분에 그녀의 명찰은 눈에 보이지도 않았다. 그녀는 몸을 돌려 명찰을 보여주는 대신 은수의 필통에서 꺼낸 은수의 펜으로 은수의 교과서 가장자리에 꼭꼭 제 이름 석 자를 눌러 썼다. 조, 안, 나. 아마 저것은 뒷페이지까지 자국이 남을 것이다…… 그나저나 특이한 이름이었다. 외국인 이름 같기도 하고, 어디서 들어본 것 같기도 하고. 아, 그래, 마트에서 팔던 큰 통에 든 아이스크림 중에 저런 이름이 있었던 것 같은데.
[아이스크림?]
[재미없어]
어, 응 그렇구나…… 그 단호함에 은수는 왠지 시무룩해졌다.
5
은수는 몹시 떨리는 눈빛으로 교탁 앞에 서 있는 선생님과 옆자리 여자애를 번갈아서 쳐다보았다. 수업 도중에 양호실에 가 본 적은 중학교 2학년 때 처음으로 위염이 왔을 때밖에 없었다. 그때는 정말 위장이 꼬여서 죽는 줄 알았지…… 따위의 회상은 지금 상황에 별로 도움이 되지 않았다.(참고로 그때 그가 정말로 가야할 곳은 양호실이 아니라 병원이었다.) 안나는 심심해, 라고 말한 후에 팔에 얼굴을 묻고는 그를 물끄러미 쳐다만 보고 있었다. 그러나 그 표정이 마치 하 이런 쫄보새끼, 라고 말하고 있는 것만 같아서 은수의 동공은 더욱 떨리기 시작했다. 그는 자기 주장이 강한 사람에게 약했고, 안나는 확실히 그런 사람이었다.
"헉."
정신을 차려보니 은수는 교실 뒷문 앞에 서 있었다. 등 뒤로 문이 닫히는 소리가 드르륵 울렸다. 복도에는 사람은 커녕 개미 한 마리도 없었다. 한참 수업을 하는 도중이니 당연한 일이었다. 문 너머에서 선생님이 뭐라뭐라 말하는 소리만이 웅웅거리면서 복도 안을 메우고 있었다. 적막했다. 조용한 학교, 라는 것은 어딘가 이상했다. 마치 현실의 공간이 아닌 것처럼…… 그 낯설음에 죄책감을 느끼면서 계단 쪽으로 걸었다. 안나는 고개를 휘휘 저어 빈 복도를 한 번 둘러보더니 그에게 말했다. "별 거 아니잖아, 그치?" 그에게는 매우 별 거였으나 그런 말은 굳이 하지 않기로 했다. 대신 물었다.
"어디 아픈 거야?"
안나는 이번에는 그를 정말 이상한 사람 쳐다보는 듯한 눈길로 쳐다보았다.
"뭐?"
"양호실 간다며……"
그 눈길에 자연히 말꼬리가 흐려졌다. 은수는 자신이 세상에서 제일 멍청한 소리를 한 것만 같은 착각에 빠졌다.
"너 그걸 믿니?"
"아, 아니, 나도 딱히 믿진 않지만 그냥 물어봤어 혹시나해서……"
정말인데…… 그렇게 덧붙여봐도 별로 소용은 없었다. 아픈 게 아니라면 내가 굳이 같이 나올 필요가 있었던 걸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어쨌거나 양호실은 한 층 아래에 있었고 그들은 계단을 내려가야만 했다.
남은수가 차유성을 처음 본 것은 사실, 그가 학생회에 들어가기도 전의 일이었다.
점심시간의 복도는 항상 소란스러웠다. 교무실 앞에 서 있는 그를 한 남학생이 쿵쿵거리면서 스치고 지나갔다. 소리 높여 누군가의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 무어라 떠드는 말들과 발소리, 웃음소리, 농담 따먹는 소리…… 은수가 복도에 서 있는 이유는 선생님의 심부름 때문이었다. 며칠 전에 걷어둔 독후감을 다시 교실에 갖다놓으랬나, 아무튼 그랬을 것이다. 그는 삼십여 개쯤 되는 공책 다발을 끌어안고 막 교무실에서 나온 참이었다. 복도에 사람이 너무 많아서 순간 멈칫하며 서 있는데 문득 눈에 띄는 사람이 있었다. 그 사람은 그냥 복도를 지나가는 중이었다. 딱히 큰 소리로 말을 하고 있거나 뛰어다니는 것도 아니었다. 그럼에도 그는 눈에 띌 수밖에 없었는데, 그러니까, 머리가 매우 밝은 금발이었다. 금색일 뿐만이 아니라 길었다. 은수는 그런 머리를 한 남자는 TV 속에서밖에 본 적이 없었다. 아래로 내려 묶은 머리카락이 움직일 때마다 언듯, 피어싱 같은 것이 복도 창문의 빛에 반사되어 시야에 두드러졌다. 은수는 저도 모르게 멀거니 그의 옆얼굴을 쳐다보았다. 쳐다보다가, 문득 그런 시선이 실례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그뿐만이 아니라 몇몇 학생들이 흘끔거리며 그를 돌아보고 있었다. 그는 별로 신경쓰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 곧 그가 복도 너머로 사라졌고 은수는 그제야 자기가 교무실 문을 가로막고 서 있으며 선생님 심부름을 하는 도중이었다는 것을 기억해냈다. 은수는 들고 있던 공책 다발을 한 번 추슬러 안으며 생각했다. 대단한 사람이네. 나 같으면 죽어도 저렇게 못하겠지, 하는 생각.
자신과 전혀 다른 방식으로 살아가는 것 같은 사람을 보면 당연히 기억에 오래 남기 마련인데, 그래서 얼마 뒤 첫 학생회 회의에서 그를 보았을 때 은수는 적지 않게 놀랐다. 그의 행색이 학생회라는, 언듯 들으면 모범생 집단처럼 느껴지는 무리에 어울리지 않는다는 점도 한몫했다. 그는 여전히 금발이었고 피어싱을 뺄 생각도 없는 것 같아 보였다. 머리가…… 신기했다. 문득 그 머리를 만져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약간, 햇빛 다발을 엮어놓은 것 같은 느낌이 들 것 같기도 했다. 은수는 눈치채이지 않을 정도로만 곁눈질 해서 그의 명찰을 기억해두었다. 그의 이름은 차유성이었다.
"저기, 선배. ……머리 한 번만 땋아봐도 돼요?"
그렇게 물은 것은 우발적인 일이었는데 말로 해놓고 스스로가 놀랐다. 어느 날 학생회실 청소를 하던 도중이었다. 머리를 만져보고 싶다는 생각을 하기는 했으나 은수는 대체로 그걸 실행에 옮길 정도로 용감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할 말 있느냐, 고 물어오니 생각도 하기 전에 그런 말이 먼저 튀어나왔고 유성은 조금 놀란 눈치였으나 생각보다 선선하게 그러라고 했다. 그러라고 해서 한 번 더 놀랐다. "그냥, 내가 풀게. 됐지?" 유성은 그렇게 말하며 스스로 머리를 풀었다. 은수는 쭈뼛쭈뼛 의자에 앉은 그의 머리카락에 손을 대었다. 몇 번 탈색을 거친 듯 성긴 질감이었다. 남의 머리를 땋아줄 일은 평생 없었지만 어떻게 땋는지는 알고 있었다. 꼼꼼하게 가닥을 잡아 엮어가는데 머리카락을 들어올리자 드러난 귓불 아래로 피어싱이 다시금 눈에 띄었다. 은수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물었다. "이거… 안 아프셨어요?" 유성은 별로 아프지 않다고 대답했다. 은수는 다시금 질문을 골랐다.
"이런 거… 하면 눈에 띄지 않아요?"
"그냥… 저였으면 부담스러울 것 같아서요. 시선… 같은 게." 은수는 남의 눈에 띄는 게 싫었다. 눈에 띈다는 것은 그만큼 스스로의 치부를 드러낼 일도 많다는 것이었다. 눈길이 모이는 곳에는 말이 모이기 마련이고, 그는 그런 것들을 못 본 체할 정도로 신경줄이 굵지가 않았다. 유성은 잠시 대답할 말을 생각하는 눈치였다. 은수는 남은 머리카락이 애매해서 한 단을 더 땋을 수 있을지 아니면 그대로 묶어야할지 고민했다. 손을 어물거리고 있는데 유성이 먼저 입을 열었다.
"사람마다 편하게 살아가는 거잖아. 난 이런 게 좋아서. 이런 게 부담스러우면, 너는 안 하면 되고."
"아……"
"그래도 하고 싶을 때 있지 않아? 근데 그거, 생각보다 금방 익숙해진다. 생각해 봐. 지나가면서 만나는 사람이 몇인데. 다 널 잠깐씩 쳐다본다고 생각하면… 말로 들으면 엄청 부담스러울 거 같지만… 사실 그냥. 별로 신경 안 쓰이게 되거든. 그니까 나는 그랬어."
딱히 무언가를 내세우거나 폼을 잡으려는 말투는 아니었고, 유성은 그냥 있는 것을 그대로 말하고 있는 듯했다. 은수는 남은 머리카락을 그러모아 한 번 더 묶었다. 머리는 예쁘게 땋였다. "오늘 지나기 전까진 안 풀게." 유성이 웃으면서 말했다. 은수는 멋쩍게 마주 웃었다. 유성은 그가 생각하던 대로 자신과는 전혀 다른 사람이었고, 그리고… 솔직히 멋있었다. 자신과 다른 것을 동경하는 것은 너무나도 쉬운 일이었다.
어느 날 은수는 등교길에 편의점에 들러 녹차맛 킷캣을 한 봉지 샀다. 교실에 들어와서 옆자리에 앉은 안나에게 하나 주고(뜯기고), 같이 다니는 친구들한테도 하나씩 줬다. 반 봉지 정도가 남았다. 수업이 다 끝나고 학생회실에 갔을 때 유성이 있었다. "선배. 킷캣 드실래요?" 그는 가방 속에 들어 있던 킷캣 봉지를 통째로 내밀었다. "어… 고마워. 너는 안 먹어?" 유성이 물었다. "아…… 저는 단 거 안 먹어서." "근데 이걸 왜 샀어?" 그 말에 은수는 그냥 어설프게 웃고 말았다.
19금 주의...
영화 볼래? 나 폰에 다운받아 놓은 거 있는데.
그 문자를 받고, 은수는 무슨 영화냐고 묻지도 않고 그러겠다고 답장을 보냈다. 그는 눈을 한 번 꾹 감았다가 떴다. 그리고 자리에서 일어나서 의자에 걸쳐져 있던 후드티와 반바지 몇 개를 주워들어 서랍 안에 차곡차곡 집어 넣고 침대 모서리에 걸터앉았다. 그는 아래를 내려다보면서 양 발을 멋쩍게 서로 비비다가 다시 자리에서 일어나서 거실로 나갔다. 베란다 창문의 블라인드를 올리고 에어컨을 틀고 청소기를 들고 방으로 들어왔는데 문자가 하나 더 와 있었다. 음료수라도 사갈까? 이미 십여 분 정도 전에 온 문자였다. 안, 그래도 되는데…… 답장을 치다가 이미 늦은 것 같아서 그냥 웃는 이모티콘(귀여운 척하는 것처럼 보일까? 그런 의도는 아니었다.)을 보내고는 핸드폰을 내려놓았다. 그가 방 안의 먼지를 죄다 쓸어낸 뒤 침대 밑으로 무선 청소기를 집어넣으려고 끙끙거리고 있는 사이 벨이 울렸다. 그는 스프링처럼 벌떡 일어나다가 침대 모서리에 허벅지를 갖다 박았다. 꽤 아팠다.
"너 왜 그래?"
"별 거 아니에요……"
은규는 약간 절뚝거리는 그를 유심히 쳐다보았지만 캐묻지는 않았다. "포카리랑 콜라 중에 어떤 게 좋아?" "어, 음, 콜라요." 은규가 편의점 비닐봉지에서 캔콜라를 꺼내주었다. 캔 표면이 차갑고 매끈했다. 은수는 양손으로 캔을 쥐고 잠시 멀뚱히 서 있다가, "고맙습니다." 하고 말했다. "뭘 그렇게 예의를 차려." 은규가 웃었다. 선선하고 자연스러운 웃음이었다. 그게 참 좋다고 생각했다. 뭐가 어떻게 좋냐고 물어보면 할 말은 없었지만…… 연애라는 게 원래 그런 법이다. 말보다 앞서는 것들의 연속.
은규가 이 집에 오는 것은 처음이 아니었다. 은수는 거의 집에 혼자 있는 편이 많았고 그들은 가난한 고등학생이었으니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영화를 보거나 책을 읽거나 수행평가를 하거나 뭔가를 시켜먹고 누워서 얘기를 하거나 게임을 하거나, 그런 잡다한 일들을 같이 했고 그런 점은 여느 친구나 선배와 다르지 않았지만 뭐…… 그런 것만 한 건 아니었다. 은수는 냉장고에서 잘라놓은 수박을 꺼내면서 그런 생각들을 하다가 하마터면 냉장고 문에 머리를 갖다박을 뻔했다.
핸드폰으로 둘이서 영화를 보려면 꼭 붙어 앉아야만 했다. "아이패드를 살까봐." 은규는 약간 투덜거리듯이 말했지만 은수는 그렇게 붙어 앉는 것이 싫지는 않았다. 은규의 작은 핸드폰 화면 안에서는 할리우드 영화 특유의 웅장한 오프닝이 지나가고 있었고 은수는 그것을 멀거니 응시하다가 조금 옆사람의 눈치를 보았다. 그가 무릎을 끌어안고 슬쩍, 어깨에 머리를 기대자 은규가 그를 한 번 흘긋 보고는 자연스럽게 그의 목에 팔을 둘렀다. 아, 이런 것들.
영화는 재밌었지만 뻔했고, 뻔하지만 유쾌했다. 할리우드 액션이란 으레 그래야하는 법이다. 은수는 수박을 집어 먹던 작은 포크를 입에 문 채로 멍하니 영화에 집중했다. 차가 폭발하고 건물이 터지고 사람이 날아가고, 악은 패배하고 히어로는 승리했으며 클라이막스에서 히로인과 키스를 했다. 은수는 문득 포크를 그릇 위에 내려놓았다. 짤각, 하는 작은 소리가 어쩐지 의식이 되었다. 영화에 정해진 수순이 있는 것처럼 사람과 사람 사이의 행간에도 정해진 수순이 있기 마련인데 그는 그런 것들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데에는 도통 재주가 없었다. 그는 클라이막스 부분부터 엔딩롤이 올라갈 때까지 거의 집중을 하지 못했다. 그런 스스로가 참, 뻔하다고 생각하면서도 부끄러워졌다.
은규는 엔딩롤 중간에 영화를 끄고 핸드폰을 내려놓았다. 은수가 조심스럽게 그를 불렀다.
"선배."
어깨를 손으로 짚고 고개를 약간 들자 입술은 가까운 곳에 있었다. 주춤하다가 혀를 내어 아랫입술을 핥자 어렴풋이 단맛이 났는데 수박 때문인지 음료수 때문인지 잘 알 수가 없었다. 은규가 눈을 한 번 깜빡이고는 손등으로 그의 뺨을 만졌다. 뺨의 솜털이 곤두서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겉을 핥는 듯한 가벼운 키스였다. 하지만 키스만으로 끝나지는 않는다는 걸 둘 다 알고 있었다.
에어컨을 틀어놓았기 때문인지, 집에서 입는 얇은 티셔츠를 벗자 약간 서늘한 느낌이 들었다. 티셔츠의 팔 부분을 끌어내리다가 한 번 더 키스를 했다. 좀 전보다는 좀 더 밭은 키스였다. 뺨 안쪽과 이빨 뒤쪽을 핥고 입천장을 쓸어내리는 키스. 은수는 길게 숨을 뱉어냈다. 침대 위로 올라 앉아 바지도 벗었다. 은규가 그의 귓불을 엄지로 누르고는 목을 만졌다. 은수는 그가 자신을 만지는 방식이 익숙하다고 생각했다. 익숙한 대로 흥분하게 된다. 긴장과 흥분이 이리저리 뒤섞여서 정신을 차릴 수가 없다. 발끝까지 열이 오르는 감각이었다.
은규가 그의 어깨를 눌렀고 자연스럽게 털썩 베개에 뒷머리가 묻혔다. 천장이 올려다보였다. 여름이었고, 늦은 오후였고, 형광등을 켜놓지 않아도 방 안이 밝았다. "아……" "왜?" "그냥요." 그때 갑자기 얼마 전 웹서핑을 하다가 인터넷 사이트에서 본 게시글이 생각이 난 것은, 정말 우연한 일이었다. 손이 턱 아래쪽과 가슴팍을 자연스럽게 훑고 내려가서 거기에 신경이 쏠렸는데, 아, 그러면서도 한 번 생각난 것은 쉬이 잊혀지지가 않았다. 그가 멀거니 딴 생각을 하는 사이 은규는 그의 브리프를 벌리고 성기를 쥐었다. 으, 하고 무심결에 큰 소리가 났다.
"아…… 잠깐, 잠깐만요, 아,"
"더 천천히 할까?"
그렇게 묻는 은규도 딱히 여유가 넘치는 얼굴은 아니었는데 은수는 항상 그것보다 좀 더 여유가 없었다. "그런, 건 아니고……" 어물쩍한 그의 대답에 이미 반쯤 발기한 성기가 다시금 손에 잡혔다. 끝부분을 문지르고 쓸어내리자 손 안에서 꾸역꾸역 부피를 늘리는 것이 스스로도 느껴져서 숨이 막혔다. 어금니를 꽉 깨물어도 먹먹한 소리가 난다. 아랫배에 바짝 힘이 들어갔다. 사정감이 꼭대기에 이르기 전에 손이 떨어졌다. 은규가 숨을 한 번 크게 내쉬고는 몸을 침대 아래로 굽혀 편의점 비닐봉지에서 콘돔을 꺼냈다. 은수는 미처 눈치채지 못하고 있던 일이었다.
"선배 완전 할 생각이었네요……"
"보통이잖아, 보통."
은규는 다소 쑥쓰러운 기색으로 대답하고는 콘돔 하나를 뜯어 침대 위에 던져두었다. 그의 손이 은수의 무릎 뒤로 들어왔다. 무릎을 세우고 허벅지 뒤쪽을 가만히 쓸어내리던 손이 뒤에 닿았다. 단단한 입구를 젖은 손가락이 꾹 누르는 감각이 지나치게 생생해서 은수는 약간 진저리를 쳤다. 꾹꾹 입구를 누르던 손가락이 이내 안으로 천천히 들어왔다. 고작 손가락 하나인데도, 원래는 그런 식으로 쓰지 않는 곳이기 때문인지 부피감이 빠듯하다. 중지를 끝까지 밀어넣고 안쪽 점막을 꾹꾹 누르다가 익숙해질 즈음 손가락 하나가 더 들어왔다. 안쪽을 누르다가 달라붙은 점막을 벌리듯이 손가락을 벌리자 숨이 목끝까지 차올랐다. 이물감과 동반되는 아릿한 감각이 척추를 따라 올라왔다. 자꾸만 허벅지 안쪽에 힘을 주게 돼서 은규가 힘 좀 빼, 라고 말해야될 정도였다.
그가 검색을 하다가 여초 사이트에 들어가게 된 것은 순전히 우연이었는데,
남자친구가 뭘 해주니 좋아한다든가 어떤 게 좋다든가 하는 얘기들을 보게 된 것도 순전히 우연이었다. 우연으로 보고 넘길 수 있었다면 좋았을텐데 안타깝게도 남은수는 뭘 해주고자 하는 욕구가 몹시 큰 사람이었고 그러니까…… 3분에 한 번씩 컴퓨터 화면을 껐다 키면서도 결국 게시물을 다 읽었다. 차가운 책상에 뺨을 대고 얼굴을 식히면서 이런 거 좋아하나, 진짜로 그런가, 라는 생각을 했던 것이 저번주의 일이다. 잊어버리고 있었는데, 아, 계속 잊어버리고 있기에도 그는 참으로 무심하지 못한 성격이어서.
세 개인가, 네 개인가, 손가락이 안에서 빠져나가자 몸이 가라앉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콘돔 비닐을 찢는 소리가 들렸다. 콘돔을 갈무리한 은규가 다시금 그의 쪽으로 몸을 수그렸다. 은수는 그를 올려다보았다.
"선배……"
그가 손바닥으로 은규의 어깨를 눌렀다. 은규는 어리둥절한 얼굴로 떠밀리듯이 상체를 일으켰다. 자세는 쉽게 바뀌었다. 아, 위에서 내려다보는 건 이런 느낌이구나. 열 오른 머리로 생각했다. "뭐하게?" 은규가 물었다. 은수는 입술을 한 번 깨물었다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묻지 말라는 뜻이었다. 부끄러워서 심장이 입밖으로 튀어나올 것 같았지만, 그렇지만! 이런 거 좋아들 한다면서! 이 얼마나 휘둘리기 쉬운 어린양인지…… 안타까울 정도였다. 가여운 어린양께서는 은규의 허벅지 위에 올라타서 한 손으로 침대 위를 짚고는 흔들리는 시선으로 그를 내려다보았다. 은규는, 얘가 뭘 할 생각인지는 모르겠으나 그 뜻을 존중한다는 의미에서 가만히 있는 것 같았다.
그의 다른 쪽 손이 은규의 성기를 잡았다. 손이 저도 모르게 덜덜 떨리고 있었다.(미친듯이 부끄러웠다.) 성기 끝을 입구에 맞추고 움직여 보았지만 야동이나 뭐 그런 데서처럼 쉽게 들어가지는 않았다. 자꾸만 입구 근처에서 미끄러지는 감각에 눈을 찌푸리며 숨을 밭게 내쉬자 그제야 그가 뭘 하려는 건지 알아차린 은규가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 표정을 보자 갑자기 얼굴이 화끈하게 달아올랐다. 그러나 이미 시작해버린 것을 되물릴 수는 없는 노릇이다. 마음을 먹고 허리를 내리자 그제야 끝부분이 입구를 벌리고 들어왔다. 반사적으로 허벅지 안쪽에 바짝 힘이 들어갔다.
"윽…… 으, 으…… 아,"
평소와 다른 각도로 들어오기 때문인지 생각보다 아팠다. 반쯤 들어간 것 같은데 더 이상 움직일 수가 없어서 고개를 숙이자 식은 땀인지 뭔지 모를 것이 뚝뚝 떨어졌다. 그를 올려다보던 은규가 말했다. "너 지금 얼굴 엄청 빨개." "으……" 진저리를 치듯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 상태로 꽤 오랫동안 있었던 것 같다.
"저기, ……계속 그러고 있으면 나도 힘든데……"
은규가 굉장히 참을성 있는 목소리로 말했다. 아마도 인내심의 한계였다. 은수는 가쁘게 숨을 몰아쉬다가, 아 이제는 정말 안되겠다, 라고 생각했다. 허벅지에 힘을 풀고 털썩, 주저앉았다. 갑작스레 안쪽까지 들어오는 느낌에 덜컥 숨이 막혔다. 눈꺼풀이 바르르 떨렸고 덕분에 시야가 흔들렸다. 아, 움직여야하는데. 움직여야하는 거 아닌가. 이제는 부끄러운 걸 넘어서 머리가 어지러웠다. 그는 어설프게 허리를 움직이기 시작했다. 안쪽이 비벼지는 감각이 익숙한 것 같기도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하고, 토 나오게 어색한 반면 몸에 익은 감각 때문인지 점점 열이 오르는 것 같았다. 파고들었다가 빠져나가는 감각. 점막이 눌리는 느낌과 어딘가를 스칠 때마다 발끝에 힘이 들어가는지, 스스로는 모를 리가 없다.
점점 움직임이 빨라졌다. 아, 아…… 앓는 듯한 소리가 자꾸만 목에서 들끓었다. 끝을 예감한 탓인지 아랫배부터 발끝까지 힘이 바짝 들어갔다. 사정감이 켜켜이 차올랐다. 눈을 질끈 감았다.
"아,"
눈꺼풀 안쪽에서 빛이 튀었다. 거의 동시에 그는 앞으로 고꾸라졌다.
"너 내 생각보다 대담하구나."
은규가 어딘가 감탄한 투로 말해서 은수는 그대로 베개에 머리를 처박고 죽고 싶다고 생각했다.
좀 전에 은규가 에어컨을 끄고 와서 방 안은 조금 더웠다. 은수는 쌔액 숨을 몰아쉬면서 빙글 몸을 돌렸다. 이성이라는 것은 왜 늦게 찾아오는 것일까? 알 수 없는 노릇이었다. 누가 시켜서 한 것도 아닌데 굉장하게 부끄러웠다. 그는 더운 것은 아랑곳하지 않고 이불을 뒤집어 쓴 채로 얼굴만 내놓고 은규를 쳐다보고 있었다. 섹스 후의 나른한 느낌이 몸을 지배했다. 이런 기분을 싫어하지 않았다. 물론 지금은 좀 수치스러워서 죽어버리고 싶다는 생각이 저 언저리에 있었지만 어쨌거나 그랬다. 그는 꾸물꾸물 손을 내밀어 은규의 손끝을 쥐었다. 은규가 그를 돌아보았다.
남은수는 말하자면 사랑 받고 싶어하는 타입이었다. 간절한 사람일 수록 많은 것을 생각하게 된다. 그는 이런 것이 어떤 선, 예를 들자면 좋은 관계를 유지할 만한 깔끔한 커뮤니케이션, 그런 것을 방해한다는 걸 알면서도 문득 떠오른 것을 입에 올렸다.
"……선배 전여친은 이런 거 안했죠."
은규는 예상대로 음ㅡ 하고 말끝을 길게 늘이더니, 뭐 그렇지, 하고 간단하게 대답했다.
"저는 선배가 처음이었는데."
토라졌다기보다는 다소 침울한 말투로 그렇게 말했다. 손끝을 쥐고 이불 속에서 몸을 옹송그리자 어디까지고 작아질 수 있을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은규가 망설이다가 그 손끝을 마주 쥐었다. 그 감촉이 따뜻해서 어쩐지 생각이 자꾸만 길어질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여름은 소란스러운 계절이었다.
은수는 이마에 배어난 땀을 손바닥으로 훔치며 그렇게 생각했다. 점심시간이었고, 급식실에서 교실로 돌아가던 중이었다. 그 짧은 거리를 오고 가는 와중에도 목덜미에 땀이 흠뻑 배어날 정도로 날이 더웠다. 방학을 하기 직전, 이 무렵이 제일 더운 것처럼 느껴진다. 해가 밝아 교내에 드문드문 서 있는 나무들의 윤곽과 건물의 가장자리까지 선명하게 보였다. 지나치게 선명해서, 자꾸만 무언가를 응시해야만 하는 것 같은 기분이 든다. 그가 생각하는 소란스러움이란 그런 종류의 소란스러움이었다.
본관 앞에는 건물 안으로 들어가려는 아이들이 많았다. 그 사이를 비집고 들어가며 사람들에 부대낄 것을 생각하니 어쩐지 몹시 피곤해져서 땡볕 아래에 멀거니 서 있는데 그를 발견했다. 그건 순전히 우연이었다. 가까운 사이라고는 해도 반도 학년도 다르니 만나자, 고 약속을 하지 않으면 마주치기가 어려웠다. 그는 문 옆에 조금 비껴 서서 핸드폰을 들여다보며 누군가와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다른 것보다 반가움이 앞섰다. 은수가 반사적으로 소리를 높여, "선배," 하고 그를 불렀다. 몇몇 학생들이 은수를 돌아보았다. 그는 조금 부끄러워졌다. 은규는 한 박자 늦게 고개를 들었다. 은수는 어물쩍 몇 걸음 그에게 다가갔는데 은규가 먼저 보폭이 큰 걸음으로 성큼성큼 걸어왔다.
"안경 끼고 있네?"
그가 인사 대신 말했다. 아, 시야가 뚜렷한 것은 그 때문이었나보다. 은수는 황급히 손을 들어 안경을 벗었다. 안경의 가장자리를 벗어나자마자 시야가 조금 흐릿해졌는데 그래도 가까운 거리에 있는 그의 얼굴은 잘 보였다. "안경 끼니까 인상이 신기하다." "이상해요?" "그렇다는 건 아니고." 너 여기 안경 자국 남았다, 라고 말하며 그가 엄지와 검지로 은수의 코 위쪽을 꾹 눌렀다. 은수는 발작적으로 눈을 감았다 떴다. 손가락들이 멀어졌다. 그 손가락들이 멀어져가는 궤도를 눈으로 쫓다가 자연스럽게 은규의 눈을 들여다보게 되었는데, 밝은 빛 아래에서 그의 눈동자는 갈색에 가깝게 보였고 은수는 그것이 자신이랑 비슷하다고 생각했다. 그러자 어쩐지 속이 울렁거리기 시작했다. 더위를 먹은 것인지도 모른다.
"서, 선배."
은수는 왠지 급하게 그를 불렀다.
"응?"
"지금……"
시간 있어요? 말해놓고보니 상황에 어울리지 않는, 전형적인 작업 거는 대사 같이 들려 순간 부끄러워졌다. 이마에서 땀이 나고 있다는 사실이 어쩐지 의식되었다. 은규가 웃으면서 그에게 되물었다.
"시간 많으면 뭐 할 건데?"
은수는 그의 손목을 잡고 정처 없이 학교 안을 돌아다녔다. 점심시간의 학교에는 어디나 사람이 많아서 안심이 되질 않았다. 결국 건물 안을 한바퀴 돌고 본관 지하의 교과 교실까지 들여다보게 되었는데 다행히도 그곳에는 아무도 없었다. 문도 잠겨 있지 않다는 점이 기뻤다. 은수는 문을 닫고 괜시리 창문 밖을 내다보다가 가장 눈에 띄지 않을 것 같은 뒷자리에 앉았다. 은규가 옆에 나란히 앉았다. 지하라서 그런지 지상보다는 기온이 조금 낮고 먼지 냄새가 났다. 은수는 여전히 자신이 그의 손목을 잡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는데, 손을 떼는 대신 멈칫거리다가 그의 손등을 엄지로 문질렀다. 고개를 들어 그의 얼굴을 보았다.
"왜 이렇게 구석까지 왔어?"
은규가 물었는데 그건 이유를 몰라서 묻는 거라기보다는 장난을 걸고 싶어하는 것 같았다. 은수는 그 속내를 짐작하면서도 그런 질문들을 못 들은 체하거나 자연스럽게 넘길 만한 성정이 못 되었다. 은수는 손을 잡지 않은 다른 쪽 팔에 얼굴을 반쯤 묻었다. 그를 올려다보자 반쪽짜리 시야에 비친 얼굴이 장난스러워보여서 꽁한 기분이 드는 한편 귀엽게 느껴지기도 했다. 참, 연애라는 게 뭔지. 그는 아주 작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선배가,"
"응?"
"……만졌잖아요."
손으로, 코를…… 그게 뭐가 어쨌냐고 생각할 수도 있을 것 같은데 그냥, 그랬다. 은수는 괜시리 그의 손목을 한 번 꾹 쥐었다가 손을 놓았다. 손 안에 뼈대의 굴곡과 살갗의 감촉이 남았다. 아, 왠지 부끄러워졌다. 그는 팔을 모아 스스로를 끌어안듯이 얼굴을 완전히 파묻었다. 뒷덜미가 화끈거렸는데 해 아래에 오래 내놓은 탓인지 다른 이유 때문인지 아리송했다. 아까 전까지만 해도 굉장히 소란스럽다고 생각했던 것 같은데 지금은 사위가 무척이나 조용했다.
"그럼 키스할래?"
은규가 문득 물었다. 은수는 살짝 고개를 들었다.
"여기 학굔데……"
"아무도 없잖아."
그런가. 그럼 괜찮을지도 모르겠다. 은수는 조금 망설였지만 그 망설임은 길지 않았다. 얼굴을 완전히 들어 그를 돌아보자 그가 가볍게 다가왔다. 마치 맞는 조각을 찾은 퍼즐처럼 고개가 자연스럽게 맞물렸다. 벌어진 입술 사이로 호흡이 먼저 섞였다. 혀끝을 부드럽게 깨물고 키스를 했다. 키스는 가벼웠고 그리 길지 않았지만 시간은 때때로 이런 식으로 멈추는 것 같았다. 그런 것이 참 신기하다고, 때가 되면 선명해지는 계절과 요란스러운 쓸쓸함보다 더 신기하다고 그는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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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에 물 수 변이 많아서, 울 일이 많을 거야."
중학교 1학년 때인가, 엄마 손에 이끌려 옆 동네에 용하다는 무당에게 사주팔자를 보러 간 적이 있었다. 치렁치렁한 장식이 달린 거대한 붉은 모자를 쓰고 있던 무당은 그의 이름 한자와 생년월일을 받아들자마자 대뜸 그렇게 말했다. 은수는 멀뚱하게, 다소 기가 죽어서 무릎을 꿇고 앉아 그 말을 들었다. 무당의 등 뒤로 보이는 거대한 병풍과 제삿상과 정체를 알 수 없는 장식들과 문 위에 붙어 있는 부적이 조금 무섭다는 생각을 했었던 것 같다. 사주가 안 좋아서 금전운이 없을 것이고 사건사고가 많을 것이며 팔자가 어쩌고저쩌고한 얘기들은 솔직히 자세하게는 기억이 나지 않지만 그 첫마디는 이상하게 지금까지도 기억에 남아 있다. 기억이 날 수밖에 없는 것이,
"네 이름은 너네 아빠가 지었거든."
하고 엄마가 말했기 때문이다. 참 그 사람도 뭘 알아보지도 않고…… 그렇게 투덜거리며 엄마는 앞좌석에 앉아 안전벨트의 선을 길게 잡아끌었다. 은수는 덩달아 안전벨트를 맸다. 방학 때였고, 평일 낮이라 도로에는 차가 적었다. 은수는 별세계에 끌려갔다 온 사람처럼 느리게 눈을 깜빡이며 차 시트에 몸을 묻고 창밖을 쳐다보았다. 흰색 경차는 매끄럽게 도로 위를 나아갔다. 날씨가 좋았다. 날이 밝아서 건물의 유리창에 반사된 햇빛들이 번쩍거리면서 시야를 어지럽혔다. 엄마가 불쑥 물었다.
"너, 개명할래?"
은수는 창문에 붙이고 있던 이마를 떼고 고개를 돌려 옆을 쳐다보았다.
"아니 뭘, 됐어."
"안 좋은 이름이래잖아."
"그래도……"
차가 신호에 걸려 멈춰섰다. 은수는 괜시리 안전벨트의 선을 손가락으로 만지작거리다가, 붉은 신호등을 올려다보았다. 그가 웅얼거리듯이 덧붙였다.
"아빠가 지은 이름이라며. 그러니까, 됐어."
신호는 오래 가지 않았다. 차는 다시 매끄럽게 나아가기 시작했다.
얼마간 말이 없던 엄마가 한숨처럼 그러니, 하고 대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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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다발을 끌어안고 깜빡 졸았던 것 같다.
"다 왔어, 내려야지."
엄마가 말했고, 은수는 한 손에 꽃을 들고 다른 손으로 느릿느릿 차 문을 열었다. 겨울이었고, 서울 근교로 나온 덕분에 건물이 적어 바람이 더 거센 것처럼 느껴졌다. 바람이 그의 얼굴 쪽으로 불고 있어 기껏 조금 길러 놓은 앞머리가 정신없이 나부꼈다. 주말에도 교복을 입고 있자니 기분이 이상했지만 그래도 수업 중에 조퇴를 하는 것보다는 나았다. 올해는 주말이라서 잘됐네, 하는 생각을 하다가 잘됐다는 말이 이상해서 머릿속에서 지웠다. 패딩 대신 검은색 코트를 꺼내 입은 것은 일부러 그런 것이었는데, 내리자마자 아, 패딩, 하고 후회가 되었다. 잠이 덜 깬 얼굴에 칼바람을 맞고 있자니 정신을 차리기가 어려웠다.
코를 훌쩍이며 납골당 안으로 들어섰다. 걸을 때마다 꽃다발이 바스락거리는 소리를 냈다. 요즘에는 이런 꽃다발도 참 세련되게 나오지 않니, 라고 엄마가 말을 했는데, 그 말도 조금 이상하다고는 생각했지만 굳이 입밖에 내지는 않았다. 이상하다거나 마음이 무겁다거나 하는 일도 이제는 조금 해묵은 것이 되어버린 것일지도 모른다. 익숙해진다는 것은 참으로 이상한 일이다.
아래에서 두 번째 칸인 덕분에 몸을 한참 수그려야만 했다. 납골당 안은 춥지는 않았지만 서늘했다. 서늘했지만 밝았다. 낮인데도 조명을 켜놓아 시야에 노란 빛이 돌았다. 은수는 거의 무릎을 꿇다시피 쪼그리고 앉아서 칸의 문을 열고 꽃다발을 집어넣고 사진을 보다가, 옆에 있는 엄마를 한 번 보고는 무릎에 손을 얹었다. 처음 몇 해 정도까지는 사진에 대고 이런저런 말을 걸어본 것 같기도 한데 이제는 그러는 일은 없었다. 엄마가 고등학교 교복은 한번 보여줘야하지 않겠니, 하고 말한 덕분에 교복을 입고 오긴 했지만 솔직히 말하자면 죽은 사람이 지켜본다는 것은 무서웠고 그건 아빠한테 좀 미안한 일인 것 같기도 했다. 아닌가? 모르겠다. 죽음이라는 것은 너무 특별한 것이어서 예외와 그렇지 않은 일이 잘 구별되지 않았다.
한참 뒤에 일어섰다. 무릎이 뻐근했다. 바짓단의 먼지를 털고 있는데 엄마가 불쑥 말했다.
"너 그거 아니?"
"응?"
"우리 집 대출금 다음달이면 다 갚는다?"
그래? 은수는 여상하게 되물었다. 납골당 밖으로 나가면 또 춥겠지, 아랫단부터 단추를 채우면서 덧붙였다.
"잘됐다. 그러면 조금 덜 바쁘게 지낼 수 있겠네."
은수는 웃었다. 죽은 사람 앞에서 웃는다는 것이 조금은 이상하다는 생각을 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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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줄로 요약될 수 있는 사실에 대한 기억을 말하자면 그건 남은수가 9살 때 일이었고 사인은 폐암이었다.
한 줄로 요약될 수 없는 사실에 대해 떠올리자면 죽기 직전인 사람의 손가락은 마치 뼈대에 가죽만을 걸쳐놓은 것처럼 몹시 차갑고 딱딱했으며 안쪽 방의 담배 냄새는 그가 죽고 난 뒤에도 아주 천천히 빠졌다. 은수는 중학교 때부터 차츰차츰 담배 한두 개비씩 찾아 피던 소위 말하자는 일진들을 보면서 그것이 아주 천천히 죽는 방법 중 하나라고 생각했다.
그 뒤로는 혼자 있는 시간이 길어졌다. 엄마는 그가 태어나고부터 그만뒀던 일을 다시 시작해야만 했다. 투병 기간은 짧았지만 항암 치료에는 지금보다도 더 돈이 들어가던 때였고 집을 산 지도 얼마 되지 않은 무렵이었다. 운이 나빴다고 할 수 있다. 그러한 사실을 자세하게 알게 된 것은 조금 더 나이를 먹은 뒤였지만 어쨌거나 그때의 은수도 운이 나쁜 상황이라는 것을 알고는 있었다. 알았다기보다는 느꼈다.
다시금 요약되지 않는 것에 대해 말해보자면,
어느 날 집에 왔을 때는 겨울이라서 그런가 해가 일찍부터 지고 있었다. 어두운 노을이 창가부터 거실 안쪽까지 빼곡하게 메우고 있었다. 난방이 되지 않은 거실 바닥은 시뻘건 색깔과는 반대로 발바닥에 차갑게 달라붙었다. 혼자 있을 때 보일러를 키는 것은 어쩐지 사치스럽다고 느껴져서 대신 뭔가 따뜻한 것을 마시고 싶다고 생각했다. 물을 끓이는 것 정도는 그전에도 몇 번 해본 적이 있으니 별다른 위기감 없이 주전자에 물을 넣고 불에 올렸다. 거의 바닥을 드러낸 유자차 병은 끈적끈적한 것이 뚜껑 근처에 말라붙어 있기 때문인지 잘 열리지가 않았다. 싱크대 옆에 서서 뚜껑을 돌리려고 애를 쓰다가 팔꿈치로 가스레인지 아랫부분을 쳤는데 와장창 소리가 먼저 들렸다. 팔에 화끈한 느낌이 든 것은 그 다음이었다. 철 주전자가 빈 소리를 내며 부엌 안쪽으로 굴러갔고 데인 곳이 아파서 저절로 눈물이 났는데 어떻게 해야할지 알 수가 없었다. 한박자 늦게 싱크대에 팔을 넣고 찬물을 틀었다. 아팠다. 눈물이 났다. 해가 지고 있었다. 부엌에서 거실 창문까지는 일직선으로 내다보이는 방향이었는데 그는 여전히 시뻘겋게 해가 지고 있는 창밖을 무의식중에 쳐다보며 엉엉 울었다. 계속 눈물이 났는데 울거나 아픈 것을 아무도 되물어주지 않으니까 그런 것들이 몹시 의미가 없는 것처럼 느껴졌다.
아무도 자신을 도와줄 수 없다는 생각을 문득 했고 그래서 아주 외로워졌는데, 그게 그가 기억하는 외로움에 대한 가장 명백한 장면이다.
3
"……나 편의점 좀 들러도 돼?"
집에 오는 길에 또 졸다가 동네 뒷산이 보이자 문득 잠에서 깼다. 엄마는 그러라고 하고는 길 가장자리에 차를 세웠다. "먼저 가도 돼. 나 걸어서 들어갈게." 차가 떠나는 것을 지켜보다가 이내 도로가 꺾이는 곳에서 차가 완전히 사라지자 그는 편의점에서 반대 방향으로 걸었다. 늦은 오후였고 해가 지고 있었는데, 산등성이가 벌겋게 물드는 것을 쳐다보고 있자니 또 그때 생각이 났다. 지금은 겨울이었고 긴 팔을 입고 있으니 흉터가 보일 리도 없지만 사실은 계절 같은 것은 별로 중요하지 않았다. 그는 뒷산 아래쪽의 야트막한 산책로를 따라 오르기 시작했다. 날이 추워서 그런가 사람이 없었다. 몸을 옹송그려도 마치 그런 것은 상관없다는 듯이 찬바람이 살갗에 스몄다. 경사가 높지도 않은데 헉헉거리면서 숨을 내쉬게 된다.
산책로의 중간에는 아래를 내려다보라고 넓게 트인 곳과 난간과 몇 가지 운동 기구들이 있었다. 운동 기구들 사이를 지나가자 오래된 쇠 냄새가 났다. 역시나 쇠 냄새가 나는 난간을 조심스럽게 짚자 너무 차가워서 불에 데인 것처럼 깜짝 놀랐다. 난간은 그가 오랫동안 손을 올려놓고 있어도 좀처럼 따뜻해지지 않았다. 듬성듬성 서 있는 나뭇가지들이 바람결에 버석거리면서 요란한 소리를 냈다. 빨갛게 한꺼풀 덮어쓰고 있는 건물들의 머리 위를 한참동안 내려다보았다.
그는 소리를 지르고 싶다고 생각했다. 아니면 울고 싶다고 생각했다.
기일이라서 그런 것은 아니었다. 아니다, 맞았다. 하지만 그것은 죽은 사람에 대한 오래된 그리움 같은 것은 아니었다. 아니다. 맞는 것일지도 모른다. 외로움과 그리움은 맞닿아 있는 구석이 있다. 그래도 그것만은 아니었다. 정말로 그것만은 아니었다. 외로움이라는 것은 아무도 없어서 생기는 것이지 누구 때문에 생기는 것은 아니었다.
누가 잘못해서 이렇게 외로운 것이라고는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그는 결국에는 울기 시작했다. 이번에는 바람이 그의 등쪽으로 불기 시작했다.
어느새 공기가 바싹 말라 있었다. 겨울이었다.
은수는 복도 한켠에 서서 반대편의 창문 너머로 밖을 내다보았다. 희미하고 회색빛이 도는 시야가 다소 낯설었다. 환기를 시키겠다고 건물 문을 열어놓은 탓인지 실내인데도 입을 열 때마다 조금씩 하얀 숨이 나왔다. 최근에 산 긴 겉옷 덕분에 그는 좀처럼 추위를 타지 않았지만, 공기 중에 드러난 손이나 귓불 같은 곳은 유독 싸늘하게 식어 있었다. 2학기 기말고사가 끝난 지 얼마 되지 않은 무렵이었다. 학기가 거의 끝나가기 때문인지 아이들은 너나할 것 없이 탁 풀어진 모습을 보였다. 남은수도 마찬가지였다. 수업에도 좀처럼 집중을 하지 못했고 마음을 다잡고 펜을 들어도 얼마 지나지 않아 책을 덮기가 일쑤였다. 싱숭생숭했다. 무언가가 끝나간다는 것은 으레 그런 법이다.
그렇게 일반화를 시킨 것이 무색하게도 은수는 복도 저편에서 계단을 내려오는 누군가를 발견한 순간 그게 그런 기분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보지 않은 척을 하려고 해도 그는 너무 눈에 띄었기 때문에 은수는 잠깐 눈을 감았다가 떴다. 계절이 바뀌었고 계절이 바뀌는 동안 변한 것은 날씨 뿐만이 아니었는데, 그 변화의 한가운데에 그가 있었다. 은수는 그가 스파이라는 것을 조금 뒤늦게 알았다. 학생회실에서 만나지 않으면 마주칠 일이 적었기 때문이었다. 그래도 소문은 언제나 발이 빨랐고 은수는 그 얘기를 듣자마자 일순간 멍하다가 그 다음에는 목 언저리에 뜨뜻미지근하게 열이 오르는 것을 느꼈다. 그는 그 소식을 말해준 사람(누구였지? 잘 기억도 나지 않는다.)이 떠나고 나서도 한참 골몰한 끝에 깨달았다.
남은수는 화가 나 있었다. 그것도 꽤나.
그런 식으로 화가 나 본 것이 너무나도 오랜만의 일이어서 어리둥절할 지경이었다. 은수는 저도 모르게 손으로 자신의 목 아래쪽을 잡고 숨을 참았다. 별로 소용은 없는 일이었다. 그 이상한 열은 반나절을 갔는데 수업이 모두 끝날 무렵 그는 가방 속에 언제나 넣어다니는 위장약을 하나 꺼내 먹어야만 했다. 왜 이렇게까지 화가 나지? 그는 스스로 좀처럼 화를 내지 않는 성격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고 그래서 그런 기분은 더욱이 의아했다. 하지만 화가 난다든가 슬프다든가 하는 감각은 인과관계가 꼭 완벽하게 일치하는 것은 아니어서 그럴듯한 당위를 찾지 못해도 울컥울컥 차오르는 법이다.
아니,
사실,
왜 이렇게까지 화가 나는지는 알고 있었다. 모르는 척하고 있을 뿐이다.
그것이 이미 몇 주 전의 일이었다. 잠깐 눈을 감았다 뜨는 그 찰나의 순간 은수는 굉장히 망설였고, 망설였지만 복도를 가로질러 가는 발걸음은 단호했다. 몸을 돌리고 서 있는 그의 옷자락을 잡으려는 순간 또 한번 망설이게 되었지만 상대는 그의 기척을 이미 알아차린 후였다. 고개를 들어 올려다보자 어쩐지 차분하고 덤덤한, 특유의 표정을 마주하게 되어 은수는 덩달아 침착해지는 것을 느꼈다.
"선배."
지금 나는 이상한 목소리를 내고 있지는 않나?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잠깐…… 얘기 좀 해요."
본관 뒤편에는 건물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어 다른 곳보다 기온이 낮았다. 문 밖으로 나와 건물 모서리를 돌아 뒤쪽으로 가는 동안 둘 다 말이라고는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얘기 좀 해요, 라니. 왜 그런 말을 한 것일까? 좀 더 적당한 말이 있었을 것 같다. 지금 당장은 떠오르지 않지만…… 은수는 자리에 서서 무어라 입을 여는 대신 아스팔트 바닥 위로 남은 눈 녹은 자리를 괜시리 신발 밑창으로 문질렀다. 평소 같았으면 유성이 먼저 대화의 운을 뗐을 수도 있으나 그를 끌고 온 것은 은수였고 할 말이 있는 것도 은수였다. 그러므로 말을 해야하는 것 역시 남은수이다. 아, 이런 장면은 정말이지 낯설었다. 은수는 어색할 정도로 긴 침묵이 지나간 후에야 입을 열었다.
"선배, 왜……"
한참을 어물거린 것과는 달리, 입을 열자마자 어디에서 온 것인지, 어디에 숨어 있었던 것인지 알 수 없는 열이 다시금 목덜미에 확 끼쳐왔다.
"왜 그런 거에요?"
목소리가 저절로 높아졌다. 주어와 목적어가 불분명한 말이었지만 그 뜻은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되었다. 유성은 유심한 눈길로 그를 내려다보았는데 그 표정은 조금 당황한 것 같기도 했고 어려운 것 같기도 했다. 은수는 그의 표정을 명확하게 읽을 수가 없다고 생각했다. 생각해보면 유성은 항상 조금 생각을 읽기가 어려운 사람이었다.
"화났어?"
"네. 화났어요."
"왜?"
유성은 그의 화를 부추기려는 것보다는 그저 정말로 순수하게, 궁금한 것처럼 물었다.
"네가 그렇게 학생회를 중요하게 생각할 줄은 몰랐는데."
"아니, 그런 게 아니라…… 그런 게 아니잖아요, 선배."
그런 게 아니었다. 그런 게 아니었지만 정확하게 무엇인지 설명하기도 어려웠다. 은수는 말을 고르려고 했는데 익숙하지 않은 열 때문인지 머리가 달아올라서 단어들은 온통 뿔뿔이 흩어졌다. 말을 뱉어낼 때마다 열은 뺨이나 귓불, 아랫배 같은 곳으로 옮겨가는 것 같았다.
"선배 거짓말을 한 거잖아요. 사람을 속이면 안된다는 생각도 안 한 거잖아요. 안 그래요?"
타인에게 그런 식으로 쏘아붙이듯이 말을 하는 것은 처음이었다. 어쩐지 혀끝이 화끈한 느낌이 들었다. 눈꺼풀 위에 얇은 막을 씌운 것처럼 시야가 흐려서 유성의 표정이 잘 보이지 않았다. 왜? 이런 순간에 울고 싶지는 않았다. 왜냐하면 그건 너무 구차해지는 일이기 때문이었다. 은수는 숨을 크게 들이마셨고, 유성이 천천히 대답했다.
"하지만 나는 널 꽤 좋아하는데, 그건 거짓말이 아니야."
그 말에, 갑자기 얻어맞은 것처럼 눈물이 났다.
"그렇다고,"
그의 목소리가 거의 소리를 지르는 것처럼 높아졌다. 은수는 생각했다. 나에게 정말로 화를 낼 자격이 있는 것일까? 그는 원래 이런 식으로 화를 내는 사람이 아니었다. 하지만 화가 났고, 그 이유가 다른 것과 맞닿아 있다는 것을 그는 알고 있었다. 알고 있었지만 오랫동안 모르는 척했다. 왜냐하면,
"그렇다고 정말로 좋아해줄 것도 아니잖아요."
아주 쓸쓸해질 것임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렇게 대답하는 목소리는 한풀 꺾여 있었다.
꽃으로 만든 책갈피를 받은 적이 있었다. 여름 쯤이었다. 지금과는 아주 다른 계절이었다. 노란색 꽃의 가장자리가 메말라 있어서 손을 대면 금방이라도 부스러질 것 같았다. 그래서 아주 조심스럽게, 조심스럽게 그 책갈피를 만졌다. 은수는 백과사전 사이에 그 책갈피를 끼워 놓았는데 왜냐하면 그게 집에 있는 책 중에 가장 두꺼운 책이기 때문이었다. 덕분에 그는 이틀에 한번씩 백과사전을 펼쳐보는 이상한 사람이 되었다. 꽃을 보고 있으면 생각이 났다. 가장 많이 생각이 나는 것은 그를 처음 봤을 때였다. 은수는 그의 머리카락을 만져보고 싶다고 생각한 것을 오랫동안 기억했다. 아마 앞으로 몇 년쯤 더 지나도 기억하고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햇살이나, 꽃이나, 끝나지 않는 여름…… 뒤를 돌아도 붙잡을 수 없는 많은 것들.
아, 정말로 쓸쓸했다.
1
무언가가 끝나가고 있었다.
은수는 그걸 느낄 수 있었다. 그는 끝나간다, 라는 말이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어디서부터 끝이 시작되어서 어디에서 정말로 끝나는 것일까? 그 말은 어떤 명확한 순간을 지칭한다기보다는 자신도 모르게 들어선 내리막길과 그 길을 따라 천천히 내려가는 그 모든 시간들을 말하는 것 같았다. 그리고 그 끝나간다는 것에 어떤 이정표를 찍으려는 것처럼 종업식 날이 다가왔다. 담임 선생님은 툭하면 그들에게 이제는 신입생이 아니며 1년은 금방 지나가므로 수능은 미리미리 준비하는 것이 좋다는 것을 일깨워주었고 은수는 그런 말들을 들으면 곧잘 흔들리는 사람답게 일순 불안해지다가도 이내 잊어버리고는 했다. 그는 종업식 날 담임 선생님이 무어라 말을 하는 내내 턱을 괴고 앉아서 이따금씩 세 자리 앞, 대각선 쪽에 있는 안나의 뒷모습을 쳐다보았다. 그들의 자리는 그동안 몇 번쯤 바뀌었기 때문에 이제 그들은 더 이상 짝이 아니었고 곧 같은 반도 아니게 될 것이었다.
그녀와 또 다시 하교하게 되는 일이 있을까? 그건 잘 모르는 일이었다.
잘 모른다고 생각하니 어쩐지 씁쓸해져서, 턱을 다른 손으로 바꿔 괴었다.
2
"선배는 진짜 나쁜 사람이에요."
비난조의 말은 그의 입에서 나와서 흰 숨으로 뿔뿔이 흩어졌다. 그렇게 말하면서 유성을 스쳐 지나간 뒤, 은수는 빠른 걸음으로 본관을 지나쳐서 신관으로 향했다. 학급 교실이 없는 신관의 화장실에는 사람이 적었다. 개수대에서 손을 씻고 있는 학생이 한 명 있을 뿐이었다. 은수는 가장 안쪽 칸으로 들어가 문을 걸어 잠그고는 그 한 명이 밖으로 나가기를 기다렸다. 눈을 감고 화장실 문에 이마를 대자 감촉이 얼음장처럼 차가웠다. 열 오른 이마가 싸늘하게 식어가는 느낌이 들었다. 그 느낌을 참기 위해 입술을 깨물었다. 이내 물소리가 멈췄다. 발소리가 멀어졌다. 유리문이 닫히는 소리.
"……윽."
입을 열자 목이 메이는 소리가 났다. 한 번 소리를 내고 나니 줄곧 참아왔던 눈물이 덩달아 왈칵 흘러나왔다. 울음은 아랫배에서부터 올라오는 것 같았다. 눈가를 눌러 닦아 보아도 계속 눈물이 나와서, 시야가 밝아졌다 흐려지기를 반복했다. 눈물은 손가락 사이로 끝없이 넘쳐흘렀다. 어디서 이렇게 많은 물이 나오는 것인지 알 수가 없을 정도였다. 정신없이 우는 와중에도 자꾸만 서러운 소리가 입에서 나오는 것 같아서 옷소매를 이로 깨물었다. 그렇게 한참을 울었다.
우는 내내 그는 사라져버리거나, 혹은 모든 것이 끝나버렸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3
강이름 은溵에 물가 수洙를 써서 은수였다. 그래서 눈물이 많다고. 아, 정말로 그런 것일지도 몰랐다.
4
종업식이 끝나고 나서 혼자 교문 밖으로 나섰다. 같은 반 아이들 몇몇이 같이 밥이나 먹고 노래방이나 가자고 졸랐지만 좀처럼 그런 기분이 들지 않아 거절했다. 겉옷 지퍼를 목끝까지 올리고 그 위에 긴 목도리를 칭칭 둘러매어도 겨울 바람은 곧잘 빈틈을 찾아 파고들었다. 바람이 강하게 불고 있었다. 인도 가장자리에 일정한 간격을 두고 늘어서 있는 가로수들은 잎이 없어 유난히 앙상해 보였다. 그는 나무들의 위쪽을 쳐다보며 걸었다. 푸르스름한 회색 빛이 도는 낮은 하늘과 바람이 불 때마다 서걱거리는 소리를 내는 마른 나뭇가지와 속이 들여다보이지 않는 새 둥지 같은 것들. 가을과 초겨울 동안 쌓인 마른 낙엽들이 자꾸만 발에 채였다. 도로 쪽에 가깝게 걷고 있는 그의 옆을 자동차들이 빠르게 스치고 지나갔다. 정류장 표지판 아래에 모여 서 있던 사람들은 초록색 버스가 도착하자 일제히 빨려들어가듯이 버스에 올라탔다. 정수리가 노란 길고양이 한마리가 그의 발치를 순식간에 가로질러 지나갔다. 길 모퉁이에 있는 까페의 알바생이 거센 바람에 문을 닫는 것을 보았다.
사라져버리고 싶다거나 모든 것이 끝났으면 좋겠다거나 생각해도 정말로 그렇게 되지는 않는다는 것을 안다.
은수는 주머니에 손을 넣고 교차로에 멈추어 섰다. 신호가 바뀌기 전 아주 잠깐 동안 그는 핸드폰을 꺼내서 연락처 목록에 들어갔다. 그는 망설이지 않고 하나의 전화번호를 지웠다. 곧 신호등이 초록불로 바뀌었고 그는 다시 핸드폰을 주머니에 집어넣고는 천천히, 아주 천천히 길을 건넜다.
오웬은 쉬는 날이면 언제나 점심 무렵에 느즈막히 일어나곤 했다. 그날도 눈을 떴을 때는 이미 한낮이었다. 일을 할 때는 밤을 새가면서 각본을 쓰고 휴일에도 나가서 리허설을 보는 것이 그의 일상이었지만 1년 365일을 그런 식으로 달릴 수 없다는 것은 본인이 더 잘 안다. 그러니 쉴 때는 게으른 고양이처럼 푹 퍼져서 아무렇게나 시간을 보내는 것이 좋았다. 얼마 전 로렌스가 사온 새 이불 커버와 베갯잇은 맨살에 닿는 감촉이 유난히 좋았고 얼굴을 비비고 있으면 잠이 다 깬 뒤에도 몇 시간쯤 더 잘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그가 빈 베개를 끌어안으며 몸을 뒤척이자 발치에서 웅크리고 자고 있던 고양이(진짜 고양이)가 도망가는 소리가 들렸고 총총 멀어지는 작은 발소리를 들으며 오웬은 크게 하품을 했다. 그는 뒷목을 긁다가, 자리에서 느릿느릿 일어났다. 시계를 보았다. 문지방을 밟으며 방 밖으로 나왔다.
여름이 가까워지고 있었다. 그것을 증명이라도 하듯 반쯤 열어둔 블라인드 사이로 떨어지는 햇빛이 선명했다. 오웬은 배가 고프다고 생각했다. 서랍장을 열어 두번째 칸에서 시리얼을 꺼내고 커피 원두를 찾았다. 로렌스는 영국에서 나고 자란 사람답게 커피보다는 차를 좋아했지만 오웬은 반대였고 그래서 그들의 집에는 언제나 원두와 찻잎이 나란히 자리하고 있었다. 커피 머신의 전원을 키며 다시 한 번 하품을 했다. 진한 커피와 시리얼 그릇을 양 손에 들고 거실로 나와 블라인드를 완전히 열었다. 베란다에 나가 있던 강아지(라고 부르기에는 이미 너무 커버렸지만, 어쨌거나 로렌스는 항상 그 개를 강아지라고 불렀다.)가 발치에 와서 납작하게 엎드렸다. 오웬은 자신의 발가락을 핥으려는 강아지의 혀를 피해 거실의 낮은 테이블에 발을 올리고 커피를 한 모금 들이켰다. 로렌스가 보면 예의 없어 보인다고 할지도 모르겠지만 오웬은 혼자 있을 때에도 없는 사람을 신경쓰는 사람은 아니었다.
"윽."
시리얼을 한 입 털어넣은 오웬이 안 좋은 소리를 냈다. 무가당이었다. 세상에 무가당 시리얼 같은 걸 먹는 사람들은 지옥에서 온 사람들밖에 없을 것이라고 생각하면서 살았는데 로렌스가 바로 그런 사람이었다. 오웬이 거기에 대해 뭐라고 말할 때마다 로렌스는 일반 시리얼에 얼마나 많은 당이 들었으며 그것이 사람 몸에 어떤 영향을 끼치는지ㅡ너는 운동도 안 하잖아? 로렌스가 그렇게 말하면 항상 할 말이 없어졌다ㅡ에 대해 유창하게 설명했으므로 오웬은 자신의 동거인이 지옥에서 온 사람임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저번에 분명 카트에 들어 있던 무가당 시리얼을 다른 것으로 바꿔치기 했던 기억이 있는데 그걸 또 언제 로렌스가 알아차렸는지는 모를 일이었다. 오웬은 돌을 씹는 것 같은 표정으로 달지 않은 시리얼을 씹어삼켰고 커피를 벌컥벌컥 들이켰다. 그가 소파 등받이에 머리를 기대고 멍하니 창밖을 바라보았다.
소파 팔걸이에 반으로 접은 조간 신문이 걸려 있었다. 오웬은 아무 생각 없이 신문을 펼쳐 헤드라인을 훑었다. 첫 페이지에는 별로 흥미로운 기사가 없었다. 오웬은 주로 인터넷 신문으로 뉴스를 확인하는 편이었으므로, 신문을 집어든 것자체가 실로 오랜만의 일이었다. 그리고 두번째 장을 펼쳤을 때 오웬은 문득 입에 대고 있던 머그잔의 가장자리를 이빨로 깨물었다. 소파 등받이에 기대고 있던 머리를 들고 몸을 약간 앞으로 기울여 기사를 읽었다. 그는 다음 장으로 신문을 한 번 넘겼다가, 다시 앞 장을 보고는 흠, 소리를 내면서 신문을 다시 접어 옆으로 밀어두었다.
왠지 신문이 소파 팔걸이에 놓여 있던 것마저 계획적인 것처럼 느껴졌다. 실제로 그런지 아닌지는 모르겠지만, 어쨌거나 오웬은 그 기사가 의미하는 바를 알았고 맛없는 시리얼을 천천히 씹으면서 참 새삼스럽다는, 생각을 했다.
케이시는 오웬이 속한 극단의 유일한 사무직원이었다. 그녀는 점심 때 나가서 사온 것이라며 여러 가지 종류의 쿠키가 든 상자를 다과로 내밀었고 그가 자리에 앉자마자 말했다.
"동성 결혼이 합법화 되었다면서요? 축하해요."
오웬은 가방에서 극본을 꺼내다말고 어정쩡하게 대답했다. "어… 고마워요." 그의 태도가 애매했으므로 케이시가 조심스럽게, "혹시 그 사이에 남자친구랑 헤어진 건 아니죠?" 하고 물어본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지난 크리스마스에 로렌스가 극단에 다녀간 이후로 극단 사람들은 모두 오웬의 오래된 남자친구에 대해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 직접적으로 축하의 말을 들으리라는 생각은 못했다. 조금 놀라기도 했고, 그 말이 게이 커뮤니티에 속한 사람에게 보내는 축하인지 그가 곧 결혼을 할 것이라 짐작하고 보내는 축하인지 알 수 없어서 애매하게 대답을 한 것이었다. 그는 고개를 가로젓고는 쿠키 상자에서 라즈베리 쿠키를 하나 집어들었다.
"혹시 딱히 결혼 생각은 없는 거에요?"
"그런 건 아닌데, 뭐랄까……"
뭐라고 말해야할까. 오웬은 잠시 생각해보았다.
"실감이 안 나네요."
오웬은 원래부터 화나 짜증을 제외하고는 감정을 겉으로 드러내지 않는 편이었으므로 적당히 대답했다. 그는 쿠키 상자에서 땅콩 쿠키를 골라내며(그는 땅콩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핸드폰을 확인했다. 원래 그는 오늘도 쉬는 날이었지만, 다음 시즌에 올릴 공연의 각본을 좀 수정하고 싶다는 주연 배우의 말에 따라 극단에 나온 것이었다. 수정본을 이메일로 보낼 수도 있었지만 좀 더 고칠 부분이 있으면 그 자리에서 듣고 바로 고치는 것이 더 빠를 것 같았다. 앞길에서 사고가 나서 15분 정도 늦는다는 배우의 메세지를 확인한 후 오웬은 바로 다음 메세지를 확인했다.
[오늘도 쉬어?]
로렌스가 보낸 메세지였다.
[밖에 나왔는데 저녁 땐 집.]
간단하게 답장을 보냈다. 케이시가 그가 일렬로 구석에 세워둔 땅콩 쿠키들을 보고는 짧게 웃었다.
오웬은 말하자면 기다리고 있었다. 그가 먼저 스크랩한 기사를 들이대면서 이제 결혼할 때가 된 것 같다고 선고하듯이 말하는 것은 쉬웠다. 하지만 10년 넘게 알아온 누군가의 성격으로 미루어 짐작하건대 지금은 기다려야하는 타이밍이었다. 로렌스는 무언가를 준비하고 계획하는 것을 무척 즐겨하는 성격이었고 이러한 삶의 전환점ㅡ이라고 해도, 크게 달라지는 것이 있을까? 오웬은 무신경하게 생각했다.ㅡ에 제대로 된 방점을 찍는 것을 유의미하게 생각할 것이 분명했다. 그것은 오웬 나름대로의 관대함이었고, 사실 오웬은 로렌스의 그런 점이 좀 성가시지만 재밌다고 생각하기도 했다.
그날 집에 돌아왔을 때 그 생각은 더 견고해졌다. 노트북 파일들을 뒤적거리면서 늦은 저녁에 볼 영화를 고르고 있는데 로렌스가 말했다.
"오웬, 혹시 목요일 저녁에 시간 있어?"
오웬은 올 게 왔다고 생각했지만 노트북 화면에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 대답했다.
"있는데, 왜요?"
"내가 저번주에 직장 근처에서 괜찮은 레스토랑을 발견했거든."
발견한 것이 아니라 찾아낸 것이 분명했지만 그 점을 지적하지는 않기로 했다. 오웬은 짐짓 차분하게 물었다. "이탈리안?" "프렌치야." 오웬은 흠, 하고 턱을 괴고 고민하는 척을 했다.(솔직히 재미있었다.) "드레스코드 있는 데에요?" "아닌데, 그래도 바람막이는 입지 말아줘." 로렌스가 말을 하면서 엄지 손가락으로 그의 뒷목 뼈대를 꾹꾹 눌렀고 그 느낌이 간지러워서 오웬은 키득거리면서 웃었다.
"좋아요."
그의 간단한 대답에 이번에는 로렌스가 웃었다. 그가 핸드폰을 집어들면서 말했다. "그럼 7시로 예약할게." 오웬은 대답 대신 눈을 내리깔고 마우스패드를 쳐다보았다.
와인은 세 잔째였다. 화이트와인 한 잔과 레드와인 두 잔. 오웬은 기분이 조금 좋아졌다. 밥은 맛있었다. 언젠가, 재작년이던가? 맛있는 걸 먹겠다고 다른 도시까지 차를 몰고 갔다가 눅눅해진 빵과 질긴 고기를 먹고 돌아오는 길에 대판 싸운 것을 떠올려보면 직장 근처에 있는 레스토랑을 고른 것은 확실히 좋은 선택이었다. 디저트로는 타르트 타탱과 바닐라 아이스크림이 나왔다. 달짝지근한 사과조림을 입 안에 굴리면서 와인을 한 모금 더 마셨다. 오웬은 로렌스가 오늘 공들여서 머리를 넘겼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그가 하고 있는 푸른색 넥타이는 올해 생일에 오웬이 선물한 것이었다. 오웬은 숨은 그림을 찾는 것처럼 그런 것들을 하나 둘 씩 알아차렸고 모르는 척했지만 사실은 로렌스도 오웬이 알고 있다는 사실을 눈치채고 있을 것이다. 눈치가 빠른 사람들의 교류란 대개 그런 법이다.
그래서 디저트 그릇이 빈 뒤에 테이블 위에 붉은 색 재질로 만들어진 반지 상자가 올라왔을 때 오웬은 놀라는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오웬은 반지를 보자마자 대답했다.
"좋아요."
"뭐가?"
"좋다고요, 뭐든."
흠, 로렌스가 작게 소리냈다. 테이블 위에 달린 노란 조명에 그의 까만 눈동자가 반짝거리고 있었다.
"내가 이거 받고 헤어져달라고 하면 어쩌려고?"
"재미없거든요?"
오웬이 왼손을 내밀었다. 로렌스가 그의 약지에 반지를 끼워주었다. 반지는 그의 손가락에 꼭 맞았다. 로렌스가 대체 어떻게 그의 약지 사이즈를 알았는지 알 수 없었지만, 아무래도 좋았다. 오웬은 손을 들어 불빛에 반지를 비춰보았다. 반지는 얇았지만 백금인 것 같았고 세련된 물결 무늬가 음각되어 있었다. 세심하고 심미안도 높은 로렌스는 어떤 물건이 오웬에게 어울릴지를 오웬보다 더 잘 알았다. 그는 손을 이리저리 뒤집으며 반지를 보다가 문득 벌어진 손가락 사이로 자신을 쳐다보고 있는 로렌스를 마주보았다.
아주 예전에, 그러니까 10년도 더 전에 도서관의 서가에서 빈 책장 사이로 그를 지켜보던 일이 문득 떠올랐다.
"왜 웃어?"
"좋아서요."
뭐가? 로렌스가 눈치없는 사람인 척 물었고, 오웬은 솔직하게 대답해주기로 했다.
"당신이 좋아서요."
그것은 말하자면 완벽한 승낙이었다.
글이 왜 이렇게 느끼한 할리퀸 소설처럼 써졌지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1 약혼반지는 세련된 걸로 골라놓고 결혼반지는 다이아몬드 큼직하게 박힌 패물같은 것 들고올 것 같은 로렌스 (po중국wer)
2 혼인신고만 올리자고 지랄했는데 결국 결혼식에서 로렌스 사돈의 팔촌까지 다 만나게 되는 오웬 (po중국wer2)
굳이 적어두자면 순서는 Act of killing - 무제 - -1 - 인력 - Signal fire - Missing link - 조각
이 순서대로 보면 둘의 감정의 흐름이 잘 보여서 좋다.
……고장 난 흰건반 대신 반음 올려 검은건반을 치며 목이 하얀 네가 말했습니다 그 방 창문 옆에서 음지식물처럼 숨죽이고 있던 내 걸음을 길과 나의 접(椄) 같은 것이었다고 말하고 싶지만 덕분에 너의 음악을 받아 적은 내 일기들은 작은 창의 불빛으로도 잘 자랐지만 사실 그때부터 나의 사랑은 죄였습니다*
오웬은 그 구절을 책에서 읽었다. 서재에 있던 낡은 시집 중 하나였다. 그는 낡아서 노랗게 번진 책의 가장자리를 접어두었다. 그 당시 그에게는 여자친구가 있었고, 이런 구절을 보여주면 좋아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그 책은 결국 보여주지 못했다. 그들은 얼마 지나지 않아 헤어졌기 때문이다. 고개를 숙이면 금색 머리카락 사이로 보이는 목이 길고 희던 여자아이였다. 하지만 오웬은 그 아이의 이름을 제대로 기억하지 못한다. 그와 마찬가지로 그는 자신이 시의 한 구절을 접어 두었다는 것을 꽤 오래 잊고 있었다. 그 시가 문득 떠오른 것은 아주 최근의 일이다. 그는 똑같은 시집을 도서관에서 발견했다. 익숙한 페이지들 사이에, 접은 자국이 없는 장. 그는 그 시를 다시 한 번 읽었다.
그는 중학생 때 두 명의 여자친구를 사귀었었는데, 둘 다 이름을 제대로 기억하지 못했다. 제시였는지, 제니퍼였는지, 제인이었는지, 조앤이었는지. 어쩌면 제니였을 수도 있겠다. 그 나잇대의 여자아이들은 감정이 빨랐다. 오웬은 그네들이 반짝반짝 빛나는 유리구슬 같다고 생각했다. 반짝반짝거리지만 만지면 차갑고, 반짝이는 것들은 유리안에 갇혀 있어 만질 수가 없는 그런 것. 그는 기본적으로 자의식이 강한 사람이었다. 타인을 자신의 안에 들이지 않는 것은 그에게 익숙한 행동양식이었다. 관계라는 것은 학습이었고, 그는 오랫동안 타자를 멀리하는 법을 학습했지만 한 번도 가까이 두는 것을 학습해본 적은 없다. 그네들과 오래가지 못한 것도 항상 크게 보자면 그런 이유였다.
목이 흰 것 같지는 않은데. 그는 책이 듬성듬성 꽂힌 서가 사이로 건너편을 내다보았다. 그는 자기 자신이 꽤 침착하다고 느꼈다. 그가 그것, 을 깨달은 것은 얼마 되지 않는다. 신기하게도 그는 그것을 아주 자연스럽게 받아들였다. 물론 부수적인 고민들은 컸지만서도, 영화의 큰 반전, 그런 것들에서 오는 압도감, 그런 느낌과는 거리가 멀었다. 그때 그는 담배를 피고 있었다. 대로변에 서서 버스가 오기를 기다리며 오랫동안 텅 빈 도로를 쳐다보았다. 초여름의 늦은 햇빛이 아스팔트 위로 드문드문 떨어졌다. 담배 연기가 아지랑이처럼 천천히 피어올랐다. 그는 그 사람, 의 눈동자를 생각하고 있었다. 손가락, 이라든가, 어깨, 라든가. 곧, 생각이 끊기고, 그는 담배를 발치에 떨어트렸다.
"아, 시발."
두 개피째의 담배였다. 장초를 떨어트렸다는 아까움과 이상한 피곤함이 몰려왔다. 그는 꽁초를 주우려 몸을 수그리다가 그 자세 그대로 쭈그리고 앉았다. 그의 뒷덜미에 더운 해가 쏟아지고 있었다. 그는 팔안에 이마를 대고 오랫동안 생각했다. 참, 합리적이지 못한 일이었다. 어느 모로 보나 그랬다. "아…… 정말 싫다." 침묵. 그는 지나가던 사람이 그를 돌아볼 때까지 오랫동안 쭈그리고 앉아 있었다. 그는 한참 후에 자리에서 일어나 바짓단을 털었다. 곧 버스가 왔고 그는 사람이 적은 버스의 가장 앞좌석에 앉았다. 눈을 감았다. 버스가 흔들리고 있었다. 덜컹, 덜컹. 그의 생각도, 마치 그릇에 담아놓은 물처럼 흔들리고 있었다.
그는 그 감정이, 앞에서도 말했다시피 합리적이지 못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회의주의자이자 냉소주의자였다. 그는 여러가지 생각을 했다. 이유를 찾으려는 시도는 그 중 하나였다. 그리고 실패했다. 그는 그가 그 동안 읽어온 수 많은 고전과 로맨스들을 약간은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이 되었다. 물론 그는 로미오도 베르테르도 아니었으므로, 불타는 열정에 빠지거나 깊은 실의에 빠지거나, 그 두 가지 행동양식은 모두 그에게는 해당이 없었다. 다만 그는 그것이 어느 순간에 끝나거나 할 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가 오랫동안 참아 온 분노와 우울처럼, 겉으로 드러내지 않는 것은 역시나 익숙했다.
그러나 익숙하다는 것은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했다. 그는 훌륭한 연기자였고 겉으로 드러내지 않을 수는 있었지만 그 사람의 목소리나 마른 손목에 대해서 생각하는 것을 멈출 수는 없었다. 지랄맞은 일이라고 그는 자진해서 평가했다. 어쨌거나 그 사람은 참, 여러 곳에 존재했다. 읽다 만 책의 한가운데에서, 도서관의 책장과 혼자 보는 영화와, 연노랑색 담배곽과, 신발코, 무수히 사라지는 연기처럼, 많은, 그러한, 상념들.
그는 문득 울고 싶다고 생각했다. 물론, 울지는 않았다.
그는 책을 손바닥으로 밀어 틈새를 가리웠다. 그 사람의 옆얼굴이 책들 사이로 사라졌다. 책의 나열번호를 적어둔 쪽지를 뒤집자 흰 면이 나타났다. 주머니에 넣어놨던 볼펜을 꺼내 시의 구절을 받아적었다. ……나의…… 죄였습니다. 벽에다 대고 쓴 글씨는 어딘가 삐뚤빼뚤했다. 그렇게 올곧은 마음도 아니니 상관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쪽지를 반듯하게 접어 손바닥 안에 쥐었다. 시집을 책꽂이 위에 올려 놓고 책장들 사이를 빠져나왔다. 그 사람은 카운터 앞에 앉아 있었다. "선배." 부르고, 불쑥, 주먹쥔 손을 들이밀자 올려다보는 눈동자가 까맣다.
"선물이에요. 가져요."
당연하게도 의아한 얼굴을 하면서도 손바닥을 내밀었다. 그 위에 종잇조각을 올려놓자 표정이 어딘가 미심쩍게 변한다. "쓰레기 버려달라는 건 아니지?" "설마." 그는 자신이 이 사람의 이름과, 시의 구절과, 같이 본 영화와, 찻잔의 무늬와, 어깨와 머리카락, 목소리와 손가락을 기억하리라고 확신할 수 있었다. 그래서, 그랬다. 그래서와, 그랬다, 사이에 존재하는 무수한 행간에 대하여는 굳이 적지 않아도 좋을 것이다. 그는 보폭이 큰 걸음으로 도서관을 빠져나오며, 시의 첫 구절을 떠올린다. 나는 걸어가기엔 멀고, 무얼 타기엔 애매한 길을, 누구보다 많이 갖고 있다.
* 청파동3ㅡ관음 /박준
그러니까, 오웬은 사실 깊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는 단순한 예상을 했다. 로렌스 우는 그 자신만큼이나 타인을 알아차리는데에 기민한 사람이었고, 둘러 가는 시구들 사이에서 그 진의를 알아차리지 못할 정도로 우둔하지는 않았다. 그의 행간은 자명했다. 수없이 많은 행간들이 존재했지만 어쨌거나 그는 구구절절히 변명하는 대신 에둘러 가는 방법을 택했다. 오웬은 쪽지가 몇 번 더 접혀 쓰레기통에 버려지는 상상을 했다. 별로 놀라운 상상은 아니었다. 그리고 앞으로는 마주쳐도 살갑게 인사하는 대신 눈을 피하게 될 것이다. 기숙사와 학년이 달라서 부러 찾지 않으면 마주칠 일도 없으니, 그건 차라리 잘 된 일이었다. 뭐…… 아마도 로렌스는 신사이니, 이것을 소문내거나 하는 일은 없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답지 않는 막연한 생각이었지만 어쩐지 믿을 만한 구석이 있었다. ㅡ그는 도서관에서 기숙사까지 오는 짧은 길목에 그런 생각들을 했다. 그저, 테이블 위에 다 먹은 음료수 병을 하나씩 올려놓는 것처럼 이상할 정도로 일상적이고 차분한 기분이었다. 그는 초록색 문으로 들어가 익숙한 복도와 계단을 지나쳐 자신의 방으로 들어갔다. 세 명이 같이 쓰는 방에는 사람이 없었고 불이 꺼져 있었다. 오웬은 불을 켜지 않은 채로 방문을 닫자마자 1층에 있는 제 침대 위로 풀썩, 엎어졌다. 빤 지 얼 마 되지 않은 시트에서 표백제 냄새가 났다. 베개에 코를 처박고 길게 길게 이어지는 생각들을 잘라내어 하나씩 정리해둔다. 그의 안에서 이제 합리적이지 않은 것은 없다.
라고, 생각하고 있을 즈음 노크 소리가 들렸다. 그는 깜빡 잠에서 깬 것 같은 기분으로 고개를 들었다. 노크 소리는 정중했다. 똑, 똑, 두 번. 오웬은 이상하게도 그것이 누구인지 문을 열기도 전부터 알고 있었다. 영화에서는, 도망가는 사람이 있으면 쫓아가는 사람도 있는 법이다. 클리셰라는 말이 현실에서도 해당이 될 줄은 몰랐다. 그는 문을 열었다. 거기에는 로렌스가 있었고 오웬은 문고리를 붙잡은 채 문간 위에 섰다. "왜 왔어요?" 그 말은 참 여러 가지 의미를 담고 있었다. 그게 단순히 왜 당신이 다른 기숙사에 있느냐, 라는 말이 아님은 그도 상대도 알았다. 로렌스는 그의 생각보다도 더 신사였던 것 같다. 굳이 친절한 거절의 말을 들려주러 여기까지 왔다. 오웬은 그 일련의 과정이 피곤하다고 느꼈다. 졸음이 왔다. 그리고 침묵이 길었다. ……그의 생각보다.
오웬은 자신이 생각할 수 있는 모든 부정적인 대답들에 대해서 상상하고 있었는데, 그 가운데 문득 떠오른 것은 언젠가 유진이 한 말이었다. "너는 의외로 로맨티스트구나, 오웬." 오웬은 그 말에 지랄 같은 소리, 라고 대꾸했던 것 같다. 유진의 논리는 그러했다. 타자에게 방어적이고 부정적인 사람들은 사실은 감성적인 사람이 많다. 그들은 자신을 방어하는 용도로 부정적인 생각들을 사용한다. 기대하고 상처받는 그 과정 자체가 싫기 때문이다. "하지만 무언가를 기대하지 살 수 있는 사람은 없는 법이지." 그렇게 말하는 유진이야말로 대단한 로맨티스트였다. 오웬은 그 말을 반쯤 수긍하고 반쯤 흘려들었다. ……왜 지금 이런 생각이 떠오르는 것일까?
"뭘 그렇게 웃어요."
그 말꼬리가 딱딱하게 끊어진 것은 그런, 생각들 때문이었던 것 같다. 아 이게 다 유진 때문이야, 인생에 도움이 안되는 형 같으니……. 그의 상념을 끊어내며 문득, 손이 눈앞으로 다가왔다. 머리카락을 쓸어내리며 헤집는 손길. 의외의 스킨쉽에 오웬은 눈을 잘게 깜빡였다. 아주 어렴풋한 체온이었다. 그러니까 딱, 손바닥 한 개 분량의 체온. 그러나 그는 왠지 지금까지 자신이 했던 모든 생각들이 부질없다고 느꼈다. 그제야 상대의 눈이 보였고, 그가 그 시선에서 무언가를 느끼기도 전에, 뒷말이 먼저 따라나왔다. "담배 끊을래?" 반사적으로 대답했다. "싫어요." "너무 단호한 거 아냐?" "싫은 걸 어쩌라구요." 오웬은 알고 있었다. 지금 문을 열지 않으면 영원히 열 수 없다는 것을.
그리고 그 뒤는 그의 예상과는 상관 없는 일이었다. 오웬은 잠깐 방 한가운데 서 있다가 로렌스의 옷소매를 끌어당겨 침대의 모서리에 앉았다. 여전히 불은 켜지 않아 방안이 조금, 어둑했다. "손님 대접 같은 건 못해요." 방안은 딱 남자애들 셋이 사용하는 공간만큼 무질서했으므로 로렌스 역시 그런 것을 기대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오웬은 잠시 망설였다. 나란히 앉아서 침묵하는 모습이 유쾌하지는 않았다. 그는 불쑥 손을 내밀었고 로렌스가 곁눈질로 그의 행동을 보았다. 그는 손바닥으로 로렌스의 손목을 감싸듯이 쥐어본다. 얇지는 않지만, 도드라진 뼈대가 손바닥 안의 오목한 부분에 닿는다. 그는 손가락으로 그의 손등을 툭툭 두드리다가, 손가락을 매만져보기도 했다. 매끈한 손톱의 감촉이 손끝에 걸린다. 오웬은 그제서야 자신이 줄곧 이렇게 하고 싶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눈동자와 어깨, 손가락과 발끝.
"뭐 하는 거야?"
"감상이요."
그는 짧고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그리고 거기에 아주 많은 예상들을, 버려두었다.
"어차피 졸업만 하면 이런 건 할 필요도 없을 텐데." 이것은 수학에 대한 문과계 사람들의 흔한 변명이다. 오웬은 그걸 알면서도 그 말을 입안으로 주워섬겼다. 그는 연습문제가 빼곡하게 적혀 있는 프린트를 성마르게 손등으로 밀어내며 의자 등받이에 몸을 기대었다. 그것을 다시 반듯하게 책상 한가운데로 끌고 온 것은 로렌스였다. "졸업까지 한참 남은 신입생이." 로렌스는 인내심이 강했다. 최소한 오웬 토너의 그것보다는 갑절은 셀 것이었다. 오웬은 그 낯에 여상하게 걸려 있는 웃음을 보며 펜 뒤쪽을 이빨로 잘근잘근 깨물었다. "그러는 그쪽은 노땅이잖아요." 말은 앞니에 걸려 뭉개지듯이 나왔다. "살면서 열여덟에 노땅 소리는 처음 들어보네." "아 나도 빨리 나이나 먹었으면. 졸업하고 싶다고요." "네가 3학년 과제량을 보면 그런 소리가 안 나올 걸." 로렌스의 손가락이 그의 손등을 툭툭 쳤고 그제야 오웬은 삐뚤게 의자에 기대어 있던 자세를 고쳐 앉았다.
해는 점점 짧아지고 있었다. 여름은 지구를 반 바퀴 비스듬히 돌아 북반구로 흘러가고 있었고, 오후에서 저녁으로 넘어가는 그 애매한 간극에는 푸른 빛과 붉은 빛이 기묘한 비율로 공존했다. 수업이 다 끝난 교실 안에는 사람이 없었다. 제각기 삐뚜름한 각도를 가지고 놓여 있는 책상들, 텅 빈 의자들. 오웬은 창틀을 타고 흐르는 불그스레한 햇빛을 곁눈질했다. "……듣고 있어?" 솔직히 안 듣고 있었다. 오웬은 눈을 느리게 몇 번 깜빡이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로렌스는 한숨을 내쉬었지만, 그것은 그렇게 깊은 한숨은 아니었다. "알려달라고 한 건 너잖아." "아니, 문제 푸는 법을 알려달라고요. 이론 말고." 과연 성질 급한 사람다운 대답이었다. 그러나 앞서 말했다시피 로렌스는 인내심이 강했고, 그는 조급한 반응을 보이는 대신 주의를 집중시키려는 듯 책상을 몇 번 두드리며 상체를 약간 앞으로 수그렸다. 그의 태도는 사뭇 진지했다. "잘 들어봐, 오웬." 여기서부터 오웬은 이미 감이 좋지 않았다. "고대 그리스에서는 철학자들이 수학을 했다는 걸 알아?" "안 궁금해요." "수학은 숫자와 기표로 이루어진 일종의 철학이야…… 수학만큼 적확하면서도 깔끔한 학문이 없지. 숫자의 개념은 어쩌면 인류 이전부터 존재했을지도 몰라." "안 궁금하다니까요." 고대 그리스인들은 수학으로 영원한 이데아를 꿈꾼거야." 오웬은 정말로 궁금하지 않았지만 로렌스는 끈질겼다. 한참을 철학과 숫자와 그 외 기타 등등의 것들에 대한 예찬을 늘어놓던 그는 이내 "그러니까, 책의 서문을 읽고는 그 안의 내용을 짐작할 수 없듯이 수학도 문제 풀이만 배워서는 그 아름다움을 익힐 수 없다고." 하며, 결론을 내렸다. 물론, 태생이 문과생이자 문학도인 오웬의 귀에는 한편의 훌륭한 개소리였다. "……그래서 이건 어떻게 푼다고요?" "안 알려준다." "젠장." 로렌스는 익숙한 욕설을 듣고도 모른 척 하는 것 역시 잘했다.
성미가 다급한 오웬에게는 그리 적절한 교육 방식은 아니긴 했지만 어쨌거나, 로렌스는 설명을 잘 했다. 그의 샤프펜이 종이 위를 천천히 따라가며 몇 가지 기호를 그렸고 오웬은 수학을 싫어하긴 했지만 뭐든지 들은 것은 금세 익힐 수 있을 정도로 영민했다. 삐뚜름하게 턱을 괸 채로 한참 동안 설명을 듣던 오웬은 문득 로렌스의 고개 숙인 정수리를 보았다. 검은 머리카락 아래의 이마와 콧등에 얹힌 안경, 그 너머의 눈동자가 기울어진 각도로 보였다. 반질반질하고 까만 눈동자. "안경 도수가 몇이에요?" 로렌스가 문득 고개를 들었다. "글쎄, 예전에 맞췄던 거라 잘 기억은 안 나는데." "안경 벗으면 안 보여요?" "아무래도……" 오웬은 그가 말을 끝맺기도 전에 손을 뻗어 그의 안경을 비스듬히 밀어올렸다. 한 겹 유리막이 없어진 눈동자는 더욱 새까맣게 보였고, 로렌스는 미간을 좁히며 게슴츠레한 표정을 지었다. 그 표정이 조금 우스워 오웬은 목 안쪽으로 잘게 웃었다. "나 눈 나빠." "그래 보이네. 내 얼굴 보여요?" "잘 안 보이는데." 오웬은 고개를 조금 숙여 얼굴을 가까이 가져다 댔다. "아직도?" "……눈이 어디있는지는 알겠다." 문득, 숨소리가 가까웠다. 우리는 종종 까먹곤 하지만 사람의 살갗은 일정한 온도를 가지고 있어서, 가까워지는 순간을 기민하게 깨닫게 되는 것이다. 마치 어떤 종류의 인력처럼. ㅡ그게, 어느 책에 나온 구절이었는지. 오웬은 생각난 것을 행동으로 옮기는데 별로 거리낌이 없는 성격이었다. 그건 지금 순간에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가볍게 고개를 뻗어 그의 입술에 입술을 가져다 댔다.
그것은 아주 찰나였다. 그리고 오웬은 별 다른 제스쳐 없이 다시금 그의 안경을 콧등까지 밀어 내려주었다. 거리가 다시 멀어지는 순간 불현듯 붉은 빛이 선득하게 시야 위쪽을 스쳤다. 어느새 완연한 석양, 이었다. 그는 고개를 들어 교실 한편에 걸린 시계를 올려다 보았다. 눈 깜짝할 새에 여섯시가 넘어 있었다. "밥 먹으러 갈래요?" 그의 목소리는 여전히 높낮이가 없었고 필통 안에 지우개와 펜을 차곡차곡 집어넣는 동작 역시 마찬가지였다. 연습문제 프린트는 대충 접혀 그의 주머니로 들어갔다. 자리에서 일어나려는데 로렌스가 문득 그의 손목을 잡았다. 그는 유쾌한 것인지 놀란 것인지 알 수 없는 표정을 하고 있었다. "……나 지금 되게 설렌 거 알아?" 오웬은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며 웃었다. "그래요?" "응, 엄청." 그는 잡힌 손목 너머로 상대의 손목을 마주 잡으며 가볍게 잡아당겼다. 의자가 끌리는 소리. 오웬은 그러한 류의 접촉이 어색하지 않은 사이라는 것이 새삼스러웠다. 그는 이전에도 몇 번, 그런 류의 접촉에 대해 상상해본 적이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상상에 그칠 것을 미리 염두에 둔 것이었으므로 작은 상자에 담아둔 유리구슬들과 다를 바가 못되었다. 그러나 실제는 상상과 달랐고, 상상보다 더 괜찮은 것 같았다. 그는 어딘가 유쾌한 기분으로 텅 빈 교실의 문을 닫았다. 밤이 화살처럼 빠르게 찾아오고 있었다.
오랜만에 꿈을 꾸었다. 담배를 줄였기 때문인지는 알 수가 없다. 우범지역의 뒷골목처럼, 기름때가 묻은 높다란 벽이 양쪽으로 서 있었고 그 사이로 난 길은 몹시 좁았다. 해가 잘 들지 않아 어둑했고, 시멘트칠을 한 지 오래된 듯 갈라진 회벽 사이로 드러난 붉은 벽돌이 동물의 내장처럼 날 것으로 보였다. 오웬은 길앞에서 오랫동안 생각했다. 그는 이것이 꿈임을 알았다. 그는 이러니저러니해도 좋은 집에서 나고 자란 도련님이었으므로, 이런 길을 제 눈으로 본 기억은 별로 없었다. 그렇다면 이 길은 어느 길인 것일까. 골목의 안쪽은 아주 어두워서 그 끝을 짐작하기가 힘들었다. 오웬은 다른 길을 갈 수 있다면 좋을 것 같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이 길 말고 다른 길은 모른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리고 그게 아주…….
그는 잠에서 깼다.
자신의 방은 아니었지만 익숙했다. 이곳이 킹스버리의 독방임을 깨닫기까지 약간의 시간이 필요했다. 걷어놓은 블라인드 아래로 늦은 오후의 고즈넉한 햇빛이 창틀과 벽을 타고 흘러내려 그의 이마까지 다가왔다. 소리가 적었다. 간간히 책장이 넘어가는 소리와 팔꿈치가 시트에 스쳐 나는 바스락거리는 소리, 그리고 숨소리. 오웬은 그게 자신이 내는 소리가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더블싱글 침대는 다 큰 남자애 둘이 나란히 누워 있기에는 다소 비좁았지만 그래서 어깨와 팔이 맞닿고 발이 엇갈려 놓여있는 것은 나쁘지 않았다. 이불을 덮은 기억은 없었는데 목까지 이불이 올라와 있었다. 깨끗한 섬유유연제 냄새가 났다. 정갈한 취향의 벽지 무늬와 침대 옆의 낮은 서랍장. 그가 몸을 조금 뒤척이자 로렌스가 물었다. "깼어?" 그는 언제나 타인의 기척에 기민했다. 대답하지 않자 손이 자연스레 얼굴 위로 올라왔다. 말라서 마디가 도드라진 손이 그의 이마와 눈꺼풀을 가볍게 스친다. 오웬은 손바닥이 드리운 얕은 그림자 아래에서 눈을 여러 번 깜빡였다.
그는 꿈에서 본 좁고 긴 길을 떠올렸다. 방은 그와 대조적으로 밝았고 익숙한 타인의 냄새가 났다. 타인, 글쎄, 어쨌거나 그런 식으로밖에 표현할 수 없는 것이다. 그는 문득 그게 아주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예를 들자면 자신이 읽다 놔둔 책이 타인의 방에 놓여 있는 일이라든가, 누군가가 자신이 좋아하는 과자를 서랍속에 넣어두는 일, 혹은 누군가가 그의 잠의 처음과 끝을 알아차리는 일. 그는 자신이 그런 종류의 일에 몹시 결핍되어 있었다는 것을 최근에야 알았다. 그는 몸을 돌려 베개를 팔꿈치 아래에 두었다. 잠이 덜 깬 탓인지 나른했다. 로렌스는 여전히 책을 읽고 있었다. 그는 손바닥을 턱, 펼친 책 한가운데에 내려놓았고 그제야 시선이 올라왔다.
"왜?"
"그냥."
이불을 끌어안아 턱 아래에 대며 눈을 감았다. "더 자거나 내가 책을 읽게 내버려 두거나, 둘 중 하나만 하는게 어때?" "싫은데." 오웬은 몸을 옹송그리며 웅얼거리듯이 대답했고 로렌스는 이런 사소한 문답에서는 항상 져주는 편이었다. 책장을 덮는 소리가 들렸다. 이내 매트리스 한쪽이 가볍게 가라앉았다. 로렌스가 몸을 편하게 뉘인 탓이다. 손끝이 자꾸만 장난스럽게 툭툭 뒷목에 닿아왔다. "그래서 왜?" 그가 거듭 물었다. 오웬은 잠시 말을 골랐다.
"싫은 꿈을 꿨거든요."
싫은 꿈, 이라고 소리내어 말하자 오히려 말은 가벼워지는 느낌이었다. 로렌스는 그 말의 의미를 잠시 생각해보는 것 같았다. 타인과 타인의 사이에는 언제나 그런 것들이 존재했다. 말하지 않으면 알 수 없는 것들. 목덜미에 닿아있던 손이 관자놀이로 올라왔다.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걷어내며 눈을 굴린다. 오웬은 감고 있던 눈을 떠서 곁눈질로 그를 쳐다보았다. "어떤 꿈이었는데?" 로렌스는 손이 조금 찬 편이었다. "……산더미처럼 쌓여있는 삶은 버섯을 먹는 꿈이라든가." 그가 소리내어 웃었다. "버섯 싫어해?" "씹는 느낌이 불쾌해요. 냄새도 별로고." "편식하면 안되지. 안 먹는게 또 뭐가 있는데?" "중국요리는 먹으면 토해요." "그래?" "어렸을 때 먹다가 토한 이후로 계속 그래요."
"그래서 진짜는 뭔데?"
오웬은 머리 위에 올라가 있는 손을 잡아 깍지를 꼈다. 마른 손가락들이 헐겁게 얽혀든다. "까먹었어요." 그렇게 말하자 어쩐지 정말로, 까먹은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한번도 잊어버린 적이 없는 꿈임에도 그랬다. 손을 잡고 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거짓말이지?" 잡힌 손에 아프게 힘이 들어간다. 아, 그만 좀. 그가 짜증스럽게 중얼거리고는 덧붙였다. "나중에 생각나면 말해줄게요." 그제야 손마디에 천천히 힘이 풀렸다.
"나중에."
"네, 나중에."
남은 말들이 아주 많았다. 오웬은 셈을 하는 것처럼 다시 눈을 감았다.
2
영화관에서 처음 보는 사람이 말을 거는 것은 그리 흔한 일이 아니다. 그리고 오웬은 그 상대가 누구든, 타자에게 그리 살가운 성격이 못되었다. 아니, 이것은 좀 완곡한 표현이고, 그는 확실히 남을 대할 때 좀 까탈스럽고 무뚝뚝한 구석이 있는 성격이었다. 오웬은 흘긋, 눈동자만 들어 제 옆에 서 있는 소년을 곁눈질했다. 소년은 저와 키가 엇비슷했고, 안경을 끼고 있었다. 새까만 머리카락과 또렷한 이목구비가 인상적이었다. 그러나 금발의 미인이 말을 걸어와도 시큰둥할 판에 제 나이 또래로 보이는 남자애가 말을 걸었다고 엄청나게 반가울 일은 없다. 오웬은 청바지 주머니에 양손을 쑤셔 넣은 채로 어깨를 으쓱 했다. "처음 보러 온 건데. 돈 아깝게 뭐하러 영화관에서 영화를 두 번이나 봐." "왜, 좋은 영화는 그러기도 하지 않나. 이거 꽤 괜찮은 영화라고?" 소년이 검지 손가락으로 툭툭, 포스터를 두들겼다. 오웬은 잠시 동안 게슴츠레한 눈으로 보라색 포스터를 쳐다보다가, 고개를 들었다. 소년은 안경 너머의 눈동자 역시 검었다. 오웬은 그 눈을 쳐다보며 바지 뒷주머니에서 연노랑색 담배곽을 꺼내들었다. 오는 길에 산 것이라 아직 곽을 버리지 않았다. 그가 그 중 한 개피를 꺼내 입에 물며, 뱉어내듯이 물었다.
"……할일 없냐?"
그것은 너 존나 한가해서 나한테 말이나 걸고 있냐, 의 축약된 버전이었다.
4
끈질기네. 사회화가 정상적으로 이루어진 사람이라면 그가 지금과 같이 온몸으로 꺼지라는 메세지를 보낼 때는 대부분 순순히 물러나기 마련이었다. 그러나 눈앞의 소년은 이상하게도 그의 억양 없는 말투에도, 잔뜩 웅크린 몸짓에도 전혀 굴하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 오웬은 소년이 사회화가 덜 된 것인지 아니면 튕기는 사람을 보면 물불 안 가리고 덤벼드는 이상한 성격의 소유자인지, 둘 중 어느쪽일까 고민하기 시작했다. 물론 오웬은 둘 다 싫었다. 그는 저를 귀찮게 하는 것이라면 대천사의 축복도 마다할 인간이었다. 오웬은 시계를 한 번 쳐다보았고, 고개를 숙여 제 신발 끝을 쳐다보다가 다시 눈을 들었다. 소년은 그때까지도 여전히 바둑알처럼 맨질맨질한 눈으로 그를 쳐다보고 있었다. 그 눈에 어린 것은 호기심에 가장 가까워 보였다. 어쩌면 그것은 묘한 오기일지도 모른다. 그 안색을 살피던 오웬은 문득, 담배꽁초를 엄지와 검지 끝으로 집어 입에서 빼내었다. 그는 입꼬리를 끌어올려 소년에게 빙긋 웃어보였다. 그가 좀처럼 짓지 않는 상냥한 웃음이었다. 갑작스러운 미소에 소년이 의아한 표정을 지을 틈도 없이, 그는 훅, 깊게 빨아들였던 연기를 소년의 안면에 뱉어내었다. 소년이 자연스레 얼굴을 찡그렸고, 오웬의 웃음은 조금 더 짙어졌다.
"담배도 못 피는 샌님이."
그가 다시금 담배를 입에 물며 목구멍 안쪽으로 작게 킬킬거렸다.
6
영화는 소년의 말마따나 괜찮았다. 오웬은 어딘가 냉소적인 기분이 되어, 영화관 쓰레기통에 담배곽을 버리고 나머지 담배들은 주머니 속에 쑤셔 넣었다. 영화관 밖으로 나오자 어느새 하늘이 뉘엿하게 붉어져 있었다. 푸른빛을 몰아내며 황혼이 천천히 가라앉고 있었다. 영화를 보고 난 뒤나 두꺼운 소설책을 다 읽었을 때 해가 질 무렵, 조용한 자정과 아침이 오기 전의 찰나, 그런 시간들에는 이상하게도 현실감각이 무뎌지는 느낌이 들었다. 그는 버스 정류장에 서서 낮은 건물들의 정수리들을 눈으로 훑었다. 퇴근 시간이라 하기에도 저녁 시간이라고 하기에도 애매한 시간, 버스 정류장에는 사람이 적었다. 그러므로 소년과 다시 마주치게 된 것이 그리 놀랍지는 않았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살갑게 아는 체를 할 기분이 들었냐하면 그건 또 결코 아니었다. 그는 두 개피째의 담배를 입에 물며 딴청을 부렸다. 삼 분 정도 뒤에 버스가 도착했고, 그는 버스를 타려 몸을 틀었다. 그보다 더 먼저 소년이 버스 앞문으로 뛰어들었다. 오웬은 멀뚱한 눈으로 소년의 검은 뒷통수를 쳐다보았다. 이 버스는 GCS로 곧장 향하는 몇 안되는 버스였다. 그는 왠지 모르게, 추리 소설에서 안 좋은 복선을 발견한 것만 같은 기분이 되었다.
8
오웬은 잠시 동안 고민했다. 자존심을 세우기 위해 전과 똑같이 싸가지 없는 태도를 고수할 것인가, 아니면 그깟 자존심 한 수 접고 앞날의 안위를 도모해볼 것인가. 물론 그의 대답은 후자였다. 그의 인생 모티브는 가늘고 길고 귀찮지 않게, 였으므로. 그는 눈을 약간 아래로 내리깔며 가라앉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오웬 토너." "그래?" "이 학교 다니…… 십니까?" 소년은 그의 어미가 정중해진 것을 알아차리고는 키득, 짤막하게 웃었다. 오웬은 갑자기 목덜미가 뜨끈해지는 것을 느꼈다. 그는 속으로 시발존나시발 왜 한 시간 거리에 있는 극장으로 영화를 보러 다니고 난리야 시발, 하고 다분히 제 얼굴에 침 뱉는 생각을 하고 있었으나 물론 그 무례함이 얼굴에까지 티가 나지는 않았다. "물론, 다니지. 나는 널 본 적이 있는데 말이야. 아는 얼굴이 아닌 걸 보니 1학년인가 2학년인가, 했지만." "……3학년?" "빙고." 비록 싸가지 없음을 얼굴로 티를 내지는 않을 지언정 입에서 쏟아지는 한숨까지 막을 수는 없었다. 뉘엿하게 저무는 노을이 그의 시야 아래, 발치에 맴돌았다.
"그, 저, 그러니까."
"그러니까, 뭐?"
"……아까는."
"아까는 뭐."
……무례하게 굴어서 죄송했습니다…… 그가 고개를 숙인 채 속사포처럼 빠르게 뱉어내었다. 아, 시발 인생 살기 힘들다.
10
오웬은 일단 귀찮은 일이라면 기본적으로 질색하는 성정이었으므로, 제 눈에 띌 때마다 득달같이 쫓아와서 전생에서부터 안 사람처럼 친근하게 인사를 하거나 훈수를 두는 상대가 반가울 리가 없었다. 오웬은 제가 몸치라는 사실을 아주 잘 알고 있었고 그걸 딱히 고치고 싶다는 생각도 크게 해 본 적이 없었다. 사람이라면 뭐, 못하는 것도 한두 개쯤 있고 그래야 인간답지 않은가.(오웬은 확실히 자기 자신을 높게 평가하는 타입이었다.) 그리고 그러는 가운데 그는 소년의 이름을 자연스럽게 알게 되었다. 소년의 이름은 로렌스 우, 라고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따박따박 우 선배님, 이라고 부르는데에서 그 심리적 거리감을 짐작할 만도 했으나, 로렌스는 참으로 굴하지 않는 정신을 가진 것 같았다. 전생에 독립투사이기라도 했던 것일까.
오웬이 그를 가장 자주 마주치는 장소는 도서관이었다. 2층짜리의 제법 오래되고 넓은 도서관은 그가 학교에서 가장 좋아하는 공간 중 하나였다. 로렌스가 도서위원이라는 사실은 그에게는 조금 얄궂은 운명의 장난 따위로 느껴졌다. "도서위원이라면서 일 안하십니까." 그가 낮고 소곤거리는 목소리로 제 옆에 선 소년에게 중얼거렸다. 그는 도스토예프스키의 죄와 벌, 을 찾고 있었다. "도서위원일 그렇게 안 빡빡해. 해볼 생각 있어?" "……별로." 그는 고개를 약간 꺾어 책장 위쪽을 쳐다보았다.
12
로렌스는 오웬이 다음 서가로 향할 때까지도 쫓아왔다. 이미 익숙해진 행동양식이므로 내버려두었다.(사실 내버려두는 것 말고 할 수 있는 것도 없었다. 망할 선후배 관계.) 도서관에서만 나는, 특유의 오래된 책 냄새가 문득 코를 찔렀다. 서점에서는 이런 냄새가 나지 않는다. 그곳에 있는 책들은 누군가의 손에 들린 적이 없는 새 책들이기 때문이다. 오직 오래된 책에서만 이런 냄새가 났다. 손때 묻은 종이, 오래 묵어 닳아진 잉크자국, 나달나달해진 책머리, 그리고 그런것들이 가지고 있는 고유한 내음과 역사. 그래서 그는 도서관을 좋아했다. 오웬이 서가의 윗부분을 눈으로 훑는 사이, 로렌스의 팔이 먼저 뻗어왔다. "여기 있네." 과연 도서위원이라 그런지 빨랐다. 오웬은 정중한, 그리고 전혀 친근하지 않은 태도로 그 책을 받아들었다. "감사합니다." 책의 표지는 어두운 초록색이었다. 고전이란 것들이 으레 그렇듯이 타인의 손을 많이 탄 흔적이 있었다. 그가 책의 닳은 모서리를 손가락으로 매만지는 사이 로렌스가 입을 열었다. "라스콜니노프, 의 이름은 라스콜에서 따왔지. 주인공의 이름 말야." 오웬이 문득 고개를 들었다. "라스콜이 무슨 뜻인데요?" "분열." 대답하며 그가 문득, 빙긋 웃었다.
14
"너는 창녀한테서 구원을 찾기엔 너무 눈치가 빠른 것 같거든." 그 말의 의미는 책의 거의 말미에서나 알 수 있었다. 오웬은 확실히 운명론에도, 일반적인 도덕에도, 종교적 함의에도 관심이 없었다. 소냐는 라스콜니노프의 인생을 구원했지만 그 자신의 인생은 한 번도 구원받은 적이 없었으므로, 겪어본 적 없는 것은 믿지도 않는 냉소주의자 특유의 감각으로 오웬은 코웃음을 쳤다. 그리고 조금 자존심 상하는 일이지만, 로렌스가 골라준 책들은 확실히 그의 구미에 맞았다. 사람 대신 늙어가는 초상화와 쓰레기 같은 인간이 만들어낸 위대한 예술. 그는 서머싯 몸의 소설을 몇 권 더 빌려야겠다는 생각을 하며 도서관을 찾았다. 로렌스는 여전히 그곳에 있었다. "금방 다 읽었네. 재밌었나보지?" 로렌스가 네 권의 책을 양손으로 받아들며 물었다. 짐짓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 묻는 것은 조금 얄궂었지만. "뭐…… 안목이 좋으신 것 같다는 생각은 했습니다." 인정할 건 인정하고 넘어가자 싶었다. 로렌스가 빙긋, 다시금 웃었다. 오웬은 이상하게도 딱딱한 기분이 조금 누그러지는 것을 느꼈다. 그러니까 뭐, 취향이 잘 맞는 사람에게 느끼는 동질감이라고 해야할까, 그런 것이 어렴풋이 느껴지는 기분이었다.
16
오웬은 타인의 행간, 에 아주 기민한 사람이었고 그러므로 그 말이 무엇을 가리키는지 모르는 것은 아니었지만, 제대로 대답하는 대신 그는 미국 근대시가 꽂혀 있는 서가 안으로 휙 들어갔다. "어어, 못 들었어?" 목소리와 발걸음이 뒤따라왔다. 뒤를 돌아보자 로렌스는 여전히 웃고 있었다. 그 웃음이 어딘가 오연한 기색을 띠고 있는 것 같아서 오웬은 부러 낯빛을 굳혔다. "뭘요?" "뭐, 글쎄. 예를 들자면 추천이라던가, 자문이라던가." 오웬은 대답 대신 침묵했다. 로렌스가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그정도면 됐잖아?" "뭘요." 오웬은 똑같은 질문을 거듭 반복하는 제가 어쩐지 멍청이 같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다. "사람을 밀어내는 거 말이야." 그렇게 말하는 로렌스의 까만 눈동자가 안경 너머에서 반들반들 빛나고 있었다. "더 거절하면 나도 상처받을 거야." 웃기시네… 라는 말이 혓바닥 위까지 올라왔으나 맛 없는 오트밀을 삼키는 것처럼 꾸역꾸역 목구멍 안쪽으로 집어넣었다. 오웬은 오랫 동안 고민했고, 이내 짧게 한숨을 뱉어냈다. 그가 몇 걸음 로렌스에게로 다가갔다. 로렌스의 표정이 마치 처음으로 망아지 새끼를 길들이는 소년 같은 흥미진진한 표정이라 조금 마음에 안 들었으나, "부탁해요." 손등으로 툭, 무례하지 않을 정도로 가볍게 그의 가슴팍을 치며 말했다.
18
"건방지게 굴기로 작정한 거야?" "전 원래 이래요." 시큰둥하게 대답하며 오웬은 반들반들하게 손길을 탄 양장본의 표지를 손바닥으로 쓰다듬었다. 느낌이 좋았다. The great Gatsby. "영화는 안 봤었는데." "영화도 괜찮아. 시간나면 한 번 봐봐." 오웬은 형이상학적인 무늬가 그려진 표지를 내려다보며 흡사 낭독가나 아나운서 같은 로렌스의 완벽한 영어 발음을 곱씹었다. 유진도 비슷한 방식으로 발음을 했던 것 같다. 오웬은 배우지 못한ㅡ이라기보단 않은ㅡ 어떤, 상류층의 교육. "전 좀, 청개구리 기질이 있어서." 그가 툭, 던지듯이 말을 이었다. "학교에서 읽으라는 책은 다 안 읽었거든요, 그러니까, 한참 질풍노도 때? 그래서 To kill a mocking bird도 읽어본 적 없어요." "그으래?" 로렌스가 손을 쑥 뻗더니 그의 등 뒤, 세번째 칸에서 책 한 권을 꺼내들었다. 푸른색으로 흉내지빠귀새가 인쇄된 표지. " …여기 있는 책들을 다 외우고 계십니까?" "그런 건 아니지만, 이것도 좀 좋아해서. ㅡ난 네가 뒤뜰에 나가 깡통이나 쏘았으면 좋겠다. 하지만 새들도 쏘게 될거야. 맞출 수만 있다면 어치새를 모두 쏘아도 된다." "아, 저기요." 그가 버릇없이 말꼬리를 잘랐지만 로렌스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ㅡ하지만 흉내지빠귀(mocking bird)를 죽이는 건 죄가 된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로렌스의 눈동자가 사금처럼 반짝이고 있었다. 오웬은, 뭐랄까, 어떤 주문을 들은 사람처럼ㅡ로렌스의 발음이 너무 우아해서 그럴지도 모른다ㅡ 물었다. "왜, 죄가 되는데요?" "흉내지빠귀는 아무 잘못도 없으니까." 말하며, 그가 오웬의 팔위에 그 책도 얹어주었다.
20
"남자한테 데이트 신청은 안 받습니다만." "아, 짜게 굴지 말고." 말하며 로렌스는 제법 친근한 제스쳐로 그의 팔뚝을 툭, 쳤다. 오웬은 무의식중에 팔을 움츠러트리며 눈을 치켜떴다. 언제부터 이렇게 친했다고… 라는 말이 반사적으로 목구멍까지 올라왔지만 저도 좀 전에 상대의 가슴팍을 친 적이 있었으므로 그만두기로 했다. 그는 잠시 동안 머릿속으로 영화잡지에서 보았던 신작 목록을 훑어보았다. "Any day now…… 는, 아직 영화관에서 안 내렸으려나." "처음 들어보는데." "저도 아직 안 봤는데, 다들 괜찮다고 하길래요." 오웬이 가볍게 어깨를 으쓱하며 팔안에 끌어안은 책 두권을 고쳐 쥐었다. "사실 저도 내용은 잘 몰라요. 영화 보기 전에 스포 찾아보는 거 안 좋아해서." "흠, 그럼 데이트 신청은 안 까인 거 맞지?" "징그러우니까 그런 표현은 그만두시죠." 그는 미미하게 눈을 찌푸리며 대답하고는, 한 박자 말을 멈췄다가 한숨처럼 덧붙였다. "책, 은, 잘볼게요." 로렌스가 다시금 빙긋 웃었다. 오웬은 그 웃는 얼굴이 조금 마음에 안 든다고 생각했다.
제목을 따라해 보았다>_<
1
오웬은 한 손에는 폭죽을, 다른 한 손에는 빈 물통을 쥔 채로 하늘을 올려다 보았다. 손바닥 자국 하나 내지 않은, 투명한 유리창 같은 하늘이었다. 주변이 소란했다. 여러 사람이 동시에 말을 하면 소리가 겹쳐 웅웅거리는 소음으로 느껴진다. 그 가운데서 누군가가 목소리를 높이거나 악을 쓰는 소리가 들리지 않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에게는 의미가 없는 소리였으므로 그 소리들은 그의 귓바퀴를 타고 슬그머니 빠져나갔다. 그는 관중석을 거슬러 올랐다. 로빈훗의 모자를 쓴 한 무리의 사람들. 초록색 옷자락 때문에 눈이 아팠다. 하루 종일 땡볕 아래에 서 있는 것은 그에게는 일상적이지 않은 일이었으므로, 그는 단 한 종목도 참가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ㅡ그의 평소 운동신경을 생각해보면 당연한 일이었다ㅡ 다소 피곤하다고 느꼈다. 오웬은 뻐근한 눈가를 한쪽 손바닥으로 누르며 거침없이 인파를 헤치고 나아갔다. 그는 경기 내내 아치볼드 관중석 왼쪽 구석에 앉아 있었고 그 자리에선 상대편 관중석이 잘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잘 보이지 않더라도 맨 앞에 서서 붉은 망토를 두르고 스태프를 휘두르고 있는 사람이 누구인지 알아보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이쪽 편 관중석에서는 끊임없이 야유가 터져나왔다. 뭐, 그건 저쪽에서도 마찬가지였지만. 기숙사장이라는 건 참 피곤한 직책이야. 생각하며, 그는 빈 물통을 쓰레기통에 버리고는 보폭이 큰 걸음으로 사람들 비집고 들어갔다. 행사가 파할 무렵의 소란이 이곳저곳에서 들끓었다. 이르게 터지는 누군가의 폭죽 소리, 짧은 비명과 소리 높여 부르는 누군가의 이름과, 아직 끝나지 않은 구호…… 그리고 오웬은 킹스버리 응원석 끄트머리에서 찾던 이를 발견했다. 눈이 마주친 순간, 오웬은 자신도 모르게 폭죽을 쥔 손을 들어 흔들어 보였다.
3
한껏 몰린 사람들의 정수리 위로 로렌스의 왕관이 허공에 뜬 등불처럼 동동 떠다녔다. 오웬은 손목을 잡았던 손바닥의 감촉을 한 번 떠올리다가 이내 재게 걸음을 놀려 그 뒷모습을 쫓았다. 아직 벗지 않은 망토의 끝자락이 붉게 너울거렸다. "멋있던데요, 하루 종일." 그는 그리 크지 않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지만 상대는 용케도 그의 목소리를 알아들은 듯 했다. "그거 농담이지?" "뭐, 반 농담 반 진담. 오늘 욕 많이 먹어서 오래 살겠어요." "아무래도 이백 살까진 살 것 같아." 그 둘의 발걸음은 인파가 없는 곳을 찾아 한참을 헤매었다. 자연스레 스태디움에서 빠져나와, 문득 고개를 들자 낮은 건물들의 옥상이 눈에 들어왔다. "들어갈 수 있을까?" "들어가 보면 알겠죠." 오웬은 한손에 든 폭죽을 기세 좋게 붕붕 휘두르며 걸음을 빨리했다. 다행히도 건물은 열려 있었고 불이 꺼진 계단에서 오웬은 다시 한 번 로렌스의 손을 잡았다. 로렌스가 문득 뒤돌아 보다 말고 웃었다. 맞잡은 손바닥은 햇빛에 달궈놓은 듯 뜨뜻했고 약간 땀에 젖어 있는 것 같기도 했다. 오웬은 마주 웃는 대신 손에 힘을 줘 꽉 쥐었다.
옥상 문을 열자 하늘이 한 눈에 들어왔다. 늦은 오후, 하늘이 위쪽에서부터 조금씩 불그스레해지고 있었다. 불꽃놀이가 목전이었다. "날씨가 좋네요." 문득, 말하고 나자 오늘 하룻동안 날씨가 좋다, 는 생각을 한 것이 지금이 처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루 종일 구름 한 점 없이 쨍한 날이었다.
5
신입생인 오웬으로서는 첫 육상대회였고 첫 불꽃놀이였다. 그런 것치고는 행사 자체에는 큰 감흥이 없기는 했지만, 일정은 모두 끝이 났고 견디기 힘든 더위는 천천히 식어가고 있었으며 하루 종일 부대끼던 사람들이 없어서 그런가 공기가 깨끗하게 느껴졌다. 또, 별로, 부러 나서서 인정하고 싶지는 않았지만 같이 있는 것이 좋은 사람이 옆에 있었다.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오웬은 양손으로 잡은 난간 끝을 검지와 중지로 두드리며 무의식중에 노래의 박자를 맞췄다. 툭, 툭, 툭. 손끝에 닿는 쇠의 서늘한 느낌. 폭죽은 엇박자로 터졌다. 음의 끝자락마다 붉고 노랗고 푸른 불빛들이 이른 저녁의 하늘을 눈 시리게 수놓았다. 그리고 시선이 있었다. 오웬은 언제나 타자의 기척에 기민했다. 가만히 옆얼굴에 와닿는 눈길을 알아차리는 것은 그에게는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불꽃놀이 안 봐요?" 그가 고개도 돌리지 않은 채 물었다. 대답은 반 박자 느리게 돌아왔다. "보고 있어." 펑, 초록색 불꽃이 머리 위에서 요란한 소리를 내며 사그라들었다. 오웬은 불꽃의 끄트머리를 쫓아 시선을 드는 척 턱을 당기다가 이내 고개를 돌렸다. 눈이 정면에서 마주쳤다. "거짓말." 그 목소리에는 드물게도 웃음기가 섞여 있었다. 푸른색 불빛이 안경테를 덧그리며 번득였고 그 너머의 눈동자는 여전히 검었다.
7
로렌스는 넘어지려는 듯 몸을 조금 휘청했지만 넘어지지는 않았다. 타닥, 타닥. 폭죽이 타들어가는 소리가 귓전을 간지럽혔다. 어스름이 내리고 있었다. 만물의 경계가 어둠속으로 흐려진다. 오웬은 반팔 체육복 아래로 잘게 돋아난 소름을 손바닥으로 쓸었고 로렌스는 문득, 여태까지 두르고 있던 망토를 벗었다. "아, 됐는데." "가만히 있어봐." 팔이 등 너머로 뻗어와 그의 어깨에 천을 둘렀고 오웬은 농담처럼 "진짜 왕자 같겠네." 하고 중얼거렸지만, 아주 사소한 접촉, 그러니까 팔 안쪽이 어깨를 스쳤다던가 하는 일들이 새삼스럽게 느껴져서, 그러니까 언제까지나 새삼스러울 것 같아서, 눈을 깜빡였다. 그는 언제나 생각한 일을 행동으로 옮기는데 망설임이 없는 사람이었고, 한 번 한 일을 두 번 하기는 어려운 것이 아니었다. 폭죽을 쥐지 않은 손으로 상대의 뺨과 턱 언저리를 감싸자 문득, 그제야 손바닥이 서늘하다는 것을 알았다. 고양이가 물을 마시는 것처럼 혀를 내어 아랫입술을 핥았고 호흡은 곧잘 섞였다. 혀끝을 아프지 않게 물고 숨을 삼킨다. 키스는 이번에는 좀 더 길었다. 단 것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폭죽 다 됐다." 코끝이 스칠 것 같은 거리에서 듣는 목소리는 소리가 아니라 진동처럼 느껴졌다. 오웬은 눈만 아래로 내려 까맣게 타들어가고 남은 흔적을 쳐다보았다. 재 냄새가 났다. 그러나 여전히 귓가가 간지러웠다.
9
얕은 어둠속에서 핸드폰의 불빛이 파랗게 깜빡였다. 손에 쥔 것을 전부 바닥에 내동댕이 쳐놨던 것이 문득 우스워 오웬은 목구멍 안쪽으로 짧게 웃었다. 그는 살면서 제가 남자와 손을 잡거나 키스를 할 수 있다는 생각을 근 한달 이전에는 한 번도 해 본적이 없었다. 과연 사람 일은 어떻게 될 지 모르는 거란 말이야. 생각은 무상하게 흘러나왔고, 옥상은 바다의 밑바닥처럼 서늘하고 현실감이 없었다. 오랫동안 가라앉은 것만 같았다. 자꾸만 깜빡이는 핸드폰 스크린이 등대처럼 보이기도 했다. 낯 간지러운 짓 그만 하고 현실로 돌아가라는 의미 없는 이정표. 아쉬운 말을 하기에 그는 붙임성이 없었고 전화는 끊임없이 울려대고 있었다. 거, 시끄럽네. 기숙사장 없으면 어디 큰일이라도 나나. 그런 고까운 생각이 여실히 표정에 드러난 것인지 이번에는 로렌스가 가벼운 소리를 내며 웃었다. 그는 평소에도 잘 웃는 편이기는 했지만 웃음에도 종류가 있는 법이다. 오웬은 그의 얼굴을 쳐다보았고 찬 공기에 식은 손끝이 불현듯 뺨 아래쪽에 가닿았다. 엄지로 도장을 찍듯이 그의 귓불을 꾹 누르자 로렌스가 순간 놀란 얼굴을 한다. 그 표정 역시 마음에 들었다. "조금만 더." 쭈그리고 앉은 종아리에 쥐가 날 것 같았지만 아쉬운 소리는 생각보다 쉽게 나왔다. 그제야 전화가 끊겼고 남아 있는 파르스름한 불빛에 턱선의 윤곽이 문득 비쳤다.
11
오웬은 타인과의 접촉이 기분 좋다고 느낀 적이 별로 없다. 그의 부모는 아무리 좋게 말해줘도 아이들을 잘 안아주거나 손을 잡고 걷는 부모는 아니었고, 습관이 되지 않은 것은 언제나 낯설었으며 낯설은 것을 기꺼워하기에 그는 다소 보수적이고 회의적이었다. 그러나 뺨에 간지럽게 와닿는 손바닥의 감촉은 싫으냐 좋으냐 둘 중 하나로만 묻자면 좋은, 것 같기도 했다. 물론 그건 아주 단순화된 화법이었다. 감정에는 수없이 많은 가닥이 있었다. 그 가닥마다 이름을 붙인다면 사전에 적어넣지 못할 정도로 별처럼 숱한 단어가 필요하리라. 그래서 오웬은 말을 고르는 것을 그만뒀고 침묵은 일정한 온도를 가지고 그들 사이를 떠돌았다. 어색하지 않은 침묵이었다. 오웬은 무릎에 턱을 대고 여러 번 눈을 깜빡였다. 눈을 감았다 뜰 때마다 눈꺼풀에 손끝이 스친다. 속눈썹을 간지럽히는 손바닥의 감촉이 낯설었다. 어느 것 하나 익숙하지 않았고, 어느 것 하나 예상하지 못한 일이었다. 아주 사소한 접촉까지 그랬다. 그것에 일일이 감동하거나 기억에 새겨두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그렇지만 순간들은 이따금씩 풍선처럼 부풀었고 그가 알지 못하는 어딘가에 닿을 것처럼 느껴졌다.
손바닥이 멀어졌고 오웬은 잠에서 깬 사람처럼 느릿한 말투로 말했다. "갈래요?" 말을 하고 나서도 찰나의 망설임이 있었다. 그러나 로렌스가 먼저 몸을 일으켰고 자연스럽게 손을 내밀었다. 오웬은 약간 비틀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바짓단을 털고 고개를 들었다. 스태디움의 불빛이 멀게 느껴졌다.
13
"춤 잘 춰." 그 말은 듬성듬성 끊겨서 들렸지만 못 알아 들을 정도는 아니었다. 오웬은 로렌스가 띄엄띄엄 뱉어낸 말 사이에 있는 것이 무엇인지 곧잘 알아차렸다. 그러나 에둘러가는 그 쑥스러움이 낯간지러워서 저 혼자 주먹을 한 번 꽉 쥐었다가 놓고는 이내 얕은 한숨을 내쉬었다. 걸음을 멈추고 잠시 얼굴을 들여다보며 기색을 살피고 싶은 기분이었지만 안타깝게도 주위엔 사람이 너무 많았고, 발을 부지런히 옮기지 않으면 금방이라도 사람들 사이로 쓸려갈 것만 같았다. 그들이 잠깐 침묵하는 와중에도 기숙사장님을 알아보며 연호하는 구호나 야유 소리는 옆쪽에서 끊임없이 들려왔다. 망토에 왕관까지 쓴 눈에 띄는 모양새이니 그럴 만도 했다. 로렌스는 고개를 돌리며 눈살을 찌푸려 시선을 피했고 댄스파티의 음악소리는 이제 몹시 가까운 곳에서 들리고 있었다. 오웬은 문득, 뒤돌아 섰다. 그는 보폭이 큰 걸음으로 몇 걸음 떨어진 곳에서 뒤따라오던 그에게로 걸어갔다. 시끄러운 비트가 고막을 찌르듯이 파고들었다. 오웬은 사람들 사이로 낮게 손을 뻗어 그의 양손을 꽉 쥐었다. 좀 전에 저 혼자 주먹 쥐던 손, 딱 그 정도의 힘으로. 로렌스가 안경 너머로 잘게 눈을 깜빡였지만 오웬은 금세 그 손을 놓았다. 눈썰미가 어지간히 좋지 않은 사람이라면 알아보지 못할 정도로 찰나였다.
"나중에."
그는 그 말만 했다.
1
오웬은 오래된 청바지 뒷주머니에서 그것, 을 찾았다. 그는 기억력이 좋은 편이었다. 그는 담배 개피들을 여러 책 사이에 하나씩 끼워두면서도 그것들이 어디에 있는지, 마치 퍼즐 조각을 맞추듯 전부 기억하고 있었고 그것은 담배가 아니어도 마찬가지였다.
늦은 주말의 기숙사 복도는 다소 소란했다. 자유 시간이 끝나기까지는 아직 두어 시간정도 남아 있었다. 오웬은 버릇처럼 발소리를 죽였다. 아는 얼굴을 마주쳐도 당황하지 않는 것은 습관이 된 여상함 때문이었다. 사소한 인사가 오가는 와중에 그의 주머니 안에서 비닐 조각이 바스락거리는 소리를 냈다. 그 소리가 남에게 들릴 리가 없는데도 그는 손끝을 한껏 오므렸고 문득 어지럽다고 느꼈다.
그는 익숙함이 경멸을 없애주는 것은 아니지만 최소한 줄여준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한 달 반 만에 찾아간 집은 참 빠르게도 낯설었다. 오웬은 모든 장소에 대해 소속감이 희미했지만 집, 이라는 곳에는 차라리 반감에 가까운 감정을 가지고 있었다. 마음대로 멀어질 수 없는 공간이라서 더욱 그러했다. 그는 주말 내내 방에 틀어박혀서 영화를 보았다. Little Miss Sunshine, 희극적인 가족상을 그린 인디영화였다. Whatever happen, we are family. 영화에서…… 드웨인은 그와 동갑이었고, 그는 눈 감았다 뜨면 열여덟이 되길 바란다고 여러 번 말했다. 오웬은 소파에서 눈을 감고 그 대사를 곱씹었다. I just wish I could go to sleep until I was eighteen and, skip all this crap.
화장실 문을 닫았다. 소음들이 희미해졌다. 그는 느리게 숨을 들이켰다. 흰 가루들이 그의 호흡에 천천히 섞여들었고 그는 그것을 뱉어내지 않도록 조심하며 천천히, 더, 어지러워졌다.
눈을 감았다 떴을 땐 형광등 불빛 때문에 눈이 시렸다. 그는 모든 불빛들이 그의 눈꺼풀 아래에 있는 것 같다고 느꼈다.
그는 문을 열었다. 잠금장치를 푸는 손이 몇 번 덜걱거리며 헛돌았다. 휘청거리지 않도록 신중하게 걸음을 내딛었다. 그의 방까지는 그렇게 멀지 않았다. 그의 룸메이트들은 대부분의 경우에 조용했고, 이불을 뒤집어 쓰고 누워 있으면 아무도 건들지 않을 것이었다. 세상이 소리 없이 흔들리고 있었다.
3
서로에게 그만큼의 거리를 허락했으므로, 모든 상황에 있어서 가장 부정적인 가능성을 전제로 하는 오웬은 이런 상황을 상상해보지 않은 것도 아니었다. 그러나 그것이 정말로 현실이 될 줄은 또 몰랐다. 생각들은 뒤집어서 쏟아놓은 퍼즐 조각처럼 그의 발치에 나뒹굴었고 그는 담요 아래에서 열린 문틈으로 희미하게 들어오는 빛을 보며 계속해서 감겨오는 눈꺼풀을 또렷하게 뜨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그러나 생각대로 제대로 된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자꾸만 시야가 흐렸다. 물 위를 걷는 것처럼 몸에 중력이 희미했다. 오웬은 평소에 그 부유감을 즐겼지만 지금의 경우에는 아니었다. 그는 상대의 이목구비를 제대로 쳐다볼 수가 없었지만 그래도 그게 누구인 지는 알았다. "어디 아파?" 하고, 물어오는 목소리가 어딘가 기묘했다. 대부분의 경우에, 다른 사람이라면 당황할 만한 경우에도 여상하게 들리던 목소리가 이상한 기색을 띠었다. 불온한 기색이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약에 취해 있기 때문에 잘못 들은 것일지도 몰랐지만. 오웬은 베개에 얼굴을 처박은 채 상대에게 들리지 않을 정도로 작게 씨발, 하고 중얼거렸다. 그 짧은 욕설조차 혀 아래에서 뭉개지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로렌스는 눈치가 빨랐고, 기민했고…… 오웬은 그의 문자를 확인하고도 답장을 보내지 않았던 일이 떠올랐다. 꼬박 반나절 전의 일이었다. 괜찮은 척하는 것은 에너지를 소모하는 일이다. 괜찮지 않은 모습을 보여주기에 그는 누구와도 멀었고 어디에도 닿을 수 없었다.
"……안 아, 파요."
목소리는 제가 듣기에도 어눌하게 꺾여 나왔다. 누가 들어도 괜찮지 않은 목소리였다. 오웬은 자꾸만 멀어지는 현실감각 속에서도 이 상황이 정말 개같다고 생각했다.
5
감각이 한 박자씩 느렸다. 일어나는 기척과 가벼워지는 침대 한쪽, 문이 여닫히는 소리와 멀어지는 발소리. 오웬은 그 모든 순간을 놓쳤고 그가 자리를 떠난 것은 발소리가 아주 멀어지고 나서야 알았다. 그는 이불 아래에서 몸을 둥글게 말아 웅크렸다. 시트 자락이 끈적한 껍데기처럼 몸에 엉켜왔다. 눈꺼풀 아래에서는 빛이, 점멸하고 있었다. ……남과의 체면치레에 신경쓰는 로렌스가 기척이나 인사 없이 자리를 뜨는 일은 좀처럼 없었다. 로렌스가 그의 상황을 정확하게 읽어낸 것처럼 오웬도 그의 생각을 어느 정도 읽어냈고, 그것은 정말이지 유쾌하지 않은 일이었다. 하지만 냉정하게 생각을 가다듬기에는, 그의 눈꺼풀 아래에서는 끊임없이 불빛이 터지고 있었고 오래달리기를 하는 사람처럼 계속해서 숨이 찼다. "…으." 그는 열병에 시달리는 사람처럼 숨을 토해냈다. 열 오른 호흡 안에 미처 토해내지 못한 감정들이 정신없이 섞여들었다. 그러나 그것들은 언제까지고 그의 자리에만 고여있었다.
정신을 차렸을 때는 한밤중이었다.
새벽, 이라고 부르는 것이 좀 더 정확할 것 같기도 했다. 그는 자신이 잠에 들었었다는 사실조차 알지 못했다. 무서울 정도로 사위가 적막했다. 그는 눈을 희게 떠 어둠속을 노려보았다. 언젠가…… 꿈에서 깨었을 때 이런 적막을 느낀 적이 있었다. 눈이 어둠에 익숙해지자 시야 저편에서 사물들의 윤곽이 천천히 떠올랐다. 생각도 꼭 그만큼 천천히 떠올랐다. 오웬은 어물어물 손을 뻗어 머리맡 어딘가에 놓아두었던 핸드폰을 집어들었다. 세 시가 조금 넘어 있었다. 답장하지 않은 문자를 다시금 확인하다가, 그만두었다. 그는 예전에, 느꼈던 감정이 불안, 이라는 것을 다시 상기했고…… 지금도 별로 다르지 않다는 걸 이내 깨달았다. 역시나 유쾌하지 않았다. 그는 다시 눈을 감았다.
7
오웬은 뭐든지 결정이 빨랐다. 예를 들자면, 그는 신발을 살 때 빨간색 스니커즈와 검은색 단화 가운데서 망설이지 않았고 식당에 가면 항상 5분 이내로 메뉴를 결정했다. 그는 길을 잘못 들었다는 것을 안 순간 지하철에서 내리거나, 막다른 길에서 망설이지 않고 몸을 돌리는 것과 같은 행동을 잘하는 편이었다. 아침에 잠에서 깼을 땐 기분이 몹시 텁텁했다. 햇빛이 눈꺼풀을 할퀴는 것 같은 느낌에 눈을 뜨기가 어려웠다. 약을 하고 난 뒤여서인지 아니면 꿈자리가 사나워서인지는 잘 모를 노릇이었다. 오웬은 비몽사몽한 가운데서도 몸에 밴 버릇대로 교과서를 챙기고 옷을 갈아 입고 세수를 했다. 치약을 묻힌 칫솔을 입안으로 밀어넣으면서 그는, 어디 아파, 하고 묻던 목소리를 문득 떠올렸다. 그 목소리가 귓바퀴에 달라붙어 있기라도 한 것만 같았다. 그는 헛구역질을 하듯이 치약 거품을 뱉어내고 나서야 머리 한구석으로 결정을 내릴 수 있었다. 줄을 먼저 당기는 사람이 되지 않겠다, 고. 그에게는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그는 언제나 밀어내는 사람이었지 당기는 사람은 아니었다. 덜 닦아낸 얼굴이 축축했다.
시간은 평소와 똑같은 속도로 흘렀다. 3교시는 영어였다. 그는 원래부터가 타인의 기척에 기민한 편이었지만 그 정도는 언제나 관계의 밀도와 비례했다. 그러니까, 소란한 복도의 저편에 있는게 누구인지 그는 오래 쳐다보지 않고도 금방 알았다. 시선을 옮기다 눈이 마주쳤다. 안경 너머의 까만 눈동자. 그는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 것에 익숙했다. 다만, 이유 없는 얕은 긴장감에 목 뒤가 당겼다.
9
"주말 잘 보냈어?"
그 상투적인 물음에 대한 솔직한 대답이라면 아주 좆같고 기분이 더러웠어요, 가 되어야 하겠으나, 오웬은 직접적인 화법을 피해가기로 했다. "내내 영화 봤어요." "무슨 영화?" "Little Miss Sunshine이라고……." 대화는 유리창 위의 물방울처럼 표면 위를 매끄럽게 흘러갔다. 그것이 지금 하고 싶은, 혹은 해야하는 이야기가 아님은 서로가 알았다. 몇 번 주고받은 말의 끄트머리에서 잘못 박은 못처럼 튀어나온 침묵은 아마 그런 이유에서일 것이다. 로렌스는 잠깐, 숨을 들이켜며 들고 있던 책을 뒤집어서 책상 위에 내려놓았고 오웬은 멀거니 선 채로 차라리 인사를 하지 말 걸 그랬나, 하는 생각을 했다. "주말 동안 무슨 일 있었어?" 로렌스가 다시금 물었다. 그것은 앞선 질문과 비슷해 보이지만 전혀 다른 질문이었다. 오웬은 가볍게 인상을 찌푸렸다. 예상하지 못한 질문은 아니었다. 그러나 오웬은 그 주제가 정말로 달갑지 않았다.
"별로."
"오웬."
그의 이름은 둥근 부분이 많았고 입안 어디에도 걸리지 않은 발음이었지만 오웬은, 로렌스의 입에서 듣는 제 이름이 어쩐지 잘라낸 쇠조각 같다는 생각을 했다. 로렌스는 아주 천천히 말을 골랐다. 신중하려는 것 같았다. 그 신중함은 무엇을 위한 신중함일까. "말하고 싶지 않다면 말하지 않아도 괜찮아." 오웬은 발작적으로 눈을 깜빡였다. "하지만 문제가 있다면 내가 도울 수 있도록 해줘." ……무엇을? 불현듯, 생각이 멀어졌고 오웬은 차게 식은 서재의 카펫과, 대리석으로 만들어진 재떨이의 모서리, 검지 끝이 무뎌질 때까지 두드렸던 피아노의 건반과 꿈속에서 보았던 좁고 먼 길…… 그것들을 차례로 떠올리며, 책상 가장자리를 짚고 있던 손에 문득 힘을 주었다. 거기에는 타인이 도울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렇다면, 타인이 간섭할 수 있는 일도 아닐 것이었다.
"언제부터야?"
"…그쪽이, 신경쓸 일 아니에요."
말은 머리에서가 아니라 혀끝에서 튀어나온 것 같았다.
11
"다시 한번 말해봐, 토너."
오웬은 그 목소리에서 억양이 사라진 것을 놓치지 않았다. 토너, 그 발음은 부러진 나뭇가지마냥 딱딱하게 나왔다. t 발음을 정확하게 내는 영국식 악센트 때문만은 아닐 것이었다. 뒷목이 누군가가 부러 한계까지 당겨놓은 활처럼 뻣뻣해졌다. 그는 아주 잠깐 망설였지만, 대답은 그런 망설임이 무색할 정도로 반사적으로 튀어나왔다. "신경쓸 일이 아니라고 했어요, 선배님." 그리고 침묵. 그 침묵은 칼로 벼려낸 단면처럼 아주 예리했다. 상대의 한계점을 건드리고 있다는 것을 서로가 알았다. 자존심을 세우는 것은 역시나 그에게는 익숙한 행동양식이었다. 그는 한번도 누군가가 자신에게 간섭하도록 내버려둔 적 없었고 그와 타인의 거리는 언제나 일정하게 멀었다. 마치 구심점을 두고 같은 거리를 덧그리며 맴도는 동심원 같이. 그에게 다가온 사람들은 언제나 그 선 바깥에서 머물거나 아니면 서성이다가 이내 뒷걸음질쳐갔다. 오웬은, 이번에도 다르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생각했지만.
"너는 그러면, 누가 너한테 '신경쓸' 수 있다고 생각하는데?"
그렇게 묻는 목소리는 여전히 억양이 없었지만 오웬은 그가 화를 내고 있음을 알았다. 그리고, 그 자신 역시 화가 나 있었다. "아무도." 오웬은 그가 멀어져가기를 바라지 않았다. 빌어먹게도. "아무도 나에게 간섭할 수 없어요." 그러나 그의 안에는 별처럼 무수한 것들이 존재했다. 여러 번 개처럼 두들겨 맞았고 욕을 먹었고, 그가 중요하다고 여기는 것은 언제나 깎아내려졌으며 누구도 그의 말을 곱씹어 생각해주지 않았다. 그것들은 버릇처럼 존재했고, 그래서 오롯이 그의 버릇이 되었다. 또한 그것들은 언제나 그의 자리에만 머물렀다. 그가 힘들었던 순간에는 언제나 아무도 없었고…… 그래서 그는 일찍이 결정했다. 그 누구도 그에게는 필요없다고. 오웬은 말을 하면서 점점 뒷목께가 뜨거워진다고 느꼈다.
"나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잖아요."
그 말을 뱉어내자 목덜미가 아주 뜨거웠다. 반대로, 목소리는 제 귀에 듣기에도 퍽 냉정했다.
13
오웬은 행간이라는 말에 대해서 다시 한번 떠올렸다. 그를 이루고 있는 수 없는 개체들의 합, 1과 2와 3과 4를 더한 것은 10과 같지 않은. 오웬은 눈앞에 있는 사람에 대해 몇 가지 사실을 알았다. 눈이 많이 나빴고, 수학을 잘하며, 책을 좋아했고, 영국식 악센트를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또? 또 무엇이 있었더라. 열 오른 머리는 알고 있던 사실들도 자꾸만 바깥으로 밀어냈고 오웬은, 모랫알을 쥐려는 어린아이처럼 손을 꽉 오므려 주먹을 쥐었다가 이내 폈다. 누군가에 대해 아는 사람이 있을 수 있다고 생각해? 그런 사람은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손을 잡고 살갗을 맞대고 입을 맞추어도 그들 사이가 멀어져갈 수 밖에 없는 이유는, 알려주지 않았고, 알려고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오웬은 그 사실을 모를 정도로 멍청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그는 한번도 누군가를 가까이 하는 법을 배운 적이 없었고, 그것은 그의 잘못이 아니었다. 왜 모든 사람들은 뒷걸음질 치기만 하는 것일까? 오웬은 화가 났고, 그러면서도 그 화가 어디서부터 시작한 것인지는 당최 알 수가 없다는 생각을 했다.
"없죠. 그런 건."
냉정하게 말했다가, 입을 다물었다. "…씨발." 익숙한 욕설이 뒤따라나왔다. 로렌스의 눈동자가 문득 올라왔다. 오웬은 무언가를 걷어차고 싶은 기분이 되었다. 걷어차고 깨부셔 놓으면 속이 시원할 것 같았다. 그러나 그의 말들은 여전히 혓바닥 위에 있었고 생각보다 더 자연스럽게 흘러나왔다.
"없어요. 애초에 기대도 하지 않았고, 그래서 안되는 거겠죠."
15
오웬은 화가 나 있었고, 화가 난 사람들이 흔히 그렇듯이 상대를 더 화나게 할 말들을 찾고있었지만, 그 한마디에 불현듯 말을 잊었다. 왜, 라는 질문이 자연스레 뒤따라 나왔다가 역시나 혀끝에서 사라졌다. 막연하게 느끼고는 있었지만 굳이 언어로 구체화하려 하지 않았던, 다른 말로 하자면 오랫동안 기만하고 있었던 생각이었다. 오웬은 남과 일정 거리 이상 가까워지지 못하는 자기 자신을 알고 있었다. 그럴 때마다 사람들의 거리는 행성과 다른 행성 사이만큼이나 멀었다. 지금 이 순간, 대화를 나눌 수 있을 정도의 짧은 거리는 한 순간 보이고 나서 사라지는 혜성만큼이나 빠르게 멀어져가고 있었다. 상대는 자신과 비슷한 종류의 사람이었다. 가벼운 말투와 농담 같은 제스쳐들 사이에서 그것을 알았다. 알고 있었다. 알고 있었는데……. 오웬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작한 자기 자신이 이상하다는 생각을 문득 했다. 먼저 손을 내민 것은 자신이었다. 그는 머리위에 꽂혀 있는 책을 집기 위해 위로 뻗은 손끝을 만져보고 싶다는 생각을 한 적이 있었다. 아직 여름이 끝나기 전이었고, 그게 시작이었다. 그리고 이제 시작은 보이지 않는 곳으로 멀어졌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친 순간 오웬은 울컥, 목구멍으로 넘겼던 화가 다시 치미는 것을 느꼈다.
쾅.
그가 발끝으로 카운터의 아래쪽을 걷어찼다. 굉음이 났고, 도서관 안의 사람들이 모두 그를 돌아보았다. 숨을 몰아쉬자 시야가 흐렸다. 덕분에 상대의 표정이 잘 보이지 않았지만 우습게도 그 편이 더 나았다. 신발 안쪽의 발가락이 찌르르하게 아파왔다. 그는 아랑곳 않고 시선들로부터 도망치듯이 보폭이 큰 걸음으로 도서관을 나섰다. 이제는 가을이었고, 겨울이 곧이었다.
17
한번 치솟았던 화는 아주 느리게 가라앉았지만 한나절을 넘기지 않았고, 일단 머리가 식고 나자 감정들은 앙금처럼 침잠했다. 자신에게 간섭한 데에 화가 났었다. 그리고 몇 마디 말에 너무나도 쉽게 멀어져버린 것에도. 오웬은 그 모순된 나열을 알아차리지 못할 정도로 아둔하지는 않았다. 뒷걸음질쳐 간 사람들을 탓했지만 결국에는 그가 밀어낸 것이나 다름없었다. 막다른 길에서 뒷걸음질하지 않을 사람은 없다. 그의 잘못은 아니었지만, 결국에는 그의 일이었다. 도서관에 가지 않는 오후는 아주 길었고 며칠 째 생각들은 그런 흐름을 따라가고 있었다. 침대에 누워, 나는 걸어가기엔 멀고, 무얼 타기엔 애매한 길을, 누구보다 많이 가지고 있다, 그런 시구를 외워보는 오후는 더욱 길었다. 그리고 그 생각들의 끝에서는 복도에서 종종 마주치고 하는 눈동자나 뒷모습이나 발끝을 되새겨보곤 하는 것이다. 순간들은 붙잡지 않으면 그렇게도 쉽게 스쳐지나갔다. 발 아래에 넣은 압정처럼 따끔거리는 찰나였다. 어느 날 문득 신발을 벗어 확인해본 엄지발가락 끝에는 시퍼렇게 멍이 들어 있었다. 발톱 끝이 갈라져 너덜거렸다. 그의 생각들도 꼭 그만큼 너덜거렸다. 그는 발가락이 신발 안쪽에 닿지 않도록 조심해서 걸음을 걸었다. 조심하는 순간마다 압정 끝 같은 생각들이 끼어들었음은 굳이 말하지 않아도 좋을 일이었다.
그리고, 문자를 받은 것은 늦은 오후였다. [기숙사 옆 벤치에 있어. 잠깐 나올래?] 오웬은 답장하지 않은 문자 아래로 또 다시 온 문자가 어쩐지 생경하다고 생각했다. 그는 그 문자를 오랫동안 쳐다보았다. 어떤 시구를 외우는 사람처럼 그랬다. 오웬은 느리게 벗어두었던 스웨터를 다시 입고 기숙사방을 나섰다. 몇 걸음 걷지 않아 벤치가 눈에 보였고 로렌스는 무언가를 들여다보듯 유심한 눈으로 아래를 쳐다보고 있었다. 딱히 부르지도 않고 다가가 서자 자연스럽게 시선이 올라왔다. 눈이 마주쳤다. 그리고는 침묵이었다. 로렌스는 그의 얼굴을 올려다보기만 했다. 그래서, 오웬도 그냥 그의 얼굴을 내려다보기만 했다. 목구멍 안쪽에서 말과 말이 되지 못한 감정들이 벌레처럼 와글거리는데도 그랬다. 오웬은 눈치가 빨랐지만 상대의 시선이 어떤 온도를 가지고 있으며 어떤 말들을 숨기고 있는 지 눈빛만 보고도 알아차릴 만큼 기민하지는 못했다. 결국에는 말하지 않는 것들은 알 수 없는 것이었다. 이상하게도 오웬은, 그 순간 그것을 깨달았고 납득했다. 아주 사소하고 이상한 일이었다.
로렌스의 시선은 몇 번 달싹였다. 손을 쥐었다 폈다 하는 사소한 움직임이 반복되었다. 어쩐지 먹먹한 기분이 드는 것은, 상대가 그런 표정을 하고 있기 때문인지 아니면 그가 그런 기분이기 때문인지 알 수가 없었다. 구분하는 일에 능하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알 수 없는 일들은 자꾸만 늘어갔고 침묵하는 동안 공기는 서늘해졌다. 어렴풋이 해가 지고 있었다. 오웬은 그의 손끝에 시선을 두었다. 이 순간에도 저 손끝을 잡고 싶다는 생각을 하는 자신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아직도 감정은 앙금처럼 남아있었고 압정처럼 뾰족했다. 그래서 우리가 잘될 수 없는 거야. 그 말은 묘하게 납득이 가는 구석이 있어 더욱 날카로웠다. 그래서 더 화가 났던 것이리라. 그러나 결국에 화의 반대편은 무언가가 되고 싶은 마음과 맞닿아 있다고 생각하면 조금 더 쉬웠다. 그는 주머니에 손을 넣은 채로 오랫동안 망설였다. 이번에도 결국 손을 먼저 내미는 것은 그였다. 불쑥 팔을 뻗어 그 손목을 쥐자 갑작스런 접촉에 어렴풋이 놀란 얼굴을 한다.
"일어나요."
오래 침묵한 사람처럼 목소리가 낮았다. 말을 하는 법을 잊어버릴 것 같다는 생각에 어지러웠다.
19
맞닿은 손바닥이 서늘했다. 손이 찬 편이구나, 하는 사실을 그때야 알았다. "나는 네가 약을 하는게 싫어." 말은 발끝에 채이는 돌부리처럼 툭, 튀어나왔다. "알아요." 명징한 것에 대답하는 일은 어렵지 않았다. 어스름이 내린 운동장은 손을 잡고 몇 바퀴를 돌아도 남 눈치가 보이지 않을 정도로 아주 어둑했다. 더 이상 운동장을 몇 바퀴를 돌았는지 셈을 하기가 어려워졌을 즈음, 체온이 옮아간 듯 상대의 손이 천천히 따스해졌다. 그게, 그 느낌이, 아주 조금 그의 마음을 누그러뜨렸다. 긴 한숨이 입에서 빠져나와 연기처럼 흩어졌다.
"나는……"
대화의 서두를 여는 일은 어려웠다. 그는 한 번도 그런 종류의 일을 해본 적이 없었으므로 더욱 그러했다. 그는 평소 말을 잘하는 편이었다. 어떤 단어가 어디에 존재해야할 지 원래부터 알고 있는 사람처럼 그랬다. 그러나 이 순간 그가 알고 있던 단어들은 이곳저곳으로 흩어졌고 오웬은, 땅에 떨어진 낱알들을 주워모으는 사람처럼 말을 골랐다.
"가끔…… 화가 나서 견딜 수 없을 때가 있어요."
얼굴을 보지 않자 말을 하는 것은 한결 쉬웠다. 다만 기척이 가까웠다. 가끔씩 소매끝이 스쳤고 손끝이 손등에 닿아있었다. 오웬은 그것을 놀라우리만치 기민하게 느끼고 있었다. 이걸 밀어낼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다. 그는 자신의 생각을 수정하는 일이 거의 없는 사람이었지만, 지금 이 순간만큼은 아니었다. 뭐든지 생각한 것과는 달랐다. 말은, 한 음절씩 끊어져 나왔다.
"이유를 모르잖아요."
문득 맞잡은 손에 힘이 들어갔다. 오웬은 걸음을 멈췄다. 로렌스의 걸음도 따라 멎었다. 오웬은 뒤를 돌아보았다. 파랗게 어두워진 저물녘에 하늘이 까마득히 높았고 학교의 오래된 건물들이 정수리를 낮추며 어둠속에서 천천히 잠들고 있었다. 밤의 첫머리에서 운동장은 경계를 알 수가 없어 광막하게 넓어보였고 그럼에도 몹시, 가까웠다. 희미하게 떠오른 이목구비의 윤곽과 그 너머의 눈동자를 쳐다보았다. 밤의 색깔을 닮아있었다. 그리고 생각을 알 수 있을 것 같다는 착각이 들 정도로 가까웠다.
"……지금부터 들으란 얘기였어요."
그의 목소리가 나직해졌다. 가까이 있지 않다면 알아듣기가 어려울 정도였다.
21
오웬은 자신 외의 것들을 구분하고 판단하는데 능한 사람이었다. 하지만 그 잣대를 자기자신에게 들이대본 적은 한번도 없었으므로, 그는 말의 첫머리를 찾기 위해 아주 많이 고심해야만 했다. 인생의 전반을 차지하고 있는 것에서 시작을 찾기란 참 힘든 일이었다. 그는 맞닿은 손바닥과 헐겁게 엉켜있는 손가락, 손등에 닿아있는 가슴팍을 감촉으로 느끼며 그런 식으로 서투르게 이어져 있음에 대하여 생각해보았다. 살면서 그런 식으로 누군가와 이어져 본 적이 있느냐고 물으면 한번도 아니었다. 그래서 그게 몹시 어색했고, 어색한 한편 이상할 정도로 먹먹했다. 오웬은 잡힌 손끝을 몇 번 옴작거리다가 이내 다시 한 번 긴 한숨을 뱉어냈다.
"……부모님이랑 사이가 안 좋은데,"
그렇게 운을 뗐다. 목소리가 자신의 것이 아닌 것처럼 귓바퀴 안쪽에서 웅웅거렸다.
"글쎄요. 그걸 그냥 안 좋다고 표현해도 될지 모르겠어요. 안 맞는 사람이라는 건 부모자식간에도 존재할 수 있는 거거든요. 그리고 부모라는 건 최소한 아이가 성인이 될 때까지는 절대적인 대상이니까."
남의 이야기를 하는 것처럼 말은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게, 무덤덤한 어조로 나왔다. 그러나 익숙치 않은 일을 한다는 것을 자각하기라도 하듯 이상하게 목 뒤쪽이 뜨거웠다. 그는 말들이 목구멍 아래에서 바글바글 끓고 있다고 생각했다. 로렌스가 그의 손가락을 엄지로 부드럽게 쓸어내렸다.
"내가 그 사람들 돈으로 밥을 먹고 학교를 다니는 동안은 나는 내 손으로는 아무것도 선택할 수 없는 거겠죠."
23
평소에 하는 말들이 한 줄로 매끄럽게 꿰인 구슬목걸이라면 지금 하고 있는 말들은 줄을 끊어낸 파편들 같았다. 자신의 얘기를 한다는 것은 그토록 낯설었다. 그는 그것이 낯설다는 것을 처음 자인했고, 어린 사람 특유의 오만으로 모든 것을 제대로 알고 있으리라 믿었던 것이 문득 부끄러워질 정도였다. 오웬은 조각난 말들이 제대로 가닿았는지 자신하지 못했다. 그가 듣기에도 말들은 어눌했고 종종 멈추기도 했으며 말과 말 사이는 행간을 알 수 없을 정도로 멀었다. 그래도 로렌스는 유심하게 그 말을 들었다. 모래알 사이에서 사금을 골라내는 사람처럼, 그랬다. 그들은 서늘한 그림자 아래를 걸었고 그가 뱉어내는 말들도 점점 더 서늘해지고 있었다. 혓바닥이 말라 붙어서 몇 번이나 신 침을 삼켰다.
마침내 말이 끝났을 때 오웬은 이상하게 울고 싶다고 생각했다. 그는 매번 자신에게 온 것들을 눈물 없이 감내해냈다. 그것이 그가 내세울 수 있는 몇 안되는 자존심이었다. 하지만 솔직하게 울 수 있었다면 많은 것들이 달라지지 않았을까? 문득, 그런 생각이 뒷목 언저리에서 들었다. 코를 훌쩍이고 나서 변명하듯이 익숙하지 않아서요, 라고 말하자 로렌스가 빙긋 웃었다.
"나는 무서웠어. …네가 사라질까봐."
나, 와 네가, 오웬은 그 말들이 어렵다고 생각했다. 우리는 제대로 우리, 가 될 수 있을까. 자신이 없었다. 그에게 습관이 된 관계들과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는 상황들이 머리 위에 드리워진 그림자처럼 높았다. 오웬은 툭, 그의 어깨에 머리를 기대었다. 사소하고 덤덤한 동작이었다. 걸음이 멈췄고, 로렌스가 문득 반대편 손을 들어 그의 눈가에 가져다댔다. 있지도 않은 눈물을 훔쳐내는 것처럼 그랬다.
"안 사라져요."
"그래."
"……안 사라져요."
"알았어."
"정말로." 다짐하듯이 말을 되새기며, 오웬은 그의 손바닥 아래에서 천천히 호흡했다. 밤이 어두웠고 아무도 그들을 보지 못할 것이었으며 공기는 서늘하고 손바닥은 차가웠다. 달라지는 것은 아무것도 없을 것이었고 그들은 앞으로도 몇 번이나 서투를 것이었으며 확신할 수 없는 것은 무엇도 없었다. 그래도 서투르게 옭아맨 손가락과 맞닿은 어깨, 눈꺼풀에 와닿는 살갗이 있었다. 그것으로 되었다. …정말로, 그것으로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