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차 +11
  1. 2018.06.09 어떤 밤
  2. 2018.02.06 어느 날
  3. 2018.01.18 쓰다 만 것
  4. 2018.01.18 막이 오르면
  5. 2018.01.01 정우인
  6. 2017.06.04 우은재
  7. 2017.06.02 남은수
  8. 2017.05.15 완벽한 승낙
  9. 2015.12.20 (☞▽☜) 10
  10. 2015.08.29 로웬
어떤 밤



 엔도 치하루는 눈을 떴다.

 익숙하지 않은 천장을 올려다보며 눈을 느리게 한 번, 두 번 깜빡거렸다. 잠이 덜 깬 머리는 제대로 맞물리지 않은 톱니바퀴처럼 삐걱삐걱 느리게 돌아갔다. 어둠에 익숙해진 눈이 침대 머리맡과 높은 천장의 모양새를 어렴풋이 인식하고 나서야 그는 몇 가지 사실을 떠올릴 수 있었다. 이 집은 크고 넓었지만 주변에 이웃이 적은 탓에 한밤중에는 무서우리만치 적막했다. 손님방과 화장실이 멀리 떨어져 있는 것도 문제라면 문제였다. 볼일을 보고 나서 길고 어두운 복도를 되짚어 가던 와중 그는 덜컥 겁이 나기 시작했고, 바닥에 깔려 있던 카펫에 발이 걸려 한 번 넘어지고 나서는 일단 아무데나 눕고 싶다는 생각 또한 들었다. 치하루는 문득, 좀 더 가까운 곳에 코하쿠의 방이 있다는 것을 떠올렸다. 고민은 길지 않았다. 밤이 새벽으로 넘어가는 시간이었다. 그는 발뒤꿈치를 들고 조용히 움직였다. 복도 끝으로 살금살금 걸어가 방 문을 슬쩍 열어 보았을 때, 그 안은 마치 사람이 없는 방처럼 적막했다.

 공간을 아낄 필요가 없는 널찍한 방 한가운데에 넓은 침대가 있었다. 두 명이 누워도 자리가 남을 법한 침대에서 코하쿠는 정자세로 잠들어 있었다. 치하루는 이불의 가장자리를 들추고 그가 할 수 있는 한 가장 조심스러운 동작으로 그 밑으로 기어들어갔다. 구석에 몸을 구기고 누워서 옆을 돌아보는데 문득, 눈이 마주쳤다.


 "어……"


 잠을 안 잤다기보다는, 자다가 깬 듯한 표정이었다. 코하쿠는 왜 여기 있냐든가 지금이 몇 시냐든가, 그런 질문을 하는 대신 눈과 눈썹 사이를 약간 좁히고는 어둠 속에서 그를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왜 그렇게 가장자리에 누워 있어요……" 졸음에 겨운 말끝이 조금 뭉개졌다. 그가 손으로 제 옆자리를 토닥이듯이 몇 번 두드렸다. 치하루는 그 사인을 냉큼 알아들었다. 무릎 걸음으로 걸어가 그의 옆에 바짝 붙어서 눕자 그제야 소년이 다시 눈을 감았다. 머리를 베개에 뉘이자마자 때늦은 수마가 눈꺼풀을 짓눌렀다. 그것을 의식하기도 전에 잠에 들었던 것 같다.

 그런데 왜 지금 깼을까.

 마치 물에서 건져내듯이 자연스러운 기상이었다. 시간을 잘 짐작할 수 없었지만 사위가 어두운 것으로 보아서는 아직 한참 새벽인 것 같았다. 그는 잠시 천장에 매달려 있는 형광등을 올려다보다가, 뒤척거리는 소리가 나지 않도록 조심하며 몸을 돌려 누웠다. 창문 너머로 희붐하게 비쳐 들어오는 빛이 유일한 광원이었다. 고작 사물의 윤곽 정도만 인식할 수 있는 시야에, 가만히 잠들어 있는 소년의 옆얼굴이 보였다. 치하루는 가만히 그 얼굴을 구경해보았다. 그는 언제나 치하루보다 일찍 일어나기 때문에 좀처럼 볼 수 없는 얼굴이었다. 코하쿠는 정물처럼 잠들어 있었다. 배 부근에 양손을 올리고, 고개를 기울이거나 몸을 뒤척인 기색도 없이, 그렇게. 어둠 탓인지, 달빛 탓인지는 모르겠으나 그 낯빛이 유난이 흰 것 같았다.

 아니, 창백한 것일지도 모른다.

 그렇게 생각하자 불현듯 그가 숨을 쉬고 있는지 아닌지 알 수가 없었다. 그것은 아주 순간적이고 막연한 기분이었다. 막연하기는 하였으나, 근거가 없는 감상은 아니었다. 아주 근거가 없지는……

 그 순간 덜컥, 무언가가 내려앉는 소리가 들린 것 같았다.

 본래 모든 공포는 막연하기 마련이다. 그 누구도 손에 잡을 수 있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기 때문에, 그렇기 때문에 사람들은 자신의, 혹은 타자의 죽음을 두려워하기 마련이고…… 홀로 남겨지는 것을 무서워하게 되는 것이다.

 그 기분 앞에서 엔도 치하루는 자연스럽게 닫힌 문과 아무도 찾지 않는 반나절을 떠올린다.

 그는 거의 무의식적인 동작으로 손을 들어 소년의 코 밑에 가져다대었다. 낮고 희미한 숨결이 손끝에 닿을 때까지의 그 찰나의 순간이 무척이나 길게 느껴졌다. 코하쿠는 거의 몸을 들썩이지 않고 숨을 쉬었다. 치하루는 그제야 제 쪽이 한참동안 숨을 참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어쩐지 손끝이 녹아내릴 것만 같은 기분에 한숨처럼 길게 숨을 내뱉었다.

 코하쿠는 아무래도 잠귀가 밝은 것 같았다. 아니면, 손 그림자가 눈 앞에서 몇 번을 왔다갔다 해서 그런 것일지도 모른다. 그는 잠이 든 얼굴만큼이나 조용히 잠에서 다시 깼다. 자던 와중에 몇 번이나 깨고도 짜증 한 번 부리지 않고 가만히 이쪽을 올려다보는 그 얼굴에 대고, 깨워서 미안하다고, 다시 자라고 말해야 하는데 어쩐지 그 말이 잘 나오지 않았다.


 "무슨 일 있었어요?"


 코하쿠가 나직하게 먼저 물어보았다. 치하루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무 일도 없었다. 아무 일도 없었기 때문에.

 그는 몸을 웅크리듯이 모로 뉘였다. 고개가 소년의 어깨 쪽으로 가까이 붙었다. 그가 중얼거리듯이 대답했다.


 "아무 일도 없어서 다행이야."


 낮고 모호한 말이었으나 해명을 요구하는 질문은 돌아오지 않았다. 어쩐지 모든 것을 이미 알고 있는 듯한 그 침묵에, 치하루는 무슨 일인지 한결 더 서러워졌다. 그 서러움이 제 것이 아님을 알면서도 반사적으로 눈물이 났다. 살면서 한 번도, 기쁨이나 슬픔을 숨겨야겠다는 생각은 한 적이 없는데, 지금은 그래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소리를 죽이고 조금씩 울기 시작했다. 관자놀이 옆이 금세 축축해졌다. 숨을 들이키는데 무심코 호흡이 얕아졌다. 안타깝게도 그는 무언가를 숨기는 데 재능이 없었다.

 아마 코하쿠가 이불 위를 더듬어 그의 손을 찾아 쥔 것은 그래서였을 것이다. 말이 없는 그 손은 이런 상황에 이미 익숙한 것 같기도 했다. 그래서 치하루도 말할 수 없었다. 네가 없는 건 무섭다고. 더 이상 혼자 있는 건 싫다고. 죽으면 안된다고. 여기 있어달라고. 그런 건 그의 마음대로 할 수 없는 일이니까. 누구의 마음대로도 할 수 없는 일이니까.

 아, 말들은 얼마나 무력한지.

 치하루는 무력한 말을 하는 대신 그의 손을 맞잡아 쥐고 눈을 감았다. 아직 남은 새벽이 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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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



 "이모, 참이슬 클래식 하고, 어, 맥주? 맥주도 한 병 주세요."


 유리는 술병을 받아들자마자 익숙한 손길로 병목을 잡고는 두 시 방향으로 꺾듯이 흔들었다. 초록색 소주병 안에서 작은 소용돌이가 일었다. 무재가 턱을 괴고 그 모양을 지켜보았다. 까득, 병을 따는 소리. "형 내가 따라줄게." 그렇게 말하면서 유리는 조심성 없이 병목을 잡은 손을 불쑥 테이블 중간으로 내밀었다. 덕분에 가장자리에 놓여 있던 티슈 꽂이가 병 뒤축에 밀려 바닥으로 떨어졌고 무재는 익숙하다는 듯 한숨도 쉬지 않고 몸을 숙여 떨어진 물건을 집어올렸다. 덕분에 그가 입고 있던 도포 자락이 바닥에 끌려 테이블 사이를 돌아다니던 점원이 흘끗 그를 돌아보았지만 그는 신경쓰지 않았다. 그 사이 유리가 무재 앞에 놓인 잔에 넘치도록 술을 따랐고, 무재가 채 허리를 펴기도 전에 제 잔에도 직접 술을 채웠다. 유리가 방긋 웃었다.


 "오늘은 형이 사주는 거야?"

 "너는 돈도 많은 애가 왜 그러냐……"

 "에에이, 나 이제 백순데."


 엊그제 대학원의 졸업식이 있었다. 유리는 한동안 석사 논문을 쓰느라 바빠서 어디에도 낯을 내비치지 못했다. 사람을 만나는 것을 좋아하는 그가 몇 날 며칠을 연구실에 틀어박혀 있었는지 모르겠다. 그 꼴에서 해방되고 나니 후련하기는 후련했지만 마냥 좋아할 상황도 아니었다. 두 달 여 전 조교들의 술자리에서 일어난 일 때문이었다.

 대학가 앞 술집은 어느 때나 북적거렸고 그때도 마찬가지였다. 모두가 한창 아무 일 없이 술을 마시던 와중이었다. 열한 시 무렵이었나, 상석에 앉아있던 교수가, 그러니까 이미 소주를 댓 병은 까고 나서 벌개진 얼굴로, 옆자리도 아니고 한참 떨어진 자리에 앉은 유리에게 갑자기 삿대질을 하며 자리에서 일어난 것이다. 처음에는 그 눈치를 모르고 옆에 앉아 있던 연구실 동기의 접시에 담긴 안주를 뺏어먹던 유리는 교수가 "야!" 하고 쩌렁쩌렁 소리를 지르고 나서야 고개를 돌렸다.


 "너 내가……"


 술자리가 벌어진 지 네 시간이 지난 때였으니 교수는 이미 얼큰하게 취해 있었지만 유리는 더 없이 매우 말짱했다. 학부 시절에는 생명공학과의 밑빠진 술독이라 불리던 그였다. 그는 고학번 때도 눈치 없이 총엠티에 따라가 신입생들 잔에 술을 따라주며 여럿 죽여놓고는 본인은 취기의 ㅊ도 없는 말짱한 얼굴로 새벽 다섯 시까지 자러 들어가려는 사람 바짓가랑이를 붙잡고 놓아주지 않기로 유명했다. 유리가 멀뚱히 입에 든 노가리를 씹어삼키는 사이 교수는 무어라고 큰 소리를 내며 그에게 삿대질을 했는데, 거리가 좀 떨어져 있을 뿐더러 한참 취해서 뭉개진 발음으로는 무슨 말을 하는지 도통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그쯤되면 보통 사람이라면 내가 무슨 잘못을 했나 눈치를 봐도 한참 볼 상황이었지만 유리는 그저 그 상황이 어리둥절할 뿐이었다. 그가 무의식중에 제 앞에 놓여 있던 감자튀김을 하나 집어 입에 털어넣자(마치 영화관에서 팝콘이라도 집어먹는 마냥), 안 그래도 큰 소리를 내고 있던 교수가 벼락 같이 외쳤다.


 "너 내가 이 바닥에 발 못 붙이게 만들어버릴 줄 알아!!!"


 그러고 교수는 테이블 위에 쓰러졌다.

 그리고 침묵이었다. 그 자리에 모인 모두의 시선이 교수 앞으로 쪼로록 모였다가 흩어졌다가 이내 유리에게로 다시 모였다. 교수가 그런 말을 한다는 것은 문자 그대로 의도가 자명했다. 너 내가 좆되게 만들어줄 거야. 유리는 두 개째의 감자튀김을 집어 입에 넣고 씹었다. 좌중의 시선이 모두 자신에게 쏠려 있는 것은 별로 개의치도 않는 표정이었다. 잠시 멀뚱하고 골몰한 얼굴로 앉아있던 그가 옆자리 동기를 돌아보며 물었다.


 "내가 뭐 잘못했나?"


 유리는 지금 앉은 술자리에서도 똑같이 무재에게 물었다. 물론 무재야 교수가 유리의 무엇에 그렇게 열을 냈는지 알 길이 없었지만 어떤 상황인지는 불 보듯 뻔했다. 박유리의 주변에 있는 사람들은 대체로 그에 대해 정해진 반응을 보였는데, 그를 아주 좋아하든지, 아니면 아니면 싫어하든지 둘 중 하나였다. 예쁘장한 얼굴에 성격도 살갑고 곰살맞으니 미워하기가 쉽지 않겠다 싶다가도 교수가 술자리에서 악을 쓸 정도로 저를 싫어하는데 그 이유를 짐작조차 못하는 망한 눈치와 선을 지킬 줄 모르는 성격은 복잡한 인간관계 사이에서 미움을 사더라도 어쩔 수가 없었다. 그나마 본인이 그런 것에 전혀 신경을 쓰지 않는 것이 다행이라면 다행이었다.(아니, 과연 다행인가?)


 어쨌거나 그러한 연유로 유리는 대학원에서 쫓겨나듯이 졸업했다. 원래는 박사 과정을 밟고 유학을 떠나는 것도 염두에 두고 있었으나 그 좁은 바닥에서 윗사람에게 미움 받는 것은 곧 앞길이 구만 리라는 의미였다. 어딜 가나 마주칠 거고, 어딜 가나 일이 꼬이겠지. 그의 연구실 동기들은 졸업이 코앞이니 석사만 따고 박사과정은 그만두는 것이 낫겠다고 그에게 삼백 번도 더 넘게 말을 했고 유리는 뭐, 아마도 그게 현명한 선택인가보다, 하고 생각했다. 뻔히 정해놓았던 앞길이 대번에 꺾였는데도 유리는 태평했다. 원체 그런 것에는 집착이 없는 그였다.


 "이제 다른 일이라도 찾아봐야겠네. 취업할 거야?"

 "음……"


 유리가 술잔 가장자리를 입에 물고 앞니로 깔짝거렸다. 생각해보지도 않은 취업을 고려하자니 그 또한 구만리였고 그렇다고 해서 당장 다른 길이 명확하게 떠오르냐면 그런 것도 아니었다. 그는 느긋한 성격답게 아직까지는 아무 생각도 없었고 십 년이 넘게 알아온 무재의 눈에는 그 속이 빤하게 들여다보였다. 그는 유리가 무념무상으로 연거푸 자작을 하는 것을 막고는 그 술잔에 술을 한 잔 따라주었다.


 "너는 사주에 역마살이 두 개나 있으니 이런 거에 좌절하면 앞으로도 힘들어."

 "그런가아……"


 사주니 역마살이니 누가 들으면 코웃음을 칠지도 모르는 일이었지만 유리는 무재가 말하는 것은 대체로 다 믿었다. 거짓말도 넙죽넙죽 믿는 판국에 사주팔자라고 못 믿을 일도 없었거니와 무재가 하는 말이 틀리는 경우는 별로 없었으니까. 그리고 무엇보다 말하는 사람이 무재니까, 유리는 그 말들을 믿었다. 그러나 믿는다고 해서 깊이 염두에 두고 신경을 쓰는 것도 아니어서 앞날을 알려줘도 고꾸라지는 경우가 종종 있었지만 그거야 뭐 유리의 잘못이었다. 유리가 기본 안주로 내어 놓은 눅눅해진 팝콘을 한움큼 입에 넣고 우물거리는데 문득 무재가 그를 불렀다.


 "송현아."


 송현松賢은 무재가 그를 부르는 이름이었다. 팝콘 그릇을 뒤적이며 탄 옥수수를 골라내던 유리가 고개를 들었다. 그때까지 의자 등받이에 몸을 기대고 있던 무재가 불쑥 상체를 약간 수그렸다. 이름을 부르던 목소리나 그 눈빛이 은근해졌는데 말하자면 누군가를 설득하려는 기색이 완연했다. 다르게 말하자면 약 파는 약쟁이 같은 기색이었다.


 "사실 이번 봄에는 신월이 들거든."

 "그래?"

 "새로운 일을 시작해볼 때야."


 그렇구나, 유리가 영문도 모른채 고개를 주억거렸다. 여전히 입에는 팝콘 알을 가득 문 채였다. 무재가 몸을 약간 수그린 채 씩 웃었다. 그리고 물었다.


 "네 운명에서 벗어나보지 않을래?"


 그때 문득 유리가 눈을 깜빡였다. 어두운 술집, 머리 위에 매달린 알전구 빛에 눈이 부신 것처럼 그랬다.

 이내 그가 덩달아서 씨익 웃었다.


 "그 말, 오랜만에 듣네."







 유리는 미취학 아동일 때 겪었던 열병의 기억을 아직 가지고 있었다. 기억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면 곧잘 까먹고 잃어버리는 그로써는 드문 일이었다. 살면서 그만치 아파 본 일이 더 없기도 했거니와 그때가 처음으로 무재를 본 때이기도 했기 때문이었다. 유리는 그때, 정말로 아팠다. 아파서 시야가 오락가락하고 이명이 들렸다가 사라졌다가 살갗이 뜨거웠다가 한기가 들었다가 그러기를 꼬박 며칠을 반복했다. 처음에는 그저 환절기마다 걸리는 감기려니, 독감 예방주사는 맞았으니 독감은 아니려니 하던 그의 무심한 부모님도 하루가 지나서는 놀라서 병원에 데려갈 정도였다. 유리는 병원 천장의 격자무늬가 자꾸만 흐려졌다가 겹쳐졌다가 여러 개로 찢어졌다가 하는 것을 올려다보다가 어지러워서 눈을 감기를 반복했다. 왼쪽 귀의 이명이 사라지지 않아서 속이 울렁거렸고 열 오른 살이 아파서 울고 싶었는데 울 기력조차 나지 않았다.

 그러던 와중, 흐릿한 시야에 불쑥 나타난 것은 한 어린애였다. 어린애라고는 해도 유리보다는 대여섯살 많아 보이는, 이목구비가 또렷하고 눈동자 색이 밝은 아이였다. 물론 유리는 그때 시야가 흐려서 그 무엇도 제대로 분별하기도 힘들었으므로 그 얼굴 어디에도 명확하게 시선을 두지 못했다. 소년은 열에 들떠 온통 붉은 유리의 얼굴을 내려다보다가 유리의 침대 옆에 걸려 있는 이름이나 병명을 쓴 표를 한 번 들여다보고는 끌끌 혀를 찼다.


 "그러길래 얘 이름은 이렇게 지으면 안된다니까…… 유리라니, 너무 깨어지기 쉬운 이름이잖아?"


 소년은 유리가 누구인지 이미 알고 있다는 투였다. 그 말투가 도통 어린아이 같지가 않았다. 쌕쌕 거친 숨을 뱉던 유리가 한 번 눈을 꽉 감았다 떴다. 그제야 시야가 명징해졌고 소년이 제법 걱정스러운 얼굴로 그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유리가 그 투명한 눈동자를 들여다보며 "누구……" 하고 간신히 물었다.


 "나는 네가 태어날 무렵에 신병을 앓았었는데,"


 무재가 에둘러가며 대답했다.


 "그때 꿈에서 네 사주가 들여다보이길래 이름을 지었다. 네 부모는 들은 척도 안했지만……"


 네 팔자는 살면서 죽을 고비가 네 번 있는 팔자인데 그중 한 번이 지금이라고 무재가 조곤조곤 말했다. 어디서 들으면 어린 놈이 사기를 친다고 역풍을 맞을 소리였으나 유리는 어렸고, 예나 지금이나 별 이유 없이도 남의 말을 잘 믿었으므로 그렇구나, 라고 생각했다. 죽을 고비가 네 번이나 있구나, 그러면 꼼짝없이 죽을 가능성이 더 높지 않나. 그렇게 생각하니 어린 마음에도 속이 아파 아까까지는 나오지도 않던 눈물이 비질비질 나왔다. 죽음이 무엇인지 제대로 알 나이도 아니었으나 생각보다 두려움이 더 먼저 앞섰다. 새카만 벽을 앞에 두고 있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유리가 아픈 와중에도 찔끔찔끔 울기 시작하는 것을 지켜보던 무재가 불쑥 물었다.


 "네 운명에서 벗어나보지 않을래?"


 응? 송현아. 그렇게 무재가 처음으로 그의 이름을 불렀다.

 유리는 눈물로 다시금 부얘진 시야로 그를 올려다보며 무슨 말인지도 제대로 모르면서 고개를 주억거렸다.






마음에 들었던 글이라 백업

무재랑 선관은 내가 짰지만 흥미로운 설정이라고 생각한다(자기 입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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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다 만 것


 1.


 뉴욕행 비행기 티켓을 예약해준 것은 유진이었다. 오웬은 주말 내내 피아노가 있는 방에 처박혀 있거나 침대에 누워 영화를 보았고, 그러다 보면 사람을 마주칠 일이 거의 없었지만 유진은 항상 제 동생들의 일에 관심이 많았다. 그는 사적인 공간에 민감한 오웬이 제 방에 들이는 몇 안 되는 사람이었다. 유진이 시내에 나갔다가 사온 과자를 그에게 건네면서 물었다. “콜롬비아 대학에 관심이 있어?” 그의 시선은 노트북 화면에 가닿아 있었다. 오웬은 노트북 스크린을 조금 몸 쪽으로 당기면서 애매하게 눈을 굴렸다. “썸머 스쿨 프로그램이 괜찮은 것 같아서.” “나쁘지 않지. 그런데 아마 아버지가 별로 안 좋아 하실 걸. 이번 여름엔 가족여행이라도 계획하시는 것 같던데. 스페인이라든가, 이탈리아든가.” 그 말에 오웬이 혀를 내밀며 구역질하는 제스쳐를 취했다. “내가 거기 따라갈 거라고 생각해?” “물론 아니지만.” 오웬은 바스락거리며 과자 봉투를 열었다. 달착지근한 라즈베리 쿠키를 혀에 올리고는 천천히 씹었다.


 “단 걸 좋아하는 줄은 몰랐어.”

 “별로 안 좋아해.”


 그 단호한 대답에 유진이 문득 웃었다. 그 웃음이 묘해서 오웬은 침대 등받이에 몸을 기댄 채로 눈을 들었다. 유진은 때로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 남에게 관대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멍청한 것은 절대 아니었다. 그는 오웬만큼이나 눈치가 빨랐고 가끔씩 그보다 더 영민할 때도 있었다. 그래서 다음 말을 들었을 때 오웬은 답지 않게 어색한 동작으로 시선을 떨어트릴 수밖에 없었다. “억양이 좀 특이해진 것 같아.” 그 말은 반 박자 느리게 다가왔다. “뭐?” “영국인 친구라도 사귀었나봐?” 유진이 손가락으로 입을 가리키며 웃었다. 오웬은 자판 근처에 시선을 둔 채로 그 말을 곱씹었다. 오래 생각할 필요는 없었다. 누군가와 가까워지는 일은 그렇게 하나씩 흔적을 남기는 일이었다. 자각하지 못한 흔적을 남에게 지적받는 것은 몹시도 떨떠름했다. 오웬은 괜시리 어금니로 과자를 우적우적 씹으면서 스크롤을 올렸다 내렸다 반복했다. 유진의 시선이 한 번 더 화면에 가닿았다 떨어졌다. 의미 없이 사소한 동작이었다.

 그리고 유진에게 전화가 온 것은 며칠 뒤였다. “썸머 스쿨이면, 한 이틀 전에 도착하면 되려나?” 오웬은 결코 말귀가 어두운 편은 아니었지만 유진의 말은 그렇게 몇몇 행간을 뛰어넘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그는 멍청하게 되물었다. “뭐?” “비행기 표 예약해야할 거 아니야.” “예약 해주게?” “너 돈 있어?” “없진 않… 을걸.” “학기 중에 굶고 살 예정이라면 말리진 않겠지만, 거기서 살이 더 빠지면 내가 널 병원에서 보게 될 것 같아서 말이야, 오웬.” 아무래도 밤 비행기가 나으려나? 비행기 안에서 잘 수 있어? 난 상관없는데 넌 좀 잠자리를 가리니까…… 떠벌떠벌 이어지는 그런 식의 말들을 들으며 오웬은 잠시간 침묵했다. “항상 좀 궁금했던 건데.” 그가 말의 중간을 잘라먹으며 입을 열었다.


 “왜 그렇게 항상 내 일에 신경을 쓰는 거야?”


 공을 주고받기라도 하듯 이번에는 전화기 너머에서 얕은 정적이 이어졌다. 침묵은 생각보다 길었다. “음…” 유진이 이내 길게 끄는 듯한 입소리를 냈다. 그것은 할 말이 없어서라기보다는 제가 할 말을 고르고 있는 것처럼 들렸다. 유진이 뱉어내는 말들은 대개 물살에 오래 부대낀 조약돌처럼 둥글었고 그만큼 신중했다. 그의 둥그스름한 말들은 그의 낮은 목소리와 잘 어울렸다. “좀 이상하게 들릴 지도 모르지만.” 그가 천천히 말들을 혀끝에 올렸다.


 “나는 그렇게 하고 싶은 게 명확한 사람이 아니거든, 오웬.”


 오웬은 눈을 감고 그 말을 들었다. “그래서 나는 견디는 게 어렵지 않았어. 무슨 말인지 알 거야, 그렇지?” “어.” “그래도 나도 가끔은 정말 싫을 때가 있었거든. 정말…… 엄청나게…… 싫을 때가 있었어. 그래도 나는 딱히 나 자신에게 다른 길을 제시할 수 있을 만한 사람이 아니었고, 그런대로 잘 견디면서 살았지만.” 오웬은 2층 침대의 바닥을 올려다보며 불현듯 이상한 기분을 느꼈다. 유진과 그는 나이차이가 제법 났고 그래서 오웬은 그들이 같은 유년을 공유했다는 자각이 별로 없었다. 유진은 언제나 우등생이었고, 한 번도 삶에 부대껴본 적이 없는 것처럼 다정했다. 오웬은 그의 다감함이 어떤 기반 위에 세워졌는지 알지 못했다. 그 이야기를 지금 듣고 있는 것이다. 그는 문득, 나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잖아요, 하고 말했던 일을 떠올렸다. 말하지 않는 일들은 그의 인식 바깥에서 그렇게 무수히 존재했다.


 “하지만 넌 아니잖아.”

 “응.”

 “열한 살 때 처음으로 같이 연극을 보러 갔던 거 기억해?”

 “기억해.”


 그는 그때 샀던 프로그램 북을 아직도 가지고 있었다. 그의 클리어파일 사이에 오랫동안 잠들어 있는 물건 중 하나였다. 손이 탄 모서리가 닳아 너덜너덜해졌지만 버리지 않았다. 그는 그때 처음으로 몹시 갈망을 느꼈다. 그것은 새 운동화나 멋진 양장본을 가지고 싶은 욕구와는 전혀 다른 갈망이었다. 빛이 있었고, 그 빛을 쫓아가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거기에서부터 시작했다. 한 번도 입 밖에 내어 말해본 적이 없었지만 유진은 알았다. 그의 열네 살 생일 때 티켓북을 선물해준 것도 유진이었다. 그것은 부모님으로부터 받은 만년필이나 넥타이핀 같은 것보다 훨씬 마음에 들었다.


 “그래서 나는 그냥 네가 하고 싶은 일이 있다면 하게 해주고 싶어.”


 그 말은 아주 느리게 스몄다. “하지만 내가 해줄 수 있는 건 많지 않아. 기껏해야 비행기 티켓을 끊어주던가, 코피 좀 닦아주는 정도겠지.” 유진의 말투가 문득 가벼워졌다. 오웬은 손등을 이마에 댄 채로 조금 망설였다. 익숙하지 않은 말을 하는 것은 여전히 어려운 일이었다. 그는 자신이 처음부터 그런 종류의 일을 배워온 사람이라는 것을 자인했다. 그것을 지금부터 조금씩 배워나가야 한다는 것도 알았다. 그래서, 말은 한 음절씩 천천히 나왔다.


“……고마워.”


 쇠구슬을 입에 문 것처럼 낯설었다. 전화기 너머에서 유진이 조용히 웃는 것이 느껴졌다.






 2.


 “…라고 하긴 했지만 말이야, 오웬.”


 유진의 목소리는 덤덤했지만 오웬은 그가 웃고 있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다. 그는 침대 모서리에 앉아 이마를 감싸 쥐었다. 유진은 정말로 눈치가 빨랐다. 필요치 않을 정도로 빨랐다. 2학기가 시작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서였다. 방학 내내 질리도록 붙어 다녔어도 주말이면 꼬박꼬박 함께 스트랫필드를 돌아다니곤 했다. 유진을 마주친 것은 서점 근처에서였다. 이 근처에 일이 있어서 왔다가여기다뭐쓰려했지


“영국인 여자친구라도 생긴 줄 알았지, 남자친구라고는 생각 못했어.”

“아, 시발.”

“중학교 때 여자친구도 몇 명 있었잖아?”

“그걸 어떻게 안 거야. 아, 진짜 시발.”




안 쓸 것 같네요~ 하지만 스트랫필드에서 유진과 마주친 오웬과 로렌스 썰은 재밌다고 생각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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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이 오르면



 꽃을 직접 사 보는 것은 처음이었다. 진회색과 하늘색 포장지로 감싼 작약 무더기를 들고 꽃집 앞에 서서 우인은 잠시 이상한 나라에 갔다 온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베고니아나 히아신스 같은 말은 어느 먼 나라의 주문 같지. 꽃은 생각보다 가짓수가 많고, 예쁘고, 그리고 비쌌다. 졸업식이나 입학식 때나 받아본 적 있는 꽃다발들을 떠올리며 그는 개당 3천원씩이나 하는 분홍색 꽃을 조심조심 옆구리에 꼈다. 부디 혼자 꽃다발을 들고 서성거리는 스스로가 너무 이상한 사람처럼 보이지는 않길 바랄 뿐이었다.

 대학로의 골목에는 모퉁이마다 하나씩 극장이 있어서 곧잘 길을 헤매게 된다. 걸을 때마다 옆구리에서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나서 신경이 쓰였다. 비싸고 성가시고 예쁘지만 얼마 안 있으면 시들어버릴 물건이라니 세상의 이치에 어긋나는 것만 같아 또 기분이 이상해진다. 핸드폰을 켜서 지도를 확인하면서 같은 모퉁이를 세번쯤 돌고 나서야 목적지를 찾을 수 있었다. 턱을 들어 극장 이름을 확인하고 유리문을 밀고 들어갔다.

 입구부터 안쪽까지 줄지어 붙어 있는 포스터를 유심히 쳐다보았다. 아래쪽에 흰 글씨로 쓰여 있는 이름이 익숙한 것 같기도 하고 낯선 것 같기도 했다. 잠깐 고민하다가 핸드폰 카메라를 켜서 사진을 찍었다. 이런 건 기념이니까. 그렇게 생각하자 조금 쑥쓰러운 기분이 드는 것 같기도 했다.


 "표를 보여주시겠어요?"


 직원의 시선이 슬쩍 옆구리의 꽃다발에 가 닿았다 떨어지는 것을 느끼며 우인은 느릿느릿 지갑 안에 넣어두었던 표를 꺼냈다. 공연이 시작하기 전, 어스름하게 켜둔 불빛들을 지나 제일 앞자리로 향했다. 첫 공연이니까, 보러 올 거면 표를 주겠다고도 했었는데, 거절을 한 것은 우인 쪽이었다. 직접 돈을 내고 표를 사고 싶었다. 그냥 그런 기분이었다. 비싸고 성가시고 곧 시들어버릴테지만 예쁜 것처럼, 세상의 이치에 맞지 않는 기분이 종종 있는 법이다. 그는 자리에 앉아 꽃을 무릎 위에 올려두었다. 좌석과 무대의 거리가 생각보다 가까웠다.

 대학에 올라와서 공연을 보는 것이 처음은 아니었는데, 그럼에도 가끔 자신의 자리가 좌석이 아니라 무대 뒤편의 조명 기계 뒤에 있어야하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할 때가 있었다. 그때는 무대의 뒤편에 서서 배우들의 뒤통수를 쳐다보는 일이 익숙했다. 조명을 돌리다 보면 사람들이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 것인지, 어떤 동작을 하고 있는지는 정작 잘 알 수가 없었으므로 그가 함이슬의 연기를 처음부터 끝까지 보는 것은 엄밀히 말하자면 지금이 처음이었다. 좌석의 등받이에 머리를 기대고 후, 길게 한숨을 내쉬자, 그게 어떤 신호인 마냥 모든 불이 꺼졌다.

 조명이 다시 켜졌다. 극의 시작이었다.

 소리, 대사, 따라가는 빛과 표정, 움직임, 손끝, 조명을 받아 반들거리는 배우들의 눈동자.

 등이 좌석에 붙박힌 것처럼 우인은 눈만 돌려 모든 흐름을 따라갔다. 이슬의 배역은 2막부터 나왔다. 암전, 적막, 빛은 무대의 정가운데 위쪽에서부터 떨어졌다. 우인은 문득 숨을 참았다. 이슬은 무대 가운데에 서 있었다. 태연한 표정이었다. 하지만 조금 긴장했나? 오랫동안 보아온 사람만이 알 수 있는 그 미묘한 기색은, 그가 입을 열자 이내 없던 일처럼 사라졌다.

 무대의 조명은 희고 밝았다. 우인은 환영을 보는 사람처럼 눈가를 조금 찌푸렸다. 그는 빛의 한가운데에 서 있었다. 그 순간, 몇 년 전 긴 밤을 지새우며 나눴던 대화를 떠올리는 것은 아주 이상한 일일 것이다. 행복해지고 싶지 않다는 말을…… 들었었는데. 그 말의 단절된 어감을 기억한다. 그런데 그는 지금 가장 밝은 빛 아래에 서 있다. 흰 조명이 그의 높은 정수리부터 반듯한 어깨를 타고 내려와 손끝까지 비추고 있었다. 마치 여기서 가장 빛나는 사람은 그라는 듯이. 예전에도 그랬고 앞으로도 그럴 것처럼.

 어라, 기분이 이상하네.

 극의 내용은 전혀 그런 게 아니었는데, 어쩐지 울고 싶은 기분이 들었다.

 우인은 목도리 안으로 턱을 파묻었다. 무대 아래쪽을 쳐다보며 흘러가는 대사를 귀로만 들었다. 이런 기분이 들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살아 있다는 것은 때때로 상상하지 못한 기분들과 마주치는 일이구나. 세상이 정말로 끝장나버리는 줄 알았을 때는 알지 못했던 일이다.


 "하지만 기쁘지 않나요?"


 배역의 대사였다. 그 또렷한 발음, 대사. 우인은 그의 목소리를 들으며 가만히 그 기분이 지나가기를 기다렸다.






 "나 주려고 산 거야?"


 이슬은 아직 무대 화장이 덜 지워진 얼굴로 반색을 했다. 우인은, 그럼 너 주려고 샀지 버리려고 샀겠냐…… 하는 말을 굳이 덧붙이면서 그의 품에 떠넘기 듯이 꽃다발을 안겨 주었다. 꽃은 그에게보다 이슬에게 훨씬 잘 어울렸다. 빈 손으로 오지 않기를 잘했다고 생각하며, 겹겹이 모인 꽃잎의 모양새를 신기하다는 듯 쳐다보는 이슬에게 말했다.


 "너 솔직히 처음에 조금 긴장했었지."


 그러자 이슬이 정곡이 찔린 듯 어색하게 웃는다.


 "티 났어?"

 "그냥, 그런 생각이 들어서."


 하지만 나 잘했다고 생각하는데. 학생 공연이 아닌 건 이번이 처음이잖아. 이슬이 뻔뻔하게 말하고는 고개를 약간 숙였다. 그런, 제스쳐가 아닌 걸 알면서도 저도 모르게 손을 뻗어 머리를 매만져보았다. 무스를 발라 고정시킨 머리카락의 감촉이 뻣뻣하게 손에 감긴다. 손바닥에 관자놀이가 부드럽게 스친다. 이슬이 칭찬을 받는 아이처럼 가만히 눈을 감았다 떴다.


 "어, 너 잘하더라. 네가 잘해서…… 좋았어."


 솔직하게 말해보았다. 그러자 이슬이 웃었다. 의뭉스럽거나 어색한 웃음이 아닌 그냥 웃음이어서 그게 또 좋다는 생각을 했다.







대성해라 이슬아!!!!(애미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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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그 정리. 지구 종말을 앞둔 연극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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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은재


글은 개발새발로 썼지만 나름대로 캐릭터의 서사를 완성시켜서 만족스러운 측면이 있음.

글은 개발새발로 썼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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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은수



로그 정리

게시판이 로드비 형식이라 제목이 없어서... 대충 정리함

너무 짧거나 실없는 로그들은 다 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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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벽한 승낙



 오웬은 쉬는 날이면 언제나 점심 무렵에 느즈막히 일어나곤 했다. 그날도 눈을 떴을 때는 이미 한낮이었다. 일을 할 때는 밤을 새가면서 각본을 쓰고 휴일에도 나가서 리허설을 보는 것이 그의 일상이었지만 1년 365일을 그런 식으로 달릴 수 없다는 것은 본인이 더 잘 안다. 그러니 쉴 때는 게으른 고양이처럼 푹 퍼져서 아무렇게나 시간을 보내는 것이 좋았다. 얼마 전 로렌스가 사온 새 이불 커버와 베갯잇은 맨살에 닿는 감촉이 유난히 좋았고 얼굴을 비비고 있으면 잠이 다 깬 뒤에도 몇 시간쯤 더 잘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그가 빈 베개를 끌어안으며 몸을 뒤척이자 발치에서 웅크리고 자고 있던 고양이(진짜 고양이)가 도망가는 소리가 들렸고 총총 멀어지는 작은 발소리를 들으며 오웬은 크게 하품을 했다. 그는 뒷목을 긁다가, 자리에서 느릿느릿 일어났다. 시계를 보았다. 문지방을 밟으며 방 밖으로 나왔다.

 여름이 가까워지고 있었다. 그것을 증명이라도 하듯 반쯤 열어둔 블라인드 사이로 떨어지는 햇빛이 선명했다. 오웬은 배가 고프다고 생각했다. 서랍장을 열어 두번째 칸에서 시리얼을 꺼내고 커피 원두를 찾았다. 로렌스는 영국에서 나고 자란 사람답게 커피보다는 차를 좋아했지만 오웬은 반대였고 그래서 그들의 집에는 언제나 원두와 찻잎이 나란히 자리하고 있었다. 커피 머신의 전원을 키며 다시 한 번 하품을 했다. 진한 커피와 시리얼 그릇을 양 손에 들고 거실로 나와 블라인드를 완전히 열었다. 베란다에 나가 있던 강아지(라고 부르기에는 이미 너무 커버렸지만, 어쨌거나 로렌스는 항상 그 개를 강아지라고 불렀다.)가 발치에 와서 납작하게 엎드렸다. 오웬은 자신의 발가락을 핥으려는 강아지의 혀를 피해 거실의 낮은 테이블에 발을 올리고 커피를 한 모금 들이켰다. 로렌스가 보면 예의 없어 보인다고 할지도 모르겠지만 오웬은 혼자 있을 때에도 없는 사람을 신경쓰는 사람은 아니었다.


 "윽."


 시리얼을 한 입 털어넣은 오웬이 안 좋은 소리를 냈다. 무가당이었다. 세상에 무가당 시리얼 같은 걸 먹는 사람들은 지옥에서 온 사람들밖에 없을 것이라고 생각하면서 살았는데 로렌스가 바로 그런 사람이었다. 오웬이 거기에 대해 뭐라고 말할 때마다 로렌스는 일반 시리얼에 얼마나 많은 당이 들었으며 그것이 사람 몸에 어떤 영향을 끼치는지ㅡ너는 운동도 안 하잖아? 로렌스가 그렇게 말하면 항상 할 말이 없어졌다ㅡ에 대해 유창하게 설명했으므로 오웬은 자신의 동거인이 지옥에서 온 사람임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저번에 분명 카트에 들어 있던 무가당 시리얼을 다른 것으로 바꿔치기 했던 기억이 있는데 그걸 또 언제 로렌스가 알아차렸는지는 모를 일이었다. 오웬은 돌을 씹는 것 같은 표정으로 달지 않은 시리얼을 씹어삼켰고 커피를 벌컥벌컥 들이켰다. 그가 소파 등받이에 머리를 기대고 멍하니 창밖을 바라보았다.

 소파 팔걸이에 반으로 접은 조간 신문이 걸려 있었다. 오웬은 아무 생각 없이 신문을 펼쳐 헤드라인을 훑었다. 첫 페이지에는 별로 흥미로운 기사가 없었다. 오웬은 주로 인터넷 신문으로 뉴스를 확인하는 편이었으므로, 신문을 집어든 것자체가 실로 오랜만의 일이었다. 그리고 두번째 장을 펼쳤을 때 오웬은 문득 입에 대고 있던 머그잔의 가장자리를 이빨로 깨물었다. 소파 등받이에 기대고 있던 머리를 들고 몸을 약간 앞으로 기울여 기사를 읽었다. 그는 다음 장으로 신문을 한 번 넘겼다가, 다시 앞 장을 보고는 흠, 소리를 내면서 신문을 다시 접어 옆으로 밀어두었다.

 왠지 신문이 소파 팔걸이에 놓여 있던 것마저 계획적인 것처럼 느껴졌다. 실제로 그런지 아닌지는 모르겠지만, 어쨌거나 오웬은 그 기사가 의미하는 바를 알았고 맛없는 시리얼을 천천히 씹으면서 참 새삼스럽다는, 생각을 했다.




 



 케이시는 오웬이 속한 극단의 유일한 사무직원이었다. 그녀는 점심 때 나가서 사온 것이라며 여러 가지 종류의 쿠키가 든 상자를 다과로 내밀었고 그가 자리에 앉자마자 말했다.


 "동성 결혼이 합법화 되었다면서요? 축하해요."


 오웬은 가방에서 극본을 꺼내다말고 어정쩡하게 대답했다. "어… 고마워요." 그의 태도가 애매했으므로 케이시가 조심스럽게, "혹시 그 사이에 남자친구랑 헤어진 건 아니죠?" 하고 물어본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지난 크리스마스에 로렌스가 극단에 다녀간 이후로 극단 사람들은 모두 오웬의 오래된 남자친구에 대해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 직접적으로 축하의 말을 들으리라는 생각은 못했다. 조금 놀라기도 했고, 그 말이 게이 커뮤니티에 속한 사람에게 보내는 축하인지 그가 곧 결혼을 할 것이라 짐작하고 보내는 축하인지 알 수 없어서 애매하게 대답을 한 것이었다. 그는 고개를 가로젓고는 쿠키 상자에서 라즈베리 쿠키를 하나 집어들었다.


 "혹시 딱히 결혼 생각은 없는 거에요?"

 "그런 건 아닌데, 뭐랄까……"


 뭐라고 말해야할까. 오웬은 잠시 생각해보았다.


 "실감이 안 나네요."


 오웬은 원래부터 화나 짜증을 제외하고는 감정을 겉으로 드러내지 않는 편이었으므로 적당히 대답했다. 그는 쿠키 상자에서 땅콩 쿠키를 골라내며(그는 땅콩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핸드폰을 확인했다. 원래 그는 오늘도 쉬는 날이었지만, 다음 시즌에 올릴 공연의 각본을 좀 수정하고 싶다는 주연 배우의 말에 따라 극단에 나온 것이었다. 수정본을 이메일로 보낼 수도 있었지만 좀 더 고칠 부분이 있으면 그 자리에서 듣고 바로 고치는 것이 더 빠를 것 같았다. 앞길에서 사고가 나서 15분 정도 늦는다는 배우의 메세지를 확인한 후 오웬은 바로 다음 메세지를 확인했다.


 [오늘도 쉬어?]


 로렌스가 보낸 메세지였다.


 [밖에 나왔는데 저녁 땐 집.]


 간단하게 답장을 보냈다. 케이시가 그가 일렬로 구석에 세워둔 땅콩 쿠키들을 보고는 짧게 웃었다.







 오웬은 말하자면 기다리고 있었다. 그가 먼저 스크랩한 기사를 들이대면서 이제 결혼할 때가 된 것 같다고 선고하듯이 말하는 것은 쉬웠다. 하지만 10년 넘게 알아온 누군가의 성격으로 미루어 짐작하건대 지금은 기다려야하는 타이밍이었다. 로렌스는 무언가를 준비하고 계획하는 것을 무척 즐겨하는 성격이었고 이러한 삶의 전환점ㅡ이라고 해도, 크게 달라지는 것이 있을까? 오웬은 무신경하게 생각했다.ㅡ에 제대로 된 방점을 찍는 것을 유의미하게 생각할 것이 분명했다. 그것은 오웬 나름대로의 관대함이었고, 사실 오웬은 로렌스의 그런 점이 좀 성가시지만 재밌다고 생각하기도 했다.

 그날 집에 돌아왔을 때 그 생각은 더 견고해졌다. 노트북 파일들을 뒤적거리면서 늦은 저녁에 볼 영화를 고르고 있는데 로렌스가 말했다.


 "오웬, 혹시 목요일 저녁에 시간 있어?"


 오웬은 올 게 왔다고 생각했지만 노트북 화면에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 대답했다.


 "있는데, 왜요?"

 "내가 저번주에 직장 근처에서 괜찮은 레스토랑을 발견했거든."


 발견한 것이 아니라 찾아낸 것이 분명했지만 그 점을 지적하지는 않기로 했다. 오웬은 짐짓 차분하게 물었다. "이탈리안?" "프렌치야." 오웬은 흠, 하고 턱을 괴고 고민하는 척을 했다.(솔직히 재미있었다.) "드레스코드 있는 데에요?" "아닌데, 그래도 바람막이는 입지 말아줘." 로렌스가 말을 하면서 엄지 손가락으로 그의 뒷목 뼈대를 꾹꾹 눌렀고 그 느낌이 간지러워서 오웬은 키득거리면서 웃었다.


 "좋아요."


 그의 간단한 대답에 이번에는 로렌스가 웃었다. 그가 핸드폰을 집어들면서 말했다. "그럼 7시로 예약할게." 오웬은 대답 대신 눈을 내리깔고 마우스패드를 쳐다보았다.







 와인은 세 잔째였다. 화이트와인 한 잔과 레드와인 두 잔. 오웬은 기분이 조금 좋아졌다. 밥은 맛있었다. 언젠가, 재작년이던가? 맛있는 걸 먹겠다고 다른 도시까지 차를 몰고 갔다가 눅눅해진 빵과 질긴 고기를 먹고 돌아오는 길에 대판 싸운 것을 떠올려보면 직장 근처에 있는 레스토랑을 고른 것은 확실히 좋은 선택이었다. 디저트로는 타르트 타탱과 바닐라 아이스크림이 나왔다. 달짝지근한 사과조림을 입 안에 굴리면서 와인을 한 모금 더 마셨다. 오웬은 로렌스가 오늘 공들여서 머리를 넘겼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그가 하고 있는 푸른색 넥타이는 올해 생일에 오웬이 선물한 것이었다. 오웬은 숨은 그림을 찾는 것처럼 그런 것들을 하나 둘 씩 알아차렸고 모르는 척했지만 사실은 로렌스도 오웬이 알고 있다는 사실을 눈치채고 있을 것이다. 눈치가 빠른 사람들의 교류란 대개 그런 법이다.

 그래서 디저트 그릇이 빈 뒤에 테이블 위에 붉은 색 재질로 만들어진 반지 상자가 올라왔을 때 오웬은 놀라는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오웬은 반지를 보자마자 대답했다.


 "좋아요."

 "뭐가?"

 "좋다고요, 뭐든."


 흠, 로렌스가 작게 소리냈다. 테이블 위에 달린 노란 조명에 그의 까만 눈동자가 반짝거리고 있었다.


 "내가 이거 받고 헤어져달라고 하면 어쩌려고?"

 "재미없거든요?"


 오웬이 왼손을 내밀었다. 로렌스가 그의 약지에 반지를 끼워주었다. 반지는 그의 손가락에 꼭 맞았다. 로렌스가 대체 어떻게 그의 약지 사이즈를 알았는지 알 수 없었지만, 아무래도 좋았다. 오웬은 손을 들어 불빛에 반지를 비춰보았다. 반지는 얇았지만 백금인 것 같았고 세련된 물결 무늬가 음각되어 있었다. 세심하고 심미안도 높은 로렌스는 어떤 물건이 오웬에게 어울릴지를 오웬보다 더 잘 알았다. 그는 손을 이리저리 뒤집으며 반지를 보다가 문득 벌어진 손가락 사이로 자신을 쳐다보고 있는 로렌스를 마주보았다.

 아주 예전에, 그러니까 10년도 더 전에 도서관의 서가에서 빈 책장 사이로 그를 지켜보던 일이 문득 떠올랐다.


 "왜 웃어?"

 "좋아서요."


 뭐가? 로렌스가 눈치없는 사람인 척 물었고, 오웬은 솔직하게 대답해주기로 했다.


 "당신이 좋아서요."


 그것은 말하자면 완벽한 승낙이었다.









글이 왜 이렇게 느끼한 할리퀸 소설처럼 써졌지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1 약혼반지는 세련된 걸로 골라놓고 결혼반지는 다이아몬드 큼직하게 박힌 패물같은 것 들고올 것 같은 로렌스 (po중국wer)

2 혼인신고만 올리자고 지랄했는데 결국 결혼식에서 로렌스 사돈의 팔촌까지 다 만나게 되는 오웬 (po중국wer2)

이 두 가지 생각하면서 웃는 중. 어쨌거나 오웬은 로렌스 사랑하니 괜찮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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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밀글 입니다.

로웬



백업하면서 새삼 다시 읽었는데 생각보다 좋은 문장이 많아서 놀랬다...

밑의 세 개는 릴레이. 내가 쓴 부분만 백업. 엄청난 스압 주의... 로렌스 좋아해...


굳이 적어두자면 순서는 Act of killing - 무제 - -1 - 인력 - Signal fire - Missing link - 조각

이 순서대로 보면 둘의 감정의 흐름이 잘 보여서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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