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을 직접 사 보는 것은 처음이었다. 진회색과 하늘색 포장지로 감싼 작약 무더기를 들고 꽃집 앞에 서서 우인은 잠시 이상한 나라에 갔다 온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베고니아나 히아신스 같은 말은 어느 먼 나라의 주문 같지. 꽃은 생각보다 가짓수가 많고, 예쁘고, 그리고 비쌌다. 졸업식이나 입학식 때나 받아본 적 있는 꽃다발들을 떠올리며 그는 개당 3천원씩이나 하는 분홍색 꽃을 조심조심 옆구리에 꼈다. 부디 혼자 꽃다발을 들고 서성거리는 스스로가 너무 이상한 사람처럼 보이지는 않길 바랄 뿐이었다.
대학로의 골목에는 모퉁이마다 하나씩 극장이 있어서 곧잘 길을 헤매게 된다. 걸을 때마다 옆구리에서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나서 신경이 쓰였다. 비싸고 성가시고 예쁘지만 얼마 안 있으면 시들어버릴 물건이라니 세상의 이치에 어긋나는 것만 같아 또 기분이 이상해진다. 핸드폰을 켜서 지도를 확인하면서 같은 모퉁이를 세번쯤 돌고 나서야 목적지를 찾을 수 있었다. 턱을 들어 극장 이름을 확인하고 유리문을 밀고 들어갔다.
입구부터 안쪽까지 줄지어 붙어 있는 포스터를 유심히 쳐다보았다. 아래쪽에 흰 글씨로 쓰여 있는 이름이 익숙한 것 같기도 하고 낯선 것 같기도 했다. 잠깐 고민하다가 핸드폰 카메라를 켜서 사진을 찍었다. 이런 건 기념이니까. 그렇게 생각하자 조금 쑥쓰러운 기분이 드는 것 같기도 했다.
"표를 보여주시겠어요?"
직원의 시선이 슬쩍 옆구리의 꽃다발에 가 닿았다 떨어지는 것을 느끼며 우인은 느릿느릿 지갑 안에 넣어두었던 표를 꺼냈다. 공연이 시작하기 전, 어스름하게 켜둔 불빛들을 지나 제일 앞자리로 향했다. 첫 공연이니까, 보러 올 거면 표를 주겠다고도 했었는데, 거절을 한 것은 우인 쪽이었다. 직접 돈을 내고 표를 사고 싶었다. 그냥 그런 기분이었다. 비싸고 성가시고 곧 시들어버릴테지만 예쁜 것처럼, 세상의 이치에 맞지 않는 기분이 종종 있는 법이다. 그는 자리에 앉아 꽃을 무릎 위에 올려두었다. 좌석과 무대의 거리가 생각보다 가까웠다.
대학에 올라와서 공연을 보는 것이 처음은 아니었는데, 그럼에도 가끔 자신의 자리가 좌석이 아니라 무대 뒤편의 조명 기계 뒤에 있어야하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할 때가 있었다. 그때는 무대의 뒤편에 서서 배우들의 뒤통수를 쳐다보는 일이 익숙했다. 조명을 돌리다 보면 사람들이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 것인지, 어떤 동작을 하고 있는지는 정작 잘 알 수가 없었으므로 그가 함이슬의 연기를 처음부터 끝까지 보는 것은 엄밀히 말하자면 지금이 처음이었다. 좌석의 등받이에 머리를 기대고 후, 길게 한숨을 내쉬자, 그게 어떤 신호인 마냥 모든 불이 꺼졌다.
조명이 다시 켜졌다. 극의 시작이었다.
소리, 대사, 따라가는 빛과 표정, 움직임, 손끝, 조명을 받아 반들거리는 배우들의 눈동자.
등이 좌석에 붙박힌 것처럼 우인은 눈만 돌려 모든 흐름을 따라갔다. 이슬의 배역은 2막부터 나왔다. 암전, 적막, 빛은 무대의 정가운데 위쪽에서부터 떨어졌다. 우인은 문득 숨을 참았다. 이슬은 무대 가운데에 서 있었다. 태연한 표정이었다. 하지만 조금 긴장했나? 오랫동안 보아온 사람만이 알 수 있는 그 미묘한 기색은, 그가 입을 열자 이내 없던 일처럼 사라졌다.
무대의 조명은 희고 밝았다. 우인은 환영을 보는 사람처럼 눈가를 조금 찌푸렸다. 그는 빛의 한가운데에 서 있었다. 그 순간, 몇 년 전 긴 밤을 지새우며 나눴던 대화를 떠올리는 것은 아주 이상한 일일 것이다. 행복해지고 싶지 않다는 말을…… 들었었는데. 그 말의 단절된 어감을 기억한다. 그런데 그는 지금 가장 밝은 빛 아래에 서 있다. 흰 조명이 그의 높은 정수리부터 반듯한 어깨를 타고 내려와 손끝까지 비추고 있었다. 마치 여기서 가장 빛나는 사람은 그라는 듯이. 예전에도 그랬고 앞으로도 그럴 것처럼.
어라, 기분이 이상하네.
극의 내용은 전혀 그런 게 아니었는데, 어쩐지 울고 싶은 기분이 들었다.
우인은 목도리 안으로 턱을 파묻었다. 무대 아래쪽을 쳐다보며 흘러가는 대사를 귀로만 들었다. 이런 기분이 들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살아 있다는 것은 때때로 상상하지 못한 기분들과 마주치는 일이구나. 세상이 정말로 끝장나버리는 줄 알았을 때는 알지 못했던 일이다.
"하지만 기쁘지 않나요?"
배역의 대사였다. 그 또렷한 발음, 대사. 우인은 그의 목소리를 들으며 가만히 그 기분이 지나가기를 기다렸다.
"나 주려고 산 거야?"
이슬은 아직 무대 화장이 덜 지워진 얼굴로 반색을 했다. 우인은, 그럼 너 주려고 샀지 버리려고 샀겠냐…… 하는 말을 굳이 덧붙이면서 그의 품에 떠넘기 듯이 꽃다발을 안겨 주었다. 꽃은 그에게보다 이슬에게 훨씬 잘 어울렸다. 빈 손으로 오지 않기를 잘했다고 생각하며, 겹겹이 모인 꽃잎의 모양새를 신기하다는 듯 쳐다보는 이슬에게 말했다.
"너 솔직히 처음에 조금 긴장했었지."
그러자 이슬이 정곡이 찔린 듯 어색하게 웃는다.
"티 났어?"
"그냥, 그런 생각이 들어서."
하지만 나 잘했다고 생각하는데. 학생 공연이 아닌 건 이번이 처음이잖아. 이슬이 뻔뻔하게 말하고는 고개를 약간 숙였다. 그런, 제스쳐가 아닌 걸 알면서도 저도 모르게 손을 뻗어 머리를 매만져보았다. 무스를 발라 고정시킨 머리카락의 감촉이 뻣뻣하게 손에 감긴다. 손바닥에 관자놀이가 부드럽게 스친다. 이슬이 칭찬을 받는 아이처럼 가만히 눈을 감았다 떴다.
"어, 너 잘하더라. 네가 잘해서…… 좋았어."
솔직하게 말해보았다. 그러자 이슬이 웃었다. 의뭉스럽거나 어색한 웃음이 아닌 그냥 웃음이어서 그게 또 좋다는 생각을 했다.
대성해라 이슬아!!!!(애미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