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모, 참이슬 클래식 하고, 어, 맥주? 맥주도 한 병 주세요."
유리는 술병을 받아들자마자 익숙한 손길로 병목을 잡고는 두 시 방향으로 꺾듯이 흔들었다. 초록색 소주병 안에서 작은 소용돌이가 일었다. 무재가 턱을 괴고 그 모양을 지켜보았다. 까득, 병을 따는 소리. "형 내가 따라줄게." 그렇게 말하면서 유리는 조심성 없이 병목을 잡은 손을 불쑥 테이블 중간으로 내밀었다. 덕분에 가장자리에 놓여 있던 티슈 꽂이가 병 뒤축에 밀려 바닥으로 떨어졌고 무재는 익숙하다는 듯 한숨도 쉬지 않고 몸을 숙여 떨어진 물건을 집어올렸다. 덕분에 그가 입고 있던 도포 자락이 바닥에 끌려 테이블 사이를 돌아다니던 점원이 흘끗 그를 돌아보았지만 그는 신경쓰지 않았다. 그 사이 유리가 무재 앞에 놓인 잔에 넘치도록 술을 따랐고, 무재가 채 허리를 펴기도 전에 제 잔에도 직접 술을 채웠다. 유리가 방긋 웃었다.
"오늘은 형이 사주는 거야?"
"너는 돈도 많은 애가 왜 그러냐……"
"에에이, 나 이제 백순데."
엊그제 대학원의 졸업식이 있었다. 유리는 한동안 석사 논문을 쓰느라 바빠서 어디에도 낯을 내비치지 못했다. 사람을 만나는 것을 좋아하는 그가 몇 날 며칠을 연구실에 틀어박혀 있었는지 모르겠다. 그 꼴에서 해방되고 나니 후련하기는 후련했지만 마냥 좋아할 상황도 아니었다. 두 달 여 전 조교들의 술자리에서 일어난 일 때문이었다.
대학가 앞 술집은 어느 때나 북적거렸고 그때도 마찬가지였다. 모두가 한창 아무 일 없이 술을 마시던 와중이었다. 열한 시 무렵이었나, 상석에 앉아있던 교수가, 그러니까 이미 소주를 댓 병은 까고 나서 벌개진 얼굴로, 옆자리도 아니고 한참 떨어진 자리에 앉은 유리에게 갑자기 삿대질을 하며 자리에서 일어난 것이다. 처음에는 그 눈치를 모르고 옆에 앉아 있던 연구실 동기의 접시에 담긴 안주를 뺏어먹던 유리는 교수가 "야!" 하고 쩌렁쩌렁 소리를 지르고 나서야 고개를 돌렸다.
"너 내가……"
술자리가 벌어진 지 네 시간이 지난 때였으니 교수는 이미 얼큰하게 취해 있었지만 유리는 더 없이 매우 말짱했다. 학부 시절에는 생명공학과의 밑빠진 술독이라 불리던 그였다. 그는 고학번 때도 눈치 없이 총엠티에 따라가 신입생들 잔에 술을 따라주며 여럿 죽여놓고는 본인은 취기의 ㅊ도 없는 말짱한 얼굴로 새벽 다섯 시까지 자러 들어가려는 사람 바짓가랑이를 붙잡고 놓아주지 않기로 유명했다. 유리가 멀뚱히 입에 든 노가리를 씹어삼키는 사이 교수는 무어라고 큰 소리를 내며 그에게 삿대질을 했는데, 거리가 좀 떨어져 있을 뿐더러 한참 취해서 뭉개진 발음으로는 무슨 말을 하는지 도통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그쯤되면 보통 사람이라면 내가 무슨 잘못을 했나 눈치를 봐도 한참 볼 상황이었지만 유리는 그저 그 상황이 어리둥절할 뿐이었다. 그가 무의식중에 제 앞에 놓여 있던 감자튀김을 하나 집어 입에 털어넣자(마치 영화관에서 팝콘이라도 집어먹는 마냥), 안 그래도 큰 소리를 내고 있던 교수가 벼락 같이 외쳤다.
"너 내가 이 바닥에 발 못 붙이게 만들어버릴 줄 알아!!!"
그러고 교수는 테이블 위에 쓰러졌다.
그리고 침묵이었다. 그 자리에 모인 모두의 시선이 교수 앞으로 쪼로록 모였다가 흩어졌다가 이내 유리에게로 다시 모였다. 교수가 그런 말을 한다는 것은 문자 그대로 의도가 자명했다. 너 내가 좆되게 만들어줄 거야. 유리는 두 개째의 감자튀김을 집어 입에 넣고 씹었다. 좌중의 시선이 모두 자신에게 쏠려 있는 것은 별로 개의치도 않는 표정이었다. 잠시 멀뚱하고 골몰한 얼굴로 앉아있던 그가 옆자리 동기를 돌아보며 물었다.
"내가 뭐 잘못했나?"
유리는 지금 앉은 술자리에서도 똑같이 무재에게 물었다. 물론 무재야 교수가 유리의 무엇에 그렇게 열을 냈는지 알 길이 없었지만 어떤 상황인지는 불 보듯 뻔했다. 박유리의 주변에 있는 사람들은 대체로 그에 대해 정해진 반응을 보였는데, 그를 아주 좋아하든지, 아니면 아니면 싫어하든지 둘 중 하나였다. 예쁘장한 얼굴에 성격도 살갑고 곰살맞으니 미워하기가 쉽지 않겠다 싶다가도 교수가 술자리에서 악을 쓸 정도로 저를 싫어하는데 그 이유를 짐작조차 못하는 망한 눈치와 선을 지킬 줄 모르는 성격은 복잡한 인간관계 사이에서 미움을 사더라도 어쩔 수가 없었다. 그나마 본인이 그런 것에 전혀 신경을 쓰지 않는 것이 다행이라면 다행이었다.(아니, 과연 다행인가?)
어쨌거나 그러한 연유로 유리는 대학원에서 쫓겨나듯이 졸업했다. 원래는 박사 과정을 밟고 유학을 떠나는 것도 염두에 두고 있었으나 그 좁은 바닥에서 윗사람에게 미움 받는 것은 곧 앞길이 구만 리라는 의미였다. 어딜 가나 마주칠 거고, 어딜 가나 일이 꼬이겠지. 그의 연구실 동기들은 졸업이 코앞이니 석사만 따고 박사과정은 그만두는 것이 낫겠다고 그에게 삼백 번도 더 넘게 말을 했고 유리는 뭐, 아마도 그게 현명한 선택인가보다, 하고 생각했다. 뻔히 정해놓았던 앞길이 대번에 꺾였는데도 유리는 태평했다. 원체 그런 것에는 집착이 없는 그였다.
"이제 다른 일이라도 찾아봐야겠네. 취업할 거야?"
"음……"
유리가 술잔 가장자리를 입에 물고 앞니로 깔짝거렸다. 생각해보지도 않은 취업을 고려하자니 그 또한 구만리였고 그렇다고 해서 당장 다른 길이 명확하게 떠오르냐면 그런 것도 아니었다. 그는 느긋한 성격답게 아직까지는 아무 생각도 없었고 십 년이 넘게 알아온 무재의 눈에는 그 속이 빤하게 들여다보였다. 그는 유리가 무념무상으로 연거푸 자작을 하는 것을 막고는 그 술잔에 술을 한 잔 따라주었다.
"너는 사주에 역마살이 두 개나 있으니 이런 거에 좌절하면 앞으로도 힘들어."
"그런가아……"
사주니 역마살이니 누가 들으면 코웃음을 칠지도 모르는 일이었지만 유리는 무재가 말하는 것은 대체로 다 믿었다. 거짓말도 넙죽넙죽 믿는 판국에 사주팔자라고 못 믿을 일도 없었거니와 무재가 하는 말이 틀리는 경우는 별로 없었으니까. 그리고 무엇보다 말하는 사람이 무재니까, 유리는 그 말들을 믿었다. 그러나 믿는다고 해서 깊이 염두에 두고 신경을 쓰는 것도 아니어서 앞날을 알려줘도 고꾸라지는 경우가 종종 있었지만 그거야 뭐 유리의 잘못이었다. 유리가 기본 안주로 내어 놓은 눅눅해진 팝콘을 한움큼 입에 넣고 우물거리는데 문득 무재가 그를 불렀다.
"송현아."
송현松賢은 무재가 그를 부르는 이름이었다. 팝콘 그릇을 뒤적이며 탄 옥수수를 골라내던 유리가 고개를 들었다. 그때까지 의자 등받이에 몸을 기대고 있던 무재가 불쑥 상체를 약간 수그렸다. 이름을 부르던 목소리나 그 눈빛이 은근해졌는데 말하자면 누군가를 설득하려는 기색이 완연했다. 다르게 말하자면 약 파는 약쟁이 같은 기색이었다.
"사실 이번 봄에는 신월이 들거든."
"그래?"
"새로운 일을 시작해볼 때야."
그렇구나, 유리가 영문도 모른채 고개를 주억거렸다. 여전히 입에는 팝콘 알을 가득 문 채였다. 무재가 몸을 약간 수그린 채 씩 웃었다. 그리고 물었다.
"네 운명에서 벗어나보지 않을래?"
그때 문득 유리가 눈을 깜빡였다. 어두운 술집, 머리 위에 매달린 알전구 빛에 눈이 부신 것처럼 그랬다.
이내 그가 덩달아서 씨익 웃었다.
"그 말, 오랜만에 듣네."
유리는 미취학 아동일 때 겪었던 열병의 기억을 아직 가지고 있었다. 기억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면 곧잘 까먹고 잃어버리는 그로써는 드문 일이었다. 살면서 그만치 아파 본 일이 더 없기도 했거니와 그때가 처음으로 무재를 본 때이기도 했기 때문이었다. 유리는 그때, 정말로 아팠다. 아파서 시야가 오락가락하고 이명이 들렸다가 사라졌다가 살갗이 뜨거웠다가 한기가 들었다가 그러기를 꼬박 며칠을 반복했다. 처음에는 그저 환절기마다 걸리는 감기려니, 독감 예방주사는 맞았으니 독감은 아니려니 하던 그의 무심한 부모님도 하루가 지나서는 놀라서 병원에 데려갈 정도였다. 유리는 병원 천장의 격자무늬가 자꾸만 흐려졌다가 겹쳐졌다가 여러 개로 찢어졌다가 하는 것을 올려다보다가 어지러워서 눈을 감기를 반복했다. 왼쪽 귀의 이명이 사라지지 않아서 속이 울렁거렸고 열 오른 살이 아파서 울고 싶었는데 울 기력조차 나지 않았다.
그러던 와중, 흐릿한 시야에 불쑥 나타난 것은 한 어린애였다. 어린애라고는 해도 유리보다는 대여섯살 많아 보이는, 이목구비가 또렷하고 눈동자 색이 밝은 아이였다. 물론 유리는 그때 시야가 흐려서 그 무엇도 제대로 분별하기도 힘들었으므로 그 얼굴 어디에도 명확하게 시선을 두지 못했다. 소년은 열에 들떠 온통 붉은 유리의 얼굴을 내려다보다가 유리의 침대 옆에 걸려 있는 이름이나 병명을 쓴 표를 한 번 들여다보고는 끌끌 혀를 찼다.
"그러길래 얘 이름은 이렇게 지으면 안된다니까…… 유리라니, 너무 깨어지기 쉬운 이름이잖아?"
소년은 유리가 누구인지 이미 알고 있다는 투였다. 그 말투가 도통 어린아이 같지가 않았다. 쌕쌕 거친 숨을 뱉던 유리가 한 번 눈을 꽉 감았다 떴다. 그제야 시야가 명징해졌고 소년이 제법 걱정스러운 얼굴로 그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유리가 그 투명한 눈동자를 들여다보며 "누구……" 하고 간신히 물었다.
"나는 네가 태어날 무렵에 신병을 앓았었는데,"
무재가 에둘러가며 대답했다.
"그때 꿈에서 네 사주가 들여다보이길래 이름을 지었다. 네 부모는 들은 척도 안했지만……"
네 팔자는 살면서 죽을 고비가 네 번 있는 팔자인데 그중 한 번이 지금이라고 무재가 조곤조곤 말했다. 어디서 들으면 어린 놈이 사기를 친다고 역풍을 맞을 소리였으나 유리는 어렸고, 예나 지금이나 별 이유 없이도 남의 말을 잘 믿었으므로 그렇구나, 라고 생각했다. 죽을 고비가 네 번이나 있구나, 그러면 꼼짝없이 죽을 가능성이 더 높지 않나. 그렇게 생각하니 어린 마음에도 속이 아파 아까까지는 나오지도 않던 눈물이 비질비질 나왔다. 죽음이 무엇인지 제대로 알 나이도 아니었으나 생각보다 두려움이 더 먼저 앞섰다. 새카만 벽을 앞에 두고 있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유리가 아픈 와중에도 찔끔찔끔 울기 시작하는 것을 지켜보던 무재가 불쑥 물었다.
"네 운명에서 벗어나보지 않을래?"
응? 송현아. 그렇게 무재가 처음으로 그의 이름을 불렀다.
유리는 눈물로 다시금 부얘진 시야로 그를 올려다보며 무슨 말인지도 제대로 모르면서 고개를 주억거렸다.
마음에 들었던 글이라 백업
무재랑 선관은 내가 짰지만 흥미로운 설정이라고 생각한다(자기 입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