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 패러렐. 중학생 사부로지와 사콘.
부모님이 일찍 돌아가셔서 조부모와 사는 사콘과 바다 소년 사부로지.
그 집을 처음 본 사람은 백이면 백 '참 고풍스러운 집이다'라고 말했다. 그래서 사전에 실린 단어들의 뜻을 정확하게 알지 못하던 어린 시절의 사콘은 '고풍스럽다'는 말이 '답답하다'는 말과 비슷한 뜻인 줄 알았다. 수국과 매화, 용담과 꽃잔디가 계절마다 번갈아서 꽃을 틔우는 그 집에는 사람보다 식물이 많았다. 입으로 나누는 말보다 나무가 삐걱거리는 소리가 사람의 행적을 알렸다. 그의 조부모는 걸음이 사뿐사뿐했고 누가 시킨 것도 아닌데 사콘은 덩달아 발소리를 내지 않고 걷는 법을 배웠다. 그런 집이었다. 모든 규율이 침묵으로 이어지는 집.
새로 산 하복 셔츠는 빳빳하고 몸에 잘 맞지 않았다. 이제 막 중학교에 들어간 신입생들이 으레 그렇듯 더 클 것을 고려해 한두 치수 정도 크게 산 것이었다. 사콘은 품이 넓은 반팔 셔츠 아래로 드러난 마른 팔뚝이 조금 볼품없다고 생각하며 자꾸만 소매단을 만지작거렸다. 흰 소매에 손때가 묻지 않을까 생각하여 간신히 손을 뗐을 땐 이미 집에서 나서야할 시간이었다. 나무 계단은 아무리 신중하게 디뎌도 삑삑거리며 희미한 새울음 같은 소리를 냈다. 이런 소리가 나지 않으려면 얼마나 가벼워야하는 걸까, 어쩌면 아예 발이 없어야지만 소리가 나지 않을 지도 모른다. 죽을 날이 가까운 사람은 점점 더 가벼워지는 걸까. 생각하는 머리 위로 반쯤 그림자가 드리웠다. 현관으로 향하는 긴 복도에는 창문이 없었다.
"다녀오겠습니다."
언제나 그렇듯,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미닫이 문을 열고 나섰을 때, 두세 걸음 앞의 담장 밖으로 익숙한 머리카락이 삐죽하게 튀어나와 있는 것이 보였다. 사콘은 순간 아연해졌다가 가까스로, 주말이 오기 전 사부로지가 다음 주부터 같이 등교하자고 말한 것이 떠올랐다. 사콘은 그 말이 농담인지 진담인지 잘 알 수가 없었는데, 아마 사부로지 본인도 잘 몰랐을 것이다. 그에게 농담과 진담은 가끔씩 나중에야 결정되는 일 같았다. 사콘이 정원 밖으로 나서자 사부로지가 반색을 했다. "하복 입었네?" 그는 이미 저번 주부터 하복 셔츠를 입었다. 한 주만에 그의 셔츠의 옆구리 부분에는 이미 세탁기로는 쉬이 지울 수 없는 흙 얼룩이 생겨 있었다.
"너네 집 되게 고풍스럽다, 야."
그가 담 너머로 2층짜리 목조 건물을 흘긋, 올려다보며 말했다. 사콘은 그 말을 기꺼워하는 것도 저어하는 것도 아닌 애매한 얼굴로 사부로지의 자전거 안장을 내려다보았다. 중학교 입학 선물로 아버지가 사준 것이라고 자랑하던 것을 몇 번 본 적이 있는 물건이었다. "너, 고풍스럽다는 말이 무슨 뜻인지 알아?" 불쑥 그렇게 물었다. 손잡이에 달린 차임벨을 몇 번 두드리며 성가신 소리를 내던 사부로지가 순간 어리둥절한 얼굴을 했다. "그걸 모르는 놈도 있냐?" 사콘은 뒷목을 긁적거리며 한숨을 내쉬었다.
"근데 난 어디 앉으라는 거야."
"뒤에 앉아, 뒤에."
사콘은 잠시 고민하다가, 메고 있던 가방을 앞으로 돌려 끌어안고는 그의 등에 등을 맞대고 앉았다. 교복 셔츠 너머로 살이 맞닿는 느낌이 이상할 정도로 낯설어서 저도 모르게 움칠했지만 빳빳하게 등을 펴고 앉자 없던 일처럼 느껴졌다. "그렇게 앉으면 떨어진다." "남이사." 앉는 자세로 몇 번 실랑이가 있었지만 결국에는 사콘의 고집이 이겼다. 자전거는 생각보다 부드럽게 출발했고 '고풍스러운 집'과 익숙한 골목들이 쏜살같이 멀어졌다.
학교까지 가는 길은 두 개가 있었는데 하나는 골목들 사이를 복잡하게 돌아서 가는 길이었고 다른 하나는 바다 쪽으로 난 도로를 에둘러가는 길이었다. 멀기는 후자가 더 멀었지만 길이 넓고 완만해서 많은 학생들이 이용하는 길이기도 했다. 하지만 사콘은 한 번도 그 길로 가 본 적이 없었다. 사부로지는 딱히 묻지도 않고 당연한 것처럼 바다쪽으로 향했고 거기에까지 고집을 부리기엔 다소 귀찮은 감이 있었다.
이른 아침의 해는 붉고 노랗고 투명하다. 햇빛이 물의 흐름에 얽혀드는 모습이 보였다. 페달이 돌아가는 소리가 차르륵 귀에 감겼다. 사부로지는 처음에는 뭐라고 계속해서 말을 걸더니 바닷가와 면한 길로 접어들자 이상하리만치 조용해졌다. 사콘은 덩달아서 입을 다물었다. 그 침묵은 탁 트여 있는 공간처럼, 그저 말과 말 사이가 느린 속도로 나아갈 뿐 어색하지가 않았다. 짜고 시원한 냄새가 났고, 앞머리가 이마 위에서 어지럽게 흩어지는 것이 느껴졌다.
"저 배가 우리 집 배다?"
사부로지가 문득 한 손으로 바닷가에 모여 있는 몇 척의 배를 가리켰다. 배들은 금방이라도 수평선 쪽으로 나아갈 것처럼 보였다. 사콘은 그 중 어느 것이 사부로지네 배인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그가 물어보기도 전에 그들의 옆으로 트럭 한 대가 아슬아슬하게 스치고 지나갔고 자전거가 일순 휘청거렸다. "아, 좀!" 사콘이 소리를 지르다시피 외쳤고 사부로지도 덩달아 목소리를 높였다. "니가 밟던가!" "나 자전거 탈 줄 모르거든." 사부로지가 그를 돌아보았다. "앞에 봐, 앞에." "왜 자전거를 탈 줄 몰라?" "가르쳐주는 사람이 없었는걸."
다시 평형을 찾은 자전거가 쌔액, 소리를 내며 맞바람을 가르고 나아갔다. 잠깐의 침묵 후에, 사부로지가 다시 물었다. "내가 가르쳐줄까?" 그 말에 사콘은 그것도 나쁘지 않겠다 싶은 생각과 어쩐지 성가신 일이 될 것 같다는 생각을 동시에 했다. "내가 가르쳐줄까?!" 그가 듣지 못했다고 생각한 것인지 사부로지가 한층 목소리를 높였다. 사콘이 가까스로 대답했다. "생각 좀 해보고."
"왜?!"
"그냥."
어느새 길은 바닷가를 벗어나 있었다. 사콘은 어쩐지 손등에 짠내가 묻은 것 같아 손등을 킁킁거리며 고개를 젖혔다. 맞닿은 등이 어느새 낯설지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