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도이/ 거리4 20150902



 비가 온 다음 날에는 공기가 마치 하나의 덩어리처럼 느껴지곤 했다. 습기를 머금은 옷소매가 팔뚝에 스치는 것이 따끔했다. 저녁이라고 하기에도 오후라고 하기에도 아직 애매한 시간이었다. 불그스레한 빛이 역의 계단에 비스듬하게 내리꽂히고 있었다. 리키치는 계단을 올라가다 말고 그 자리에서 멈추어섰다. 역 입구에서 익숙한 뒷모습을 본 탓이다. 흰 색 셔츠에 서류 가방을 든 것이 지하철 안에서 열다섯 번은 보았을 법한 평범한 직장인의 모습이었지만, 그가 알아보지 못할 리가 없었다. 도이는 한 손에 핸드폰을 쥐고서 전화기 너머로 무어라 말하고 있는 중이었다. 잘 들리지는 않아도 짐작컨대 학부모의 전화인 것 같았다. 리키치는 바지 주머니에 양 손을 넣은 채 그 자리에 서서 그 통화가 끝날 때까지 기다렸다. "그럼, 다음에 봬요." 도이가 전화기를 내리며 크게 숨을 내쉬었다. 셔츠 아래의 어깨가 가라앉는 것이 눈에 보였다. "지금 퇴근하는 거에요?" 말을 거는 목소리가 스스로도 천연덕스럽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제야 도이가 그를 돌아보았다.

 역광이 비치고 있었다. 얼굴의 윤곽이 선명했다. 표정은 잘 보이지 않았다. 그의 어깨 너머로 보이는 건물들의 정수리가 천천히 노을에 젖어가고 있었다. 이 시간의 풍경은 현실 감각이 없었다. 그 순간, 왜 그런 생각이 들었는지는 모를 일이다. 조금 떨어진 거리에서 그를 올려다보면서, 리키치는 지금까지 그와 자신의 관계를 구성했던 어떤 순간들에 대해서 생각했다. 그런 때에 도이의 표정을 떠올려보면, 이상하게도 잘 떠오르지 않았다. 그가 기억하지 않으려 한 것인지, 아니면 보여주지 않으려 한 것인지 알 수 없었다. 중요한 순간들은 그렇게 아리송한 상태로 존재했다. "아, 리키치 군." 반 박자 늦게 대답이 돌아왔다. 리키치는 느리게 눈을 깜빡였다. 그의 안에는 항상 충동이 존재했다. 그와 그가 이루고 있는 얼음팍 같은 균형을 걷어차고 부수고 산산조각내고 싶은 충동이었다. 모든 것을 명확하게, 그리고 비참하게 만들고 싶은 충동이기도 했다.


"좋아해요."


 말하고 나자 입 안이 따끔했다. 그는 한달음에 계단을 마저 올라가, 손을 내밀어 도이의 손목을 잡았다. 더 이상 도망가게 내버려두지 않을 것이다. 손바닥 안에서 동맥이 파득거리는 것이 미미하게 느껴졌다. 리키치는 그의 손등을 내려다보았다. 손마디가 불거져나온 평범한 남자의 손. 하지만 그는 그 손이 그의 머리를 쓰다듬던 감촉을 기억하고 있다.

 셈을 하듯 대답을 기다렸다. 침묵이 길었다. 너무 길어서, 도이가 그의 말을 이해하지 못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나도 좋아해."


 그리고 나온 대답은 그의 예상 안에 없던 것이었다. 아니, 사실은, 이런 대답을 상상해본 적이 있기는 있었다.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상상의 범주에 머물렀지 근거 있는 예상이 되지는 못했다. 리키치는 불에 데인 것처럼 화들짝 고개를 들었다. 도이는 웃고 있었다. 차분한 얼굴이었다. 누그러진 눈썹 아래의 눈동자가 선명하다. 리키치는 직감적으로 알아차렸다. 그것은, 긍정의 표정이 아니었다.






 도이가 편의점에서 맥주 몇 캔을 사서 나왔을 때는 이미 어스름이 내리고 있었다. 걸음을 걸을 때마다 비닐봉지 안에서 캔이 잘그락거리는 소리가 났다. 한적한 인가를 빙 돌아 공원으로 향했다. 빈 벤치에 자리를 잡고 앉을 때까지 그들은 아무런 대화도 하지 않았다. "맥주니까, 안주는 없어도 되겠지." 도이가 건넨 맥주캔은 아주 차갑고 축축했다. 툭, 캔을 따자 알싸한 소리가 났다. 리키치는 물처럼 맥주를 들이켰다. 뒷덜미가 단숨에 서늘해졌다.

 캔 하나를 거의 다 비웠을 때쯤, 그가 먼저 입을 열었다.


 "농담이나 거짓말이라면…… 아주 질이 나쁜 거라고 생각해요."


 도이가 손으로 빈 캔을 우그러트렸다. "그런 농담은 안 해." 그렇게 말하는 그는 어쩐지 조금 피곤해보였다. 그는 비닐봉지에서 새 맥주캔을 꺼내면서 한 박자 대답을 망설였다.


 "그러면 안되는 거잖아."

 "뭐가요?"


 자신도 모르게 조금 울컥해서 곧바로 대답이 나갔다. 도이가 문득, 한숨처럼 웃었다. "알면서 왜 물어." 말마따나 아집을 부릴 나이는 아니었지만, 리키치는 똑같이 빈 캔을 우그러트리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와작, 금속이 구겨지는 소리. 도이가 손으로 자신의 눈가를 쓸어내렸다. 말을 고르고 있는 것 같았다.


 "일단은…… 너네 부모님이 상처를 받으시겠지. 아주 힘들 거야. 누구한테도 말할 수 없을 거고, 당당해질 수도 없을 테지. 잘못한 게 없어도, 죄진 것처럼 느끼게 될 거야. 무엇보다 자기자신이 가장 많이 상처받게 되겠지."

 "그런 게 중요한가요?"

 "중요해."


 그 대답은 단호했다. 그는 여전히 손으로 눈을 가린 채였다.

 

 "내가 상처받는 건 상관없지만 네가 상처받는 건 무서워."


 귓속이 먹먹해졌다. 그 말은 너무 의외여서, 리키치는 자신도 모르게 쥐고 있던 캔을 놓칠 뻔 했다. 흘러넘친 맥주가 그의 손등을 서늘하게 적셨지만 닦을 생각은 들지 않았다. 여러가지 말이 입과 목 안에서 와글거렸다. 그 중 한 가지를 고르는 것은 아주 힘든 일이었다. 결국 입밖으로 나온 것은 아주 단순한 말이었다.


 "……당신, 절 정말로 좋아하나봐요."

 "그러게. 그런가보다."


 대답 역시 단순했다.







 공원 쓰레기통에 빈 캔을 버리고 걸어왔던 길을 되짚어갔다. 평소라면 겨우 맥주 두 캔에 취할리가 없는데, 너무 빨리 마신 탓인지 걸음을 내딛을 때마다 몽롱하게 술기운이 올라왔다. 그것은 도이 역시 마찬가지인지 모퉁이를 도는 걸음걸이가 묘하게 불안정했다. 돌아올 때는 역시나 말이 없었다. 침묵은 원래부터 그 자리에 있었던 것처럼 자연스러워서, 리키치는 어쩐지 좀 전에 나눴던 대화들이 모두 멀게 느껴진다고 생각했다.

 마침내 빌라 앞에 도착해 나란히 계단을 올랐다. 3층에서, 도이는 열쇠가 잘 맞지 않는 듯 연신 문고리를 잡고 덜걱거리기를 반복했다. 리키치는 그 모습을 지켜보다가 말고 입을 열었다. "앞으로도 당신 집앞에서 담배를 필 거예요." 달칵, 열쇠가 맞물리는 소리가 들렸다. 도이가 고개를 드는 기척이 느껴졌다. 리키치는 반대로 시선을 바닥으로 끌어내렸다. "한동안은." 문이 열렸다. 그래도 도이는 그의 말을 가만히 듣고 있었다. "어쩌면 앞으로도 계속."


 "……잘 가, 리키치 군."


 리키치는 그의 표정을 보지 못했다. 문이 닫혔다. 그제야 시선을 들었다. 머리 위의 전조등의 불이 꺼졌다. 그는 어둠속에서 오랫동안 닫힌 문을 노려보고 있었다.









(((캐붕으로 뚜드려맞아도 할 말이 없다)))

끝! 끝! 끄읕! 끝! 하지만 천천히 수정할 수도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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