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카이도 야마토가 집을 나와 처음으로 얻은 자취방은 지은 지 20년이 된 빌라였다. 돌이켜 생각해보아도 주거환경이 좋다고는 할 수 없는 집이었는데, 안타깝게도 그 무렵 그는 갓 고등학교를 졸업한 어린애였고 그런 좋고 나쁨을 따질 수 있을 정도로 삶에 능숙하지는 못했다. 옆방의 커플이 삼 일마다 한 번씩 싸우는 소리가 마치 귀에다 대고 말하는 것처럼 생생하게 들린다든가, 세면대의 하수구가 곧잘 고장나서 바닥으로 물이 줄줄 샌다든가 하는 일들을 일일이 꼽아보고 있다보면 조금 우울해졌는데, 개중에서도 가장 참기 힘든 것은 추위였다. 그의 방은 3층 가장 안쪽에 있었고, 삼면이 바깥과 닿아 있는 탓인지 다른 방보다 외풍이 잘 드는 것 같았다. 여름 이불과 겨울 이불을 겹쳐서 목끝까지 덮고 있어도 냉기는 곧잘 빈자리를 파고들었다.
사람이 제대로 살아가기 위해서는 사소한 것들이 모두 갖춰져 있어야 하는구나. 불 꺼진 방의 천장을 올려다보면서 그는 처음으로 깨달았다. 그 생각은 자연스럽게 따뜻한 방과 때마다 차려지는 끼니, 깨끗한 창문과 돌봐주는 사람이 있는 집의 풍경을 돌아보게 했다. 그런 것들이 얼마나 세심하게 사람의 손을 탔는지를 집을 나와서야 깨닫게 되는 것은 아이러니한 일이었다.
그것들을 의심하지 않을 수 있었던 시기가 그에게도 있었다. 유년의 기억은 여전히 투명하고 온전했지만, 사실은 때가 타 있었다는 것을 이제는 알고 있다.
벽으로 스며든 바람이 얼굴 위를 지나가고 있었다. 그는 눈을 감고 이불 속에서 몸을 둥글게 웅크렸다. 어딘가 먼 곳에서 개가 짖는 소리가 들렸다. 컹, 컹, 컹, 하고. 누군가를 부르는 것처럼. 불러도 나는 돌아가지 않아. 야마토는 그렇게 생각했다.
앞으로 무언가를 진심으로 사랑하게 되는 일은 없을 것만 같았다.
여섯 번째로 오디션에 떨어진 날, 이즈미 미츠키는 방을 청소하던 중에 책상 아래 서랍에서 오래된 DVD를 발견했다. 어렸을 적 처음으로 용돈을 모아 산 제로 콘서트의 DVD였다. 하도 낡은 물건이라 제대로 돌아갈까 싶었는데 다행히도 화질이 조금 낡았다는 것 외에는 문제가 없었다. 그는 한쪽 무릎을 세우고 앉아 DVD를 돌려보았다. 그의 이상은, 늘상 변함 없는 모습이었다. 색색의 조명 아래에서 춤추고 노래하고 웃는 모습. 사람들을 압도하고 행복하게 만드는 퍼포먼스. 카메라가 무대를 멀리서 비추면서 관객석을 드러내자, 똑같은 색의 사이리움이 마치 같은 물살을 탄 파도처럼 움직이는 것이 보였다. 노랫소리를 떠받치듯 어렴풋한 환성이 들렸다. 몹시, 빛나고 있었다.
운동장에 분필로 선을 그어 구획을 나누는 것처럼 화면 안과 화면 바깥의 세상이 몹시 다른 것 같이 느껴졌다. 제로의 DVD를 보면서 그런 기분을 느끼는 것은 처음이었다. 아무도 없는 실내의 적막이 유난히 컸다. 정리를 하느라 제멋대로 꺼내놓아 어지러운 옷가지들과 물건들이 바닥에 널려 있었다. 그 사이에 앉아, 이즈미 미츠키는 홀로 영상을 보고 있었다. 그는 화면 안의 세계를 내버려둔 채 무릎에 고개를 파묻었다. 귀를 막고도 따라부를 수 있을 정도로 익숙한 후렴구가 반복해서 들려오고 있었다. 눈을 감아도, 귀를 막아도, 숨을 멈추어도 계속 들릴 것 같았다.
무언가를 좋아해서 괴로워질 수도 있다는 것을 그때 처음으로 알았다. 미츠키는 엔딩 스크롤이 올라가고 화면이 멈출 때까지 오랫동안,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구두 끈이 풀려 있었다.
현관에서 막 나서려는 찰나였다. 아, 하고 성마른 입소리가 튀어나왔다. 잠이 덜 깬 아침에는 온갖 사소한 것들이 성가셔지기 마련이다. 야마토는 마치 비디오를 되감는 것처럼 느릿하게 현관 가장자리에 주저 앉았다. 몸을 굽혀 구두 끈을 묶기 시작했다. 잠이 덜 깬 탓인지 매듭이 예쁘게 만들어지지 않아 몇 번쯤 헛손질을 했다. 가까스로 끈을 묶고 고개를 드는데, 무언가가 눈 앞으로 불쑥 내밀어졌다. 자세히 보니 흰색 보온병이었다.
미츠키는 부엌에서 곧장 현관으로 나온 것인지 앞치마를 그대로 하고 있었다. "이게 뭐야?" 하고 묻자, 미츠키는 이른 아침에 어울리지 않는 또렷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커피야. 야마토 씨, 요즘 아침 촬영 많길래." 계속 보온병을 쥐고 있었던 것인지 건네주는 손끝이 따뜻했다. 그 손가락이 맞닿는 순간, 살짝 움츠러들며 손마디를 구부리는 감촉까지 진동으로 느껴졌다. 야마토는 무심코 웃으면서 병을 받았다.
"고마워. 잘 마실게."
"잘 다녀와-"
친절한 배웅을 받으며 문을 열고 나섰다. 찬 공기가 훅, 끼쳐오자 순식간에 잠이 깨는 것 같았다. 새벽에 가까운 시간, 거리에는 아직 어스름이 남아 있었다. 그는 길을 따라 한참을 걷고 나서야 문득 깨달은 것처럼 손에 들고 있던 보온병을 가방에 집어넣었다. 후, 하고 숨을 내쉬자 흰 김이 궤적을 그리듯 길게 허공을 가른다. 가방 안의 보온병이 묵직하게 느껴졌다.
니카이도 야마토는 최근 이즈미 미츠키에 대해 생각하는 시간이 늘었다. 그것은 누군가가 자신을 빤히 쳐다보면 이쪽에서도 상대를 쳐다보게 되는 것과 같은 이치라고, 야마토는 생각했다. 아니다, 먼저 쳐다본 것은 자신이었을까? 그런 것은 중요하지 않았고, 중요한 것은 현재 그들이 마주보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손을 뻗으면 잡을 수 있을 것만 같은 거리가 그들 사이에 있었다. 미츠키는 사람을 볼 때 정확하게 눈을 쳐다보곤 했고, 그것은 관계에 있어서도 변함이 없어서, 그는 일정한 거리를 두고 선 채로도 그것을 무르거나 애매모호하게 만들려고 들지 않는다.
그런 생각을 확인받듯이 미츠키는 곧잘 야마토에게 다정을 베풀었다. 원래부터도 세심한 구석이 있는 성격이기는 했지만, 행동거지의 질이 다르다는 것 정도는 눈치챌 만했다. 자연스레 뻗어오는 손과 가만히 살피는 시선 같은 것들을 떠올리다보면 목 안쪽이나 뱃속처럼 손에 닿지 않는 곳이 간지러워졌는데, 그러면서도 야마토는 그 감각이 어딘가 께름칙하다고 생각했다.
그건 아마, 궤도를 벗어나는 감각이다. 이런 기분은 자신답지 않았다. 썰물 때 물이 빠져나가는 것처럼, 정신을 놓으면 무심코 스르륵 끌려갈 것만 같다.
이건, 안되는 거겠지. 가방을 고쳐 매며 새롭게 생각했다. 동이 트고 있었다. 차가운 아침이었다.
촬영은 일정한 리듬을 가지고 분주하게 흘러갔다. 야마토는 그 흐름에 몸을 맡기는 것을 좋아했다. 잘하는 일을 싫어하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그 재능의 출처를 알고 있어도 그러하다. 이 일을 하는 이상 그것을 잊어버릴 수는 없었지만, 모순적이게도 카메라 앞에 서면 부차적인 것들은 잘 기억이 나지 않았다. 기분좋은 망각은 감독이 시원스레 컷을 외칠 때까지 이어졌다.
다음 장면까지 텀이 조금 있었다. 야마토는 의자 위에 올려두었던 가방을 뒤져 핸드폰을 꺼내들었다. 부재중 전화가 한 통. 그 이름을 확인하는 순간 그는 극중 인물이 아니라 니카이도 야마토로 되돌아왔다. 그는 잠시 이름을 쳐다보며 고민했다. 고민은 길지 않았다. 촬영장의 구석을 찾아 통화 버튼을 눌렀다. 대기음이 몇 번 이어지고, "응, 야마토 씨." 미츠키가 익숙하게 전화를 받는다.
"어, 왜 전화했나 싶어서. 무슨 일 있어?"
"그런 건 아니고. 바빠?"
"지금은 안 바쁜데."
촬영 분장 때문인지 얼굴이 조금 답답한 느낌이 들었다. 야마토는 조심스레 앞머리를 쓸어넘기며 수화기 너머의 목소리를 들었다. "별 건 아니야. 야마토 씨가 탕두부 먹고 싶다고 했던 게 기억나서, 오늘 저녁 집에서 먹을 거냐고 물어보려고 했어." 마침 두부가 세일하는 것 같길래, 그리고, 야마토 씨 요즘 바쁘잖아? 계속 사먹으면 아무래도 질리지 않을까 싶기도 하고. 그러니까…… 변명처럼 길게 늘어지는 뒷말을 가만히 듣고 있었다. 이런 실없는 말을 하는 목소리를 계속 듣고 있고 싶다는 생각이 든 순간, 야마토는 퍼뜩 고개를 들었다. 간지럽고, 불온했다.
"저기, 미츠."
사담의 중간을 뚝, 끊으며, 생각보다도 먼저 말이 튀어나갔다.
"우리 이런 거 그만두지 않을래?"
그 말은 모호해서, 언제나 정확하게 자신의 눈을 쳐다보는 미츠키에게 내놓기에는 어쩐지 맞지 않는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미츠키는 '이런 거'가 무엇인지 묻지 않았다. 무지근한 침묵이 이어졌다. 스피커 너머로 낮게 깔리는 숨소리가 아니었다면, 통화가 끊긴 줄 알았을 것이다. 이내, 미츠키가 되물었다.
"왜?"
왜? 왜냐고…… 그 질문에, 야마토는 몇 가지 변명들을 고를 수 있었다. 손쉽고 적당한 대답들. 그러나 그것들은 정확하지 않았다. 자신만의 감각을 남에게 설명해서 납득시킬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세트장의 구석을 노려보면서 야마토는 입을 열었다가, 다시 다물었다. 그가 망설이는 기색을 기민하게 알아차린 것인지, 미츠키가 조금 노기 어린 목소리로 말했다.
"제대로 설명하지도 못할 거면, 난 싫어. 끊어!"
그리고 전화가 끊겼다. 뚜, 뚜, 뚜. 무언가 어긋난 듯한 수화음이 스피커에서 흘러나왔다. 그대로 휴대폰을 붙잡고 있자 화면이 저절로 어두워졌다. 야마토는 스태프가 자신을 부르러 올 때까지 그 자리에 멍청하게 서 있었다.
막 방영일을 앞둔 드라마 촬영은 타이트한 일정으로 흘러갔다. 기숙사에 붙어 앉아 있을 시간이 없다는 게 불행인지 다행인지 알 수 없다고 생각하며, 야마토는 허둥지둥 그 일정들을 소화해나갔다. 바쁜 와중에도 기숙사에 들락날락할 때마다 미츠키는 꼭 한 번씩 나와 그를 배웅했는데, 그 태도에는 별반 달라진 점이 없었다. 따뜻한 커피나 차 같은 것이 담긴 보온병과, 핫팩과, 벙어리 장갑과 담요. 야마토는 그런 점마저 그답다고 생각하며 커피를 마시고 핫팩을 쥐고 담요를 덮을 때마다 그를 생각했다. 생각하다보면 저절로 수화기 너머로 들었던 목소리를 떠올리게 되었다. 제대로, 가 무엇인지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그 날은 오래간만의 오프날이었다. 늦은 밤, 야마토는 냉장고 안을 들여다보다가 모아뒀던 캔맥주가 다 떨어졌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편의점 다녀올테니까, 혹시 살 거 있는 사람?" 멤버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는 거실을 향해 외치자, 기다렸다는 것마냥 푸딩부터 주스에 과자에 잡지까지 다양한 대답이 날아들었다. 그 가운데 미츠키가 불쑥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도 같이 가." 말을 무를 틈도 없이 재빨리 옆에 서서 신발을 구겨신는다. 야마토는 그 정수리를 잠깐 쳐다보다가 문을 열고 나섰다.
천천히 길을 걷자 일정한 간격으로 서 있는 가로등 불빛에 시야가 밝아졌다 어두워지기를 반복했다. 노란 불빛을 받아 빛나는 미츠키의 옆얼굴은 여상한 표정이었다. 가장 가까운 편의점에 들어가 과자며 잡지 같은 것을 집어드는 동안 그들은 별다른 말을 나누지 않았다. 어색한 것 같기도 하고 익숙한 것 같기도 한 이상한 기분으로 물건들이 담긴 비닐봉투를 들고 다시 밖으로 나서자, 뒷통수에 대고 아르바이트 생이 안녕히 가세요, 하고 발랄하게 인사하는 소리가 들렸다. 움직일 때마다 비닐이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났다.
길을 중간쯤 되짚어왔을 때 미츠키가 문득 입을 열었다. 있잖아, 야마토 씨.
"응?"
"나는, 짝사랑에는 익숙하거든."
그렇게 말하는 옆얼굴은 여전히 침착하고, 하지만 어딘가 결연한 듯한 표정이었다.
"하지만 날 너무 기다리게 만들지는 마."
그 말에 야마토는 또 다시 멍청하게 멈춰섰다.
미츠키는 붙박힌 듯 서 있는 그를 내버려두고 먼저 앞서 걸어나갔다. 그 걸음에는 망설임이 없었다. 야마토는, 제대로, 라는 말에 대해서 다시 한 번 생각했다. 그 말은 저열함도 비열함도 못난 구석도 전부 포함하는 제대로, 일 것이다.
야마토는 보폭이 큰 걸음으로 성큼 걸어 그의 손목을 붙잡았다. 손에 든 비닐봉투가 바닥에 떨어져서 풀썩 소리가 났다. 미츠키가 그를 돌아보았다.
"무서워서 그랬어."
미츠키가 눈을 깜빡였다. 그래서? 라고 묻는 것처럼.
"너무 진심이 될까봐 무서워서. 너한테, 그러니까…… 그런 건, 힘드니까. 싫다고, 또 그런 식으로 괴로워지는 건. 진심이라는 건 그런 거잖아."
두서없는 말들에 목덜미까지 다 화끈해지는 것 같았다. 미츠키는 그의 얼굴을 한 번 쳐다보고는 손목을 내려다보았다. 야마토는 천천히 그의 손목을 놓았다. 손가락과 살갗이 달라붙은 것처럼 손아귀에서 힘이 잘 빠지지가 않았다. 미츠키가 몸을 숙여서 떨어진 비닐봉지를 집어들었다. 안에서 깨진 물건은 없는지 살피더니, 이내 다시 고개를 든다. 그리고는 툭, 말했다.
"바보야, 뭔가를 좋아하는 일은 원래 힘든 거야."
그는 약간 눈썹을 찡그린 채, 웃는 것도 같고 아닌 것도 같은 미묘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 얼굴을 보자 갑자기 손끝에서부터 힘이 빠져나갔다. 야마토는 바보가 된 기분으로 되물었다.
"……그런가?"
"그렇다고. 바보야."
"두 번이나 말했어……"
"아, 몰라. 나도 진짜, 어쩌다가 이런 사람을 좋아하게 돼서……"
말끝에서 입을 다물었다. 놀려야하는 타이밍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그럴 기분도 들지 않았다. 야마토는 그제야 미츠키의 표정이, 조금 울 것 같은 얼굴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불현듯 마음이 부풀어오르는 것 같았다. 진심이라는 것은 그렇게, 무겁고 불편하고 어려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한 번도 그것을 외면해 본 적이 없을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자 야마토는 갑작스럽게 그 우그러진 눈가를 쓰다듬어보고 싶어졌다. 그는 가까스로 말을 골랐다.
"……손 잡을래?"
야마토가 슬그머니 손을 내밀었다. 미츠키가 잠시 망설이다가, 말없이 들고 있던 비닐봉지를 다른 손으로 바꿔 쥐고는 그의 손을 마주잡았다. 그들은 다시 걷기 시작했다.
돌아가는 길은 좀 더 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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