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마미츠/ 좋아하는, 좋아하는


 니카이도 야마토가 집을 나와 처음으로 얻은 자취방은 지은 지 20년이 된 빌라였다. 돌이켜 생각해보아도 주거환경이 좋다고는 할 수 없는 집이었는데, 안타깝게도 그 무렵 그는 갓 고등학교를 졸업한 어린애였고 그런 좋고 나쁨을 따질 수 있을 정도로 삶에 능숙하지는 못했다. 옆방의 커플이 삼 일마다 한 번씩 싸우는 소리가 마치 귀에다 대고 말하는 것처럼 생생하게 들린다든가, 세면대의 하수구가 곧잘 고장나서 바닥으로 물이 줄줄 샌다든가 하는 일들을 일일이 꼽아보고 있다보면 조금 우울해졌는데, 개중에서도 가장 참기 힘든 것은 추위였다. 그의 방은 3층 가장 안쪽에 있었고, 삼면이 바깥과 닿아 있는 탓인지 다른 방보다 외풍이 잘 드는 것 같았다. 여름 이불과 겨울 이불을 겹쳐서 목끝까지 덮고 있어도 냉기는 곧잘 빈자리를 파고들었다.

 사람이 제대로 살아가기 위해서는 사소한 것들이 모두 갖춰져 있어야 하는구나. 불 꺼진 방의 천장을 올려다보면서 그는 처음으로 깨달았다. 그 생각은 자연스럽게 따뜻한 방과 때마다 차려지는 끼니, 깨끗한 창문과 돌봐주는 사람이 있는 집의 풍경을 돌아보게 했다. 그런 것들이 얼마나 세심하게 사람의 손을 탔는지를 집을 나와서야 깨닫게 되는 것은 아이러니한 일이었다.

 그것들을 의심하지 않을 수 있었던 시기가 그에게도 있었다. 유년의 기억은 여전히 투명하고 온전했지만, 사실은 때가 타 있었다는 것을 이제는 알고 있다.

 벽으로 스며든 바람이 얼굴 위를 지나가고 있었다. 그는 눈을 감고 이불 속에서 몸을 둥글게 웅크렸다. 어딘가 먼 곳에서 개가 짖는 소리가 들렸다. 컹, 컹, 컹, 하고. 누군가를 부르는 것처럼. 불러도 나는 돌아가지 않아. 야마토는 그렇게 생각했다.

 앞으로 무언가를 진심으로 사랑하게 되는 일은 없을 것만 같았다.







 여섯 번째로 오디션에 떨어진 날, 이즈미 미츠키는 방을 청소하던 중에 책상 아래 서랍에서 오래된 DVD를 발견했다. 어렸을 적 처음으로 용돈을 모아 산 제로 콘서트의 DVD였다. 하도 낡은 물건이라 제대로 돌아갈까 싶었는데 다행히도 화질이 조금 낡았다는 것 외에는 문제가 없었다. 그는 한쪽 무릎을 세우고 앉아 DVD를 돌려보았다. 그의 이상은, 늘상 변함 없는 모습이었다. 색색의 조명 아래에서 춤추고 노래하고 웃는 모습. 사람들을 압도하고 행복하게 만드는 퍼포먼스. 카메라가 무대를 멀리서 비추면서 관객석을 드러내자, 똑같은 색의 사이리움이 마치 같은 물살을 탄 파도처럼 움직이는 것이 보였다. 노랫소리를 떠받치듯 어렴풋한 환성이 들렸다. 몹시, 빛나고 있었다.

 운동장에 분필로 선을 그어 구획을 나누는 것처럼 화면 안과 화면 바깥의 세상이 몹시 다른 것 같이 느껴졌다. 제로의 DVD를 보면서 그런 기분을 느끼는 것은 처음이었다. 아무도 없는 실내의 적막이 유난히 컸다. 정리를 하느라 제멋대로 꺼내놓아 어지러운 옷가지들과 물건들이 바닥에 널려 있었다. 그 사이에 앉아, 이즈미 미츠키는 홀로 영상을 보고 있었다. 그는 화면 안의 세계를 내버려둔 채 무릎에 고개를 파묻었다. 귀를 막고도 따라부를 수 있을 정도로 익숙한 후렴구가 반복해서 들려오고 있었다. 눈을 감아도, 귀를 막아도, 숨을 멈추어도 계속 들릴 것 같았다.

 무언가를 좋아해서 괴로워질 수도 있다는 것을 그때 처음으로 알았다. 미츠키는 엔딩 스크롤이 올라가고 화면이 멈출 때까지 오랫동안,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구두 끈이 풀려 있었다.

 현관에서 막 나서려는 찰나였다. 아, 하고 성마른 입소리가 튀어나왔다. 잠이 덜 깬 아침에는 온갖 사소한 것들이 성가셔지기 마련이다. 야마토는 마치 비디오를 되감는 것처럼 느릿하게 현관 가장자리에 주저 앉았다. 몸을 굽혀 구두 끈을 묶기 시작했다. 잠이 덜 깬 탓인지 매듭이 예쁘게 만들어지지 않아 몇 번쯤 헛손질을 했다. 가까스로 끈을 묶고 고개를 드는데, 무언가가 눈 앞으로 불쑥 내밀어졌다. 자세히 보니 흰색 보온병이었다.

 미츠키는 부엌에서 곧장 현관으로 나온 것인지 앞치마를 그대로 하고 있었다. "이게 뭐야?" 하고 묻자, 미츠키는 이른 아침에 어울리지 않는 또렷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커피야. 야마토 씨, 요즘 아침 촬영 많길래." 계속 보온병을 쥐고 있었던 것인지 건네주는 손끝이 따뜻했다. 그 손가락이 맞닿는 순간, 살짝 움츠러들며 손마디를 구부리는 감촉까지 진동으로 느껴졌다. 야마토는 무심코 웃으면서 병을 받았다.


 "고마워. 잘 마실게."

 "잘 다녀와-"


 친절한 배웅을 받으며 문을 열고 나섰다. 찬 공기가 훅, 끼쳐오자 순식간에 잠이 깨는 것 같았다. 새벽에 가까운 시간, 거리에는 아직 어스름이 남아 있었다. 그는 길을 따라 한참을 걷고 나서야 문득 깨달은 것처럼 손에 들고 있던 보온병을 가방에 집어넣었다. 후, 하고 숨을 내쉬자 흰 김이 궤적을 그리듯 길게 허공을 가른다. 가방 안의 보온병이 묵직하게 느껴졌다.

 니카이도 야마토는 최근 이즈미 미츠키에 대해 생각하는 시간이 늘었다. 그것은 누군가가 자신을 빤히 쳐다보면 이쪽에서도 상대를 쳐다보게 되는 것과 같은 이치라고, 야마토는 생각했다. 아니다, 먼저 쳐다본 것은 자신이었을까? 그런 것은 중요하지 않았고, 중요한 것은 현재 그들이 마주보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손을 뻗으면 잡을 수 있을 것만 같은 거리가 그들 사이에 있었다. 미츠키는 사람을 볼 때 정확하게 눈을 쳐다보곤 했고, 그것은 관계에 있어서도 변함이 없어서, 그는 일정한 거리를 두고 선 채로도 그것을 무르거나 애매모호하게 만들려고 들지 않는다.

 그런 생각을 확인받듯이 미츠키는 곧잘 야마토에게 다정을 베풀었다. 원래부터도 세심한 구석이 있는 성격이기는 했지만, 행동거지의 질이 다르다는 것 정도는 눈치챌 만했다. 자연스레 뻗어오는 손과 가만히 살피는 시선 같은 것들을 떠올리다보면 목 안쪽이나 뱃속처럼 손에 닿지 않는 곳이 간지러워졌는데, 그러면서도 야마토는 그 감각이 어딘가 께름칙하다고 생각했다.

 그건 아마, 궤도를 벗어나는 감각이다. 이런 기분은 자신답지 않았다. 썰물 때 물이 빠져나가는 것처럼, 정신을 놓으면 무심코 스르륵 끌려갈 것만 같다.

 이건, 안되는 거겠지. 가방을 고쳐 매며 새롭게 생각했다. 동이 트고 있었다. 차가운 아침이었다.







 촬영은 일정한 리듬을 가지고 분주하게 흘러갔다. 야마토는 그 흐름에 몸을 맡기는 것을 좋아했다. 잘하는 일을 싫어하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그 재능의 출처를 알고 있어도 그러하다. 이 일을 하는 이상 그것을 잊어버릴 수는 없었지만, 모순적이게도 카메라 앞에 서면 부차적인 것들은 잘 기억이 나지 않았다. 기분좋은 망각은 감독이 시원스레 컷을 외칠 때까지 이어졌다.

 다음 장면까지 텀이 조금 있었다. 야마토는 의자 위에 올려두었던 가방을 뒤져 핸드폰을 꺼내들었다. 부재중 전화가 한 통. 그 이름을 확인하는 순간 그는 극중 인물이 아니라 니카이도 야마토로 되돌아왔다. 그는 잠시 이름을 쳐다보며 고민했다. 고민은 길지 않았다. 촬영장의 구석을 찾아 통화 버튼을 눌렀다. 대기음이 몇 번 이어지고, "응, 야마토 씨." 미츠키가 익숙하게 전화를 받는다.


 "어, 왜 전화했나 싶어서. 무슨 일 있어?"

 "그런 건 아니고. 바빠?"

 "지금은 안 바쁜데."


 촬영 분장 때문인지 얼굴이 조금 답답한 느낌이 들었다. 야마토는 조심스레 앞머리를 쓸어넘기며 수화기 너머의 목소리를 들었다. "별 건 아니야. 야마토 씨가 탕두부 먹고 싶다고 했던 게 기억나서, 오늘 저녁 집에서 먹을 거냐고 물어보려고 했어." 마침 두부가 세일하는 것 같길래, 그리고, 야마토 씨 요즘 바쁘잖아? 계속 사먹으면 아무래도 질리지 않을까 싶기도 하고. 그러니까…… 변명처럼 길게 늘어지는 뒷말을 가만히 듣고 있었다. 이런 실없는 말을 하는 목소리를 계속 듣고 있고 싶다는 생각이 든 순간, 야마토는 퍼뜩 고개를 들었다. 간지럽고, 불온했다.


 "저기, 미츠."


 사담의 중간을 뚝, 끊으며, 생각보다도 먼저 말이 튀어나갔다.


 "우리 이런 거 그만두지 않을래?"


 그 말은 모호해서, 언제나 정확하게 자신의 눈을 쳐다보는 미츠키에게 내놓기에는 어쩐지 맞지 않는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미츠키는 '이런 거'가 무엇인지 묻지 않았다. 무지근한 침묵이 이어졌다. 스피커 너머로 낮게 깔리는 숨소리가 아니었다면, 통화가 끊긴 줄 알았을 것이다. 이내, 미츠키가 되물었다.


 "왜?"


 왜? 왜냐고…… 그 질문에, 야마토는 몇 가지 변명들을 고를 수 있었다. 손쉽고 적당한 대답들. 그러나 그것들은 정확하지 않았다. 자신만의 감각을 남에게 설명해서 납득시킬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세트장의 구석을 노려보면서 야마토는 입을 열었다가, 다시 다물었다. 그가 망설이는 기색을 기민하게 알아차린 것인지, 미츠키가 조금 노기 어린 목소리로 말했다.


 "제대로 설명하지도 못할 거면, 난 싫어. 끊어!"


 그리고 전화가 끊겼다. 뚜, 뚜, 뚜. 무언가 어긋난 듯한 수화음이 스피커에서 흘러나왔다. 그대로 휴대폰을 붙잡고 있자 화면이 저절로 어두워졌다. 야마토는 스태프가 자신을 부르러 올 때까지 그 자리에 멍청하게 서 있었다.







 막 방영일을 앞둔 드라마 촬영은 타이트한 일정으로 흘러갔다. 기숙사에 붙어 앉아 있을 시간이 없다는 게 불행인지 다행인지 알 수 없다고 생각하며, 야마토는 허둥지둥 그 일정들을 소화해나갔다. 바쁜 와중에도 기숙사에 들락날락할 때마다 미츠키는 꼭 한 번씩 나와 그를 배웅했는데, 그 태도에는 별반 달라진 점이 없었다. 따뜻한 커피나 차 같은 것이 담긴 보온병과, 핫팩과, 벙어리 장갑과 담요. 야마토는 그런 점마저 그답다고 생각하며 커피를 마시고 핫팩을 쥐고 담요를 덮을 때마다 그를 생각했다. 생각하다보면 저절로 수화기 너머로 들었던 목소리를 떠올리게 되었다. 제대로, 가 무엇인지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그 날은 오래간만의 오프날이었다. 늦은 밤, 야마토는 냉장고 안을 들여다보다가 모아뒀던 캔맥주가 다 떨어졌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편의점 다녀올테니까, 혹시 살 거 있는 사람?" 멤버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는 거실을 향해 외치자, 기다렸다는 것마냥 푸딩부터 주스에 과자에 잡지까지 다양한 대답이 날아들었다. 그 가운데 미츠키가 불쑥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도 같이 가." 말을 무를 틈도 없이 재빨리 옆에 서서 신발을 구겨신는다. 야마토는 그 정수리를 잠깐 쳐다보다가 문을 열고 나섰다.

 천천히 길을 걷자 일정한 간격으로 서 있는 가로등 불빛에 시야가 밝아졌다 어두워지기를 반복했다. 노란 불빛을 받아 빛나는 미츠키의 옆얼굴은 여상한 표정이었다. 가장 가까운 편의점에 들어가 과자며 잡지 같은 것을 집어드는 동안 그들은 별다른 말을 나누지 않았다. 어색한 것 같기도 하고 익숙한 것 같기도 한 이상한 기분으로 물건들이 담긴 비닐봉투를 들고 다시 밖으로 나서자, 뒷통수에 대고 아르바이트 생이 안녕히 가세요, 하고 발랄하게 인사하는 소리가 들렸다. 움직일 때마다 비닐이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났다.

 길을 중간쯤 되짚어왔을 때 미츠키가 문득 입을 열었다. 있잖아, 야마토 씨.


 "응?"

 "나는, 짝사랑에는 익숙하거든."


 그렇게 말하는 옆얼굴은 여전히 침착하고, 하지만 어딘가 결연한 듯한 표정이었다.


 "하지만 날 너무 기다리게 만들지는 마."


 그 말에 야마토는 또 다시 멍청하게 멈춰섰다.

 미츠키는 붙박힌 듯 서 있는 그를 내버려두고 먼저 앞서 걸어나갔다. 그 걸음에는 망설임이 없었다. 야마토는, 제대로, 라는 말에 대해서 다시 한 번 생각했다. 그 말은 저열함도 비열함도 못난 구석도 전부 포함하는 제대로, 일 것이다.

 야마토는 보폭이 큰 걸음으로 성큼 걸어 그의 손목을 붙잡았다. 손에 든 비닐봉투가 바닥에 떨어져서 풀썩 소리가 났다. 미츠키가 그를 돌아보았다.


 "무서워서 그랬어."


 미츠키가 눈을 깜빡였다. 그래서? 라고 묻는 것처럼.


 "너무 진심이 될까봐 무서워서. 너한테, 그러니까…… 그런 건, 힘드니까. 싫다고, 또 그런 식으로 괴로워지는 건. 진심이라는 건 그런 거잖아."


 두서없는 말들에 목덜미까지 다 화끈해지는 것 같았다. 미츠키는 그의 얼굴을 한 번 쳐다보고는 손목을 내려다보았다. 야마토는 천천히 그의 손목을 놓았다. 손가락과 살갗이 달라붙은 것처럼 손아귀에서 힘이 잘 빠지지가 않았다. 미츠키가 몸을 숙여서 떨어진 비닐봉지를 집어들었다. 안에서 깨진 물건은 없는지 살피더니, 이내 다시 고개를 든다. 그리고는 툭, 말했다.


 "바보야, 뭔가를 좋아하는 일은 원래 힘든 거야."


 그는 약간 눈썹을 찡그린 채, 웃는 것도 같고 아닌 것도 같은 미묘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 얼굴을 보자 갑자기 손끝에서부터 힘이 빠져나갔다. 야마토는 바보가 된 기분으로 되물었다.


 "……그런가?"

 "그렇다고. 바보야."

 "두 번이나 말했어……"

 "아, 몰라. 나도 진짜, 어쩌다가 이런 사람을 좋아하게 돼서……"


 말끝에서 입을 다물었다. 놀려야하는 타이밍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그럴 기분도 들지 않았다. 야마토는 그제야 미츠키의 표정이, 조금 울 것 같은 얼굴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불현듯 마음이 부풀어오르는 것 같았다. 진심이라는 것은 그렇게, 무겁고 불편하고 어려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한 번도 그것을 외면해 본 적이 없을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자 야마토는 갑작스럽게 그 우그러진 눈가를 쓰다듬어보고 싶어졌다. 그는 가까스로 말을 골랐다.


 "……손 잡을래?"


 야마토가 슬그머니 손을 내밀었다. 미츠키가 잠시 망설이다가, 말없이 들고 있던 비닐봉지를 다른 손으로 바꿔 쥐고는 그의 손을 마주잡았다. 그들은 다시 걷기 시작했다.

 돌아가는 길은 좀 더 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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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오미츠이오/ 키가 자라는 꿈


 1


 대부분의 어린아이들이 그렇듯, 어릴 적엔 빨리 키가 자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 무렵 세계는 아직 직관적이었고, 어린 이즈미 이오리에게는 서랍장 위쪽에 손이 닿는다든가 발돋움을 하면 천장을 짚을 수 있다든가 하는 일들이 성장의 척도인 것처럼 느껴졌다. 이오리의 방에는 포스터로 가려놓은 벽 뒤쪽에 키가 자란 것을 재던 흔적이 아직도 남아 있었다. 벽지 위에 유성펜으로 잘게 그어진 선들은 들쭉날쭉했고, 부모님이 발견하고서 혼낸 뒤로는 그런 짓을 하지 않았지만, 그 선들을 그어준 것이 미츠키였던 것을 아직도 기억하고 있다. 실눈을 뜨고 손바닥으로 정수리를 내리누르며 펜을 긋는 그 신중한 얼굴을 비스듬히 올려다보던 일이, 필름의 한 장면처럼 머릿속에 남아 있었다.

 네 살 차이는 또래라고 하기에는 멀고 아주 멀다고 하기에는 가까운 나이차이였다. 삶의 궤도를 앞서 나가는 사람이 있다는 것은, 다른 모든 형제들이 그렇겠지만, 신기한 일이었다. 미츠키는 그보다 먼저 글을 떼고 자전거를 배우고 학교에 들어가고 부모님을 돕고 교복을 입고 졸업장을 받았다. 이오리는 그 시절 그런 것들을 따라잡고 싶어서 내심 안달이 나 있었다. 아마 그들이 네 살 차이였기 때문에, 한 살이나 열 살이 아니라 네 살 차이였기 때문에 그랬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것은 손을 뻗으면 닿을 것 같지만 잘 닿지 않는 거리였다.

 그러다보면 가끔씩 자라고 싶은 것인지 따라잡고 싶은 것인지 구분이 가지 않았다. 그 두 가지는 닮아 있었으므로, 굳이 구분할 필요가 없기도 했다.

 그런 생각이 조금 바뀐 것은 이오리가 교복을 입을 때쯤이었다. 미츠키는 동네의 공립 중학교를 나와 공립 고등학교에 들어갔고, 내내 가쿠란을 입었다. 형이 키가 좀 더 컸다면 교복을 물려입을 수도 있었을텐데, 하는 어머니의 말에 이오리는 문득 자신과 미츠키가 거의 키가 같아졌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는 더 이상 미츠키를 올려다 볼 필요가 없었다.

 그렇네, 나, 더는 자라지 않으니까. 미츠키는 선선한 말투로 그렇게 말했지만 이오리는 그 말이 트럼프 카드처럼 뒷면을 숨기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미츠키에게는 신경쓰는 일을 부러 덤덤하게 말하는, 그런 것이 좋은 일이라고 생각하는 버릇이 있었다. 이오리는 그의 그런 점들을 잘 알았다. 미츠키와 관련된 일 중에 그가 모르는 것은 없었다.

 만약에 형을 신경쓰게 한다면 더 이상 자라지 않아도 좋다고, 새로 산 교복의 매끄러운 소매를 만져보며 이오리는 생각했다.

 꿈을 꾸기 시작한 것은 그 무렵이다.


 "떨어지는 꿈을 꿨어요."


 어느 날 아침, 화장실 앞에서 미츠키와 마주쳤을 때 그렇게 말했다. 미츠키가 칫솔을 입에 문 채로 그를 돌아보았다. 꿈에서 이오리는 어딘가의 가장자리에 서 있었다. 아래를 아무리 내려다보아도 스스로가 서 있는 높이가 가늠이 되지 않는 곳이었다. 그러다가 툭, 누가 밀친 것처럼 지면에서 발이 빗겨나가고, 그는 아무것도 없는 허공으로 떨어졌다. 몸이 아래로 훅, 꺼지는 순간의 그 섬찟한 느낌. 덕분에 아직도 턱이나 팔 안쪽이 간지러웠지만, 나쁜 꿈을 꿨다고 어리광을 부리기에는 민망해서 자세히 설명하지는 않았다. 미츠키가 세면대에 치약 거품을 뱉고는 대답했다.


 "그거, 키가 크는 꿈이라던데."


 잘됐네, 그렇게 말하며 미츠키가 그의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잘된 것일까? 이오리는 선뜻 확신할 수 없었다.

 그 해 이즈미 이오리는 6cm가 자랐다.






 2


 이오리가 가지고 있는 몇 가지 불만 중 하나는 미츠키와 같은 학교를 다닐 수 없다는 점이었다. 이오리가 다니는 중학교는 미츠키가 다니는 고등학교보다 조금 더 멀었다. 이오리는 버스를 타고 등교했고, 미츠키는 주로 자전거를 타고 등교했다. 아침마다 미츠키는 이오리를 뒷자리에 태워 버스정류장까지 데려다주었다. 그러기 위해 그가 20분 정도 일찍 일어난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수고롭지 않냐는 말에 미츠키가 나는 학교가 즐거우니까 일찍 가도 괜찮아, 하고 대답했으므로 재차 묻지는 않았다. 미츠키의 어깨를 붙잡고 길이 꺾일 때마다 그의 머리가 조금씩 흔들리는 것이나 찬바람에 붉어진 귓바퀴를 보는 일은 꽤 즐거웠다.


 그건, 어느 겨울의 일이었다.

 버스를 타고 하교하는 길이었다. 겨울의 해는 짧아서, 당번 일을 마치고 나니 어느새 해가 어스름하게 가라앉고 있었다. 아스팔트 바닥의 틈마다 노을이 붉은 용암처럼 깔려 있었다. 이오리는 사람이 적은 버스 한쪽에 앉아 무심하게 창밖을 응시했다. 하교 시간과 퇴근 시간 사이에 낀 애매한 때라 길에도 사람이 적었다. 가까운 거리만 순회하는 버스는 도로가 비어 있어도 좀처럼 속도를 내지 않았다. 김이 서린 창문을 옷 소매로 닦아내며 길가를 내다보는데 문득, 그의 시야에 익숙한 뒷모습이 걸렸다. 이오리는 저도 모르게 차가운 창문에 이마를 가져다 댔다.

 미츠키는 자전거에 올라타지 않고 손으로 자전거를 끌며 천천히 걷고 있었다. 그와 같은 학교의 교복을 입은 여자아이가 그의 옆에서 나란히 보폭을 맞추고 있었다. 머리가 길고, 미츠키와도 제법 키 차이가 나는 체구가 작은 여자아이였다. 무슨 얘기를 하는 것인지 그들은 몇 마디 말을 나누다가 이내 거울을 보는 것처럼 비슷한 얼굴로 웃었다. 노을 탓인지 아니면, 무엇 때문인지, 미츠키의 얼굴 윤곽이 발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버스가 그들 옆을 스쳐지나가는 짧은 순간, 그 모습이 망막에 찍어누른 것처럼 잔상이 남았다.

 이오리는 그들의 모습이 보이지 않게 된 뒤에도 한동안 창문에 얼굴을 붙이고 있다가, 뒤로 푹 꺼지듯이 좌석 등받이에 기대 앉았다. ……역입니다, 이번 정류장은, ……. 그는 한참 뒤에야 자신이 내릴 정류장을 지나쳤다는 걸 알았다. 급하게 벨을 누르고 이름 모를 정류장에 내리자 마치 표류하는 부표가 된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낯설고 어려운 곳에 떨어진 것 같은 기분이기도 했다. 이오리는 몇 정거장이나 되는 거리를 발로 걸어서 되돌아왔다. 그러면서 내내 자꾸만 좀 전에 보았던 그 얼굴을 곱씹었다.

 그런 표정은 처음 보았다. 미츠키에게 자신이 모르는 얼굴이 있다는 것 또한 처음 알았다. 이즈미 이오리는 이즈미 미츠키에 대해 모든 것을 알고 있었는데, 정말로? 그럴 리가 없었다. 가까운 사람일 수록 상대에 대해 전부 알고 있다는 착각을 하기 마련이라는 사실을…… 그런 쉬운 사실을, 그는 그때 처음으로 깨달았다.

 깨닫고 난 뒤에도 그는 얼빠진 사람처럼 한참 현관문의 문고리를 잡고 서 있었다. 가까스로 문을 열고 집 안으로 들어섰을 때, 미츠키는 아직 집에 없었다. 그러고보니 미츠키는 요즘 종종 하교가 늦었다. 그 여자아이 때문일지도 모른다고 어렵지 않게 짐작하며 이오리는 2층으로 올라갔다. 목도리를 풀고 겉옷을 벗어 의자에 걸쳐 놓고 침대 가장자리에 풀썩 주저 앉았다.

 마치 주전자의 물이 끓어오르는 것처럼, 그의 안에서 자꾸만 무언가가 끓고 있었다. 그것은 어떤 충동이었다. 이오리는 미츠키의 방에 들어가서 서랍이나 옷장 같은 것을 열어보고 싶었다. 혹은 핸드폰을 열어 문자나 메모 같은 것을 보고 싶기도 했다. 그것은 말하자면 자신이 모르는 모든 것을 확인하고 싶은 충동이었다. 미츠키에게는 얼마나 더 그가 모르는 얼굴이 있을까? 자라게 된다면 가까워질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그의 키가 미츠키를 넘어서서 멈추지 않는 것처럼, 그들은 앞으로도 점점 더 멀어지기만 할 것이다. 그들은 형제였으나 또한 타인이기 때문에. 가장 가까이 있는데도 멀게 느껴진다니, 차라리 아예 타인이었으면 좋았을 텐데.

 …아예 타인이었으면?

 이오리는 빈 벽을 멍하니 노려보며 한참동안 그 자리에 앉아 있었다.






 3


 "나랑 달리 이오리는 뭐든 다 잘하잖아. 그 머리를 본인을 위해 쓰라고!"


 미츠키가 여덟 번째 오디션에 떨어졌을 때, 미츠키는 이오리에게 그런 식으로 화를 냈다. 화를 뱉어낸 후의 어색하고 침잠한 침묵을 견디기가 어려웠던 것인지, 그는 이오리를 내버려두고 빠른 걸음으로 앞서갔다. 이오리는 부러 걸음을 서서히 늦췄다. 미츠키가 돌아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는데, 그는 점점 더 멀어지더니 이내 길가의 사람들 사이로 파묻히듯이 사라졌다. 미츠키의 모습이 보이지 않게 되자 이오리는 길가에 멈춰 서서 멀거니 그가 사라진 방향을 바라보았다. 이제는 거리에서 길을 잃어도 형이 찾아줄 나이는 아니구나, 하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애초에 혼자서 길을 잃어본 적은 한 번도 없다는 사실은 뒤늦게서야 기억났다.

 그러고서 며칠 뒤엔가, 미츠키가 이오리의 방에 찾아왔다. "이오리, 생크림 케익 먹을래?" 케익이 먹고 싶지는 않았지만 그러겠다고 했다. "그럼 만들어줄게. 도와줘." 미츠키는 그의 손을 끌고 가게의 주방으로 갔다. 그날은 마침 가게가 쉬는 날이었다. 미리 준비해둔 것인지 넓은 조리대 위에 생크림이나 보울이나 딸기 같은 것이 어지럽게 올라와 있었다. 미츠키는 익숙한 손길로 반죽을 하고 딸기를 자르고 생크림에 거품을 냈다. 이오리는 케익 틀에 박력분을 뿌리며 전동 거품기가 요란한 소리를 내며 돌아가는 것을 지켜보았다.

 흰색 액체는 금방 몸집을 불려 몽실몽실한 크림이 되었다. "나 예전에는 이게 되게 신기했었는데." 미츠키가 거품기를 흔들며 말했다. "액체였는데, 그냥 휘젓기만 하는 걸로 뭔가 다른 게 된다는 게 말야." "그건 크림 속에 들어 있는 유지방이 충격에 의해 파괴되어서 서로 밀집하기 때문이래요." "그래? 처음 알았네."


 "저번엔 미안했어."


 미츠키가 작고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사과할 일은 아니라고 생각해요." 이오리는 그렇게 대답했다.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귀염성이 없는 대답이었다. "아니야, 그런 식으로 말하는 게 아니었어." 미츠키는 입술을 오므린 채 생각에 잠긴 얼굴로 오븐을 예열하고 도마며 계량컵 같은 것을 개수대에 넣어두었다. 잠시 뒤 그가 덧붙였다.


 "그냥, 변하는 게 너무 쉽네 하는 생각이 들었어."

 "그런가요."

 "응. 너도 나도 말야."


 그런가요, 이오리는 똑같은 대답을 되풀이할 수밖에 없었다. 오븐 안에서 반죽이 천천히 부풀고 있었다.

 미츠키가 만들어준 케익은, 언제나처럼 달고 맛있었다.






 4


 어느 날 학교에 다녀왔을 때, 미츠키는 거실 소파에 누워 잠들어 있었다.

 이오리는 팔걸이에 머리를 기대고 가만히 눈을 감고 있는 그 얼굴을 오랫동안 내려다보았다. 부드러운 얼굴선에 늦은 오후의 나직한 햇살이 머물러 있었다. 미츠키는 이마에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걷어올려주는 손길에도 잠을 깨지 않았다. 이오리는 조용히 숨소리를 죽였다. 그때 그는 어쩐지 죄를 짓는 기분이 되었는데, 스스로도 그 기분의 출처를 정확하게 알 수가 없었다. 숨소리까지 죽여가며 누군가의 얼굴을 오래 쳐다보는 일. 뺨을 가로지르며 비치는 그림자의 각도와, 감은 눈꺼풀의 모양새를 기억하는 일…… 둥근 이마를 더 만져보고 싶다고 생각하는 일. 그런 일들을 어떤 식으로 나누고 분석하고 이름붙일 수 있겠는가? 이즈미 이오리는 처음으로 명명命名을 포기하기로 했다.

 정의하지 않으면 변하는 일도 없을 것이다.

 그날 밤에는 또 꿈을 꾸었다. 떨어지는 꿈이었다. 그는 가장자리에 서 있었는데…… 가장자리가 아니었다. 그것은 어떤 선 위였다. 그는 줄타기를 하고 있었다. 조금만 발을 헛디뎌도 아래로 떨어지는…… 그런 아슬아슬한, 그러니까, 그는 꿈에서 자꾸만 균형을 잃었고 아래로 떨어졌다. 그 감각은 항상 섬뜩했다. 아래로 훅 꺼지는…… 돌이킬 수 없는 감각.

 아침에 눈을 떴을 때 이오리는 생각했다. 이것은 나쁜 꿈이구나,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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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마소우타마/ 열과 빛


 요츠바 타마키에게 오오사카 소고에 대한 것을 묻는다면, 부드럽고 매끈한 천으로 감싼 압정 같은 놈이라고 대답할 것이다. 잘 다림질 되어 구김이 없어 보이고, 만지면 감촉이 좋을 것 같고, 값비쌀 것 같고, 하지만 그 안에는 어떤 것이 있는지 알 수가 없는. 몇 번 그 천 안으로 손을 쑥 집어넣어 안에 든 것을 꺼내 본 이후로는 예전만큼 그가 불투명하게 느껴지지는 않았으나, 근본적으로 소고는 속내를 잘 드러내지 않는 사람이었다. 그것은 옆에서 아무리 말로 표현해달라고, 솔직하게 털어놓으라고 졸라도 쉬이 변하지 않는 근본에 가까운 성질이어서, 사람은 타인의 마음에 들지 않는 점도 감내하며 살아가야하는 것이구나…… 하고 이상스레 생각하게 될 때가 있었다.


 "아."


 그만큼 타마키는 그의 기척에 기민해지는 법을 익혀가는 중이었다.

 작게 입소리를 낸 소고가 갑작스럽게 동작을 멈췄다. 몸을 돌려 쳐다보자 그는 마치 바닥에서 무언가를 찾는 것처럼 눈을 내리깔고 시선으로 발치를 훑고 있었다. 리허설을 하는 와중이었다. 고개를 숙이고 있는 탓에 얼굴이 잘 보이지 않았으나, 앞머리 사이로 슬쩍 보인 그의 미간이 찌푸려져 있는 것 같기도 했다. "왜 그래?" 타마키가 묻자, 소고가 반 박자 느리게 고개를 들었다. 그, 아주 짧은 찰나. 소고는 짐짓 침착한 얼굴로 "아무것도 아니야." 하고 대답했다.

 그 찰나를 알아차리게 된 것이 지금까지의 경험의 산물이라면 산물이었다. 타마키는 뭔데, 무슨 일이야, 하고 그에게 따져물으려고 했으나, "다 됐나요?" 하고 물어보는 스태프의 높은 말소리가 그들 사이에 날아들었다. "네, 리허설은 이정도면 될 것 같아요. 감사합니다." 소고가 재빨리 대답하고는 타마키의 옆에 반듯하게 섰다. 타마키는 자신보다 조금 낮은 곳에 있는 그의 옆얼굴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집요한 시선을 느꼈을 텐데도 한 번 돌아보지도 않는 것이, 그의 의혹을 더욱 가중시켰다. 그러나 그가 그 의혹을 어떤 방식으로든 풀어내기도 전에 간주가 시작되었다. 녹화 방송이었으나 촬영을 지연시켜서 좋을 것이 없다는 것은 이제 타마키도 알았다.

 음악이 들려오자 몇 번이고 연습해서 익숙해진 동작을 따라 몸이 저절로 움직였다. MEZZO"의 안무는 항상 그다지 격렬하지 않았다. 팔을 뻗었다가 내리고, 천천히 가까워졌다 멀어지고, 문득, 타마키는 그가 평소보다 조금 동작이 굼뜬 것을 알아차렸는데, 시선이 마주치고, 다시 가까워졌다가 엇갈려서 서로를 지나치는 순간, 소고의 목덜미에 배어나온 땀방울 같은 것이 얼핏 보였고, 눈으로 내내 그를 쫓지 않도록 조심하면서 움직이자 4분 남짓한 곡이 아주 길게 느껴졌다.

 끝나는 반주가 서서히 잦아들었다. 타마키는 몸을 긴장시키며 자신과 조금 떨어진 곳에 서 있는 소고를 맹렬하게 쳐다보았다.


 "네, OK입니다!"


 스태프가 명랑한 목소리로 외쳤다.


 "수고하셨, 습, 아?"


 소고는 언제나처럼 인사를 하려고 했으나 그럴 수가 없었다. 보폭이 큰 걸음으로 두어 걸음만에 그에게 다가온 타마키가 어떤 예고도 없이, 정말로 갑작스럽게 몸을 숙이더니 그를 쌀포대처럼 들쳐업었기 때문이었다. 굉장히 순간적으로 일어난 일이었던 탓에 소고는 뇌의 처리속도가 현실을 따라가지 못하는 기분을 느꼈다. 배가 눌리고 몸이 공중에 뜨는 감각이 머리를 더욱 느리게 돌아가게 했다. "저기, 저기 타마키 군? 타마키 군? 이거 뭐하는 거야?" 그가 더듬더듬 항의했으나 타마키는 대답도 하지 않고 휙 몸을 돌렸다.


 "반쨩, 우리 다음 스케쥴 있어?"

 "어? 아니, 없을 텐데."

 "그럼 숙소로 돌아가도 되는 거지?"


 그럴…… 걸, 하는 대답을 듣자마자 쏜살같이 촬영장 출구로 튀어나가는 타마키의 뒷모습은 사뭇 비장하기까지했다. 이게 뭐하는 거냐니까? 저기, 저기 타마키 군! 듣고 있어? 타마키 군! 소고의 목소리가 멀어져가며 복도를 울렸다. 한참 잘 나가는 듀엣의 희귀한 모습을 감상하느라 넋이 나간 스태프들에게 허둥지둥 인사를 건네며, 반리는 그들을 쫓아 황급하게 촬영장을 나섰다.






 노도와 같은 기세로 주차장까지 내려와 구겨지듯이 차에 올라탄 후, 소고는 이번에야말로 화를 내야할 타이밍인가 하고 생각했지만, 자신의 옆에 앉아 왼쪽 발목을 잡고 휙 무릎 위에 올려두는 타마키를 보며 그 반대가 되겠구나 하는 것을 짐작했다. 타마키가 바짓단을 제멋대로 구기듯이 걷어올려 그의 발목을 드러냈다. 발목은 한 눈에 보기에도 복사뼈 부근이 붉게 달아올라 퉁퉁 부어 있었다. 타마키가 바짓단을 올려 잡은 채로 그를 노려보았다. 소고는 할 말이 없어져서 입을 다물었다. 타마키가 운전석에 올라탄 반리에게 물었다.


 "반쨩, 뭔가 시원한 거 있어? 얼음이라든가."

 "얼음은 없고 방금 산 스포츠드링크가 있긴 한데." 

 "그럼 그거라도 줘."


 차가운 음료수 병이 발목에 눌리듯이 닿았다. 반사적으로 아, 하는 신음이 튀어나왔다. "어디 다쳤어?" 반리가 후진을 하며 뒤늦게 물었다. 이제는 더 숨길 여력도 없어 솔직하게 대답하기로 했다.


 "아까 리허설 할 때, 그, 무대의 단이 조금 높아서요. 잘못 디뎌서 발을 좀 삐었어요."

 "이게 조금이야? 엄청 부었잖아!"


 역시나 타마키는 화를 냈다. 화를 내면서도 스포츠드링크를 가져다대주는 손은 떨어지지 않는다. 몇 마디 더 쏘아붙일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그 대신 입을 다물고 부루퉁한 얼굴을 한다. 좋지 않은 패턴이었다. 차라리 솔직하게 화를 내주는 쪽이 조금 더 달래기가 쉬울 텐데. 소고는 그가 어느 정도로 화가 나 있는지 속으로 가늠해보았다. 이런 식으로 화를 낼 때의 그는 성가시고 다루기가 어렵다. 어떤 말에 어떤 식으로 반응하는지 알 수가 없어서, 그와 자신이 다른 사람이라는 것을 절실하게 느끼게 된다.

 하지만 걱정해주는 거겠지. 타마키는 어느새 고개를 돌리고 창밖을 쳐다보고 있다. 이마며 콧대의 윤곽이 창밖으로 가로등 불빛이 지나갈 때마다 밝아졌다 어두워지기를 반복했다. 소고의 발목은 여전히 그의 다리 위에 올라가 있는 채였다. 화를 내는 것이 다정함과 연결되어 있다니 이상한 일이라는 생각을 하며, 소고는 멀거니 시선으로 그 옆얼굴의 자취를 쫓았다.






 숙소에 도착해서 내리는 것 역시 타마키의 도움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걸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말했으나 씨알도 먹히지 않았다. 쌀포대처럼 들쳐 메지는 경험을 살면서 두 번이나 하게 될 줄은 몰랐다. 거실에서 TV를 보고 있던 리쿠와 미츠키가 놀라 방까지 쫓아 들어오는 것을 보니 부끄럽기까지 했다. "뭔데? 무슨 일인데?" 그렇게 묻는 리쿠에게는 좀 전에 반리에게 했던 설명을 되풀이해줬다. 미츠키가 눈치 빠르게 얼음 주머니를 만들어서 가져왔다. 얼음이 차가워서 뭔가 안심이 됐다.

 괜찮아? 아프겠다. 엄청 부었네. 내일 병원에 가는 게 좋지 않을까? 뭔가 더 필요한 거 있어? 일어나지 말고. 그런 다정한 말들이 오가고, 리쿠와 미츠키가 방을 나서고 나서도 타마키는 여전히 그 자리에 있었다. 괜시리 눈치가 보여 손에 든 얼음 주머니를 만지작거리자 달그락거리는 소리가 난다. 먼저 입을 연 것은 타마키였다. 여전히 좀 볼멘 소리였다.


 "아프지 않았어?"


 그의 말은 언제나 부속품이 하나 둘쯤 빠진 듯 이해하기가 어려웠다. "언제?" "아까, 춤출 때 말야." "아아."


 "일이니까…… 참아야 할 것 같아서. 리허설 다 했는데 갑자기 못하겠어요, 하는 것도 안될 일이고."

 "이상해, 그런 거. 소쨩 표정도 변하지 않았었구."

 "그야 참는 건 익숙하니까."

 "익숙하면 아프지도 않아?"


 소고는 뒤늦게 타마키가 자신의 아픔에 대해서 묻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건 스스로도 되짚어본 적이 없는 일이라 선뜻 대답할 수가 없었다. 아팠나? 아팠던가. 아팠던 걸까.

 그때 문득 떠오른 것은 아직 교복을 입을 때의 기억이다. 중학생 때였던가, 언제 한 번 반에서 독감이 유행한 적이 있었다. 병증은 역시나 그를 피해가지 않았고, 살면서 그렇게나 열이 올랐던 것은 그때가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도무지 학교에 나갈 수가 없어 침대에 누워, 이마에 물수건을 얹고 비몽사몽하는 가운데 누군가가 자신을 내려다보았던 것이 기억난다. 누군가, 가 아니다. 그것은 아버지였다. 눈을 감고 있었는데도 그것을 알 수 있었던 것은 이내 들려온 목소리 때문이었다.

 건강 관리도 제대로 못하는구나.

 목소리는 그렇게 말했다. 그래서 한심하다든가, 안됐다든가 하는 말도 없이 딱 그 말만. 몽롱한 와중에도 그 말의 어조와, 칼로 도려낸 듯 떨어지는 말끝은 기억에 눌러 박은 듯이 남았다.

 그 이후 집을 나올 때까지 오오사카 소고는 앓아누워 본 적이 한 번도 없었다.


 "나는 아팠던 걸까?"


 말이 자연스럽게 흘러나왔다. 입밖에 내고서야 아차, 했다. 그 역시 모호한 질문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타마키는 아랑곳 않은 표정으로 대답했다.


 "그걸 왜 나한테 묻는 거구. 소쨩, 자기가 아픈 것도 몰라?"

 "으음……"

 "소쨩은 바보네."

 "아, 하하, 그럴지도."


 침대 가장자리에 나란히 앉아 있던 타마키가 풀썩 그의 어깨에 머리를 기댔다. 머리카락이 목 언저리에 닿아 간지러운 느낌이 들었다. 소고는 무심코 웃었다. 타마키가 무게를 싣듯 몸을 기울이며 웅얼거리는 소리로 거듭, 말했다.


 "소쨩은 바보야."


 그 목소리에 눌러담긴 짜증이나 걱정 같은 것이 문득, 사랑스러웠다.


 "응, 그러게."


 그가 웃음기 실린 목소리로 대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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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마미츠


 정신을 차려보니 열두 시가 다 되어가고 있었다. 숙소는 그날따라 유난히 조용했다. 소고는 심야 방송의 게스트로 나갔다고 했고, 이오리와 타마키는 학교 시험이 다가와서 (강제로) 일찍 잠에 든다고 말했으며, 나기는 녹화해 둔 애니메이션을 정주행한다고 했다. 그 옆에 끼고 갈 오늘의 희생양으로는 리쿠가 점지되었다. 니카이도 야마토는 손에 든 얇은 대본을 말아쥐며 조용히 복도를 가로질러갔다. 행여나 요란한 인기척을 내서 희생양2가 되는 일은 웬만해서는 사양하고 싶기 때문이었다. 거실의 불은 꺼져 있어 가구들의 윤곽만이 어둑하게 보였다. 유일한 광원은 부엌 식탁 위의 노란 전조등이었다. 그 어렴풋한 불빛 아래에서 누군가가 이리저리 움직이고 있었다. 얼굴을 확인하지 않아도, 그림자의 크기로 누구인지 짐작할 만했다.

 야마토는 구태여 그를 부르거나 말을 붙이는 대신 조용히 다가가 그의 어깨 너머를 내다보았다. 도마 위에 가지런히 썰려 있는 야채들과 큰 냄비. "스튜?" 그렇게 묻자 이즈미 미츠키는 별로 놀라는 기색 없이 대답했다.

 

 "카레야."

 "이 시간에?"

 "나 내일 아침부터 스케쥴 있는걸. 카레 데우는 것 정도는 다들 알아서 하겠지 싶어서."


 "하긴, 바쁠 때는 카레가 최고지." 야마토는 식탁 가장자리에 앉았다. 그는 대본을 살피는 척 고개를 숙인 채로 미츠키가 요리를 하는 것을 지켜보았다. 무언가를 썰고 볶고 꺼내고 집어넣고, 그렇게 바지런히 움직이는 모습을 보고 있는 것은 꽤 즐거웠다. 도와주려면 도와줄 법도 했으나 미츠키는 혼자서 할 수 있는 일은 혼자서 하고 싶어했고, 특히 요리를 할 때는 남의 방해를 받고 싶지 않아하는 것 같았다.

 냄비 안에 루를 풀어넣자 단숨에 익숙한 카레 냄새가 부엌을 메웠다. "아, 배고파지는 냄새."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는데도 빠르게 질문이 되돌아왔다. "야마토 씨, 밥 안 먹었어?" "그러고보니 저녁을 안 먹었네. 아까 촬영장에서 애매한 시간에 밥을 먹었더니." "그럼 지금 조금 먹을래? 이거 거의 다 됐고, 냉동실에 얼려놓은 밥 있으니까." "그럴까."

 어느새 정신을 차려 보니 적은 양의 밥과 막 끓인 카레가 눈 앞에 놓여 있었다. 야마토는 사양하지 않고 숟가락으로 밥을 가득 퍼서 입에 집어넣었다. 음식을 만들어놓은 사람들이 으레 그렇듯 미츠키는 짧은 순간 그의 표정을 살폈고, 야마토는 알기 쉽게 말로 해주기로 했다. "맛있네, 카레." "그래?" "응. 맛있다." 강조하듯이 재차 말하자 미츠키가 턱을 괸 채로 배시시 웃었다. 야마토는 천천히 밥을 먹었다. 조용한 사위와 희미한 불빛, 넓은 식탁에 가까이 붙어 앉아 있는 일이나 작은 소리로 주고받는 대화 같은 것들이 제법 마음에 들었기 때문이었다.


 "평소에는."

 "응?"

 "그, 뭐랄까. 애인…… 이 만들어준 밥을 먹고 있다는 실감이 별로 안 났는데, 지금은 좀 그런 기분이네."


 그 대목에서 미츠키가 몇 번 눈을 깜빡였다. 그가 조금 목소리를 높여 지적했다.


 "왜 애인이라는 말을 그렇게 뜸을 들여 하는 거야?"

 "글쎄……."

 "이상한 데서 부끄러움을 탄다니까, 이 아저씨."


 그 말에는 대답할 만한 말이 없었다. 할 말이 궁색한 대화는 피하는 것이 최적이다. "미츠는 어디 가서 굶어죽지는 않겠어." "그럼, 요리 잘하는 애인이 얼마나 귀한데." ……미츠키에게는 우회하는 것이 잘 먹히지 않는다는 사실을 이렇게 종종 까먹곤 했다. 이제는 반쯤 놀리는 것에 가까운 얼굴로 웃고 있는 그 얼굴을 보고 있자니, 불쑥, 마음 속에서 오기가 머리를 치켜들었다.

 야마토는 숟가락으로 밥과 카레를 푹 떠 미츠키 쪽으로 내밀었다. 미츠키가, 이게 뭐하는 짓이냐고 표정으로 물었다.


 "왜, 애인다운 행동."

 "아저씨, 취했어요?"

 "아닌데. 나 완전 제정신. 아- 해봐. 아-"


 미츠키가 난생 처음 보는 괴상한 표정을 지었으나 야마토는 뻔뻔함을 고수하기로 했다. 약간 손바닥 안쪽이 간지러운 것 같기도 했고, 질색을 하는 것인지 쑥쓰러워하는 것인지 알 수 없는 얼굴로 눈을 굴리는 모양을 보고 있는 것이 즐겁기도 했고, 대체 뭐에 이긴 것인지는 알 수 없으나 아무튼 이겼다는 애매한 승리감도 동시에 들었다. 적당히 그러다가 말려고 했는데, 그 다음 순간 미츠키가 고개를 약간 숙여 숟가락을 입에 넣었다.

 쇠의 표면이 이빨에 달그락거리며 걸리는 느낌까지 이상하리만치 선명하게 느껴졌다. 미츠키가 입에 든 것을 우물거리며 그를 쳐다보았다.


 "……."

 "……."


 그리고 이내 꿀꺽, 삼켰다. 뻔뻔함의 스위치가 내려가자 불현듯 지금 하고 있는 행동들이 엄청나게 낯간지러운 짓이라는 실감이 들었다. 그 실감이 가장 잘 느껴지는 대목은 미츠키의 얼굴이었다. 전조등의 노란 불빛 아래에서도, 그의 얼굴이 이마까지 불그스레해진 것이 눈에 잘 들어왔다. 그들은 서로의 눈을 쳐다보며 잠시 침묵했다. 곧, 미츠키가 오연한 목소리로 물었다.


 "내가 이겼지?"

 "……그래, 그래라……"


 애인을 이겨서 뭐에 쓰려는 건데…… 라는 말은, 하지 않는 쪽이 좋을 것 같았다. 어느새 자정, 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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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도이/ 닫힌 밤



 도이 한스케에게는 오래된 버릇이 있었다. 그는 긴장이 될 때마다 손마디를 하나씩 세었다. 아직 스무 살이 되기 전, 그에게는 긴장할 일이 뼈마디의 개수만큼이나 많았다. 그날의 일도 그 중 하나였다. 풀숲에 숨어서 천천히 숨을 골랐다. 등 뒤에서 부는 바람에 조금씩 호흡을 날려 보냈다. 마치 거기에는 숨을 쉬는 사람 같은 것은 없다는 것처럼. 수리검은 오른손에 쥐었다. 왼손으로는 도드라진 뼈의 골격을 매만졌다. 하나, 둘, 셋, 넷. 엄지가 마디를 하나 넘을 때마다 바짝 들떴던 숨결이 조금씩 가라앉는다. 도망칠 수 있다, 라는 생각이 막 들었을 때였다.

 눈이 마주쳤다.

 몸을 일으키자 나뭇잎들이 우수수 쏟아지는 소리를 냈다. 곧장 발을 뒤로 빼고 달리기 시작했다. 바람이 살갗에 스치는 감각으로 뒤에서 쫓아오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어깨의 상처가 요란하게 욱신거렸다. 일을 하다 보면 추이를 예상하는 실력만 늘어간다. 곧 죽을 것이다, 라고 생각한 동료가 오랫동안 살아 있었던 적은 없다. 그런 생각이 자신의 일이 되자 턱 아래가 싸르르해졌다. 죽는다. 죽을지도 모른다. 언제나 그런 예감들을 넘나들며 살아왔다.

 숲이 끝나는 지점은 절벽이었다. 반사적으로 걸음이 멈췄다. 도이는 한 번 뒤를 돌아보았다. 죽는다, 죽을지도 모른다. 죽음은 항상 망설이는 순간에 찾아온다.

 그는 숨을 참은 채로 아래로 뛰어내렸다.






 그 뒤는 예상하지 못한 일이었다. 자신이 얼마나 운이 좋았는지를 알고 있다. 야마다 씨는 상냥한 사람이었다. 그의 부인도 그러했다. 다만, 리키치는 자신에게 조금 화가 난 것 같았다. 아주 단순하고 간명한, 어린아이의 심술이었다. 그런 나이대의 아이를 대하는 것은 아주 오래간만이어서 조금 낯선 기분이 들었다. 그가 몇 해를 살아온 세상에는 아이들이 적었다. 집이라는 공간도 없었다. 가족은 더더욱 드물었다. 밤이면 등불을 켠다. 다른 사람의 숨소리를 들으며 잠에 든다. 따뜻한 물에 목욕을 한다. 장지문 너머에서 바람 소리를 듣는다. 제때 밥을 먹는다. 그런 당연한 일들이 당연하다는 것을, 오래 잊고 있었다.

 리키치는 과연, 어린아이들이 흔히 그렇듯이 뚜렷한 계기 없이도 화를 풀었다. 그는 어느 순간부터인가 조금씩 도이의 뒤를 쫓아다니기 시작했다. 상처가 나아가는 시점부터 도이는 자잘한 집안일들을 돕고 있었다. 우물에서 물을 긷고 있으면 뒤에서 나직하게 휘파람 소리가 들렸다. 돌아보면, 모르는 척 뒷짐을 지고 삭은 나뭇가지 같은 것을 뚝뚝 부러트리느라 바쁘다. 그런 일이 몇 번이나 반복되었다. 왜 그러는 걸까요, 하고 어색하게 묻자 야마다 부인은 웃었다. 형 같이 느껴지는 건가 보죠. 아버지도 아니고 제 또래도 아닌, 성인 남성을 대면하는 것이 처음인가보다 했다. 나이 터울이 많이 나는 형제는 이런 느낌인 걸까. 실없는 감상을 가질 수 있을 만큼 마음이 여유로웠다.

 리키치에게 그의 버릇을 알려준 것은 우발적인 일이었다. "수리검을 던질 때마다 자꾸 손이 엇나가는 기분이 들어요." 그런 상담을 들어줄 정도로 친해졌을 무렵이다. "너무 긴장하는 것 아니야?" "어떻게 하면 긴장하지 않을 수 있는지 모르겠어요." 그래서, 아직 결이 고운 어린 손을 매만지며 그 버릇을 알려주었다. 습관이 들면 긴장하지 않을 수 있을 거야, 익숙해지면 괜찮아, 하는 말을 하면서.

 그런 계절이 있었다.






 교장선생님의 명령으로 조사를 나간 지역에서 리키치를 마주친 것은 우연이었다.

 눈에 띄지 않는 차림을 하고 있었지만 변장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알아보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나무를 숲에 숨기는 것처럼, 사람을 숨기기 위해서는 사람들 속이 가장 좋다는 것은 이해하기 쉬운 법칙이다. 도이가 리키치를 본 것은 근 반 년 만의 일이었다. 시장바닥에는 사람들이 물건을 주고받고 흥정하는 소리가 왁자했다. 생선이, 빗이, 사과가, 새로 들어온 천이, ……. 그런 소리들 속에서 시선이 빠르게 오고 간 순간 도이는, 마지막으로 그를 본 게 어떤 때였더라, 하고 떠올렸다. 잘 기억이 나지를 않았다.

리키치는 눈이 마주치고도 표정이 변하지 않았다. 조금 피곤한 듯 보였다. 아니, 그것보다도, 뭔가. 도이는 그 얼굴이 낯설다고 생각했다. 최근 뜸했다고는 해도 몇 해를 보아온 얼굴인데 낯설다니 이상한 일이었다. 더 이상한 것은, 낯설면서도 어딘가 낯익다는 것이다. 그것이 야마다 리키치의 얼굴이기 때문이 아니었다. 애매하고 껄적지근한 기시감이었다. 그 익숙함에 소스라치듯이, 도이는 고개를 돌려 멀어지려는 리키치의 옷자락을 쥐었다.


 "사토, 군."


 일부러 다른 이름으로 부르자 반 박자쯤 어물거리던 리키치가 뒤따라 천연덕스럽게 웃었다. 언제 어떤 식으로 누구를 마주칠지 모르니 사람 많은 곳에서 흔적은 숨겨두는 것이 좋다는 것을 서로가 안다. "아, 이런데서 마주치네요." "응. 군은 무슨 일이야?" "뭐, 아시잖아요. 선…… 그쪽도?" "그렇지, 뭐." 몇 마디 말을 나누는 사이 수레가 그들 뒤를 스치고 지나갔다. 발걸음을 길 가장자리로 물렸다. 리키치가 손바닥으로 제 눈가를 한 번 눌렀다. 눈을 깜빡이는 속도가 느리다.


 "묵을 곳은 있고?"

 "아직이요."

 "흠."


 말끝의 정적이 어색하다. 이런 사이였던가, 생각해보면 사람과 사람이 멀어지는 것은 순식간이니 반년이면 어색해지기에 차고 넘칠 만한 시간일지도 모른다. 그렇게 생각하자 더욱 이상한 기분이 들어 침을 한 번 삼켰다. "그러면 같은 곳에 묵을래? 방을 같이 쓰면 돈이 절반이라서 좋잖아." "키리마루 같은 소리를 하시네요." 익숙한 이름이 나오자 왠지 안심이 되었다.


 "그래서 싫어?"

 "아뇨, 싫다는 얘기는 아닙니다." 대답이 빨랐다.






 겨울의 해는 이르게 진다. 방은 가장자리부터 새파랗게 어두워졌다. 일찍 저녁을 먹고 방에 들어왔다. 조금 더 밖이 어두워지기를 기다리는 것이다. 닌자의 일은 낮이 아니라 밤에 시작되기 때문이다. 잠깐이라도 눈을 붙일까, 생각했지만 리키치는 피곤한 낯빛과는 달리 잠을 청할 생각이 없어 보였다. 그는 문 쪽에 앉아 고개를 돌리고 있었다. 옅은 어둠 속에 희미하게 드러난 턱 선이 말라 보였다. "살이 빠졌어?"하고 묻자, "잘 모르겠어요."하는 대답이 돌아왔다.

 벽에 기대어 세워둔 화승총을 쳐다보다가 시선을 돌렸다. 대화는 드문드문 끊이지 않고 이어졌다. 최근의 날씨 이야기부터 시작해서 주변 사람들의 근황으로 흘러간 말들은 결국 일에 대한 얘기로 한데 모였 다. 리키치는 서두르지 않는 말씨로 입을 열었다.


 "산을 넘어서 왔는데…… 그 와중에 두 명이 죽었어요."


 장작 개수를 세듯이 손가락을 꼽아본다.


 "원래는 세 명이었어요. 한 명은 잠을 잘못 자서 동사했고…… 나머지 한 명은 활에 맞았어요. 독이 발라져 있었던 것 같아요. 너무 빨리 죽었거든요."

 "리키치 군은?"

 "저는 겨울 산에는 익숙하니까요."


 둘은 동시에 호뇨센을 떠올렸다. 겨울이면 얼음이 잘 녹지 않아 산길을 내려갈 때마다 덧신을 신어야만 했다. 어린 리키치는 제법 산을 잘 탔다. 산에서 나고 자랐으니 당연한 일이다. 눈이 녹은 자리만을 골라 짚어 걸어가는 발자국을 따라 걸으면 넘어질 일은 없었다. 불현듯 대화가 멈추고, 도이는 그 겨울을 떠올렸다. 그가 회상한 것은 그들이 같이 보낸 겨울이다. 도이는 아직 선생님이 아니었고, 리키치는 그의 허리께까지밖에 오지 않던 시절이 있었다.

 문득, 도이는 무언가를 깨달았다. 그는 다시 한 번 차근히 리키치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표정이 적은 낯이었다. 오랜 물살에 마모되어 둥글어진 조약돌과 같았다. 도이는 사람의 안에도 닳아 없어지는 것이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 겨울의 그가 그러했었다. 그리고 또, 그가 그랬듯이, 지금의 리키치도 그러하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모르려야 모를 수가 없었다. 갑자기 입 안쪽이 따끔했다.


 "그러면 안 돼, 리키치 군."


 자신의 손끝을 보고 있던 리키치가 고개를 들었다.


 "죽음에 대해서, 그렇게 아무렇지도 않게 말하게 되면 안 돼."

 "……예의 같은 걸 따질 처지는 아니잖아요."

 "나는 지금 예의 얘기를 하는 게 아니야."


 방 안은 어느새 깜깜해져서 서로의 표정을 알아보기가 어려워졌다. 도이는 허공을 마주보고 있는 것 같이 갑자기 막막해졌다. "익숙해져서는 안 되는 것들이 있잖아." 돌을 깨문 것처럼 입 안이 아렸다. 말이 아니라 자갈을 뱉어 놓은 것 같았다.

 한참을 침묵이었다.


 "……하지만 어떻게 익숙해지지 않을 수가 있죠?"


 대답은 어둠 속에서 돌아왔다. 도이는 순간 숨을 참았다. 말보다 침묵이 더 많은 말을 한다. 열 몇 살 무렵의 도이는 그런 질문에 대답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에게도 죽음이 너무 쉬웠던 시절이 있었다. 밥을 먹는 횟수보다 사람이 죽는 것을 보는 횟수가 더 많던 계절도 있었다. 익숙해지지 않으면 지나가지 않는 밤들이었다. 하지만 리키치에게는 부모도, 친구도, 동료도 있었는데.

 그런데 어쩌다가 이렇게 되었는가.

 질문에 대한 답은 점점 더 깜깜해졌다.

 정적이 방의 구석구석을 빠듯하게 메웠다. 아주 오랜 시간이 지난 것 같았다. 리키치가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났다.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리더니 이내 미닫이문이 열렸다가 닫혔다. 빈 바닥이 얼음처럼 차가웠다. 도이는 리키치가 떠났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인사조차 없었다는 사실이 문득 서러워질 쯤, 리키치는 다시 돌아왔다. 장지문에 불빛이 먼저 희끄무레하게 비쳤다. 그는 손에 어디서 가져온 것인지 모를 등불을 들고 있었다. 아마 집주인에게 받아온 것일 테다.

 리키치가 방으로 들어왔다. 그는 등불을 방 한중간에 내려놓았다. 그때 아직 열려 있던 문틈으로 바람이 불었다. 불빛이 요란하게 흔들리면서 그의 얼굴에 번졌다. 빛 그림자가 눈가에 일렁인다. 마치 눈물 자국 같다.


 "왜 울어요?"


 도이는 그제야 자신이 울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손바닥으로 눈가를 훔쳤다. 손가락 사이가 금세 축축해졌다. 도이는 조용히 울었다. 눈물은 쉽게 멈추지 않았다. 닦아내도 닦아내도 지워지지 않는 얼룩 같다. 그들의 삶을 구성하는 모든 것이 그러하다.


 "네가 울지 않으니까……."


 그 말에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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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사카즈/ 안과 바깥



 "카즈마 군, 같이 수족관 가지 않을래?"


 그 말을 듣고 카즈마는 이번이 정확하게 네 번째구나, 하고 생각했다.

 언제가 처음이었냐하면 아마도 열흘 전 쯤이다. 카즈마는 그날 손가락을 다쳤다. 무심코 문틀에 손을 짚고 있다가 바람이 불었고 문이 쾅 닫혀버린 탓에 손가락에 금이 갔다고 했다. 병원에 가보니 다친 곳은 중지와 검지였고, 전치 2주가 나왔다. 다행히도 왼손이었지만, 카즈마가 다행의 디귿 자도 꺼내지 못할 만한 얼굴을 하고 있어서 아무도 그런 말을 하지는 못했다. "카즈마 군 탓은 아니잖아. 사고인걸." 아사히는 그렇게 말했지만 별로 카즈마에게 와닿지는 않은 것 같다. 컨디션 관리는 최우선, 기타리스트로서 자부심도 높고 자존심도 센 카즈마에게는 스스로의 신념에 어긋나는 일일테다. 그 때문에 잡혀 있었던 에덴에서의 공연도 미뤄지게 됐으니 나쁜 일이 나쁜 일을 불러온 격이었다. 사에가 마스터에게 공연을 취소해야할 것 같다고 전화 거는 것을 들으면서, 요시무네는 조용히, 카즈마에게 들리지 않을 정도로, 카즈맛치가 이렇게 풀이 죽어 보이는 것은 처음이라고 말했고 아사히는 말없이 동의했다.

 기타 없이 연습이 제대로 될 리도 없으니 자연히 일정에 숭숭 구멍이 뚫렸다. "혹시나 해서 말하는 건데, 괜찮은 것 같다고 기타 건드리거나 그러면 안돼. 알았지? 덧나면 낫는 데 한참 더 걸린다고." 사에가 엄격한 얼굴로 덧붙였고 카즈마는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였지만 그 찜찜하고 화가 난 듯한, 그러면서 한편으로는 맥아리 없어 보이는 옆얼굴이 아사히는 마음에 걸렸다.

 그로부터 며칠 동안 카즈마는 난생 처음으로 시간이 느리게 지나간다는 것을 느꼈다. 다들 무언가에 열중하고 있으니 깨닫지 못할 뿐이다. 누군가는 공부에 집중하고, 누군가는 열렬히 연애를 하고, 누군가는 부활동에 온 힘을 다하면서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비어 있는 시간을 충족시키기 위해서, 무언가를 하고 있다고 느끼기 위해서 누구나 아등바등한다. 카즈마에게는 기타가 그런 것이었는데, 퍼즐의 한쪽 귀퉁이를 빼낸 것처럼 그 부분을 빼내고 나니 나나세 카즈마라는 그림은 완전하지 못하게 되었다. 시간과 체력이 모조리 붕 떠 버려서 얼떨떨했다. 이럴 때 시간을 보낼 만한 다른 취미생활 하나 없다니 나도 참 지루한 사람이라고, 스스로가 그렇게 느껴지는 것마저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래서 부러 작곡에 열을 쏟았지만 하지만 한 번 뿔뿔이 흩어진 집중력은 쉬이 돌아오지 않아서, 사흘 째 되는 날 밤 마침내 펜을 아무렇게나 던져버렸을 때는 이미 잔뜩 짜증이 나 있는 상황이었다. 침대에 머리를 처박듯이 눕자 스프링의 반동으로 몸이 조금 떴다가 다시 가라앉았다.

 천장을 올려다보자 전등의 불빛이 희었다. 눈을 감을 때마다 둥근 전등 모양으로 잔상이 붉게 남아서 깜빡, 깜빡 느리게 눈을 깜빡였다. 사지에 힘을 빼고 있자니 점점 더 몸이 아래로 가라앉는 것 같았다. 이런 기분을 뭐라고 부르더라. 어디선가 분명, 읽었던 것 같은데. 아니었나, 영화 대사에서 나왔던가, 아무튼. 아, 그래, 아마도 무력감…… 이었지.

 …….

 그때 문득, 전화가 왔다.

 어디선가 진동 소리가 들리는 것 같은데, 핸드폰을 아무렇게나 내버려둔 탓에 찾는 데 한참이 걸렸다. 침대 매트리스와 벽 사이에서 핸드폰을 끄집어내고 액정을 보자 익숙한 이름이 떠 있었다. 무슨 일이지 싶어 곧장 전화를 받았다. "왜?" 그러자 수화기 너머에서 짧게 웃는 소리가 들렸다. "뭐야, 왜 웃어." 퉁명스럽게 말하자 조금 멋쩍은 듯한 대답이 돌아왔다. [아, 아니 아니, 그냥. 카즈마 군은 전화 받는 것도 카즈마 군 답구나 싶어서……] "그래서, 왜? 연습 있던 건 다 취소되지 않았나." 그렇게 물으며 카즈마는 몸을 돌려 모로 누웠다. 아사히가 음, 하고 목을 길게 끌었다. 무슨 말을 하려나 싶어 가만히 듣고 있었는데,


[……있잖아 카즈마 군, 유원지 좋아해?]

"뭐?"


 아사히는 예상하지 못한 질문을 했다.

 그러니까 그게, 시작이었다.






 카즈마는 유원지를 좋아하지 않았다. 영화관이나, 플라네타리움이나, 게임센터 같은 곳도 별반 다르지는 않았다. 그런 곳에는 언제나 사람이 많아서, 남들과 똑같은 것을 보고 똑같은 일을 하고 있으면 자신도 그런 별 볼일 없는 관중들 중 한 사람이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어렴풋이 들곤 했다. 그런 식의 남는 것이 없는 즉흥적인 자극은 그에게 말 그대로 '시간을 때운다' 이상의 의미를 가지지 못했다. 아, 그런데도, [남는 표가 있어서 말이야.] 하는 뻔한 거짓말을 극구 거절하지 않은 것은 이유를 잘 모르겠다. 카즈마는 한 손에는 카라멜 팝콘을 들고 머리에는 동물 머리띠를 하고 있는 스스로가 참을 수 없이 멍청하게 느껴졌다. 그는 지금 음료수를 사러 간 아사히를 기다리고 있는 중이었다. 사이 좋아 보이는 커플이 팔짱을 꼭 끼고 리본 머리띠를 한 채로 조형물 옆에 서서 사진을 찍는 것을 지켜보고 있자니 낯설다 못해 어색해서 발바닥이 간지러웠다.


 "사람 많네ㅡ 여기!"


 아사히가 그의 뒤에서 나타나 이온 음료와 콜라를 동시에 내밀었고 카즈마는 이온 음료를 받아들었다. 아사히가 아차, 하는 얼굴로 그의 손에서 다시 음료수 병을 뺏어서 제가 직접 병뚜껑을 땄다. 그 모습을 보고 있자니 어쩐지 입이 타는 것 같아서 한꺼번에 들이키자 단숨에 반이 비었다. 아사히가 쓰고 있는 흰색 토끼 머리띠는 그에게 지나치게 잘 어울려서 오히려 기묘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아사히가 바지 뒷주머니에 넣어뒀던 유원지 팜플렛을 꺼내들었다. "다음에는 뭐 탈까?" 아사히가 회전목마나, 관람차나, 롤러코스터 같은 것들을 쭉 열거하는 내내 카즈마는 찌푸린 표정으로 대답을 않았다. 아사히가 서서히 입을 다물고는 눈만 들어서 그를 흘끗, 쳐다보았다. "별로야?" 아사히가 물었고, 카즈마는 잠시 생각하다가, "넌 이런 게 즐거워?"라고 되물어보았다. 싫은 내색을 고스란히 드러내기에는 이런 곳인줄 모르고 온 것도 아니고, 약간은 완곡하게 비꼬는 말이었는데 아사히는 그 말을 듣자마자 생글생글 웃었다.


 "나는 카즈마 군이랑 있으니까 즐거워."


 오오토리 아사히는 그런 말을 너무나 쉽게 했다. 아첨이나 거짓이라면 조금 더 어려웠을 텐데 그렇지가 않았다. 카즈마는 순간 화끈해진 귓불을 저도 모르게 손으로 가렸다. 그때 한 무리의 여중생들이 교복을 입은 채로 왁자하게 떠들면서 그들 옆을 스쳐지나갔다. 소란스러웠고, 마음이 더 소란스러운 것 같았다. 카즈마는 그네들을 쳐다보는 척 따라 고개를 돌리면서 슬그머니 대답했다.


 "……나는, 롤러코스터가 나을 것 같은데."


 아사히가 웃음을 참는 소리가 얼핏 들려서 어쩐지 부끄러워졌다.


 매번 그런 식이었다. 카즈마가 못내 내켜하지 않으면서도 거절하지는 않으니까, 아사히는 조금씩 조금씩 더 짧은 빈도로 그에게 전화를 걸었다. 영화 보지 않을래? 라든가, 역 앞에 게임 센터가 있던데, 라든가, 어제 TV에서 별자리에 대한 다큐멘터리를 하더라, 라든가…… 카즈마는 그때마다 할 일이 없었고 거절할 이유도 찾을 수가 없었다. 이건 아마도 배려라는 거겠지. 영화관을 나와 그럭저럭 재밌지도 재미없지도 않았던 영화의 포스터를 들여다보면서 카즈마는 그렇게 생각했다. 아사히는 나나세 카즈마가 어떤 사람인지 잘 알고 있는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니 뭔가…… 속을 읽힌 기분이 드는 반면 더 거절할 수가 없었다.







 세 정거장 떨어진 곳에 있는 수족관은 그가 생각하던 것보다 규모가 컸다. 날씨가 좋아서 역에서 내려서 조금 걷다보니 땀이 나는 것 같았다. 드문드문 서 있는 가로수의 윤곽이 저 멀리 있는 것까지 또렷하게 눈에 들어왔다. 카즈마는 눈을 가늘게 뜨고 흰 외벽의 수족관 건물을 올려다보았다. 지은 지 고작 3년 밖에 되지 않았다는 얘기를 아사히가 했던 것 같다. 평일 오후여서 그런가 사람이 적은 점이 마음에 들었다. 회전문을 타고 건물 안으로 들어가자 해가 가려져서 조금 서늘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카즈마는 곧장 매표소로 걸어가는 아사히의 옷자락을 잡았다. "왜?" "오늘은 내가 낼테니까. 너, 그렇게 돈 많지도 않잖아?" 용돈 다 떨어졌지? 하고 덧붙여 묻는 말에 아사히가 앗, 하고 조금 어색한 표정을 지었다. "들켰네……"

 두 장의 표를 흔들면서 입구로 들어섰다. "펭귄, 펭귄이다." 오른쪽을 보며 대뜸 외치는 아사히의 목소리에 철창 너머의 사육사가 손을 흔들어줬다. 아사히가 손을 마주 흔드는 것을 보며, 넉살도 좋네, 라고 생각하다가 고개를 돌렸다. 물범도 있네. 물범이 아니라 물개 아냐? 그런가, 얼굴은 의외로 귀엽게 생긴 것 같아. 생각보다 작은데…… 그런 실없는 대화를 하며 천천히 걸었다. 이내 양쪽으로 수조가 늘어선 곳으로 들어가자 통로가 조금 좁고 어두워진 것처럼 느껴졌다.

 동그랗고 새파란 수조 속에 들어 있는 해파리를 보았다. 거대한 가오리나, 흰동가리나 산호 같은 것들을 바라보다보니 점점 말수가 줄어들었다. 물 속에서 모든 것들은 조용히, 그리고 서서히 움직였다. 마치 다른 세상에서 온 것처럼. 아사히의 얼굴 위에 물빛이 번져서 푸르고 투명하게 물들었다. 카즈마는 종종 그의 옆얼굴을 곁눈질했다. 눈앞에 있는 것에 온전히 열중하는 그 표정이 어린아이 같다. 왜 이런 표정을 지을 수 있는 걸까, 하고 생각하게 된다.

 안으로 들어갈 수록 사람이 점점 더 적어졌다. 문득 정신을 차렸을 때는 아사히와 카즈마 둘 뿐이었다. 그들은 흰고래가 들어 있는 대수조 앞에 서 있었다. 아사히가 탄식처럼 중얼거렸다. "엄청 크다." 그 말을 들은 것처럼, 고래가 천천히 유리창 쪽으로 물살을 밀어내며 그들 앞으로 다가왔다. 마치 유리창에 머리를 들이박을 것처럼 다가와서는, 몸을 돌려 그들을 지나쳐갔다. 아사히의 이마에 푸른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카즈마는 그 얼굴에서 그림자가 서서히 거둬지는 것을 지켜보았다. 아사히가 문득 카즈마 쪽으로 약간 몸을 붙였다. "이렇게 큰 걸 보고 있으면 어쩐지 조금 무서워지는 것 같아." 어깨가 맞닿았다. 수조가 아니라 그의 얼굴을 보고 있었다는 것을 들킨 것만 같은 기분이 되어 고개를 돌렸을 때, 유리창에 비친 자신의 얼굴을 보았다. 유리 너머의 나나세 카즈마는 어딘가 이상한, 조금 들뜬 것도 같은, 한 번도 본 적 없는 것 같은 표정을 짓고 있었다.


 오늘은 한 번도 기타에 대한 생각을 하지 않았다는 것을 문득 생각했다.


 갑자기 심장이 뛰었다. 쿵, 쿵, 쿵, 쿵, 하고. 달리기를 하거나 공연을 한 직후와는 아주 다른 느낌이었다. 마치 처음 가는 곳에서 길을 잃었을 때나 버스를 잘못 탔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 같은 감각이었다. 카즈마는 또 다시 생각을 했는데, 그러니까 이런 걸 뭐라고 부르더라, 하고, 어디선가 읽었던 적이 있었던 것 같은, 예전에 들춰 봤던 소설책에서, 아니면 영화에서, 아마도 이런 것을,

 불온하다, 라고 부르는 것 같았는데.

 그렇게 생각한 순간 카즈마는 고개를 똑바로 들었다. 몸을 조금 물리자 맞닿아 있던 어깨가 떨어졌다. 아사히가 그를 돌아보았다. 


 "……나 갈래."

 

 "어?" 아사히가 그를 붙잡기도 전에 그는 물 속에서 움직이는 것처럼 스르륵 그 자리에서 빠져나와 길을 되짚어 갔다. 아사히가 뒤에서 그의 이름을 부르는 소리가 들렸지만 걷는 속도를 늦추지 않았다. 제법 복잡한 길을 거슬러가는 내내 걸음은 점점 빨라졌다. 아마도 아사히는 그를 쫓아오고 있을 것이다. 카즈마는 스스로 도망치고 있다는 것을 인지했다. 이런 것은 이상하다. 도망치는 것도 잊어버리는 것도 모두 자기자신 답지 않다. 하지만 지금은 도망치지 않으면 안된다. 왜 그렇게 느껴지는지 제대로 생각할 틈도 없이 다시 회전문을 돌아 바깥으로 나왔을 때는 여전히 날씨가 좋았고 해가 쨍해서 눈이 부셨다. 어쩐지 눈을 제대로 뜰 수가 없어 손바닥으로 눈을 비볐다. 눈꺼풀 안쪽에서 자꾸만 푸른 잔상이 번쩍거려서 난생 처음으로, 세상이 너무 밝은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약 4300자

나나세 카즈마 어른이 되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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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밀글 입니다.

아사카즈/ 여름의 시작


* 여기서(http://tarde0420.tistory.com/71) 이어져요

* 소재재공 불순님 ㄳㄳ





 카즈마一真라는 이름은 어쩐지 확고한 진실, 혹은 태도 같은 것을 말하고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고, 아사히는 처음 그의 이름을 보았을 때 생각했다. 흔한 이름이었으므로 유난할 것도 없었지만 왜 다른 한자도 아니고 그 한자였을까. 어쨌거나 그 이름은 그에게 무척이나 잘 어울렸다. 그와 요시무네와 미사토는 처음부터 서로를 이름으로 부르고 있었으므로 카즈마를 초면이라거나 나이가 많다는 이유만으로 나나세 씨, 라고 부르는 것은 그를 외따로 두는 것만 같았다. 그래서 미처 거리감을 좁히기도 전에 이름을 부르는 일이 먼저 다가왔다. 카즈마 군, 이라고 어색하게 입을 떼자 카즈마는 무뚝뚝한 표정을 지으면서도 저어하지는 않았다.(그 뒤에 요시무네가 카즈맛치, 라고 부르자 확실히 얼굴을 구기기는 했다.)


 처음 만났을 때의 일을 떠올린 것은 그에 대해서 생각하는 시간이 길어졌기 때문이었다. 마치 점점 길어지는 낮처럼, 혹은 늦은 오후의 그림자처럼, 더 길어질 수가 없다고 생각했는데도 한없이 길어졌다. 덕분에 지루할 정도로 하루가 길었고, 지루하게 느껴지는 이유는 아마도 몇 주 전ㅡ어쩌면 몇 달 전에 흐지부지하게 끝난 대화 탓이기도 할 것이다.

 여름의 초입에서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다.

 손에 들고 있던 음료수 병이 미지근해졌다는 사실을 조금 나중에야 알아차렸다. 손에 힘을 줘 병뚜껑을 비틀자 따각 소리를 냈다. 역시나 내용물도 미지근해져 있었다. 그래도 벌컥벌컥 마셨다. 한참 뒤에나 올 것 같았던 여름이 바로 문밖에 서 있는 것 같다. 급하게 꺼내 입은 반팔 티셔츠 아래의 팔뚝이 어색했고, 갑작스럽게 한층 더 밝아진 시야가 어색했다. 그 갑작스러운 계절의 변화처럼, 생각은 간헐적으로 찾아왔다.

 옅은 어둠에 묻힌 그의 얼굴이 당혹감에 물드는 것을 지켜보는 심정은 조금쯤 비참했다. 그 표정은 미처 몰랐다, 기보다는 올 게 왔다, 라는 느낌에 더 가까웠다. 그때 붙잡고 있던 카즈마의 손에서 문득 힘이 풀릴 뻔했던 것을 기억하고 있다. 그는 손을 놓는 대신 다른 쪽 손으로 얼굴을 세게 한 번 문지르고는, 고개를 숙였다가, 한참 뒤에 다시 들었다. 카즈마가 그런 상황을 쉽사리 넘길 수 있을 정도로 처세가 좋지는 않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 순간에 그런 생각을 한 스스로가 얌체 같아서 부끄럽기도 했다.

 그래서 어떻게 되고 싶다거나, 무엇을 하고 싶다거나, 그런 생각으로 한 말은 아니었는데, 카즈마는 묻지도 않은 일에 대답을 찾는 데 필사적이다가 이내 실패한 것처럼 보였다. 한참 말이 없던 그가 입술을 세게 깨물었다. 그는 곧 뱉어내듯이 대답했다.


 ……내려가자.

 그리고는 끝이었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끝은 아니었는데, 아사히가 상상할 수 있는 최악의 상황이 되기는 했다. 카즈마는 그에게 이전보다 더 데면데면하게 굴었다. 워낙에 행동거지가 살갑지 못하니 과하게 티가 나진 않았지만 티가 안 나지도 않았다. 새로 쓴 곡의 악보를 넘겨줄 때, 문득 맞닿은 손끝에서 후두둑 떨어지던 종이뭉치나 눈이 마주치면 기묘할 정도로 빠르게 고개를 돌리던 순간들을 떠올리면 딱 죽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겨우 이런 걸로 죽고 싶어해서 죄송해요 엄마 아빠 하느님. 이런 상황을 예상하지 못했던 것도 아닌데 막막한 것은 어쩔 수가 없다.

 그런데도 왜 고백 같은 것을 했을까…… 후회하는 마음이 하루에도 열댓 번씩 물컥물컥 올라왔지만 어쨌거나 그건 스스로 자초한 일이었다. 그래도 말하고 싶었다. 말하고 싶었다는 마음이 나쁜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냥…… 그랬다. 카즈마를 생각하다보면 생각이 길어지고 길어진 생각이 그를 구성하는 일부가 되고, 그 일부가 다시 카즈마를 생각하곤 했다. 그러다보면 자신의 안에서 점점 그를 좋아하는 마음이 커져서 이것이 더 이상 떼놓을 수 없는 한 부분이 되었구나, 라는 생각이 들자 그냥 말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 생각이 처음 든 것은 겨울이었는데, 당장은 겁이 나서 얼결에 봄이 되면, 날이 따뜻해지면, 라고 정해버린 것이다. 봄이 되면 조금은 더 낭만적인 상황 속에서 가능성도 있지 않을까……그랬다. 다시 생각해보니 웃기는 얘기이다.

 아사히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놀이터 가장자리의 벤치에 앉아 있었는데 어느새 정신을 차려보니 놀이터에는 아무도 없었다. 빈 플라스틱 병을 쓰레기통에 버리고 무릎을 한 번 굽혔다가 폈다. 여기 근처에는 어느 건물이 제일 높더라…… 허공을 천천히 걸어다니는 것은 어렸을 때부터 생각이 많아지면 하던 습관 같은 것이었다. 아무도 올 수 없는 곳, 아무도 볼 수 없는 곳에 있다는 확신이 들면 어쩐지 기분이 차분해졌다. 생각이 많아질 수록 몸은 점점 더 쉽게 떠올랐다. 

 여름의 낮은 길고 지리하고, 앞으로 더 길어질 일밖에 남지 않았다. 아사히는 생각들을 떨쳐내듯 운동화 뒷굽으로 아스팔트 바닥을 박차고 어딘가로 달리기 시작했다.







"어쩌다 이렇게 됐지."


 소리 내어 말해보았다. 그가 뱉어낸 중얼거림은 마치 처음부터 없었던 것처럼 허공으로 녹아들어 사라졌다. 최근 들어서는 이런 생각을 많이 하게 된다고, 아사히는 곱씹었다. 그런 태평한 생각을 하고 있을 상황은 아니었지만 현재가 난해할 수록 도피를 하게 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아사히는 파랗게 깜깜해진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아래쪽으로 갈 수록 네온사인의 불빛에 반사되어 한밤중인데도 하늘이 푸르스름하게 밝았다. 이렇게 높이 올라왔는데도 더 높은 곳이 있다는 사실이 난생 처음으로 조금 막막해졌다.

 그는 최소한, 걸음마를 떼게 된 이후부터 허공에 뜨고 내려오는 법을 까먹은 적이 없다. 숨을 쉬는 것이 누군가 알려줘서 되는 일이 아닌 것과 비슷했다. 그와 비슷한 체질을 가지고 있던 그의 부모님도 그에게 딱히 뭔가를 알려주려고 한 적은 없었다. 그래도 지금 전화 정도는 받았으면 좋겠는데, 안 그래도 높은 곳에 있어서 전파도 잘 터지지 않는데 수화기 너머는 묵묵무답이다. 거의 세 시간 전에 온, 네가 통 집에 오지 않으니 우리끼리 외식을 하러 가겠다, 는 문자를 보자 절망스럽기까지 했다.

 아사히는 발을 아래로 쭉 뻗어보았다. 그가 몇 시간 전까지 발을 딛고 있던 건물의 옥상이 까마득하게 내려다보였다. 중력이라는 것은 대체 무엇일까. 알고 있었던 것을 까먹은 것은 왜일까. 아래로 내려가고 싶은데 몸은 좀처럼 무거워지지 않았다. 그가 헛되이 발을 허우적거리는 동안에도 몸은 점점 더 떠오르는 것 같았다. 생각이 많아서 그래. 마치 바람을 불어넣으면 부풀어오르는 풍선처럼…… 그래서 그래. 초등학생 때인지 중학생 때인지, 풍선을 한없이 위로 띄워 올리면 하늘 어디에선가 터져버린다는 얘기를 들었던 것이 생각나자 갑자기 조금 무섭고, 슬퍼졌다.

 그는 핸드폰을 손에 쥔 채 몸을 웅크렸다. 이와중에도 그는 카즈마를 생각하고 있었다. 무섭거나, 슬프거나, 외롭다거나……그런 걸 말하고 싶은 상대는 한명 밖에 없다. 손이 통화버튼 사이에서 헛돌았다. 지금쯤이면 그는 아마 책상 앞에 앉아서 음표들과 씨름하고 있을 것이다. 아니면 기타를 들고 어디 노래방 같은 데에 갔을지도 모른다. 아니면, 예상할 수 없는 무언가를 하고 있을지도…… 그것은 정말로 전화를 해보기 전까지는 모르는 일이다. 아사히는 통화 버튼을 길게 꾹 눌렀다.

 카즈마는 수화음이 열두 번이나 울릴 때까지 전화를 받지 않았다. 아사히는 그가 전화를 받지 않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전화를 받을 수 없는 상황일지도 모르겠지만, 나쁜 상상을 하는 쪽이 조금 더 쉬웠다. 하지만 수화음이 끊기고, 여보세요, 하는 반쯤 잠긴 듯한 목소리가 들리자 그런 상상이 무색할 정도로 반가워졌다. "카즈마, 군." 부르자 잠깐의 침묵. "왜? 무슨 일인데."

 껄끄러운 목소리로도 부러 무슨 일인데, 하고 물어오는 말이 상냥하게 느껴지는 것은 스스로가 그를 그런 사람으로 생각하고 있어서인지, 아니면 그가 정말로 그런 사람이어서인지는 잘 모르겠다. 아사히는 수화기에 입을 바짝 대고 속삭이듯이 대답했다. "카즈마 군. 나 지금……" 내려오는 걸 잊어버려서 말이야, 곤란해졌어, 그렇게 말할 수도 있었을 것 같은데 정작 나온 것은 다른 말이었다.


"무서워."

"뭐가?"

"카즈마 군한테 영영 미움받을까봐."


 그 말에, 카즈마가 너무 대답을 하지 않아서 아사히는 몇 번이나 휴대폰 화면을 확인해야했다. 통화는 여전히 이어지고 있었다. "……딱히 미워하는 건 아냐." 그 목소리에는 표가 나지 않게 죄책감이 섞여 있었다. 아사히는 그 어렵사리 나온 대답을 한참 곱씹었다. 곱씹다가, 어쩐지 눈물이 날 것 같아서 길게 숨을 뱉어내자 목이 떨렸다. 그 작은 떨림을 놓치지 않은 것인지, "너 지금 우냐?" 하는 물음이 돌아왔다. "안 울어……" "그런데 너 지금 어디야? 주변이 왜 이렇게 조용해." 여기를 어디라고 말해야할까. 하늘, 허공, 아무도 없는 곳.


"OO아파트 옥상보다 조금 더 위."

"……."

"사실 나 여기서 내려가는 법이 기억이 안 나. 어떡하지."


 뭐어…… 카즈마가 뒤늦게 경악을 삼키는 소리가 어렴풋이 들렸다. 뭔가 좀 더 다그치려는 듯 숨을 삼키다가 이내 그가 물었다. "어디라고?" "OO아파트, 어, 5동." "잠깐 기다려." 그리고 뚝, 전화가 끊겼다. 아사히는 멀뚱히 핸드폰을 내려다보았다. 지금 오려는 걸까. 시간도 늦었는데. 한참 불 꺼진 핸드폰 화면을 쳐다보다가 무릎을 모아서 끌어안고 고개를 파묻었다. 그러자 스스로가 아주아주 작아진 것 같아서, 눈물이 나서 그냥 조금 울었다.







 몇 십분쯤 기다린 것인지는 잘 모르겠는데, 그의 생각보다는 빨리 옥상 문이 달칵 열렸다. 카즈마가 뛰어들듯이 옥상 문을 열고 나오는 것이 작게 보였다. 어두워서 거리가 잘 가늠이 되진 않았지만 대략 나무 두 그루 정도의 거리가 그들 사이에 있었다. 카즈마는 그를 올려다보며 숨을 몰아쉬었다. "야." 소리 높여서 부르는 목소리. "진짜 못 내려오겠어?" 아사히는 상대에게 보이는 것인지 아닌지도 잘 모르면서 고개를 끄덕거렸다. 카즈마가 뒷머리를 긁적이며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올라가는 게 어렵지 내려오는 게 어렵냐고. 그냥 뛰어내리면 안돼?"

"그러다가 어디 부러지기라도 하면 어떡해."


 그게 지금 문제냐…… 카즈마가 한숨처럼 말했다. 고작 몇 미터 떨어져 있을 뿐인데 그 거리가 이렇게 광막하게 느껴진 것은 지금이 처음이었다. 그것은 최근 몇 달 간 그들 사이의 거리감과도 비슷해서, 목소리에 맥이 빠지는 기색을 숨길 수가 없었다. "이러다 진짜 못 내려가면 어떡하지……" 흐려진 말끝에는 얼마간의 두려움도 섞여 있었던 것 같다. 카즈마는 대답 않고 그를 쳐다보고 있었다. 턱을 치켜들고 이쪽을 노려보는 얼굴이 먼 거리에서도 이상하리만치 뚜렷하게 보인다.


"……내가 받아줄테니까."


 카즈마가 그렇게 말했다. 분명한 목소리였다. 그가 양팔을 위로 뻗었다. 마치 무언가를 붙잡으려는 사람처럼.


"내가 받아줄테니까 뛰어내려!"


 아사히는,

 그를 내려다보면서 다시금 처음 만났을 때를 떠올렸는데, 그 이름, 한 일 자에 참될 진 자를 써서 카즈마, 라고 읽는 이름과, 어두운 옥상에 홀로 서서 팔을 벌리고 있는 모습과, 혼자 기타를 붙들고 있는 옆얼굴, 악보를 적어내려가는 손끝과, 진지한 표정, 고민하고, 고민하는 내색을 숨기지 못하면서도, 완전히 쳐내지도 못하는 그런 말들, 그런 것들을 차례로 떠올리면서, 많은 것들을 보았다고 생각했고, 문득, 자신이 왜 그를 좋아하고 있는 것인지를 새삼스레 생각했다.

 상반신부터 몸이 무거워졌다. 떨어지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카즈마가 그를 잘 받아낼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는데, 그래도 손이 닿자마자 그의 몸을 와락 움켜쥐며 끌어안았다. 팔과 팔이 얽히고, 이마와 어깨가 맞닿는다. 큰 소리가 났다. 뒤로 넘어지기는 했지만 많이 아프지는 않았다. "으, 젠장." 카즈마가 짧게 욕을 하며 앓는 소리를 냈다. 풀썩 일어난 먼지가 들숨과 정신없이 뒤섞였다. 아사히가 그의 품 안에서 불쑥 얼굴을 들었다.


"나, 카즈마 군을 정말 좋아해."


 카즈마가 크게 숨을 들이마시는 것이 살갗으로 느껴졌다. 고개를 치켜들고 있어서 그 표정은 잘 보이지 않았다. "정말 좋아해." 재차 말하자 어깨를 붙들고 있는 손에 문득 힘이 들어갔다. 카즈마는 그러고도 한참 말이 없었다. 어지러웠다. 생각이, 말이, 넘쳐흐르고 있었다. 아사히는 불현듯 고개를 모로 돌리고 있는 그의 귓불이 불그스레해진 것을 알아차렸다. 아, 이런 것들.


"……알고 있어."


 한참만에 나온 대답이 그것이었다. 아사히는 웃었다. 웃어도 될 것 같았다. 무언가가 시작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4600자 정도

크아앗... 오글거려...

혼자 떠 있는 것은 좋아하는 마음과 비슷하지 않을까... 누군가가 받아주기 전에는 온전히 혼자만의 것이니까요... 그런 생각을 하면서 썼는데 워메 오글거려... 글 쓸 때 자제라는 것을 모르시는군요...

이어질지도 모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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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사카즈/ 봄의 폭풍



 "카즈마 군, 사실 나 비밀이 하나 있어." 아사히가 그렇게 말했을 때 카즈마는 신발 끈을 고쳐 매던 중이었다. "어, 그래." 그들의 대화는 곧잘 실없는 방향으로 흘러가곤 했으므로 카즈마는 대수롭지 않게 대꾸했다. 트럭 한 대가 인도에 서 있는 그들 옆을 가까이 스치고 지나갔다. 차 소리가 소란스러워서 옆에 있는 사람의 목소리도 잘 들리지 않는 저녁이었다. 아사히는 깜빡거리는 신호등의 불빛을 한 번 쳐다보고는 다시 말했다. "왠지 카즈마 군한테는 말하고 싶어서."

 길가의 가게들이 머리 위에서 하나 둘 씩 간판의 불을 밝히고 있었다. 카즈마는 그제야 고개를 들었다. 무슨 얘기를 하냐는 듯한 표정에, 아사히가 씩 웃었다. 아사히는 의뭉스럽다기보다는 솔직한 성격이었지만, 카즈마는 종종 그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인지 잘 알 수가 없었다. "말하고 싶은 거야, 말하고 싶지 않은 거야." 그렇게 묻자 아사히는 어깨를 한 번 으쓱하고는 대답했다. "모르겠어. 하지만……" 말끝이 한숨처럼 묻혔고 긴 호흡에 흰 연기가 입가에서 흩어졌다. 겨울이 바짝 살을 조이는 계절이었다. 드문드문 불이 밝혀진 거리와 건물의 꼭대기와 그 위의 허공을 가늠하듯이 쳐다보던 그는 동물이 제 털 속으로 몸을 웅크리는 것처럼 목도리 속으로 턱을 묻었다.


"봄 쯤에? 날이 따뜻해지면 말해줄게."


 무슨 놈의 비밀이 계절을 타. 그렇게 대답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았으나 그 뭔지도 모를 비밀, 그 비밀이라는 말 한 마디 때문에 호기심이 불쑥 머리를 치켜들었다. 다그치면 입을 다물어 버릴 것 같아서 카즈마는 그러냐, 라고 한 마디 하고 말았다. 그것이 이미 서너 달 전의 일이었다. 사소하고 붕 뜬 것 같은 대화였지만 나나세 카즈마는 그 일을 잊어버리지 않았다. 집 근처 공원을 가로질러 가면서 망울이 맺힌 벚꽃 나무를 보거나, 뉴스에서 화분증 경보를 보거나, 부쩍 날이 따뜻해졌다는 말을 듣거나 할 때마다 문득 그날의 대화가 떠올랐다. 비밀, 이라는 말의 어감 때문인지 아니면 봄이라는 애매한 기한 때문인지 그때마다 발가락 밑이 간지러워지는 기분이 들었다.

 해가 점점 길어져 연습이 끝나고도 낮처럼 밝았다. "이제 아이스크림을 먹을 수 있는 계절이 돌아왔어!" 요시무네는 선포하듯이 그렇게 말하고는 역 반대 방향에 있는 편의점으로 그들을 끌고 갔다. 제각기 다른 아이스크림 막대를 입에 물고 서로 한 입씩 먹어보자는 둥, 네 거가 더 맛있는 것 같다는 둥 조잘거리는 모습은 밴드맨이라기보다는 어디에서나 흔히 볼 수 있는 고교생 같았다. 카즈마는 그 분위기에 딱히 동조하지 않으면서도 제 아이스크림까지 뺏길까봐 세 입 만에 먹어치웠다. "아ㅡ 카즈맛치ㅡ 하드는 녹여 먹어야 하는 거라고ㅡ" 카즈마는 눈썹을 세워 보이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 했다.

 전철을 타는 것은 아사히와 카즈마 뿐이었으므로 역 근처까지 왔을 땐 둘 밖에 없었다. 아사히는 역 앞의 쓰레기통에 아이스크림 봉지를 버리고는 그를 돌아보았다. 돌아보았을 때, 눈이 마주쳤다. 눈이 마주쳤기 때문에 질문은 자연스럽게 나왔다.


"네 그 비밀이라는 건 아직이야?"


 아사히는 그 말을 곧장 알아들은 것 같았다. 그는 조금 당황한 것 같다가, 우물쭈물하다가, 이내 웃었다. 그의 얼굴은 웃는 표정이 자연스러워서 살면서 마주치는 웬만한 모든 일들은 무마시킬 수 있을 것처럼 보였다. 카즈마는 그를 바라보기만 했다. 늦은 오후의 길가에는 사람이 적었다. 한적한 탓인지 대화의 공백이 더 크게 느껴졌다. 잠시 뒤 아사히는 다시 위를 올려다 보았다. 위, 랄까, 정확하게는 하늘. 아직 밝지만 저 너머에서부터 어렴풋이 불그스레한 빛이 번지고 있었다. 그가 슬그머니 손을 뻗어 카즈마의 손목을 잡았다. 그 손길이 조심스럽고 손바닥 안쪽이 따뜻해서, 카즈마는 또 다시 간지러운 기분을 느껴야만 했다.


"따라올래?"


 무엇인지는 몰라도 그러기로 했다.






 아사히가 그를 데리고 간 곳은 근처에서 가장 높은 23층짜리 빌딩의 옥상이었다. 카즈마는 역 근처에 그런 건물이 있다는 것을 처음 알았다. 한 번도 눈 여겨 본 적이 없는 탓이다. 엘리베이터 안에서 아사히가 물었다. "혹시 카즈마 군, 고소공포증 같은 거 있는 거 아니지?" 띵동, 문이 열리는 소리. "없어, 있을리가." 요즘에는 보통 옥상 같은 곳은 잠궈 놓기 마련인데, 그곳은 열려 있었다. 문 한쪽에 간신히 매달려 있는 잠금쇠가 장식품처럼 보였다. 반쯤 열려 있는 문에서는 철 냄새가 났고 슬쩍 밀자 삐걱거리는 소리가 요란했다. 아사히는 그 모든 것에 익숙한 것처럼 보였다. 문턱을 넘자 봄철의, 아주 짧은 계절에만 느낄 수 있는 적당히 미적지근하고 마른 공기가 느껴졌다. 다른 건물들의 머리꼭지가 내려다보이는 것이 제법 풍경이 좋았다. 하지만 풍경이나 보자고 여기로 올라온 건 아닐텐데.

 아사히가 옥상 가장자리의 난간 쪽으로 몸을 수그렸다. 너무 수그린 탓에 발이 공중에 뜰 것처럼 보였다. 위에서 내려다 본 거리에는 여전히 사람이 적었다. "위험하게." 그렇게 말하자 아사히는 빙그레 웃었다. "별로 그렇지도 않아." 나한테는, 이라고 덧붙이는 말의 의미는 조금 뒤에야 알았다.

 그가 곧장 허리쯤까지 오는 난간을 딛고 섰을 땐 아무리 카즈마라고 해도 조금 놀랄 수 밖에 없었다. "네 비밀이라는 게 자살쇼야?" "아냐, 아냐." 아니라고 능청스럽게 말하고 있으면서도 한쪽 발이 이미 허공에 가 있었다. 이런 미친, 카즈마가 생각나는대로 욕을 주워섬기기도 전에 다른 발이 떨어졌다. 눈을 한 번 감았다가 떴다. 무언가를 판단하기에는 너무 순식간의 일이었다.

 아사히는 여전히 그 자리에 있었다.

 그가 해를 등지고 서 있어서, 문득, 해가 지는구나, 하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아사히의 어깨나 정수리의 윤곽이 붉은 빛으로 뚜렷했다. 그의 발밑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아무것도 없었는데, 그는 마치 땅을 딛고 있는 것처럼 편안한 얼굴로 허공에 서 있었다. 카즈마는 아사히가 공중에 서 있다는 사실을 가까스로 깨달았다. 그 모습이 전혀 어색하거나 생경해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이 더 이상했다. 오오토리 아사히는 워낙에 그런 사람이었다. 무언가를 받아들이거나, 받아들여지거나, 그런 일이 익숙한 사람.


"……엄청나네."

"그런가?"


 그런가, 라니. 누가 보면 너 오늘 신발이 멋있네, 같은 질문을 한 줄 알겠다. 어쨌거나 혼란은 길지 않았다. 카즈마는 그런대로 그 상태, 혹은 현상을 받아들였다. 아사히는 멋쩍은 표정으로 그를 내려다보았다. 그 어깨 너머로 해가 지고 있었다. 붉은 빛이 푸른 빛을 몰아내고, 또 그 붉은 빛은 어둠에 자리를 내주는, 하루 중 시간의 흐름이 가장 강하게 느껴지는 때. 아사히가 그에게 손을 내밀었다. "나는 왜?" "나랑 손을 잡으면, 같이 걸을 수 있거든." 싫으면 할 수 없지만. 카즈마는 잠시 주춤했다. 고소공포증 같은 건 없다고 말했지만 아무래도 익숙하지 않은 탓이다. 그의 얼굴에 미심쩍은 표정이 떠오르자 아사히는 허리를 숙이고 눈을 몇 번 깜빡였다. 카즈마는 내밀어진 손을 보면서 문득 방금 전 자신의 손목을 잡고 있던 그 손바닥의 감촉을 생각했다. 그것을 떠올리자 익숙하거나 익숙하지 않거나 하는 류의 감정은 별로 중요하지 않은 것처럼 느껴졌다.


"아, 잠깐, 잠깐, 좀."

"똑바로 서면 괜찮을 거야."


 그 말대로 생각보다 무섭지는 않았다. 마치 발 아래 단단한 것을 딛고 있는 것처럼 안정감이 있었다. 역 앞 길에 늘어선 가로등이 하나씩 불을 밝히는 것을 내려다보며, 걸음마를 처음 익히는 사람 마냥 천천히 걸었다. 얕은 어둠에 묻힌 꽃나무들과 드문드문 도로를 지나치는 자동차의 헤드라이트, 역 안으로 들어가는 사람들과 어렴풋한 네온사인. 마치 빛나는 모래를 밟으며 지나가는 것 같다. "영화 같네." 불쑥 그렇게 말하자 대답이 돌아왔다. "하울의 움직이는 성?" "그래, 그런 거." "그럼 카즈마 군이 소피인가." "재미없는데." 하하, 소리 내어 웃는 소리.


"사실 이건 미사토하고 요시무네도 몰라. 부모님은 알지만. 가족력이거든."

"그러냐."

"응. 그래서 어렸을 땐 이상한 줄도 잘 몰랐는데, 뭐, 부모님도 별 말 안했고. 하지만 어쨌거나 숨기는 게 좋겠다, 라는 생각은 좀 나중에 했어."


 그 말을 듣고 카즈마는 문득 어떤 생각을 했고, 그 생각이 적당한 것인지 잠시 망설였다. 꼬리에 꼬리를 무는 생각들은 한 가지 질문으로 수렴했다.


"근데 왜 나한테는 말하는 건데?"


 맞잡고 있는 손아귀에 불현듯 힘이 들어갔다. 이미 해가 반쯤 진 뒤였지만 아사히의 얼굴이 문득 붉어졌다가 하얘졌다가, 이내 다시 붉어지는 것이 똑똑히 보였다. 그 조금은 멋쩍고, 조금은 수줍은 듯한, 그리고 또 조금은 무서워하는 것도 같은 옆얼굴을 본 순간 카즈마는 그가 무슨 말을 할 것인지 알아차렸다. 어느새 멈춘 발걸음 아래로 퇴근 시간 무렵의 헤드라이트 행렬이 하얗게 지나가고 있었다. 덩달아 손이나, 목, 배 안쪽이 맹렬하게 간지러워졌다.


"그야…… 좋아하는 사람한테는 뭐든 말하고 싶어지는 법이잖아."


 그를 돌아보는 아사히의 얼굴이 무척이나 비장한 표정을 짓고 있어서 다른 때였으면 웃었을 것도 같다. 살면서 이런 곳에서 고백을 받을 줄은 생각도 못했는데, 라든가, 비밀이 하나만 있는 것도 아니었잖아, 라는 생각도 들었지만 그 얼굴과 말 앞에서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되었다. 

 어느새 밤, 이었다.








아악 글 재활 너무 시급해~~~~~

걍..머.. 손 푸는 느낌으로 썼는데 글 내용이 진짜 실없다

뒤에 안 쓸 것 같은데 마무리 너무 실없어서 일단 상을 붙여봄 뒷편 써줄사람 구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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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이모브/ 책상 밑 어둠  (0) 2016.03.26
토모와타

 


 마시로 토모야는 평범한 사람들이 으레 그렇듯, 몇 가지 고민을 가지고 있었다. 그 고민의 목록은 매번 조금씩 바뀌었지만 적어도 그 중 한가지는 항상 히비키 와타루와 관련된 것이었다. 부장이 이번 연극에서도 나에게 드레스를 입히려고 한다, 부장이 내 팔보다 더 긴 뱀을 키워보라고 떠안기고는 사라졌다, 부장이 어제도 무대 위에서 나에게 장미꽃을 던졌다. ……. 인간의 놀라운 점은 거꾸로 매달려 있어도 익숙해지는 것이라고 하던데마시로 토모야는 16살에 그 말의 의미를 진정으로 깨닫고 있는 중이었다. 그는 어째서 자신이 한 손에는 장미꽃 한 손에는 화병을 든 채 인생의 무상함을 느껴야하는지 잘 알 수가 없었다연극부의 소품 중 하나인 화병은 어마무지하게 고풍스러워 보였다개수대에서 물을 받아 꽂아두니 꺾은 지 하루가 지난 꽃인데도 붉은 빛이 생생해서 제법 잘 어울렸다. 히비키 와타루는 다행히도 부재중이었다. 토모야는 소파 위에 털썩 주저앉으면서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의 가방에는 며칠 전 받은 새 대본이 들려 있었다. 지난 밤에도 한 번 훑어보기는 했지만 차근히 읽어볼 기회가 필요했다. 그는 이미 자신의 대사에 형광펜으로 밑줄을 그어두었다. 널찍한 소파 위에 편한 자세로 앉아 대사들을 하나씩 되뇌었다. 이번에도 여주인공 역할인 것은 안타까웠지만 괜찮은 각본이었다. 20세기 초반을 배경으로, 재능이 넘치는 여주인공이 시대와 성별 때문에 쉬이 제 재능을 펼치지 못하는 내용이 주였다. 최근의 트렌드에도 맞는 것 같았고, 구성도 흥미로웠다. 토모야는 그 대본의 내용에 쉽게 이입했다.


 "남다른 재능은, 어째서 쉽게 이해받지 못하는 것일까요?"


 그가 대사 중 한 구절을 문득 읊었을 때 창문이 열렸다. 바람이 불고 있었다. 히비키 와타루가 거기에 있었다. 그는 아주 당연하다는 듯이, 마치 중력을 받지 않는 사람인 것처럼, 사뿐하게 창틀 위로 발을 디뎠다. 토모야는 하마터면 들고 있던 대본을 반으로 찢어버릴 뻔했다. 여기는 1층이 아니었고, 등으로 역풍을 받으며 머리카락을 휘날리고 있는 히비키 와타루는 몹시도 비현실적으로 보였기 때문이었다. "여기는 1층이 아닌데요?" 하고 묻자, "후후, 그런 당연한 질문ㅡ 역시 평범하네요." 하는 대답이 돌아왔다. 아니 그래서 어떻게 들어왔냐고…… 뒷말은 목 너머로 쑥 들어갔다. 와타루는 부실을 성큼성큼 가로질러 들어와 그의 입술에 검지를 대었다.


 "당신이 이해받지 못하는 것은, 당신이 오만을 부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토모야는 반 박자쯤 늦게 그것이 연극 대사라는 것을 알았다. 조금 전 토모야가 읊은 대사에 이어지는 것이었다. 대본을 받은 지 며칠도 채 되지 않았는데 와타루는 이미 대사를 모조리 외워버린 모양이었다. 토모야는 더듬더듬, 각본을 내려다보면서 대사를 이어갔다. "오만이라는 것은…… 누가 정하는 것인가요? 신인가요 사람들인가요?" "그것이 그렇게 중요합니까?" 와타루가 조금 허리를 숙였다. 흘러내린 머리카락이 이마에 닿아 간지러웠다. 손끝으로 이마를 긁적였다. "중요합니다. 나의 재능은 신이 내린 것이고, 나를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나는 누구의……" 뜻을 따라야하는 것인가요? 문득 종이에서 눈을 떼고 고개를 들었을 때 토모야는 대사를 잇지 못했다. 히비키 와타루는 웃고 있었다. 익숙한 웃는 낯이었다. 이 부분은 전혀 웃을만한 부분이 아닌데? 하고 생각하고 나니 그 얼굴이 어딘가 기묘해 보였다. 어디라고 콕 찝어서 말하기는 어렵지만, 조금, 약간, 그러니까…… 슬픈 것 같기도 했다익숙한 것이 슬퍼 보인다는 것은 참, 이상한 일이었다.

 ? 라든가, 무엇 때문에? 라고 생각하기도 전에 몸이 먼저 움직였다. 손을 뻗자 머리카락이 한 웅큼 가득 손아귀에 들어왔다. 얼굴이 가까워졌다.


 "……."


 고작 맞닿는 정도의 키스였지만 아주 오랜 시간이 지난 것 같았다. 토모야가 자신의 행동을 깨닫는 것은 조금 더 느렸다. 그는 기어이 들고 있던 대본을 바닥에 던져버렸다. "뭐, 뭐, 뭐, 뭐하는 거야, 이 변태가면?" "그걸 저한테 묻는 건가요? 키스는 이 다음 장인데 말이지요." 내동댕이쳐진 대본을 주워 들며 와타루가 소리 내서 웃었다. 종이가 넘어가면서 팔락거리는 소리가 났다.


 "아, 하지만 진정하세요 토모야 군. 평범 그 자체의 반응 이 히비키 와타루, 예상했으니까요. 연기에 몰입하여 저에게 키스한 사람이 토모야 군이 처음은 아니랍니다. 빛나는 재능은 모두를 매혹시키기 마련이니까요, 후후."


 그러지 않아도 붉어져 있던 토모야의 얼굴이 터질 듯이 시뻘개졌다. 그는 와타루의 손에서 낚아채듯이 대본을 뺏어들고는 소파 위에 널부러져 있던 가방을 재빠르게 등에 맸다. "어라? 가는 건가요?" "그래!" 그 뒤에 와타루가 무어라 말을 한 것 같은데, 연극부실을 뛰쳐나오다시피 하느라 듣지를 못했다. 한참 복도를 가로지르고 계단을 내려가 1층에 도착하고 나서야 숨을 고를 수 있었다. 오래 달리기를 한 사람처럼 숨이 찼다. 그는 손등을 입가에 대고 숨을 골랐다. 이것도 저것도, 엉망진창이었다. 제일 엉망인 것은 좀 전의 그 얼굴이나, ……감촉 같은 것을 되새기고 있는 자기자신인 것 같기도 했다.

 

 "……아!!!!!"


 아무도 없는 1층 복도에서 고함을 지르자 소리가 울렸다. 마시로 토모야 16세, 고민이 많은 나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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