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밤



 엔도 치하루는 눈을 떴다.

 익숙하지 않은 천장을 올려다보며 눈을 느리게 한 번, 두 번 깜빡거렸다. 잠이 덜 깬 머리는 제대로 맞물리지 않은 톱니바퀴처럼 삐걱삐걱 느리게 돌아갔다. 어둠에 익숙해진 눈이 침대 머리맡과 높은 천장의 모양새를 어렴풋이 인식하고 나서야 그는 몇 가지 사실을 떠올릴 수 있었다. 이 집은 크고 넓었지만 주변에 이웃이 적은 탓에 한밤중에는 무서우리만치 적막했다. 손님방과 화장실이 멀리 떨어져 있는 것도 문제라면 문제였다. 볼일을 보고 나서 길고 어두운 복도를 되짚어 가던 와중 그는 덜컥 겁이 나기 시작했고, 바닥에 깔려 있던 카펫에 발이 걸려 한 번 넘어지고 나서는 일단 아무데나 눕고 싶다는 생각 또한 들었다. 치하루는 문득, 좀 더 가까운 곳에 코하쿠의 방이 있다는 것을 떠올렸다. 고민은 길지 않았다. 밤이 새벽으로 넘어가는 시간이었다. 그는 발뒤꿈치를 들고 조용히 움직였다. 복도 끝으로 살금살금 걸어가 방 문을 슬쩍 열어 보았을 때, 그 안은 마치 사람이 없는 방처럼 적막했다.

 공간을 아낄 필요가 없는 널찍한 방 한가운데에 넓은 침대가 있었다. 두 명이 누워도 자리가 남을 법한 침대에서 코하쿠는 정자세로 잠들어 있었다. 치하루는 이불의 가장자리를 들추고 그가 할 수 있는 한 가장 조심스러운 동작으로 그 밑으로 기어들어갔다. 구석에 몸을 구기고 누워서 옆을 돌아보는데 문득, 눈이 마주쳤다.


 "어……"


 잠을 안 잤다기보다는, 자다가 깬 듯한 표정이었다. 코하쿠는 왜 여기 있냐든가 지금이 몇 시냐든가, 그런 질문을 하는 대신 눈과 눈썹 사이를 약간 좁히고는 어둠 속에서 그를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왜 그렇게 가장자리에 누워 있어요……" 졸음에 겨운 말끝이 조금 뭉개졌다. 그가 손으로 제 옆자리를 토닥이듯이 몇 번 두드렸다. 치하루는 그 사인을 냉큼 알아들었다. 무릎 걸음으로 걸어가 그의 옆에 바짝 붙어서 눕자 그제야 소년이 다시 눈을 감았다. 머리를 베개에 뉘이자마자 때늦은 수마가 눈꺼풀을 짓눌렀다. 그것을 의식하기도 전에 잠에 들었던 것 같다.

 그런데 왜 지금 깼을까.

 마치 물에서 건져내듯이 자연스러운 기상이었다. 시간을 잘 짐작할 수 없었지만 사위가 어두운 것으로 보아서는 아직 한참 새벽인 것 같았다. 그는 잠시 천장에 매달려 있는 형광등을 올려다보다가, 뒤척거리는 소리가 나지 않도록 조심하며 몸을 돌려 누웠다. 창문 너머로 희붐하게 비쳐 들어오는 빛이 유일한 광원이었다. 고작 사물의 윤곽 정도만 인식할 수 있는 시야에, 가만히 잠들어 있는 소년의 옆얼굴이 보였다. 치하루는 가만히 그 얼굴을 구경해보았다. 그는 언제나 치하루보다 일찍 일어나기 때문에 좀처럼 볼 수 없는 얼굴이었다. 코하쿠는 정물처럼 잠들어 있었다. 배 부근에 양손을 올리고, 고개를 기울이거나 몸을 뒤척인 기색도 없이, 그렇게. 어둠 탓인지, 달빛 탓인지는 모르겠으나 그 낯빛이 유난이 흰 것 같았다.

 아니, 창백한 것일지도 모른다.

 그렇게 생각하자 불현듯 그가 숨을 쉬고 있는지 아닌지 알 수가 없었다. 그것은 아주 순간적이고 막연한 기분이었다. 막연하기는 하였으나, 근거가 없는 감상은 아니었다. 아주 근거가 없지는……

 그 순간 덜컥, 무언가가 내려앉는 소리가 들린 것 같았다.

 본래 모든 공포는 막연하기 마련이다. 그 누구도 손에 잡을 수 있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기 때문에, 그렇기 때문에 사람들은 자신의, 혹은 타자의 죽음을 두려워하기 마련이고…… 홀로 남겨지는 것을 무서워하게 되는 것이다.

 그 기분 앞에서 엔도 치하루는 자연스럽게 닫힌 문과 아무도 찾지 않는 반나절을 떠올린다.

 그는 거의 무의식적인 동작으로 손을 들어 소년의 코 밑에 가져다대었다. 낮고 희미한 숨결이 손끝에 닿을 때까지의 그 찰나의 순간이 무척이나 길게 느껴졌다. 코하쿠는 거의 몸을 들썩이지 않고 숨을 쉬었다. 치하루는 그제야 제 쪽이 한참동안 숨을 참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어쩐지 손끝이 녹아내릴 것만 같은 기분에 한숨처럼 길게 숨을 내뱉었다.

 코하쿠는 아무래도 잠귀가 밝은 것 같았다. 아니면, 손 그림자가 눈 앞에서 몇 번을 왔다갔다 해서 그런 것일지도 모른다. 그는 잠이 든 얼굴만큼이나 조용히 잠에서 다시 깼다. 자던 와중에 몇 번이나 깨고도 짜증 한 번 부리지 않고 가만히 이쪽을 올려다보는 그 얼굴에 대고, 깨워서 미안하다고, 다시 자라고 말해야 하는데 어쩐지 그 말이 잘 나오지 않았다.


 "무슨 일 있었어요?"


 코하쿠가 나직하게 먼저 물어보았다. 치하루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무 일도 없었다. 아무 일도 없었기 때문에.

 그는 몸을 웅크리듯이 모로 뉘였다. 고개가 소년의 어깨 쪽으로 가까이 붙었다. 그가 중얼거리듯이 대답했다.


 "아무 일도 없어서 다행이야."


 낮고 모호한 말이었으나 해명을 요구하는 질문은 돌아오지 않았다. 어쩐지 모든 것을 이미 알고 있는 듯한 그 침묵에, 치하루는 무슨 일인지 한결 더 서러워졌다. 그 서러움이 제 것이 아님을 알면서도 반사적으로 눈물이 났다. 살면서 한 번도, 기쁨이나 슬픔을 숨겨야겠다는 생각은 한 적이 없는데, 지금은 그래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소리를 죽이고 조금씩 울기 시작했다. 관자놀이 옆이 금세 축축해졌다. 숨을 들이키는데 무심코 호흡이 얕아졌다. 안타깝게도 그는 무언가를 숨기는 데 재능이 없었다.

 아마 코하쿠가 이불 위를 더듬어 그의 손을 찾아 쥔 것은 그래서였을 것이다. 말이 없는 그 손은 이런 상황에 이미 익숙한 것 같기도 했다. 그래서 치하루도 말할 수 없었다. 네가 없는 건 무섭다고. 더 이상 혼자 있는 건 싫다고. 죽으면 안된다고. 여기 있어달라고. 그런 건 그의 마음대로 할 수 없는 일이니까. 누구의 마음대로도 할 수 없는 일이니까.

 아, 말들은 얼마나 무력한지.

 치하루는 무력한 말을 하는 대신 그의 손을 맞잡아 쥐고 눈을 감았다. 아직 남은 새벽이 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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