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마미츠/ 좋아하는, 좋아하는


 니카이도 야마토가 집을 나와 처음으로 얻은 자취방은 지은 지 20년이 된 빌라였다. 돌이켜 생각해보아도 주거환경이 좋다고는 할 수 없는 집이었는데, 안타깝게도 그 무렵 그는 갓 고등학교를 졸업한 어린애였고 그런 좋고 나쁨을 따질 수 있을 정도로 삶에 능숙하지는 못했다. 옆방의 커플이 삼 일마다 한 번씩 싸우는 소리가 마치 귀에다 대고 말하는 것처럼 생생하게 들린다든가, 세면대의 하수구가 곧잘 고장나서 바닥으로 물이 줄줄 샌다든가 하는 일들을 일일이 꼽아보고 있다보면 조금 우울해졌는데, 개중에서도 가장 참기 힘든 것은 추위였다. 그의 방은 3층 가장 안쪽에 있었고, 삼면이 바깥과 닿아 있는 탓인지 다른 방보다 외풍이 잘 드는 것 같았다. 여름 이불과 겨울 이불을 겹쳐서 목끝까지 덮고 있어도 냉기는 곧잘 빈자리를 파고들었다.

 사람이 제대로 살아가기 위해서는 사소한 것들이 모두 갖춰져 있어야 하는구나. 불 꺼진 방의 천장을 올려다보면서 그는 처음으로 깨달았다. 그 생각은 자연스럽게 따뜻한 방과 때마다 차려지는 끼니, 깨끗한 창문과 돌봐주는 사람이 있는 집의 풍경을 돌아보게 했다. 그런 것들이 얼마나 세심하게 사람의 손을 탔는지를 집을 나와서야 깨닫게 되는 것은 아이러니한 일이었다.

 그것들을 의심하지 않을 수 있었던 시기가 그에게도 있었다. 유년의 기억은 여전히 투명하고 온전했지만, 사실은 때가 타 있었다는 것을 이제는 알고 있다.

 벽으로 스며든 바람이 얼굴 위를 지나가고 있었다. 그는 눈을 감고 이불 속에서 몸을 둥글게 웅크렸다. 어딘가 먼 곳에서 개가 짖는 소리가 들렸다. 컹, 컹, 컹, 하고. 누군가를 부르는 것처럼. 불러도 나는 돌아가지 않아. 야마토는 그렇게 생각했다.

 앞으로 무언가를 진심으로 사랑하게 되는 일은 없을 것만 같았다.







 여섯 번째로 오디션에 떨어진 날, 이즈미 미츠키는 방을 청소하던 중에 책상 아래 서랍에서 오래된 DVD를 발견했다. 어렸을 적 처음으로 용돈을 모아 산 제로 콘서트의 DVD였다. 하도 낡은 물건이라 제대로 돌아갈까 싶었는데 다행히도 화질이 조금 낡았다는 것 외에는 문제가 없었다. 그는 한쪽 무릎을 세우고 앉아 DVD를 돌려보았다. 그의 이상은, 늘상 변함 없는 모습이었다. 색색의 조명 아래에서 춤추고 노래하고 웃는 모습. 사람들을 압도하고 행복하게 만드는 퍼포먼스. 카메라가 무대를 멀리서 비추면서 관객석을 드러내자, 똑같은 색의 사이리움이 마치 같은 물살을 탄 파도처럼 움직이는 것이 보였다. 노랫소리를 떠받치듯 어렴풋한 환성이 들렸다. 몹시, 빛나고 있었다.

 운동장에 분필로 선을 그어 구획을 나누는 것처럼 화면 안과 화면 바깥의 세상이 몹시 다른 것 같이 느껴졌다. 제로의 DVD를 보면서 그런 기분을 느끼는 것은 처음이었다. 아무도 없는 실내의 적막이 유난히 컸다. 정리를 하느라 제멋대로 꺼내놓아 어지러운 옷가지들과 물건들이 바닥에 널려 있었다. 그 사이에 앉아, 이즈미 미츠키는 홀로 영상을 보고 있었다. 그는 화면 안의 세계를 내버려둔 채 무릎에 고개를 파묻었다. 귀를 막고도 따라부를 수 있을 정도로 익숙한 후렴구가 반복해서 들려오고 있었다. 눈을 감아도, 귀를 막아도, 숨을 멈추어도 계속 들릴 것 같았다.

 무언가를 좋아해서 괴로워질 수도 있다는 것을 그때 처음으로 알았다. 미츠키는 엔딩 스크롤이 올라가고 화면이 멈출 때까지 오랫동안,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구두 끈이 풀려 있었다.

 현관에서 막 나서려는 찰나였다. 아, 하고 성마른 입소리가 튀어나왔다. 잠이 덜 깬 아침에는 온갖 사소한 것들이 성가셔지기 마련이다. 야마토는 마치 비디오를 되감는 것처럼 느릿하게 현관 가장자리에 주저 앉았다. 몸을 굽혀 구두 끈을 묶기 시작했다. 잠이 덜 깬 탓인지 매듭이 예쁘게 만들어지지 않아 몇 번쯤 헛손질을 했다. 가까스로 끈을 묶고 고개를 드는데, 무언가가 눈 앞으로 불쑥 내밀어졌다. 자세히 보니 흰색 보온병이었다.

 미츠키는 부엌에서 곧장 현관으로 나온 것인지 앞치마를 그대로 하고 있었다. "이게 뭐야?" 하고 묻자, 미츠키는 이른 아침에 어울리지 않는 또렷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커피야. 야마토 씨, 요즘 아침 촬영 많길래." 계속 보온병을 쥐고 있었던 것인지 건네주는 손끝이 따뜻했다. 그 손가락이 맞닿는 순간, 살짝 움츠러들며 손마디를 구부리는 감촉까지 진동으로 느껴졌다. 야마토는 무심코 웃으면서 병을 받았다.


 "고마워. 잘 마실게."

 "잘 다녀와-"


 친절한 배웅을 받으며 문을 열고 나섰다. 찬 공기가 훅, 끼쳐오자 순식간에 잠이 깨는 것 같았다. 새벽에 가까운 시간, 거리에는 아직 어스름이 남아 있었다. 그는 길을 따라 한참을 걷고 나서야 문득 깨달은 것처럼 손에 들고 있던 보온병을 가방에 집어넣었다. 후, 하고 숨을 내쉬자 흰 김이 궤적을 그리듯 길게 허공을 가른다. 가방 안의 보온병이 묵직하게 느껴졌다.

 니카이도 야마토는 최근 이즈미 미츠키에 대해 생각하는 시간이 늘었다. 그것은 누군가가 자신을 빤히 쳐다보면 이쪽에서도 상대를 쳐다보게 되는 것과 같은 이치라고, 야마토는 생각했다. 아니다, 먼저 쳐다본 것은 자신이었을까? 그런 것은 중요하지 않았고, 중요한 것은 현재 그들이 마주보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손을 뻗으면 잡을 수 있을 것만 같은 거리가 그들 사이에 있었다. 미츠키는 사람을 볼 때 정확하게 눈을 쳐다보곤 했고, 그것은 관계에 있어서도 변함이 없어서, 그는 일정한 거리를 두고 선 채로도 그것을 무르거나 애매모호하게 만들려고 들지 않는다.

 그런 생각을 확인받듯이 미츠키는 곧잘 야마토에게 다정을 베풀었다. 원래부터도 세심한 구석이 있는 성격이기는 했지만, 행동거지의 질이 다르다는 것 정도는 눈치챌 만했다. 자연스레 뻗어오는 손과 가만히 살피는 시선 같은 것들을 떠올리다보면 목 안쪽이나 뱃속처럼 손에 닿지 않는 곳이 간지러워졌는데, 그러면서도 야마토는 그 감각이 어딘가 께름칙하다고 생각했다.

 그건 아마, 궤도를 벗어나는 감각이다. 이런 기분은 자신답지 않았다. 썰물 때 물이 빠져나가는 것처럼, 정신을 놓으면 무심코 스르륵 끌려갈 것만 같다.

 이건, 안되는 거겠지. 가방을 고쳐 매며 새롭게 생각했다. 동이 트고 있었다. 차가운 아침이었다.







 촬영은 일정한 리듬을 가지고 분주하게 흘러갔다. 야마토는 그 흐름에 몸을 맡기는 것을 좋아했다. 잘하는 일을 싫어하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그 재능의 출처를 알고 있어도 그러하다. 이 일을 하는 이상 그것을 잊어버릴 수는 없었지만, 모순적이게도 카메라 앞에 서면 부차적인 것들은 잘 기억이 나지 않았다. 기분좋은 망각은 감독이 시원스레 컷을 외칠 때까지 이어졌다.

 다음 장면까지 텀이 조금 있었다. 야마토는 의자 위에 올려두었던 가방을 뒤져 핸드폰을 꺼내들었다. 부재중 전화가 한 통. 그 이름을 확인하는 순간 그는 극중 인물이 아니라 니카이도 야마토로 되돌아왔다. 그는 잠시 이름을 쳐다보며 고민했다. 고민은 길지 않았다. 촬영장의 구석을 찾아 통화 버튼을 눌렀다. 대기음이 몇 번 이어지고, "응, 야마토 씨." 미츠키가 익숙하게 전화를 받는다.


 "어, 왜 전화했나 싶어서. 무슨 일 있어?"

 "그런 건 아니고. 바빠?"

 "지금은 안 바쁜데."


 촬영 분장 때문인지 얼굴이 조금 답답한 느낌이 들었다. 야마토는 조심스레 앞머리를 쓸어넘기며 수화기 너머의 목소리를 들었다. "별 건 아니야. 야마토 씨가 탕두부 먹고 싶다고 했던 게 기억나서, 오늘 저녁 집에서 먹을 거냐고 물어보려고 했어." 마침 두부가 세일하는 것 같길래, 그리고, 야마토 씨 요즘 바쁘잖아? 계속 사먹으면 아무래도 질리지 않을까 싶기도 하고. 그러니까…… 변명처럼 길게 늘어지는 뒷말을 가만히 듣고 있었다. 이런 실없는 말을 하는 목소리를 계속 듣고 있고 싶다는 생각이 든 순간, 야마토는 퍼뜩 고개를 들었다. 간지럽고, 불온했다.


 "저기, 미츠."


 사담의 중간을 뚝, 끊으며, 생각보다도 먼저 말이 튀어나갔다.


 "우리 이런 거 그만두지 않을래?"


 그 말은 모호해서, 언제나 정확하게 자신의 눈을 쳐다보는 미츠키에게 내놓기에는 어쩐지 맞지 않는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미츠키는 '이런 거'가 무엇인지 묻지 않았다. 무지근한 침묵이 이어졌다. 스피커 너머로 낮게 깔리는 숨소리가 아니었다면, 통화가 끊긴 줄 알았을 것이다. 이내, 미츠키가 되물었다.


 "왜?"


 왜? 왜냐고…… 그 질문에, 야마토는 몇 가지 변명들을 고를 수 있었다. 손쉽고 적당한 대답들. 그러나 그것들은 정확하지 않았다. 자신만의 감각을 남에게 설명해서 납득시킬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세트장의 구석을 노려보면서 야마토는 입을 열었다가, 다시 다물었다. 그가 망설이는 기색을 기민하게 알아차린 것인지, 미츠키가 조금 노기 어린 목소리로 말했다.


 "제대로 설명하지도 못할 거면, 난 싫어. 끊어!"


 그리고 전화가 끊겼다. 뚜, 뚜, 뚜. 무언가 어긋난 듯한 수화음이 스피커에서 흘러나왔다. 그대로 휴대폰을 붙잡고 있자 화면이 저절로 어두워졌다. 야마토는 스태프가 자신을 부르러 올 때까지 그 자리에 멍청하게 서 있었다.







 막 방영일을 앞둔 드라마 촬영은 타이트한 일정으로 흘러갔다. 기숙사에 붙어 앉아 있을 시간이 없다는 게 불행인지 다행인지 알 수 없다고 생각하며, 야마토는 허둥지둥 그 일정들을 소화해나갔다. 바쁜 와중에도 기숙사에 들락날락할 때마다 미츠키는 꼭 한 번씩 나와 그를 배웅했는데, 그 태도에는 별반 달라진 점이 없었다. 따뜻한 커피나 차 같은 것이 담긴 보온병과, 핫팩과, 벙어리 장갑과 담요. 야마토는 그런 점마저 그답다고 생각하며 커피를 마시고 핫팩을 쥐고 담요를 덮을 때마다 그를 생각했다. 생각하다보면 저절로 수화기 너머로 들었던 목소리를 떠올리게 되었다. 제대로, 가 무엇인지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그 날은 오래간만의 오프날이었다. 늦은 밤, 야마토는 냉장고 안을 들여다보다가 모아뒀던 캔맥주가 다 떨어졌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편의점 다녀올테니까, 혹시 살 거 있는 사람?" 멤버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는 거실을 향해 외치자, 기다렸다는 것마냥 푸딩부터 주스에 과자에 잡지까지 다양한 대답이 날아들었다. 그 가운데 미츠키가 불쑥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도 같이 가." 말을 무를 틈도 없이 재빨리 옆에 서서 신발을 구겨신는다. 야마토는 그 정수리를 잠깐 쳐다보다가 문을 열고 나섰다.

 천천히 길을 걷자 일정한 간격으로 서 있는 가로등 불빛에 시야가 밝아졌다 어두워지기를 반복했다. 노란 불빛을 받아 빛나는 미츠키의 옆얼굴은 여상한 표정이었다. 가장 가까운 편의점에 들어가 과자며 잡지 같은 것을 집어드는 동안 그들은 별다른 말을 나누지 않았다. 어색한 것 같기도 하고 익숙한 것 같기도 한 이상한 기분으로 물건들이 담긴 비닐봉투를 들고 다시 밖으로 나서자, 뒷통수에 대고 아르바이트 생이 안녕히 가세요, 하고 발랄하게 인사하는 소리가 들렸다. 움직일 때마다 비닐이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났다.

 길을 중간쯤 되짚어왔을 때 미츠키가 문득 입을 열었다. 있잖아, 야마토 씨.


 "응?"

 "나는, 짝사랑에는 익숙하거든."


 그렇게 말하는 옆얼굴은 여전히 침착하고, 하지만 어딘가 결연한 듯한 표정이었다.


 "하지만 날 너무 기다리게 만들지는 마."


 그 말에 야마토는 또 다시 멍청하게 멈춰섰다.

 미츠키는 붙박힌 듯 서 있는 그를 내버려두고 먼저 앞서 걸어나갔다. 그 걸음에는 망설임이 없었다. 야마토는, 제대로, 라는 말에 대해서 다시 한 번 생각했다. 그 말은 저열함도 비열함도 못난 구석도 전부 포함하는 제대로, 일 것이다.

 야마토는 보폭이 큰 걸음으로 성큼 걸어 그의 손목을 붙잡았다. 손에 든 비닐봉투가 바닥에 떨어져서 풀썩 소리가 났다. 미츠키가 그를 돌아보았다.


 "무서워서 그랬어."


 미츠키가 눈을 깜빡였다. 그래서? 라고 묻는 것처럼.


 "너무 진심이 될까봐 무서워서. 너한테, 그러니까…… 그런 건, 힘드니까. 싫다고, 또 그런 식으로 괴로워지는 건. 진심이라는 건 그런 거잖아."


 두서없는 말들에 목덜미까지 다 화끈해지는 것 같았다. 미츠키는 그의 얼굴을 한 번 쳐다보고는 손목을 내려다보았다. 야마토는 천천히 그의 손목을 놓았다. 손가락과 살갗이 달라붙은 것처럼 손아귀에서 힘이 잘 빠지지가 않았다. 미츠키가 몸을 숙여서 떨어진 비닐봉지를 집어들었다. 안에서 깨진 물건은 없는지 살피더니, 이내 다시 고개를 든다. 그리고는 툭, 말했다.


 "바보야, 뭔가를 좋아하는 일은 원래 힘든 거야."


 그는 약간 눈썹을 찡그린 채, 웃는 것도 같고 아닌 것도 같은 미묘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 얼굴을 보자 갑자기 손끝에서부터 힘이 빠져나갔다. 야마토는 바보가 된 기분으로 되물었다.


 "……그런가?"

 "그렇다고. 바보야."

 "두 번이나 말했어……"

 "아, 몰라. 나도 진짜, 어쩌다가 이런 사람을 좋아하게 돼서……"


 말끝에서 입을 다물었다. 놀려야하는 타이밍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그럴 기분도 들지 않았다. 야마토는 그제야 미츠키의 표정이, 조금 울 것 같은 얼굴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불현듯 마음이 부풀어오르는 것 같았다. 진심이라는 것은 그렇게, 무겁고 불편하고 어려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한 번도 그것을 외면해 본 적이 없을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자 야마토는 갑작스럽게 그 우그러진 눈가를 쓰다듬어보고 싶어졌다. 그는 가까스로 말을 골랐다.


 "……손 잡을래?"


 야마토가 슬그머니 손을 내밀었다. 미츠키가 잠시 망설이다가, 말없이 들고 있던 비닐봉지를 다른 손으로 바꿔 쥐고는 그의 손을 마주잡았다. 그들은 다시 걷기 시작했다.

 돌아가는 길은 좀 더 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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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오미츠이오/ 키가 자라는 꿈


 1


 대부분의 어린아이들이 그렇듯, 어릴 적엔 빨리 키가 자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 무렵 세계는 아직 직관적이었고, 어린 이즈미 이오리에게는 서랍장 위쪽에 손이 닿는다든가 발돋움을 하면 천장을 짚을 수 있다든가 하는 일들이 성장의 척도인 것처럼 느껴졌다. 이오리의 방에는 포스터로 가려놓은 벽 뒤쪽에 키가 자란 것을 재던 흔적이 아직도 남아 있었다. 벽지 위에 유성펜으로 잘게 그어진 선들은 들쭉날쭉했고, 부모님이 발견하고서 혼낸 뒤로는 그런 짓을 하지 않았지만, 그 선들을 그어준 것이 미츠키였던 것을 아직도 기억하고 있다. 실눈을 뜨고 손바닥으로 정수리를 내리누르며 펜을 긋는 그 신중한 얼굴을 비스듬히 올려다보던 일이, 필름의 한 장면처럼 머릿속에 남아 있었다.

 네 살 차이는 또래라고 하기에는 멀고 아주 멀다고 하기에는 가까운 나이차이였다. 삶의 궤도를 앞서 나가는 사람이 있다는 것은, 다른 모든 형제들이 그렇겠지만, 신기한 일이었다. 미츠키는 그보다 먼저 글을 떼고 자전거를 배우고 학교에 들어가고 부모님을 돕고 교복을 입고 졸업장을 받았다. 이오리는 그 시절 그런 것들을 따라잡고 싶어서 내심 안달이 나 있었다. 아마 그들이 네 살 차이였기 때문에, 한 살이나 열 살이 아니라 네 살 차이였기 때문에 그랬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것은 손을 뻗으면 닿을 것 같지만 잘 닿지 않는 거리였다.

 그러다보면 가끔씩 자라고 싶은 것인지 따라잡고 싶은 것인지 구분이 가지 않았다. 그 두 가지는 닮아 있었으므로, 굳이 구분할 필요가 없기도 했다.

 그런 생각이 조금 바뀐 것은 이오리가 교복을 입을 때쯤이었다. 미츠키는 동네의 공립 중학교를 나와 공립 고등학교에 들어갔고, 내내 가쿠란을 입었다. 형이 키가 좀 더 컸다면 교복을 물려입을 수도 있었을텐데, 하는 어머니의 말에 이오리는 문득 자신과 미츠키가 거의 키가 같아졌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는 더 이상 미츠키를 올려다 볼 필요가 없었다.

 그렇네, 나, 더는 자라지 않으니까. 미츠키는 선선한 말투로 그렇게 말했지만 이오리는 그 말이 트럼프 카드처럼 뒷면을 숨기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미츠키에게는 신경쓰는 일을 부러 덤덤하게 말하는, 그런 것이 좋은 일이라고 생각하는 버릇이 있었다. 이오리는 그의 그런 점들을 잘 알았다. 미츠키와 관련된 일 중에 그가 모르는 것은 없었다.

 만약에 형을 신경쓰게 한다면 더 이상 자라지 않아도 좋다고, 새로 산 교복의 매끄러운 소매를 만져보며 이오리는 생각했다.

 꿈을 꾸기 시작한 것은 그 무렵이다.


 "떨어지는 꿈을 꿨어요."


 어느 날 아침, 화장실 앞에서 미츠키와 마주쳤을 때 그렇게 말했다. 미츠키가 칫솔을 입에 문 채로 그를 돌아보았다. 꿈에서 이오리는 어딘가의 가장자리에 서 있었다. 아래를 아무리 내려다보아도 스스로가 서 있는 높이가 가늠이 되지 않는 곳이었다. 그러다가 툭, 누가 밀친 것처럼 지면에서 발이 빗겨나가고, 그는 아무것도 없는 허공으로 떨어졌다. 몸이 아래로 훅, 꺼지는 순간의 그 섬찟한 느낌. 덕분에 아직도 턱이나 팔 안쪽이 간지러웠지만, 나쁜 꿈을 꿨다고 어리광을 부리기에는 민망해서 자세히 설명하지는 않았다. 미츠키가 세면대에 치약 거품을 뱉고는 대답했다.


 "그거, 키가 크는 꿈이라던데."


 잘됐네, 그렇게 말하며 미츠키가 그의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잘된 것일까? 이오리는 선뜻 확신할 수 없었다.

 그 해 이즈미 이오리는 6cm가 자랐다.






 2


 이오리가 가지고 있는 몇 가지 불만 중 하나는 미츠키와 같은 학교를 다닐 수 없다는 점이었다. 이오리가 다니는 중학교는 미츠키가 다니는 고등학교보다 조금 더 멀었다. 이오리는 버스를 타고 등교했고, 미츠키는 주로 자전거를 타고 등교했다. 아침마다 미츠키는 이오리를 뒷자리에 태워 버스정류장까지 데려다주었다. 그러기 위해 그가 20분 정도 일찍 일어난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수고롭지 않냐는 말에 미츠키가 나는 학교가 즐거우니까 일찍 가도 괜찮아, 하고 대답했으므로 재차 묻지는 않았다. 미츠키의 어깨를 붙잡고 길이 꺾일 때마다 그의 머리가 조금씩 흔들리는 것이나 찬바람에 붉어진 귓바퀴를 보는 일은 꽤 즐거웠다.


 그건, 어느 겨울의 일이었다.

 버스를 타고 하교하는 길이었다. 겨울의 해는 짧아서, 당번 일을 마치고 나니 어느새 해가 어스름하게 가라앉고 있었다. 아스팔트 바닥의 틈마다 노을이 붉은 용암처럼 깔려 있었다. 이오리는 사람이 적은 버스 한쪽에 앉아 무심하게 창밖을 응시했다. 하교 시간과 퇴근 시간 사이에 낀 애매한 때라 길에도 사람이 적었다. 가까운 거리만 순회하는 버스는 도로가 비어 있어도 좀처럼 속도를 내지 않았다. 김이 서린 창문을 옷 소매로 닦아내며 길가를 내다보는데 문득, 그의 시야에 익숙한 뒷모습이 걸렸다. 이오리는 저도 모르게 차가운 창문에 이마를 가져다 댔다.

 미츠키는 자전거에 올라타지 않고 손으로 자전거를 끌며 천천히 걷고 있었다. 그와 같은 학교의 교복을 입은 여자아이가 그의 옆에서 나란히 보폭을 맞추고 있었다. 머리가 길고, 미츠키와도 제법 키 차이가 나는 체구가 작은 여자아이였다. 무슨 얘기를 하는 것인지 그들은 몇 마디 말을 나누다가 이내 거울을 보는 것처럼 비슷한 얼굴로 웃었다. 노을 탓인지 아니면, 무엇 때문인지, 미츠키의 얼굴 윤곽이 발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버스가 그들 옆을 스쳐지나가는 짧은 순간, 그 모습이 망막에 찍어누른 것처럼 잔상이 남았다.

 이오리는 그들의 모습이 보이지 않게 된 뒤에도 한동안 창문에 얼굴을 붙이고 있다가, 뒤로 푹 꺼지듯이 좌석 등받이에 기대 앉았다. ……역입니다, 이번 정류장은, ……. 그는 한참 뒤에야 자신이 내릴 정류장을 지나쳤다는 걸 알았다. 급하게 벨을 누르고 이름 모를 정류장에 내리자 마치 표류하는 부표가 된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낯설고 어려운 곳에 떨어진 것 같은 기분이기도 했다. 이오리는 몇 정거장이나 되는 거리를 발로 걸어서 되돌아왔다. 그러면서 내내 자꾸만 좀 전에 보았던 그 얼굴을 곱씹었다.

 그런 표정은 처음 보았다. 미츠키에게 자신이 모르는 얼굴이 있다는 것 또한 처음 알았다. 이즈미 이오리는 이즈미 미츠키에 대해 모든 것을 알고 있었는데, 정말로? 그럴 리가 없었다. 가까운 사람일 수록 상대에 대해 전부 알고 있다는 착각을 하기 마련이라는 사실을…… 그런 쉬운 사실을, 그는 그때 처음으로 깨달았다.

 깨닫고 난 뒤에도 그는 얼빠진 사람처럼 한참 현관문의 문고리를 잡고 서 있었다. 가까스로 문을 열고 집 안으로 들어섰을 때, 미츠키는 아직 집에 없었다. 그러고보니 미츠키는 요즘 종종 하교가 늦었다. 그 여자아이 때문일지도 모른다고 어렵지 않게 짐작하며 이오리는 2층으로 올라갔다. 목도리를 풀고 겉옷을 벗어 의자에 걸쳐 놓고 침대 가장자리에 풀썩 주저 앉았다.

 마치 주전자의 물이 끓어오르는 것처럼, 그의 안에서 자꾸만 무언가가 끓고 있었다. 그것은 어떤 충동이었다. 이오리는 미츠키의 방에 들어가서 서랍이나 옷장 같은 것을 열어보고 싶었다. 혹은 핸드폰을 열어 문자나 메모 같은 것을 보고 싶기도 했다. 그것은 말하자면 자신이 모르는 모든 것을 확인하고 싶은 충동이었다. 미츠키에게는 얼마나 더 그가 모르는 얼굴이 있을까? 자라게 된다면 가까워질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그의 키가 미츠키를 넘어서서 멈추지 않는 것처럼, 그들은 앞으로도 점점 더 멀어지기만 할 것이다. 그들은 형제였으나 또한 타인이기 때문에. 가장 가까이 있는데도 멀게 느껴진다니, 차라리 아예 타인이었으면 좋았을 텐데.

 …아예 타인이었으면?

 이오리는 빈 벽을 멍하니 노려보며 한참동안 그 자리에 앉아 있었다.






 3


 "나랑 달리 이오리는 뭐든 다 잘하잖아. 그 머리를 본인을 위해 쓰라고!"


 미츠키가 여덟 번째 오디션에 떨어졌을 때, 미츠키는 이오리에게 그런 식으로 화를 냈다. 화를 뱉어낸 후의 어색하고 침잠한 침묵을 견디기가 어려웠던 것인지, 그는 이오리를 내버려두고 빠른 걸음으로 앞서갔다. 이오리는 부러 걸음을 서서히 늦췄다. 미츠키가 돌아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는데, 그는 점점 더 멀어지더니 이내 길가의 사람들 사이로 파묻히듯이 사라졌다. 미츠키의 모습이 보이지 않게 되자 이오리는 길가에 멈춰 서서 멀거니 그가 사라진 방향을 바라보았다. 이제는 거리에서 길을 잃어도 형이 찾아줄 나이는 아니구나, 하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애초에 혼자서 길을 잃어본 적은 한 번도 없다는 사실은 뒤늦게서야 기억났다.

 그러고서 며칠 뒤엔가, 미츠키가 이오리의 방에 찾아왔다. "이오리, 생크림 케익 먹을래?" 케익이 먹고 싶지는 않았지만 그러겠다고 했다. "그럼 만들어줄게. 도와줘." 미츠키는 그의 손을 끌고 가게의 주방으로 갔다. 그날은 마침 가게가 쉬는 날이었다. 미리 준비해둔 것인지 넓은 조리대 위에 생크림이나 보울이나 딸기 같은 것이 어지럽게 올라와 있었다. 미츠키는 익숙한 손길로 반죽을 하고 딸기를 자르고 생크림에 거품을 냈다. 이오리는 케익 틀에 박력분을 뿌리며 전동 거품기가 요란한 소리를 내며 돌아가는 것을 지켜보았다.

 흰색 액체는 금방 몸집을 불려 몽실몽실한 크림이 되었다. "나 예전에는 이게 되게 신기했었는데." 미츠키가 거품기를 흔들며 말했다. "액체였는데, 그냥 휘젓기만 하는 걸로 뭔가 다른 게 된다는 게 말야." "그건 크림 속에 들어 있는 유지방이 충격에 의해 파괴되어서 서로 밀집하기 때문이래요." "그래? 처음 알았네."


 "저번엔 미안했어."


 미츠키가 작고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사과할 일은 아니라고 생각해요." 이오리는 그렇게 대답했다.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귀염성이 없는 대답이었다. "아니야, 그런 식으로 말하는 게 아니었어." 미츠키는 입술을 오므린 채 생각에 잠긴 얼굴로 오븐을 예열하고 도마며 계량컵 같은 것을 개수대에 넣어두었다. 잠시 뒤 그가 덧붙였다.


 "그냥, 변하는 게 너무 쉽네 하는 생각이 들었어."

 "그런가요."

 "응. 너도 나도 말야."


 그런가요, 이오리는 똑같은 대답을 되풀이할 수밖에 없었다. 오븐 안에서 반죽이 천천히 부풀고 있었다.

 미츠키가 만들어준 케익은, 언제나처럼 달고 맛있었다.






 4


 어느 날 학교에 다녀왔을 때, 미츠키는 거실 소파에 누워 잠들어 있었다.

 이오리는 팔걸이에 머리를 기대고 가만히 눈을 감고 있는 그 얼굴을 오랫동안 내려다보았다. 부드러운 얼굴선에 늦은 오후의 나직한 햇살이 머물러 있었다. 미츠키는 이마에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걷어올려주는 손길에도 잠을 깨지 않았다. 이오리는 조용히 숨소리를 죽였다. 그때 그는 어쩐지 죄를 짓는 기분이 되었는데, 스스로도 그 기분의 출처를 정확하게 알 수가 없었다. 숨소리까지 죽여가며 누군가의 얼굴을 오래 쳐다보는 일. 뺨을 가로지르며 비치는 그림자의 각도와, 감은 눈꺼풀의 모양새를 기억하는 일…… 둥근 이마를 더 만져보고 싶다고 생각하는 일. 그런 일들을 어떤 식으로 나누고 분석하고 이름붙일 수 있겠는가? 이즈미 이오리는 처음으로 명명命名을 포기하기로 했다.

 정의하지 않으면 변하는 일도 없을 것이다.

 그날 밤에는 또 꿈을 꾸었다. 떨어지는 꿈이었다. 그는 가장자리에 서 있었는데…… 가장자리가 아니었다. 그것은 어떤 선 위였다. 그는 줄타기를 하고 있었다. 조금만 발을 헛디뎌도 아래로 떨어지는…… 그런 아슬아슬한, 그러니까, 그는 꿈에서 자꾸만 균형을 잃었고 아래로 떨어졌다. 그 감각은 항상 섬뜩했다. 아래로 훅 꺼지는…… 돌이킬 수 없는 감각.

 아침에 눈을 떴을 때 이오리는 생각했다. 이것은 나쁜 꿈이구나,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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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마소우타마/ 열과 빛


 요츠바 타마키에게 오오사카 소고에 대한 것을 묻는다면, 부드럽고 매끈한 천으로 감싼 압정 같은 놈이라고 대답할 것이다. 잘 다림질 되어 구김이 없어 보이고, 만지면 감촉이 좋을 것 같고, 값비쌀 것 같고, 하지만 그 안에는 어떤 것이 있는지 알 수가 없는. 몇 번 그 천 안으로 손을 쑥 집어넣어 안에 든 것을 꺼내 본 이후로는 예전만큼 그가 불투명하게 느껴지지는 않았으나, 근본적으로 소고는 속내를 잘 드러내지 않는 사람이었다. 그것은 옆에서 아무리 말로 표현해달라고, 솔직하게 털어놓으라고 졸라도 쉬이 변하지 않는 근본에 가까운 성질이어서, 사람은 타인의 마음에 들지 않는 점도 감내하며 살아가야하는 것이구나…… 하고 이상스레 생각하게 될 때가 있었다.


 "아."


 그만큼 타마키는 그의 기척에 기민해지는 법을 익혀가는 중이었다.

 작게 입소리를 낸 소고가 갑작스럽게 동작을 멈췄다. 몸을 돌려 쳐다보자 그는 마치 바닥에서 무언가를 찾는 것처럼 눈을 내리깔고 시선으로 발치를 훑고 있었다. 리허설을 하는 와중이었다. 고개를 숙이고 있는 탓에 얼굴이 잘 보이지 않았으나, 앞머리 사이로 슬쩍 보인 그의 미간이 찌푸려져 있는 것 같기도 했다. "왜 그래?" 타마키가 묻자, 소고가 반 박자 느리게 고개를 들었다. 그, 아주 짧은 찰나. 소고는 짐짓 침착한 얼굴로 "아무것도 아니야." 하고 대답했다.

 그 찰나를 알아차리게 된 것이 지금까지의 경험의 산물이라면 산물이었다. 타마키는 뭔데, 무슨 일이야, 하고 그에게 따져물으려고 했으나, "다 됐나요?" 하고 물어보는 스태프의 높은 말소리가 그들 사이에 날아들었다. "네, 리허설은 이정도면 될 것 같아요. 감사합니다." 소고가 재빨리 대답하고는 타마키의 옆에 반듯하게 섰다. 타마키는 자신보다 조금 낮은 곳에 있는 그의 옆얼굴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집요한 시선을 느꼈을 텐데도 한 번 돌아보지도 않는 것이, 그의 의혹을 더욱 가중시켰다. 그러나 그가 그 의혹을 어떤 방식으로든 풀어내기도 전에 간주가 시작되었다. 녹화 방송이었으나 촬영을 지연시켜서 좋을 것이 없다는 것은 이제 타마키도 알았다.

 음악이 들려오자 몇 번이고 연습해서 익숙해진 동작을 따라 몸이 저절로 움직였다. MEZZO"의 안무는 항상 그다지 격렬하지 않았다. 팔을 뻗었다가 내리고, 천천히 가까워졌다 멀어지고, 문득, 타마키는 그가 평소보다 조금 동작이 굼뜬 것을 알아차렸는데, 시선이 마주치고, 다시 가까워졌다가 엇갈려서 서로를 지나치는 순간, 소고의 목덜미에 배어나온 땀방울 같은 것이 얼핏 보였고, 눈으로 내내 그를 쫓지 않도록 조심하면서 움직이자 4분 남짓한 곡이 아주 길게 느껴졌다.

 끝나는 반주가 서서히 잦아들었다. 타마키는 몸을 긴장시키며 자신과 조금 떨어진 곳에 서 있는 소고를 맹렬하게 쳐다보았다.


 "네, OK입니다!"


 스태프가 명랑한 목소리로 외쳤다.


 "수고하셨, 습, 아?"


 소고는 언제나처럼 인사를 하려고 했으나 그럴 수가 없었다. 보폭이 큰 걸음으로 두어 걸음만에 그에게 다가온 타마키가 어떤 예고도 없이, 정말로 갑작스럽게 몸을 숙이더니 그를 쌀포대처럼 들쳐업었기 때문이었다. 굉장히 순간적으로 일어난 일이었던 탓에 소고는 뇌의 처리속도가 현실을 따라가지 못하는 기분을 느꼈다. 배가 눌리고 몸이 공중에 뜨는 감각이 머리를 더욱 느리게 돌아가게 했다. "저기, 저기 타마키 군? 타마키 군? 이거 뭐하는 거야?" 그가 더듬더듬 항의했으나 타마키는 대답도 하지 않고 휙 몸을 돌렸다.


 "반쨩, 우리 다음 스케쥴 있어?"

 "어? 아니, 없을 텐데."

 "그럼 숙소로 돌아가도 되는 거지?"


 그럴…… 걸, 하는 대답을 듣자마자 쏜살같이 촬영장 출구로 튀어나가는 타마키의 뒷모습은 사뭇 비장하기까지했다. 이게 뭐하는 거냐니까? 저기, 저기 타마키 군! 듣고 있어? 타마키 군! 소고의 목소리가 멀어져가며 복도를 울렸다. 한참 잘 나가는 듀엣의 희귀한 모습을 감상하느라 넋이 나간 스태프들에게 허둥지둥 인사를 건네며, 반리는 그들을 쫓아 황급하게 촬영장을 나섰다.






 노도와 같은 기세로 주차장까지 내려와 구겨지듯이 차에 올라탄 후, 소고는 이번에야말로 화를 내야할 타이밍인가 하고 생각했지만, 자신의 옆에 앉아 왼쪽 발목을 잡고 휙 무릎 위에 올려두는 타마키를 보며 그 반대가 되겠구나 하는 것을 짐작했다. 타마키가 바짓단을 제멋대로 구기듯이 걷어올려 그의 발목을 드러냈다. 발목은 한 눈에 보기에도 복사뼈 부근이 붉게 달아올라 퉁퉁 부어 있었다. 타마키가 바짓단을 올려 잡은 채로 그를 노려보았다. 소고는 할 말이 없어져서 입을 다물었다. 타마키가 운전석에 올라탄 반리에게 물었다.


 "반쨩, 뭔가 시원한 거 있어? 얼음이라든가."

 "얼음은 없고 방금 산 스포츠드링크가 있긴 한데." 

 "그럼 그거라도 줘."


 차가운 음료수 병이 발목에 눌리듯이 닿았다. 반사적으로 아, 하는 신음이 튀어나왔다. "어디 다쳤어?" 반리가 후진을 하며 뒤늦게 물었다. 이제는 더 숨길 여력도 없어 솔직하게 대답하기로 했다.


 "아까 리허설 할 때, 그, 무대의 단이 조금 높아서요. 잘못 디뎌서 발을 좀 삐었어요."

 "이게 조금이야? 엄청 부었잖아!"


 역시나 타마키는 화를 냈다. 화를 내면서도 스포츠드링크를 가져다대주는 손은 떨어지지 않는다. 몇 마디 더 쏘아붙일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그 대신 입을 다물고 부루퉁한 얼굴을 한다. 좋지 않은 패턴이었다. 차라리 솔직하게 화를 내주는 쪽이 조금 더 달래기가 쉬울 텐데. 소고는 그가 어느 정도로 화가 나 있는지 속으로 가늠해보았다. 이런 식으로 화를 낼 때의 그는 성가시고 다루기가 어렵다. 어떤 말에 어떤 식으로 반응하는지 알 수가 없어서, 그와 자신이 다른 사람이라는 것을 절실하게 느끼게 된다.

 하지만 걱정해주는 거겠지. 타마키는 어느새 고개를 돌리고 창밖을 쳐다보고 있다. 이마며 콧대의 윤곽이 창밖으로 가로등 불빛이 지나갈 때마다 밝아졌다 어두워지기를 반복했다. 소고의 발목은 여전히 그의 다리 위에 올라가 있는 채였다. 화를 내는 것이 다정함과 연결되어 있다니 이상한 일이라는 생각을 하며, 소고는 멀거니 시선으로 그 옆얼굴의 자취를 쫓았다.






 숙소에 도착해서 내리는 것 역시 타마키의 도움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걸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말했으나 씨알도 먹히지 않았다. 쌀포대처럼 들쳐 메지는 경험을 살면서 두 번이나 하게 될 줄은 몰랐다. 거실에서 TV를 보고 있던 리쿠와 미츠키가 놀라 방까지 쫓아 들어오는 것을 보니 부끄럽기까지 했다. "뭔데? 무슨 일인데?" 그렇게 묻는 리쿠에게는 좀 전에 반리에게 했던 설명을 되풀이해줬다. 미츠키가 눈치 빠르게 얼음 주머니를 만들어서 가져왔다. 얼음이 차가워서 뭔가 안심이 됐다.

 괜찮아? 아프겠다. 엄청 부었네. 내일 병원에 가는 게 좋지 않을까? 뭔가 더 필요한 거 있어? 일어나지 말고. 그런 다정한 말들이 오가고, 리쿠와 미츠키가 방을 나서고 나서도 타마키는 여전히 그 자리에 있었다. 괜시리 눈치가 보여 손에 든 얼음 주머니를 만지작거리자 달그락거리는 소리가 난다. 먼저 입을 연 것은 타마키였다. 여전히 좀 볼멘 소리였다.


 "아프지 않았어?"


 그의 말은 언제나 부속품이 하나 둘쯤 빠진 듯 이해하기가 어려웠다. "언제?" "아까, 춤출 때 말야." "아아."


 "일이니까…… 참아야 할 것 같아서. 리허설 다 했는데 갑자기 못하겠어요, 하는 것도 안될 일이고."

 "이상해, 그런 거. 소쨩 표정도 변하지 않았었구."

 "그야 참는 건 익숙하니까."

 "익숙하면 아프지도 않아?"


 소고는 뒤늦게 타마키가 자신의 아픔에 대해서 묻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건 스스로도 되짚어본 적이 없는 일이라 선뜻 대답할 수가 없었다. 아팠나? 아팠던가. 아팠던 걸까.

 그때 문득 떠오른 것은 아직 교복을 입을 때의 기억이다. 중학생 때였던가, 언제 한 번 반에서 독감이 유행한 적이 있었다. 병증은 역시나 그를 피해가지 않았고, 살면서 그렇게나 열이 올랐던 것은 그때가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도무지 학교에 나갈 수가 없어 침대에 누워, 이마에 물수건을 얹고 비몽사몽하는 가운데 누군가가 자신을 내려다보았던 것이 기억난다. 누군가, 가 아니다. 그것은 아버지였다. 눈을 감고 있었는데도 그것을 알 수 있었던 것은 이내 들려온 목소리 때문이었다.

 건강 관리도 제대로 못하는구나.

 목소리는 그렇게 말했다. 그래서 한심하다든가, 안됐다든가 하는 말도 없이 딱 그 말만. 몽롱한 와중에도 그 말의 어조와, 칼로 도려낸 듯 떨어지는 말끝은 기억에 눌러 박은 듯이 남았다.

 그 이후 집을 나올 때까지 오오사카 소고는 앓아누워 본 적이 한 번도 없었다.


 "나는 아팠던 걸까?"


 말이 자연스럽게 흘러나왔다. 입밖에 내고서야 아차, 했다. 그 역시 모호한 질문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타마키는 아랑곳 않은 표정으로 대답했다.


 "그걸 왜 나한테 묻는 거구. 소쨩, 자기가 아픈 것도 몰라?"

 "으음……"

 "소쨩은 바보네."

 "아, 하하, 그럴지도."


 침대 가장자리에 나란히 앉아 있던 타마키가 풀썩 그의 어깨에 머리를 기댔다. 머리카락이 목 언저리에 닿아 간지러운 느낌이 들었다. 소고는 무심코 웃었다. 타마키가 무게를 싣듯 몸을 기울이며 웅얼거리는 소리로 거듭, 말했다.


 "소쨩은 바보야."


 그 목소리에 눌러담긴 짜증이나 걱정 같은 것이 문득, 사랑스러웠다.


 "응, 그러게."


 그가 웃음기 실린 목소리로 대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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