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즈마 군, 사실 나 비밀이 하나 있어." 아사히가 그렇게 말했을 때 카즈마는 신발 끈을 고쳐 매던 중이었다. "어, 그래." 그들의 대화는 곧잘 실없는 방향으로 흘러가곤 했으므로 카즈마는 대수롭지 않게 대꾸했다. 트럭 한 대가 인도에 서 있는 그들 옆을 가까이 스치고 지나갔다. 차 소리가 소란스러워서 옆에 있는 사람의 목소리도 잘 들리지 않는 저녁이었다. 아사히는 깜빡거리는 신호등의 불빛을 한 번 쳐다보고는 다시 말했다. "왠지 카즈마 군한테는 말하고 싶어서."
길가의 가게들이 머리 위에서 하나 둘 씩 간판의 불을 밝히고 있었다. 카즈마는 그제야 고개를 들었다. 무슨 얘기를 하냐는 듯한 표정에, 아사히가 씩 웃었다. 아사히는 의뭉스럽다기보다는 솔직한 성격이었지만, 카즈마는 종종 그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인지 잘 알 수가 없었다. "말하고 싶은 거야, 말하고 싶지 않은 거야." 그렇게 묻자 아사히는 어깨를 한 번 으쓱하고는 대답했다. "모르겠어. 하지만……" 말끝이 한숨처럼 묻혔고 긴 호흡에 흰 연기가 입가에서 흩어졌다. 겨울이 바짝 살을 조이는 계절이었다. 드문드문 불이 밝혀진 거리와 건물의 꼭대기와 그 위의 허공을 가늠하듯이 쳐다보던 그는 동물이 제 털 속으로 몸을 웅크리는 것처럼 목도리 속으로 턱을 묻었다.
"봄 쯤에? 날이 따뜻해지면 말해줄게."
무슨 놈의 비밀이 계절을 타. 그렇게 대답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았으나 그 뭔지도 모를 비밀, 그 비밀이라는 말 한 마디 때문에 호기심이 불쑥 머리를 치켜들었다. 다그치면 입을 다물어 버릴 것 같아서 카즈마는 그러냐, 라고 한 마디 하고 말았다. 그것이 이미 서너 달 전의 일이었다. 사소하고 붕 뜬 것 같은 대화였지만 나나세 카즈마는 그 일을 잊어버리지 않았다. 집 근처 공원을 가로질러 가면서 망울이 맺힌 벚꽃 나무를 보거나, 뉴스에서 화분증 경보를 보거나, 부쩍 날이 따뜻해졌다는 말을 듣거나 할 때마다 문득 그날의 대화가 떠올랐다. 비밀, 이라는 말의 어감 때문인지 아니면 봄이라는 애매한 기한 때문인지 그때마다 발가락 밑이 간지러워지는 기분이 들었다.
해가 점점 길어져 연습이 끝나고도 낮처럼 밝았다. "이제 아이스크림을 먹을 수 있는 계절이 돌아왔어!" 요시무네는 선포하듯이 그렇게 말하고는 역 반대 방향에 있는 편의점으로 그들을 끌고 갔다. 제각기 다른 아이스크림 막대를 입에 물고 서로 한 입씩 먹어보자는 둥, 네 거가 더 맛있는 것 같다는 둥 조잘거리는 모습은 밴드맨이라기보다는 어디에서나 흔히 볼 수 있는 고교생 같았다. 카즈마는 그 분위기에 딱히 동조하지 않으면서도 제 아이스크림까지 뺏길까봐 세 입 만에 먹어치웠다. "아ㅡ 카즈맛치ㅡ 하드는 녹여 먹어야 하는 거라고ㅡ" 카즈마는 눈썹을 세워 보이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 했다.
전철을 타는 것은 아사히와 카즈마 뿐이었으므로 역 근처까지 왔을 땐 둘 밖에 없었다. 아사히는 역 앞의 쓰레기통에 아이스크림 봉지를 버리고는 그를 돌아보았다. 돌아보았을 때, 눈이 마주쳤다. 눈이 마주쳤기 때문에 질문은 자연스럽게 나왔다.
"네 그 비밀이라는 건 아직이야?"
아사히는 그 말을 곧장 알아들은 것 같았다. 그는 조금 당황한 것 같다가, 우물쭈물하다가, 이내 웃었다. 그의 얼굴은 웃는 표정이 자연스러워서 살면서 마주치는 웬만한 모든 일들은 무마시킬 수 있을 것처럼 보였다. 카즈마는 그를 바라보기만 했다. 늦은 오후의 길가에는 사람이 적었다. 한적한 탓인지 대화의 공백이 더 크게 느껴졌다. 잠시 뒤 아사히는 다시 위를 올려다 보았다. 위, 랄까, 정확하게는 하늘. 아직 밝지만 저 너머에서부터 어렴풋이 불그스레한 빛이 번지고 있었다. 그가 슬그머니 손을 뻗어 카즈마의 손목을 잡았다. 그 손길이 조심스럽고 손바닥 안쪽이 따뜻해서, 카즈마는 또 다시 간지러운 기분을 느껴야만 했다.
"따라올래?"
무엇인지는 몰라도 그러기로 했다.
아사히가 그를 데리고 간 곳은 근처에서 가장 높은 23층짜리 빌딩의 옥상이었다. 카즈마는 역 근처에 그런 건물이 있다는 것을 처음 알았다. 한 번도 눈 여겨 본 적이 없는 탓이다. 엘리베이터 안에서 아사히가 물었다. "혹시 카즈마 군, 고소공포증 같은 거 있는 거 아니지?" 띵동, 문이 열리는 소리. "없어, 있을리가." 요즘에는 보통 옥상 같은 곳은 잠궈 놓기 마련인데, 그곳은 열려 있었다. 문 한쪽에 간신히 매달려 있는 잠금쇠가 장식품처럼 보였다. 반쯤 열려 있는 문에서는 철 냄새가 났고 슬쩍 밀자 삐걱거리는 소리가 요란했다. 아사히는 그 모든 것에 익숙한 것처럼 보였다. 문턱을 넘자 봄철의, 아주 짧은 계절에만 느낄 수 있는 적당히 미적지근하고 마른 공기가 느껴졌다. 다른 건물들의 머리꼭지가 내려다보이는 것이 제법 풍경이 좋았다. 하지만 풍경이나 보자고 여기로 올라온 건 아닐텐데.
아사히가 옥상 가장자리의 난간 쪽으로 몸을 수그렸다. 너무 수그린 탓에 발이 공중에 뜰 것처럼 보였다. 위에서 내려다 본 거리에는 여전히 사람이 적었다. "위험하게." 그렇게 말하자 아사히는 빙그레 웃었다. "별로 그렇지도 않아." 나한테는, 이라고 덧붙이는 말의 의미는 조금 뒤에야 알았다.
그가 곧장 허리쯤까지 오는 난간을 딛고 섰을 땐 아무리 카즈마라고 해도 조금 놀랄 수 밖에 없었다. "네 비밀이라는 게 자살쇼야?" "아냐, 아냐." 아니라고 능청스럽게 말하고 있으면서도 한쪽 발이 이미 허공에 가 있었다. 이런 미친, 카즈마가 생각나는대로 욕을 주워섬기기도 전에 다른 발이 떨어졌다. 눈을 한 번 감았다가 떴다. 무언가를 판단하기에는 너무 순식간의 일이었다.
아사히는 여전히 그 자리에 있었다.
그가 해를 등지고 서 있어서, 문득, 해가 지는구나, 하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아사히의 어깨나 정수리의 윤곽이 붉은 빛으로 뚜렷했다. 그의 발밑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아무것도 없었는데, 그는 마치 땅을 딛고 있는 것처럼 편안한 얼굴로 허공에 서 있었다. 카즈마는 아사히가 공중에 서 있다는 사실을 가까스로 깨달았다. 그 모습이 전혀 어색하거나 생경해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이 더 이상했다. 오오토리 아사히는 워낙에 그런 사람이었다. 무언가를 받아들이거나, 받아들여지거나, 그런 일이 익숙한 사람.
"……엄청나네."
"그런가?"
그런가, 라니. 누가 보면 너 오늘 신발이 멋있네, 같은 질문을 한 줄 알겠다. 어쨌거나 혼란은 길지 않았다. 카즈마는 그런대로 그 상태, 혹은 현상을 받아들였다. 아사히는 멋쩍은 표정으로 그를 내려다보았다. 그 어깨 너머로 해가 지고 있었다. 붉은 빛이 푸른 빛을 몰아내고, 또 그 붉은 빛은 어둠에 자리를 내주는, 하루 중 시간의 흐름이 가장 강하게 느껴지는 때. 아사히가 그에게 손을 내밀었다. "나는 왜?" "나랑 손을 잡으면, 같이 걸을 수 있거든." 싫으면 할 수 없지만. 카즈마는 잠시 주춤했다. 고소공포증 같은 건 없다고 말했지만 아무래도 익숙하지 않은 탓이다. 그의 얼굴에 미심쩍은 표정이 떠오르자 아사히는 허리를 숙이고 눈을 몇 번 깜빡였다. 카즈마는 내밀어진 손을 보면서 문득 방금 전 자신의 손목을 잡고 있던 그 손바닥의 감촉을 생각했다. 그것을 떠올리자 익숙하거나 익숙하지 않거나 하는 류의 감정은 별로 중요하지 않은 것처럼 느껴졌다.
"아, 잠깐, 잠깐, 좀."
"똑바로 서면 괜찮을 거야."
그 말대로 생각보다 무섭지는 않았다. 마치 발 아래 단단한 것을 딛고 있는 것처럼 안정감이 있었다. 역 앞 길에 늘어선 가로등이 하나씩 불을 밝히는 것을 내려다보며, 걸음마를 처음 익히는 사람 마냥 천천히 걸었다. 얕은 어둠에 묻힌 꽃나무들과 드문드문 도로를 지나치는 자동차의 헤드라이트, 역 안으로 들어가는 사람들과 어렴풋한 네온사인. 마치 빛나는 모래를 밟으며 지나가는 것 같다. "영화 같네." 불쑥 그렇게 말하자 대답이 돌아왔다. "하울의 움직이는 성?" "그래, 그런 거." "그럼 카즈마 군이 소피인가." "재미없는데." 하하, 소리 내어 웃는 소리.
"사실 이건 미사토하고 요시무네도 몰라. 부모님은 알지만. 가족력이거든."
"그러냐."
"응. 그래서 어렸을 땐 이상한 줄도 잘 몰랐는데, 뭐, 부모님도 별 말 안했고. 하지만 어쨌거나 숨기는 게 좋겠다, 라는 생각은 좀 나중에 했어."
그 말을 듣고 카즈마는 문득 어떤 생각을 했고, 그 생각이 적당한 것인지 잠시 망설였다. 꼬리에 꼬리를 무는 생각들은 한 가지 질문으로 수렴했다.
"근데 왜 나한테는 말하는 건데?"
맞잡고 있는 손아귀에 불현듯 힘이 들어갔다. 이미 해가 반쯤 진 뒤였지만 아사히의 얼굴이 문득 붉어졌다가 하얘졌다가, 이내 다시 붉어지는 것이 똑똑히 보였다. 그 조금은 멋쩍고, 조금은 수줍은 듯한, 그리고 또 조금은 무서워하는 것도 같은 옆얼굴을 본 순간 카즈마는 그가 무슨 말을 할 것인지 알아차렸다. 어느새 멈춘 발걸음 아래로 퇴근 시간 무렵의 헤드라이트 행렬이 하얗게 지나가고 있었다. 덩달아 손이나, 목, 배 안쪽이 맹렬하게 간지러워졌다.
"그야…… 좋아하는 사람한테는 뭐든 말하고 싶어지는 법이잖아."
그를 돌아보는 아사히의 얼굴이 무척이나 비장한 표정을 짓고 있어서 다른 때였으면 웃었을 것도 같다. 살면서 이런 곳에서 고백을 받을 줄은 생각도 못했는데, 라든가, 비밀이 하나만 있는 것도 아니었잖아, 라는 생각도 들었지만 그 얼굴과 말 앞에서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되었다.
어느새 밤, 이었다.
아악 글 재활 너무 시급해~~~~~
걍..머.. 손 푸는 느낌으로 썼는데 글 내용이 진짜 실없다
뒤에 안 쓸 것 같은데 마무리 너무 실없어서 일단 상을 붙여봄 뒷편 써줄사람 구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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