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이모브/ 책상 밑 어둠


1


 낮부터 공기에서 축축한 냄새가 났다. 막 세탁기에서 나온 빨래나, 젖은 수건에서 날 것 같은 그런 냄새였다. 아침에 일기예보를 볼 적만 해도 그래, 비가 오는구나, 했던 것 같은데, 집에서 나설 때는 까맣게 잊어버렸다. 학교가 끝날 무렵까지 오후 내내 날씨가 맑았다. 조금 더운 것도 같았다. 그러나 저녁 무렵 사무실에서 막 나왔을 때는 하늘이 거무죽죽했다. 금세라도 거꾸로 쏟아질 것 같이 어둡고 낮은 하늘이었다. 그러고보니 오늘 비가 온다고 했어요. 그래? 그거 큰일이네, 우산 없는데. 같은 대화를 나눈지 5분도 되지 않아 빗줄기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초여름의 전형적인 변덕스러운 날씨였다. 빗물이 운동화 바닥에 차올라 양말까지 적시는 것은 금방이었다. 라면을 먹으러 가려던 발걸음을 급히 틀었다. 레이겐의 원룸은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었고, 모브의 집보다 훨씬 가까웠다.

 모브는 문 앞에 서서야 그의 집에 와보는 것은 처음이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그렇게 생각하자 불현듯 긴장이 되는 것도 같았다. 모브는 젖은 옷깃을 살에서 떼내듯이 잡아당겼다. 레이겐은 물 묻은 손에서 열쇠가 자꾸 미끄러진다고 불평을 했다. 문은 조금 뒤에 열렸다. 레이겐의 방은, 남자 혼자 사는 집치고는 그다지 더럽지는 않았지만 아주 깔끔하다고 말하기도 어려웠다. 전날 밤 깔아두었던 이불이나 옷가지 같은 것들이 몇몇 바닥에 널려 있었고, 책장의 책들은 제각기 높낮이가 다르게 꽂혀 있었다. 레이겐은 방 안으로 들어가면서 세탁소에서 찾아온 지 얼마 안된 것처럼 보이는 양복 겉옷을 자연스레 집어 들어 책상 위에 올려놓았다. "먼저 씻어도 돼." 그 말을 듣자마자 갑자기 축축한 목덜미가 의식되었다.

  걸을 때마다 발바닥과 타일 사이에서 처벅처벅 소리가 났다. 젖은 셔츠와 교복 바지를 변기 뚜껑 위에 대강 놓아두었다. 샤워기의 물은 제일 뜨거운 쪽으로 돌려 놓아도 줄곧 미지근했다. "갈아입을 옷 여기 있어." 문의 바깥에서 목소리가 희미하게 들렸다. 모브는 하마터면 타일 위에서 미끄러질 뻔했다. 차가운 벽에 어깨를 쿵 찧고 나서야 문득 정신이 들었다. 손바닥으로 얼굴을 세게 문지르자, 살갗이 화끈거렸다.


 "뜨거운 물 잘 나와?"


 그 말에 모브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근데 왜 이렇게 얼굴이 빨개." 레이겐은 그의 뺨을 한 번 툭 치고는 욕실로 들어갔다. 모브는 화들짝 그를 돌아보았다. 이내 물소리가 들렸다. 레이겐이 건네준 티셔츠는 반팔인데도 소매가 팔꿈치까지 내려왔다. 소매 아래로 손을 집어넣어 머쓱하게 맨 팔뚝을 쓰다듬다가 손을 들어 느리게 뺨을 문질렀다. 손등에서는 낯선 샴푸 냄새가 났다. 물소리, 그리고 물소리. 뱃속이 이상하게 부글거렸다. 이건, 어떤, 느낌이었더라. 그는 어렵게 발을 떼어 책상 앞으로 다가갔다. 마치 발바닥이 바닥에서 2cm쯤 떨어져 있는 것처럼 걸음이 어색했다. 털썩 의자에 주저앉자 등받이가 거세게 삐걱거렸다. 책상 옆에 난 쪽창으로 밖을 내다보았다. 바깥에서는 여전히 비가 오고 있었다. 툭, 툭, 툭. 창틀을 두드리는 소리가 규칙적이다.

 이건 들떠 있는 게 아닐까.

 ……. 확실하지는 않지만 그런 것 같았다. 스스로 들떠 있다는 걸 자각하는 느낌은 이상한 것이었다. 모브는 의자 위에서 무릎을 모아 팔로 한껏 끌어안았다. 엄지발가락이 다른 쪽 엄지발가락과 가만히 맞닿았다. 책상 위에는 다 식은 커피가 반쯤 담긴 머그컵이 놓여 있었다. 심이 닳은 볼펜과 노란색 메모지, 현관 앞의 슬리퍼, 구두, 모아둔 재활용 쓰레기 봉투, 먼지가 얇게 쌓인 선반, 머리맡의 자명종과 모서리가 뒤집힌 얇은 여름 이불.

 타인의 흔적이 가득한 공간에 들어와 있다는 것은 묘한 일이었다. 모브는 무릎에 턱을 대고 눈을 감았다. 눈을 감자 시계 초침 소리가 크게 들렸다. 누군가의 심장소리처럼 규칙적이고 안정이 되는 박자였다. 심장이 두근거리는 한편 알 수 없이 졸리웠다. 깜빡, 잠이 들 것 같다고 생각했을 때였다.

 쾅, 창밖에서 벼락이 내리쳤다. 바깥의 거리가 일순 하얗게 밝아졌다. 모브는 화들짝 고개를 들었다. 반사적으로 놀란 동작을 하자 아직 덜 마른 발이 의자 위에서 미끄러졌다. 미처 중심을 잡기도 전에 의자에서 자빠지는 것은 한순간이었다. 바닥에 엉덩이를 찧고 나서야 정신이 들었다. 천둥이 어두운 하늘 저편으로 우릉거리며 잦아드는 것이 희미하게 들렸다. 고개를 들자 창문 너머는 여전히 깜깜했다. 엉덩이가 아팠고, 얕은 졸음은 어딘가로 사라져버렸다. 그는 세게 부딪힌 엉덩이를 문지르며 아쉽게 침을 삼켰다. 무엇이 아쉬운지는 잘 모를 노릇이었다.

 그러다가 눈을 돌렸을 때, 책상 아래에서 무언가 반짝이는 것을 본 것은 순전한 우연이었다. 비스듬한 각도에서만 보이는 무언가였다. 모브는 어정쩡한 자세로 앉아 있다가 책상 밑에 손을 슬그머니 집어넣었다. 팔을 몇 번 휘젓자 매끄럽고 작은 것이 손끝에 달각 걸렸다. 구슬? 커프스 버튼일까? 어렴풋이 짐작하며 손을 꺼냈다.

 그가 꺼낸 것은 귀걸이 한 짝이었다. 희끄무레한 진주알의 표면에 먼지가 묻어 있어 엄지로 문질러 닦았다. 리본 모양의 은색 금속이 작은 진주알을 감싸고 있었고, 좁쌀만한 비즈가 알알이 박혀 있었다. 누가 보아도 절대, 레이겐의 것이라고는 착각할 수 없는 물건이었다. 한 쌍이 아니라 한 짝만 있다는 점이 더욱 그러했다. 이리저리 돌려보다가 침 끝에 손가락이 살짝 찔렸다. 피는 나지 않았지만 제법 따가웠다.

 누구의 것일까? 아마도 여자의 것일테다. 진주 귀걸이가 잘 어울리는, 귓불이 둥글고 목이 흰 여자일 것 같다는 생각이 아무런 근거도 없이 들었다. 스승님은 지금 여자친구가 있으신 걸까? 아무리 생각해봐도 그런 것 같지는 않았다. 여자친구가 있다면 주말이나 밤에도 그렇게 한결같이 한가할 리가 없었다. 그렇다면 전 여자친구의 것일까. 스승님은 전에 애인을 사귄 적이 있으신 걸까. 그렇겠지. 그럴 것이다.

 그의 연애는 어떤 것이었을까?

 레이겐의 방에 귓불이 둥글고 목이 흰 여자가 앉아 있는 것을 상상하자 속이 아주 이상해졌다. 그녀와 레이겐이 나눌 대화 같은 것은 쉽게 상상이 되지 않았다. 알 수 없는 것을 상상해내려고 애쓰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었다. 유통기한이 한참 지난 우유를 잘못 마신 것처럼 속이 울렁거렸다. 모브는 한참동안 귀걸이를 손 위에서 동그랗게 굴렸다. 매끄럽고 차갑고 따끔했다. 창밖이 점점 더 어두워지고 있었다. 생각이 자꾸만 따끔거렸다.







2


 레이겐은 졸린 것처럼 보였다.

 모브는 베개에 뺨을 대고 비스듬하게 그를 올려다보았다. 체모가 옅은 그는 수염 자국이 잘 보이지 않았다. 손을 들어 얼굴에 가져다 대자 땀이 배인 살갗에 손바닥이 달라붙는 것처럼 느껴졌다. 왜? 하고 물어보는 목소리가 평소보다 조금 낮다. 그게 조금, 야한 것 같다고 생각하면서 모브는 고개를 저었다. 손은 뺨과 턱을 한 번 쓰다듬고는 맥없이 내려왔다. 레이겐이 나직하게 하품을 했다. 그가 느리게 눈을 깜빡이며 동작을 따라하듯 손을 들어 모브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 머리카락 안쪽 두피를 헤집는 손가락의 감촉이 부드럽다. 섹스 후의 공기는 언제나 뭉근하고 간지러웠다. 맞닿은 맨 팔뚝의 감촉이 더 간지러운 것 같기도 했다. 모브가 여러 번 눈을 깜빡이는 사이, 레이겐은 잠이 든 것처럼 보였다. "……스승님, 자요?" 귓속말을 하는 것처럼 작은 목소리로 물어본 것에는 대답이 없었다.

 모브는 턱을 괸 채로 창문을 올려다보았다. 그가 알아차리지 못한 사이 비가 오고 있었다. 간신히 구멍을 뚫어놓은 것처럼 작은 창을 타고 빗물이 길게 흘러내렸다. 툭, 툭, 툭. 단조롭게 창틀을 두드리는 소리.

 모브는 멀거니 창문을 올려다보다가 불쑥 이불 밖으로 손을 내밀었다. 팔을 있는 힘껏 뻗자 책상 아래까지 간신히 닿았다. 손끝에 덜컥 걸리는 것이 있었다. 귀걸이는 여전히 거기에 있었다. 모브는 그것을 버리거나 치우지 않았다. 그러지 못했다는 표현이 조금 더 정확하다. 그는 그의 상상의 바깥에 있는 것을 질투하거나 싫어할 수는 있어도 감히 어떻게 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이제는 자신도 그에게 흔적을 남길 수 있다는 것을 안다.

 말갛고 흰 귀걸이를 손가락으로 만지작거리고 있자니 조금씩 몽롱해졌다. 졸린 것 같기도 했다. 그는 귀걸이를 손에 꼭 쥔 채로 다시 이불 안으로 파고들었다. 반쯤 몸을 돌린 자세로 누워 있는 레이겐의 품 속으로 어물쩍 파고들자 점점 더 졸리워졌다. 잠들어 있는 몸은 따뜻하고 익숙했다. 모브는 그의 팔을 벤 채로 눈을 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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