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사카즈/ 안과 바깥



 "카즈마 군, 같이 수족관 가지 않을래?"


 그 말을 듣고 카즈마는 이번이 정확하게 네 번째구나, 하고 생각했다.

 언제가 처음이었냐하면 아마도 열흘 전 쯤이다. 카즈마는 그날 손가락을 다쳤다. 무심코 문틀에 손을 짚고 있다가 바람이 불었고 문이 쾅 닫혀버린 탓에 손가락에 금이 갔다고 했다. 병원에 가보니 다친 곳은 중지와 검지였고, 전치 2주가 나왔다. 다행히도 왼손이었지만, 카즈마가 다행의 디귿 자도 꺼내지 못할 만한 얼굴을 하고 있어서 아무도 그런 말을 하지는 못했다. "카즈마 군 탓은 아니잖아. 사고인걸." 아사히는 그렇게 말했지만 별로 카즈마에게 와닿지는 않은 것 같다. 컨디션 관리는 최우선, 기타리스트로서 자부심도 높고 자존심도 센 카즈마에게는 스스로의 신념에 어긋나는 일일테다. 그 때문에 잡혀 있었던 에덴에서의 공연도 미뤄지게 됐으니 나쁜 일이 나쁜 일을 불러온 격이었다. 사에가 마스터에게 공연을 취소해야할 것 같다고 전화 거는 것을 들으면서, 요시무네는 조용히, 카즈마에게 들리지 않을 정도로, 카즈맛치가 이렇게 풀이 죽어 보이는 것은 처음이라고 말했고 아사히는 말없이 동의했다.

 기타 없이 연습이 제대로 될 리도 없으니 자연히 일정에 숭숭 구멍이 뚫렸다. "혹시나 해서 말하는 건데, 괜찮은 것 같다고 기타 건드리거나 그러면 안돼. 알았지? 덧나면 낫는 데 한참 더 걸린다고." 사에가 엄격한 얼굴로 덧붙였고 카즈마는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였지만 그 찜찜하고 화가 난 듯한, 그러면서 한편으로는 맥아리 없어 보이는 옆얼굴이 아사히는 마음에 걸렸다.

 그로부터 며칠 동안 카즈마는 난생 처음으로 시간이 느리게 지나간다는 것을 느꼈다. 다들 무언가에 열중하고 있으니 깨닫지 못할 뿐이다. 누군가는 공부에 집중하고, 누군가는 열렬히 연애를 하고, 누군가는 부활동에 온 힘을 다하면서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비어 있는 시간을 충족시키기 위해서, 무언가를 하고 있다고 느끼기 위해서 누구나 아등바등한다. 카즈마에게는 기타가 그런 것이었는데, 퍼즐의 한쪽 귀퉁이를 빼낸 것처럼 그 부분을 빼내고 나니 나나세 카즈마라는 그림은 완전하지 못하게 되었다. 시간과 체력이 모조리 붕 떠 버려서 얼떨떨했다. 이럴 때 시간을 보낼 만한 다른 취미생활 하나 없다니 나도 참 지루한 사람이라고, 스스로가 그렇게 느껴지는 것마저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래서 부러 작곡에 열을 쏟았지만 하지만 한 번 뿔뿔이 흩어진 집중력은 쉬이 돌아오지 않아서, 사흘 째 되는 날 밤 마침내 펜을 아무렇게나 던져버렸을 때는 이미 잔뜩 짜증이 나 있는 상황이었다. 침대에 머리를 처박듯이 눕자 스프링의 반동으로 몸이 조금 떴다가 다시 가라앉았다.

 천장을 올려다보자 전등의 불빛이 희었다. 눈을 감을 때마다 둥근 전등 모양으로 잔상이 붉게 남아서 깜빡, 깜빡 느리게 눈을 깜빡였다. 사지에 힘을 빼고 있자니 점점 더 몸이 아래로 가라앉는 것 같았다. 이런 기분을 뭐라고 부르더라. 어디선가 분명, 읽었던 것 같은데. 아니었나, 영화 대사에서 나왔던가, 아무튼. 아, 그래, 아마도 무력감…… 이었지.

 …….

 그때 문득, 전화가 왔다.

 어디선가 진동 소리가 들리는 것 같은데, 핸드폰을 아무렇게나 내버려둔 탓에 찾는 데 한참이 걸렸다. 침대 매트리스와 벽 사이에서 핸드폰을 끄집어내고 액정을 보자 익숙한 이름이 떠 있었다. 무슨 일이지 싶어 곧장 전화를 받았다. "왜?" 그러자 수화기 너머에서 짧게 웃는 소리가 들렸다. "뭐야, 왜 웃어." 퉁명스럽게 말하자 조금 멋쩍은 듯한 대답이 돌아왔다. [아, 아니 아니, 그냥. 카즈마 군은 전화 받는 것도 카즈마 군 답구나 싶어서……] "그래서, 왜? 연습 있던 건 다 취소되지 않았나." 그렇게 물으며 카즈마는 몸을 돌려 모로 누웠다. 아사히가 음, 하고 목을 길게 끌었다. 무슨 말을 하려나 싶어 가만히 듣고 있었는데,


[……있잖아 카즈마 군, 유원지 좋아해?]

"뭐?"


 아사히는 예상하지 못한 질문을 했다.

 그러니까 그게, 시작이었다.






 카즈마는 유원지를 좋아하지 않았다. 영화관이나, 플라네타리움이나, 게임센터 같은 곳도 별반 다르지는 않았다. 그런 곳에는 언제나 사람이 많아서, 남들과 똑같은 것을 보고 똑같은 일을 하고 있으면 자신도 그런 별 볼일 없는 관중들 중 한 사람이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어렴풋이 들곤 했다. 그런 식의 남는 것이 없는 즉흥적인 자극은 그에게 말 그대로 '시간을 때운다' 이상의 의미를 가지지 못했다. 아, 그런데도, [남는 표가 있어서 말이야.] 하는 뻔한 거짓말을 극구 거절하지 않은 것은 이유를 잘 모르겠다. 카즈마는 한 손에는 카라멜 팝콘을 들고 머리에는 동물 머리띠를 하고 있는 스스로가 참을 수 없이 멍청하게 느껴졌다. 그는 지금 음료수를 사러 간 아사히를 기다리고 있는 중이었다. 사이 좋아 보이는 커플이 팔짱을 꼭 끼고 리본 머리띠를 한 채로 조형물 옆에 서서 사진을 찍는 것을 지켜보고 있자니 낯설다 못해 어색해서 발바닥이 간지러웠다.


 "사람 많네ㅡ 여기!"


 아사히가 그의 뒤에서 나타나 이온 음료와 콜라를 동시에 내밀었고 카즈마는 이온 음료를 받아들었다. 아사히가 아차, 하는 얼굴로 그의 손에서 다시 음료수 병을 뺏어서 제가 직접 병뚜껑을 땄다. 그 모습을 보고 있자니 어쩐지 입이 타는 것 같아서 한꺼번에 들이키자 단숨에 반이 비었다. 아사히가 쓰고 있는 흰색 토끼 머리띠는 그에게 지나치게 잘 어울려서 오히려 기묘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아사히가 바지 뒷주머니에 넣어뒀던 유원지 팜플렛을 꺼내들었다. "다음에는 뭐 탈까?" 아사히가 회전목마나, 관람차나, 롤러코스터 같은 것들을 쭉 열거하는 내내 카즈마는 찌푸린 표정으로 대답을 않았다. 아사히가 서서히 입을 다물고는 눈만 들어서 그를 흘끗, 쳐다보았다. "별로야?" 아사히가 물었고, 카즈마는 잠시 생각하다가, "넌 이런 게 즐거워?"라고 되물어보았다. 싫은 내색을 고스란히 드러내기에는 이런 곳인줄 모르고 온 것도 아니고, 약간은 완곡하게 비꼬는 말이었는데 아사히는 그 말을 듣자마자 생글생글 웃었다.


 "나는 카즈마 군이랑 있으니까 즐거워."


 오오토리 아사히는 그런 말을 너무나 쉽게 했다. 아첨이나 거짓이라면 조금 더 어려웠을 텐데 그렇지가 않았다. 카즈마는 순간 화끈해진 귓불을 저도 모르게 손으로 가렸다. 그때 한 무리의 여중생들이 교복을 입은 채로 왁자하게 떠들면서 그들 옆을 스쳐지나갔다. 소란스러웠고, 마음이 더 소란스러운 것 같았다. 카즈마는 그네들을 쳐다보는 척 따라 고개를 돌리면서 슬그머니 대답했다.


 "……나는, 롤러코스터가 나을 것 같은데."


 아사히가 웃음을 참는 소리가 얼핏 들려서 어쩐지 부끄러워졌다.


 매번 그런 식이었다. 카즈마가 못내 내켜하지 않으면서도 거절하지는 않으니까, 아사히는 조금씩 조금씩 더 짧은 빈도로 그에게 전화를 걸었다. 영화 보지 않을래? 라든가, 역 앞에 게임 센터가 있던데, 라든가, 어제 TV에서 별자리에 대한 다큐멘터리를 하더라, 라든가…… 카즈마는 그때마다 할 일이 없었고 거절할 이유도 찾을 수가 없었다. 이건 아마도 배려라는 거겠지. 영화관을 나와 그럭저럭 재밌지도 재미없지도 않았던 영화의 포스터를 들여다보면서 카즈마는 그렇게 생각했다. 아사히는 나나세 카즈마가 어떤 사람인지 잘 알고 있는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니 뭔가…… 속을 읽힌 기분이 드는 반면 더 거절할 수가 없었다.







 세 정거장 떨어진 곳에 있는 수족관은 그가 생각하던 것보다 규모가 컸다. 날씨가 좋아서 역에서 내려서 조금 걷다보니 땀이 나는 것 같았다. 드문드문 서 있는 가로수의 윤곽이 저 멀리 있는 것까지 또렷하게 눈에 들어왔다. 카즈마는 눈을 가늘게 뜨고 흰 외벽의 수족관 건물을 올려다보았다. 지은 지 고작 3년 밖에 되지 않았다는 얘기를 아사히가 했던 것 같다. 평일 오후여서 그런가 사람이 적은 점이 마음에 들었다. 회전문을 타고 건물 안으로 들어가자 해가 가려져서 조금 서늘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카즈마는 곧장 매표소로 걸어가는 아사히의 옷자락을 잡았다. "왜?" "오늘은 내가 낼테니까. 너, 그렇게 돈 많지도 않잖아?" 용돈 다 떨어졌지? 하고 덧붙여 묻는 말에 아사히가 앗, 하고 조금 어색한 표정을 지었다. "들켰네……"

 두 장의 표를 흔들면서 입구로 들어섰다. "펭귄, 펭귄이다." 오른쪽을 보며 대뜸 외치는 아사히의 목소리에 철창 너머의 사육사가 손을 흔들어줬다. 아사히가 손을 마주 흔드는 것을 보며, 넉살도 좋네, 라고 생각하다가 고개를 돌렸다. 물범도 있네. 물범이 아니라 물개 아냐? 그런가, 얼굴은 의외로 귀엽게 생긴 것 같아. 생각보다 작은데…… 그런 실없는 대화를 하며 천천히 걸었다. 이내 양쪽으로 수조가 늘어선 곳으로 들어가자 통로가 조금 좁고 어두워진 것처럼 느껴졌다.

 동그랗고 새파란 수조 속에 들어 있는 해파리를 보았다. 거대한 가오리나, 흰동가리나 산호 같은 것들을 바라보다보니 점점 말수가 줄어들었다. 물 속에서 모든 것들은 조용히, 그리고 서서히 움직였다. 마치 다른 세상에서 온 것처럼. 아사히의 얼굴 위에 물빛이 번져서 푸르고 투명하게 물들었다. 카즈마는 종종 그의 옆얼굴을 곁눈질했다. 눈앞에 있는 것에 온전히 열중하는 그 표정이 어린아이 같다. 왜 이런 표정을 지을 수 있는 걸까, 하고 생각하게 된다.

 안으로 들어갈 수록 사람이 점점 더 적어졌다. 문득 정신을 차렸을 때는 아사히와 카즈마 둘 뿐이었다. 그들은 흰고래가 들어 있는 대수조 앞에 서 있었다. 아사히가 탄식처럼 중얼거렸다. "엄청 크다." 그 말을 들은 것처럼, 고래가 천천히 유리창 쪽으로 물살을 밀어내며 그들 앞으로 다가왔다. 마치 유리창에 머리를 들이박을 것처럼 다가와서는, 몸을 돌려 그들을 지나쳐갔다. 아사히의 이마에 푸른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카즈마는 그 얼굴에서 그림자가 서서히 거둬지는 것을 지켜보았다. 아사히가 문득 카즈마 쪽으로 약간 몸을 붙였다. "이렇게 큰 걸 보고 있으면 어쩐지 조금 무서워지는 것 같아." 어깨가 맞닿았다. 수조가 아니라 그의 얼굴을 보고 있었다는 것을 들킨 것만 같은 기분이 되어 고개를 돌렸을 때, 유리창에 비친 자신의 얼굴을 보았다. 유리 너머의 나나세 카즈마는 어딘가 이상한, 조금 들뜬 것도 같은, 한 번도 본 적 없는 것 같은 표정을 짓고 있었다.


 오늘은 한 번도 기타에 대한 생각을 하지 않았다는 것을 문득 생각했다.


 갑자기 심장이 뛰었다. 쿵, 쿵, 쿵, 쿵, 하고. 달리기를 하거나 공연을 한 직후와는 아주 다른 느낌이었다. 마치 처음 가는 곳에서 길을 잃었을 때나 버스를 잘못 탔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 같은 감각이었다. 카즈마는 또 다시 생각을 했는데, 그러니까 이런 걸 뭐라고 부르더라, 하고, 어디선가 읽었던 적이 있었던 것 같은, 예전에 들춰 봤던 소설책에서, 아니면 영화에서, 아마도 이런 것을,

 불온하다, 라고 부르는 것 같았는데.

 그렇게 생각한 순간 카즈마는 고개를 똑바로 들었다. 몸을 조금 물리자 맞닿아 있던 어깨가 떨어졌다. 아사히가 그를 돌아보았다. 


 "……나 갈래."

 

 "어?" 아사히가 그를 붙잡기도 전에 그는 물 속에서 움직이는 것처럼 스르륵 그 자리에서 빠져나와 길을 되짚어 갔다. 아사히가 뒤에서 그의 이름을 부르는 소리가 들렸지만 걷는 속도를 늦추지 않았다. 제법 복잡한 길을 거슬러가는 내내 걸음은 점점 빨라졌다. 아마도 아사히는 그를 쫓아오고 있을 것이다. 카즈마는 스스로 도망치고 있다는 것을 인지했다. 이런 것은 이상하다. 도망치는 것도 잊어버리는 것도 모두 자기자신 답지 않다. 하지만 지금은 도망치지 않으면 안된다. 왜 그렇게 느껴지는지 제대로 생각할 틈도 없이 다시 회전문을 돌아 바깥으로 나왔을 때는 여전히 날씨가 좋았고 해가 쨍해서 눈이 부셨다. 어쩐지 눈을 제대로 뜰 수가 없어 손바닥으로 눈을 비볐다. 눈꺼풀 안쪽에서 자꾸만 푸른 잔상이 번쩍거려서 난생 처음으로, 세상이 너무 밝은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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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나세 카즈마 어른이 되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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