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뭔 제목을 붙여도 후질 것 같았다...
고등학교와 중학교 사이에 있는 도서관에는 언제나 책을 읽는 사람보다 공부를 하는 사람이 더 많았다. 참고서에서 나는 빳빳한 종이 냄새와 오래된 소설책에서 나는 냄새는 사뭇 달랐다. 쇼우는 들고 있던 소설책을 처음부터 읽는가 싶더니, 이내 몇 장을 넘겨 중간쯤을 보다가, 마지막 페이지를 한 번 들춰보고는 덮었다. "재미없네." 그의 어설픈 총평이었다. 리츠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답이 필요한 말은 아니었을 것이다. 리츠는 종이 위를 손으로 짚어가며 푼 문제들을 채점했다. 대부분 맞았고, 가끔 틀린 문제는 눈여겨 보았다. 쉬운 일은 아니었는데, 그가 문제에 틀린 표시를 할 때마다 쇼우가 그의 어깨에 턱을 기대며 "이런 걸 틀렸어?"라든가, "어떻게 푸는 건지 알 수가 없네." 같은 말을 한 마디씩 거들었기 때문이었다. 말하자면, 성가셨다.
리츠가 채점을 다 마쳤을 때 쇼우가 은근히 팔에 팔을 기대왔다. "저기, 놀러 가고 싶지 않아?" "별로." 리츠는 곧장 대답하고는 다 푼 참고서를 가방에 집어넣고 새 문제집을 꺼냈다. 쇼우는 잠깐 실망하는가 싶었지만 쉽게 굴하지 않았다. "한 시간 반이나 도서관에 있었잖아." "공부 중이야." "기왕 학교가 일찍 끝난 날에 도서관에 오다니 너, 생각보다 되게 재미없다." "너한테 재미있으라고 공부를 하는 건 아니지." 리츠는 모서리를 접어 표시해둔 부분을 펼쳤다. 깨끗하게 정리가 되어 있었다. 그러나 쇼우는 기어이 그를 방해하려고 작정한 듯 싶었다. "노래방 좋아해?" "안 좋아해." "쇼핑은 어때." "관심없어." "영화 보러 갈래?" "아니."
"그럼 가고 싶은 곳 없어?"
리츠는 자를 대고 파란색 볼펜으로 중요한 부분에 밑줄을 그었다. 파란…… 어제 TV에서 봤던, 관광지의 수평선이 꼭 그런 색깔이었던 것 같다. 오키나와였던가, 벳부였던가. 햇볕에 젖어드는 물빛이 선명했던 것이 문득 떠올랐다.
"바다라든가……"
대답은 생각보다도 더 먼저, 어물쩡 흘러나왔다. 섣불리 물 거리를 던져줬구나, 하는 생각이 뒤이어 들었다. 스즈키 쇼우는 이상한 행동력의 소유자였다. 아니나 다를까, 리츠가 말을 끝맺기도 전에 덥썩 손목을 잡아왔다. 안 좋은 예감이 들었다. "갈까? 바다." 아마도 사실이 될 예감이었다.
리츠에게 바다, 라는 것은 그렇게 쉽게 갈 수 있는 곳은 아니었다. 어렸을 적 휴가철에 몇 번 물놀이를 갔던 기억만이 희미하게 남아 있다. 그나마도 초등학교 고학년이 되고부터는 간 적이 없다. 친구들끼리 놀러갈만한 나이도 아직 아니고, 수학여행도 아직은 이르다. 카게야마 리츠는 이러니저러니해도 정해진 길만 걷는 모범생인 것이다. 그래서, 어느새 기차표를 들고 텅 빈 플랫폼에 서 있으니 다소 생경한 기분이 들었다. 손에 들고 있는 것이 문제집과 참고서와 필통이 든 책가방이라니 더욱 이상하다. 그런 그의 혼란스러움을 아는 것인지 모르는 것인지, 쇼우는 자판기를 두드리며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이었다. "녹차가 좋아, 커피가 좋아?" 둘 다 싫어, 라고 대답하려다가, "녹차." 라고 대답하고 말았다.
평일, 늦은 오후의 기차역에는 사람이 적었다. 도시에서 나고 자란 사람들이 으레 그렇듯 리츠는 사람 없는 공간이 낯설었다. 그가 녹슨 벤치의 등받이와 역 이름이 쓰여 있는 간판을 번갈아서 쳐다보는 사이 쇼우가 녹차가 든 페트병을 장난스레 던지듯 건넸다. 가볍게 받아든 병 표면에는 작은 물방울들이 송글송글 맺혀 있었다. 차가웠다.
어쩌다가 이렇게 되었는지 생각해본다. 바다, 라고 말은 했지만 실현 가능성이 희박했기 때문에 쉽게 나온 말이었을 것이다. 사실은 말했다, 보다 모르는 사이에 흘러나왔다, 라는 표현이 더 정확했다. 그러나 쉽지 않다고 생각했던 것은 아마 리츠 본인 뿐이었던 것 같다. 쇼우는 곧장 거리낌 없이 기차역으로 향해 노선을 확인하고는 가장 이른 시간의 표를 샀다. 그 일련의 과정이 너무 거침없어서, 리츠는 현실 감각이 없다고 생각했다.
십 여 분 후에 기차가 왔다. 쇼우는 녹차를 마시며 어정거리는 리츠의 어깨를 떠밀듯이 기차에 올라탔다. 기차 안에도 역시 사람이 적었다. 구석 자리에서 꾸벅꾸벅 졸고 있는, 나이 든 여자 한 명이 있을 뿐이다. 가운데 좌석에 자리를 잡고 앉자, 기차는 느릿느릿 출발했다.
기차가 흔들릴 때마다 몸이 덜컥거렸다. 쇼우는 꽤나 기꺼이 창가자리를 리츠에게 양보했다. 리츠는 턱을 괴고 앉아서 창밖을 쳐다보았다. 간간히 쇼우가 던지는 말에 대답을 하거나 안하거나 하면서, 줄곧 빠르게 지나치는 풍경들을 지켜보았다. 듬성듬성 늘어서 있는 집들의 모양새와 지붕들을 구경하다가, 이내 그마저도 뜸해졌다. 산등성이와 다리 위를 거쳐 점점 땅의 가장자리로 밀려가고 있는 것이 느껴졌다. 기계에서 부속품이 하나씩 빠지듯 시야의 빈 자리가 점점 넓어진다.
한참 말이 없는 것 같더니 쇼우는 아무래도 졸고 있는 모양이었다. 눈을 돌리자 고개를 숙인 채 이리저리 흔들리고 있는 그의 모습이 보였다. 리츠는 핸드폰을 꺼내 사진이라도 찍어둘까 생각하다가, 툭 기대오는 머리에 생각을 그만두었다. 어깨가 묵직해졌다. 밀쳐내는 방법도 있었지만, 기차표를 전부 그가 계산했다는 것과 차가운 녹차와, 꽤 밝고 고적한 바깥의 풍경 같은 것들을 생각하고는 이번 한 번만 봐주기로 했다.
기차는 천천히 바다 쪽으로 나아가고 있었다.
추웠다.
그것이 리츠의 첫 감상이었다.
신나게 졸고 있던 쇼우를 깨워 내린 역은 역시나 한적했다. 빈 녹차병을 쓰레기통에 버리고 길다란 플랫폼을 빠져나왔다. 역의 바깥은 바로 모래사장과 이어져 있었다. 바다는, TV에서 본 것과는 많이 달랐다. 희끗하고 낮은 하늘이 수평선과 곧장 맞닿아 있었고, 물빛은 푸른색보다는 회색에 가까웠다. 아직 이른 봄이었고 춘추복을 입기도 전이었다. 무엇보다 물이 가까이 있어서 그런지, 어마무지하게 바람이 불었다. 백사장에 발을 디디자마자 리츠는 반사적으로 팔짱을 끼고 몸을 웅크렸다. 숨을 크게 들이켜자 짠 냄새가 찬바람과 함께 사정없이 밀려들었다.
"춥잖아."
"어, 그러게."
"뭐가 그러게, 야." 리츠는 볼멘 소리를 하면서 모래를 발로 슬쩍 걷어찼다. 걸을 때마다 발바닥이 푹푹 잠겼다. 모래 위로 발자국이 깊게 패였다. 리츠는 쇼우를 내버려두고 성큼성큼 바다쪽으로 걸었다. 파도가 신발코까지 다가올 정도로 가까이 다가가자 희미한 수평선이 좀 더 잘 보였다. 젖은 땅이 바로 발치에 있었다. 쇼우가 서두르지 않고 그의 뒤를 따라왔다.
"근데 왜 하필 바다야?"
리츠는 흘끗 쇼우를 돌아보았다. 그는 좀처럼 대답을 하지 않았다. 옆구리에 끼고 있는 손이 시려서 몸을 좀 더 옹송그렸다. 쇼우는 그의 대답을 기다리는 대신 입고 있던 겉옷을 훌쩍 벗었다. 그에게 쑥 내밀자 리츠는 다소 질색하는 기색으로 말했다. "여자애 취급하지 마." "뭐? 아닌데." 쇼우는 천연덕스럽게 말을 이었다.
"좋아하는 사람한테는 원래 이런 거 하는 거야."
그 말에 리츠는 한참, 그를 쳐다보았다.
옆구리에 끼고 있던 손을 대신 바지 주머니에 넣었다. 파도가 좀 더 거세졌다. 운동화 밑바닥을 적실 정도로 물이 밀려와서, 리츠는 몇 발자국쯤 뒷걸음질을 쳤다. 수평선은 여전히 희미했다. "형이." 그렇게 입을 열 때면 항상 속이 이상하게 울렁거렸다. "바다가 가고 싶다고 했거든."
지난 날 저녁에, 소파에 나란히 앉아서 TV를 보다가 문득 그랬다. 영 볼 만한 게 없어 채널을 돌리다가 불쑥 얻어걸린 여행 프로그램에서, 화면을 꽉 채운 바닷가의 풍경을 보았다. 길게 이어진 수평선을 경계로 하늘과 바다가 나뉘어 있었다. 잔잔한 수면 위로 요트 한 대가 유유자적하게 떠다니는 것이 보였다. "나도 가고 싶다, 바다." 시게오가 문득 말했다. 리츠는 그를 돌아보았다. 그는 그렇게 말했을 뿐이다. 정말로, 그것만 말했을 뿐이다.
"그래서야."
리츠는 어깨를 한 번 작게 으쓱했다. 바람이 자꾸만 쓸고 지나가서 목덜미에 잘게 솜털이 돋았다. 쇼우는 겉옷을 손에 쥔 채로 그를 마주보았다. 리츠는 그의 반응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 다음에 그는 한 걸음에 성큼 다가와서, 들고 있던 겉옷을 리츠의 어깨에 둘러주었다. 예상하지 못한 일이었다. 멀뚱히 쳐다보고 있으니, 크게 한숨을 쉬었다. 연극배우처럼 어딘가 과장된 동작이었다.
"너 말야……"
그는 잠시 말을 고르더니 이내 빠르고 큰 목소리로 말했다. "난 말이지, 네가 날 대용으로 쓰는 건 아무렇지도 않거든?" 그리고는, 약간 작아진 목소리로 덧붙였다. "아, 아무렇지도 않다는 건 좀 거짓말이지만, 아무튼."
"하지만 네가 널 상처주는 일은 그만두는 게 좋아."
리츠는 팔뚝으로 스르륵 흘러내리는 겉옷을 추어올리다가 문득 손을 멈췄다. "무슨 말인지 알겠어?" 그 말은 대답하기가 어려웠다. 젖은 발이 축축하고 차갑다는 것을 그제야 생각했다. 차갑고 큰 쇠구슬을 입에 물고 있는 것 같았다. 미지근하고 푹신한 온도의 겉옷 때문에 더 그랬다. 품이 비슷하고, 열은 자신보다 조금 높은 것 같다.
"……네가 뭘 안다고."
결국 나온 것은 딱딱하고 상투적인 말이다.
"잘 알지."
"웃기지 마."
리츠는 보폭이 큰 걸음으로 백사장 위를 가로질러 걷기 시작했다. 바닥에 닿을 때마다 젖은 발이 절그럭거렸다. "뭐야, 어디가?" 쇼우가 한사코 그의 뒤를 따라왔지만, 리츠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답하지 않은 질문들이 많이 있었다. 앞으로도 오랫동안은 그럴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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