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지사콘



현대 패러렐. 중학생 사부로지와 사콘.

부모님이 일찍 돌아가셔서 조부모와 사는 사콘과 바다 소년 사부로지.





 그 집을 처음 본 사람은 백이면 백 '참 고풍스러운 집이다'라고 말했다. 그래서 사전에 실린 단어들의 뜻을 정확하게 알지 못하던 어린 시절의 사콘은 '고풍스럽다'는 말이 '답답하다'는 말과 비슷한 뜻인 줄 알았다. 수국과 매화, 용담과 꽃잔디가 계절마다 번갈아서 꽃을 틔우는 그 집에는 사람보다 식물이 많았다. 입으로 나누는 말보다 나무가 삐걱거리는 소리가 사람의 행적을 알렸다. 그의 조부모는 걸음이 사뿐사뿐했고 누가 시킨 것도 아닌데 사콘은 덩달아 발소리를 내지 않고 걷는 법을 배웠다. 그런 집이었다. 모든 규율이 침묵으로 이어지는 집.

 새로 산 하복 셔츠는 빳빳하고 몸에 잘 맞지 않았다. 이제 막 중학교에 들어간 신입생들이 으레 그렇듯 더 클 것을 고려해 한두 치수 정도 크게 산 것이었다. 사콘은 품이 넓은 반팔 셔츠 아래로 드러난 마른 팔뚝이 조금 볼품없다고 생각하며 자꾸만 소매단을 만지작거렸다. 흰 소매에 손때가 묻지 않을까 생각하여 간신히 손을 뗐을 땐 이미 집에서 나서야할 시간이었다. 나무 계단은 아무리 신중하게 디뎌도 삑삑거리며 희미한 새울음 같은 소리를 냈다. 이런 소리가 나지 않으려면 얼마나 가벼워야하는 걸까, 어쩌면 아예 발이 없어야지만 소리가 나지 않을 지도 모른다. 죽을 날이 가까운 사람은 점점 더 가벼워지는 걸까. 생각하는 머리 위로 반쯤 그림자가 드리웠다. 현관으로 향하는 긴 복도에는 창문이 없었다.


 "다녀오겠습니다."


 언제나 그렇듯,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미닫이 문을 열고 나섰을 때, 두세 걸음 앞의 담장 밖으로 익숙한 머리카락이 삐죽하게 튀어나와 있는 것이 보였다. 사콘은 순간 아연해졌다가 가까스로, 주말이 오기 전 사부로지가 다음 주부터 같이 등교하자고 말한 것이 떠올랐다. 사콘은 그 말이 농담인지 진담인지 잘 알 수가 없었는데, 아마 사부로지 본인도 잘 몰랐을 것이다. 그에게 농담과 진담은 가끔씩 나중에야 결정되는 일 같았다. 사콘이 정원 밖으로 나서자 사부로지가 반색을 했다. "하복 입었네?" 그는 이미 저번 주부터 하복 셔츠를 입었다. 한 주만에 그의 셔츠의 옆구리 부분에는 이미 세탁기로는 쉬이 지울 수 없는 흙 얼룩이 생겨 있었다.


 "너네 집 되게 고풍스럽다, 야."


 그가 담 너머로 2층짜리 목조 건물을 흘긋, 올려다보며 말했다. 사콘은 그 말을 기꺼워하는 것도 저어하는 것도 아닌 애매한 얼굴로 사부로지의 자전거 안장을 내려다보았다. 중학교 입학 선물로 아버지가 사준 것이라고 자랑하던 것을 몇 번 본 적이 있는 물건이었다. "너, 고풍스럽다는 말이 무슨 뜻인지 알아?" 불쑥 그렇게 물었다. 손잡이에 달린 차임벨을 몇 번 두드리며 성가신 소리를 내던 사부로지가 순간 어리둥절한 얼굴을 했다. "그걸 모르는 놈도 있냐?" 사콘은 뒷목을 긁적거리며 한숨을 내쉬었다.


 "근데 난 어디 앉으라는 거야."

 "뒤에 앉아, 뒤에."


 사콘은 잠시 고민하다가, 메고 있던 가방을 앞으로 돌려 끌어안고는 그의 등에 등을 맞대고 앉았다. 교복 셔츠 너머로 살이 맞닿는 느낌이 이상할 정도로 낯설어서 저도 모르게 움칠했지만 빳빳하게 등을 펴고 앉자 없던 일처럼 느껴졌다. "그렇게 앉으면 떨어진다." "남이사." 앉는 자세로 몇 번 실랑이가 있었지만 결국에는 사콘의 고집이 이겼다. 자전거는 생각보다 부드럽게 출발했고 '고풍스러운 집'과 익숙한 골목들이 쏜살같이 멀어졌다.

 학교까지 가는 길은 두 개가 있었는데 하나는 골목들 사이를 복잡하게 돌아서 가는 길이었고 다른 하나는 바다 쪽으로 난 도로를 에둘러가는 길이었다. 멀기는 후자가 더 멀었지만 길이 넓고 완만해서 많은 학생들이 이용하는 길이기도 했다. 하지만 사콘은 한 번도 그 길로 가 본 적이 없었다. 사부로지는 딱히 묻지도 않고 당연한 것처럼 바다쪽으로 향했고 거기에까지 고집을 부리기엔 다소 귀찮은 감이 있었다.

 이른 아침의 해는 붉고 노랗고 투명하다. 햇빛이 물의 흐름에 얽혀드는 모습이 보였다. 페달이 돌아가는 소리가 차르륵 귀에 감겼다. 사부로지는 처음에는 뭐라고 계속해서 말을 걸더니 바닷가와 면한 길로 접어들자 이상하리만치 조용해졌다. 사콘은 덩달아서 입을 다물었다. 그 침묵은 탁 트여 있는 공간처럼, 그저 말과 말 사이가 느린 속도로 나아갈 뿐 어색하지가 않았다. 짜고 시원한 냄새가 났고, 앞머리가 이마 위에서 어지럽게 흩어지는 것이 느껴졌다.


 "저 배가 우리 집 배다?"


 사부로지가 문득 한 손으로 바닷가에 모여 있는 몇 척의 배를 가리켰다. 배들은 금방이라도 수평선 쪽으로 나아갈 것처럼 보였다. 사콘은 그 중 어느 것이 사부로지네 배인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그가 물어보기도 전에 그들의 옆으로 트럭 한 대가 아슬아슬하게 스치고 지나갔고 자전거가 일순 휘청거렸다. "아, 좀!" 사콘이 소리를 지르다시피 외쳤고 사부로지도 덩달아 목소리를 높였다. "니가 밟던가!" "나 자전거 탈 줄 모르거든." 사부로지가 그를 돌아보았다. "앞에 봐, 앞에." "왜 자전거를 탈 줄 몰라?" "가르쳐주는 사람이 없었는걸."

 다시 평형을 찾은 자전거가 쌔액, 소리를 내며 맞바람을 가르고 나아갔다. 잠깐의 침묵 후에, 사부로지가 다시 물었다. "내가 가르쳐줄까?" 그 말에 사콘은 그것도 나쁘지 않겠다 싶은 생각과 어쩐지 성가신 일이 될 것 같다는 생각을 동시에 했다. "내가 가르쳐줄까?!" 그가 듣지 못했다고 생각한 것인지 사부로지가 한층 목소리를 높였다. 사콘이 가까스로 대답했다. "생각 좀 해보고."


 "왜?!"

 "그냥."


 어느새 길은 바닷가를 벗어나 있었다. 사콘은 어쩐지 손등에 짠내가 묻은 것 같아 손등을 킁킁거리며 고개를 젖혔다. 맞닿은 등이 어느새 낯설지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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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야토나/ 열사



 우라카제 토나이는 별 볼일 없는 농가 출신이었다. 그는 농가의 여느 아이처럼 형제가 많았다. 그는 4남 1녀 중 셋째였고, 위의 두 형과는 나이 터울이 제법 났다. 그다지 눈에 띄는 위치는 아니었다. 집에 가만히 들어앉아 있으면 어린 여동생을 돌보는 것이 그의 몫이 되곤 했으므로, 제 일이 끝나면 잽싸게 바깥으로 나다니는 것 또한 그 또래의 남자애들과 다름이 없었다. 여름이면 개울가에서 멱을 감고 놀았고, 겨울이면 얼음을 지치면서 놀았다. 그런 계절들은 언제나 쏜살같아서, 정신을 차려보면 모내기 철이 되어 있고, 또 정신을 차려 보면 수확철이 되어 있곤 했다.

 토나이가 처음으로 불온함을 느낀 것은 그의 키가 집에 있는 큰 기둥의 절반쯤 되었을 무렵이었다. 옆집의 히로는 동물을 좋아했다. 소년은 아이들과 놀다가도 시간만 되면 송아지에게 여물을 챙겨주러 겅중겅중 뛰어 집으로 돌아가곤 했다. 길모퉁이에 사는 카에는 손재주가 좋았다. 그녀는 그보다 겨우 한 살 밖에 많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그녀가 만든 옷가지며 베갯잇 따위가 방 구석에 바리바리 쌓여 있다고 했다. 그의 큰 형은 시장에서 염색집을 하는 여자애한테 홀딱 반해 있었다. 그 아가씨에게 청혼을 하려고 몰래 한 푼 두 푼 돈을 모으고 있다는 사실은 부모님만 빼고 동생들은 다 알았다. 작은 형은 상인이 되고 싶다는 소리를 자주 했다. 어차피 집안의 논과 밭은 전부 큰 형의 몫이 될 터이니, 자기는 제가 잘하는 것을 하고 싶다는 얘기였다. 실제로 그는 곰살 맞고 말재주가 좋아서, 5분만 얘기해도 사람들의 혼을 쏙 빼놓는 재주가 있었다.

 그런 것들. 토나이는 평범한 아이였다. 누구보다 키가 크지도 작지도 않았고, 일을 잘하는 것도 못하는 것도 아니었고, 달리기가 빠르지도 느리지도, 수영을 잘하지도 못하지도 않았다. 그는 아주 어린 것도 아주 나이가 많은 것도 아니어서, 누군가가 그를 미처 빼먹었다 하더라도 별로 놀라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그때까지 아무도 그에게 그런 것을 묻지 않았지만, 만약 누군가가 그에게 너는 무엇을 좋아하냐고, 혹은 무엇을 잘하냐고 물으면 아마 그는 대답할 수 없었을 것이다.

 스스로 의문을 가지기에는 아직 어린 나이였다. 어느 날의 저녁 때까지는 그랬다. 노을이 집의 지붕과 마당을 적시고 있었다. 토나이는 누군가 있으리라 생각하고 풀썩 마루에 앉아 집 안을 들여다보았다. 사람의 그림자가 없었다. 나중에야 안 사실이지만, 그 날은 할머니가 장독을 옮기다가 허리를 삐끗해서 온 가족이 모시고 의원에게 갔다고 했다. 어린 두 동생은 옆집에 맡겨 두었다고 했다. 그것은 익숙하지 않은 적막이었다. 토나이는 신발을 벗고 집 안으로 들어갔다. 그가 형제들과 함께 쓰는 방은 북향이어서, 이 무렵이면 이미 방 안에 빛의 종적을 찾을 수가 없었다. 이 시간이면 누군가가 항상 등잔 불을 켜놓곤 했는데, 얇은 장지문 너머에는 희미한 어둠이 있었다. 토나이는 그 문 앞에서 잠시 고민했다. 무엇을 고민하는지 모르겠으면서도, 고민했다. 그 골몰함에 이유를 찾을 수 없다는 걸 깨닫고 나서야 문을 열었다.

 방은 비어있었다. 구석에 엉성하게 개어 놓은 이불과, 앉은뱅이책상과, 꺼져 있는 등불. 그리고 아무것도 없었다. 토나이는 어둠 속으로 들어갔다. 그곳이 제 방이니 들어오기는 했지만, 친숙한 공간은 친숙한 만큼 생경했다. 그는 가족이 많은 집의 아이가 으레 그렇듯이 사람이 없는 공간에 익숙하지 않았다. 토나이는 등불을 켤 생각도 안하고 방의 한 중간에 앉았다. 비어있는 공간과, 적막과, 식어가고 있는 낮의 미지근한 온기를 품은 얇은 어둠.

 그는 그것이 무섭다고 생각했다.

 어두워서라든가, 너무 조용해서라든가, 그런 원초적인 이유와는 또 달랐다. 그는 바닥을 손으로 짚고 앉아 생각했다. 이 생소함은 반쪽짜리 생소함이었다. 그는 이런 것을 알고 있었다. 누군가가 없다면, 아무도 문을 열지 않는다면, 누구도 불을 켜지 않는다면, 아무것도 없는 것. 좋아하는 것도, 싫어하는 것도, 되고 싶은 것도, 하고 싶은 것도, 알 수가 없었다. 아직 어리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는 자신이 앞으로도 그런 명확한 무언가가 될 수 없으리라는 것을 은근하게 알아차렸다. 물을 쏟으면 아래로 흐르고 불을 붙이면 재가 되는 것만큼이나 자연스럽게, 알았다.

 등 뒤에서 해가 빠르게 지고 있었다. 눈물이 나왔다.



 그의 가족들이 돌아온 것은 한 시간 정도가 지난 뒤였다. 방에 가장 먼저 들어온 것은 어머니였는데, 방의 한 중간에 주저 앉아 불도 켜지 않고 엉엉 울고 있는 그를 보고는 화들짝 놀란 것 같았다. 그녀는 재빠르게 문을 닫고 그에게로 다가와 앉았다. 약간 서늘한 손이 그의 이마에 닿았다. 전혀 부드럽지 않은, 허드렛일에 익숙한 마른 손이었다.


 "열은 없는데. 혼자 있는 게 많이 무서웠어?"


 토나이는 고개를 끄덕여야할지 저어야할지 잘 알 수가 없었다. 혼자 있는 것은 무서웠지만, 그녀가 생각한 것과는 다른 이유에서일 것이다. 그는 더듬더듬 입을 열었다. "나만……" 입을 열자 딸꾹질이 쏟아져나왔다. 어머니가 그의 등을 두드려주었다. 말도 입에서 같이 쏟아졌다. "아무것도 없어서, 그게……" 방문 밖에서 형제들이 낮은 목소리로 드문드문 대화를 나누는 것이 어렴풋이 들렸다. 왜 울어? 몰라, 겁이라도 먹은 건가…… 라든가, 정말로 울어? 라든가. 그는 말소리를 낮췄다. "옆집 히로도, 건넛집 카에도, 형들도, 또 다른 애들도 다…… 가지고 있는데. 나만 없어서……" "뭐가?" 그 물음은 어려웠다. 그것은 아직 나이가 두 자릿수도 되지 않은 어린아이가 말로 풀어낼 수 없는 종류의 언어였다. 대답을 찾으려 골몰하는 사이 눈물이 먼저 왈칵 쏟아졌다. 말이 되지 않은 웅얼거림이 울음과 함께 섞여나왔다. 어머니가 그의 뒷머리를 쓰다듬다가, 그가 다시금 울기 시작하자 그의 머리를 끌어당겨 품에 안았다. 그는 그 품에서 오랫동안 울었다.

 

 





 결과적으로 말하자면 그가 인술학원에 들어가게 된 것은 그때 그 날의 일 때문이었다. 어머니는 그가 한 말을 조금 다른 방향으로 해석한 것 같았다. 그녀는 위의 큰 형들과 아래의 어린 동생들에게 신경을 쓰느라 그에게 미처 신경써주지 못한 것이 평소부터 못내 미안했던 모양이었다. 이유가 어찌되었든 그의 울고 있는 모습은 그녀에게 꽤나 인상적이었던 것인지, 적게나마 충격을 받은 듯 그녀는 계절이 바뀌기 전에 그에게 넌지시 물어왔다. 너, 인술학원에 가볼래? 하고.

 학비가 한두 푼 하는 것도 아니었고, 또 농번기에 일손이 하나 빠진다는 것은 별로 좋은 일이 아니었지만, 어머니는 반대하는 아버지에게도 제법 고집을 부렸다. 저 어린애가, 혼자 울고 있었다니까요. 자기한테는 아무것도 없다고요. 그러면 안되는 일이잖아요. 결국에는 아버지가 먼저 포기했다.

 그로부터 여러 번 해가 바뀌었다. 토나이는 그 여름, 그 질문을 들었다.


 "너는 어떤 사람이 되고 싶은 거냐?"


 그 질문을 듣고, 토나이는 아연하게 자신이 무엇을 잘못한 것일까 생각했다. 어제 보았던 쪽지 시험은 제법 그럴듯한 답안을 썼던 것 같은데, 그게 아니면 오전에 했던 실습이 문제인가…… 싫은 소리 들을 만한 일을 하지 않았던 것 같은데……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선생님은 그의 얼굴을 찬찬히 들여다보더니 한숨을 내쉬었다. "아니, 됐다. 그만 나가보렴."

 미닫이 문이 등 뒤로 닫히자 문득 한숨이 나왔다. 아직 날이 밝았다. 긴 복도를 걸어 밖으로 나서면서 토나이는 반사적으로 눈을 찌푸렸다. 그는 여전히 그 질문을 곱씹고 있었다. 그저께 냈던 작문 숙제와 저번주에 새로 배운 인술까지 되짚어보는 사이 그는 교정을 천천히 가로질러 반대편으로 향하고 있었다. 작법위원회실 앞에 도착해 문을 열자, 가장 먼저 보인 것은 센조의 피곤해하면서도 어딘가 익숙해보이는 낯이었다. 그는 토나이를 보자마자 인사 대신 물었다. "오는 길에 혹시 아야베 못 봤어?"

 그리하여, 종적이 묘연한 아야베 키하치로를 찾는 것은 언제나 그렇듯이 그의 몫이었다. 늘 있는 일이었으므로 갈급한 마음보다는 곤란한 마음이 앞섰다. 토나이는 아야베가 있을 만한 곳을 한번에 짚어내는 적이 없었다. 마치 다른 지도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처럼 그들이 찾는 길은 항상 엇갈렸다. 온 교정과 뒷산을 헤매고 나서야 토나이는 그를 발견할 수 있었고 아야베는 항상 그런 그의 곤경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는 듯한 낯으로 땅을 쑤셔대고 있곤 했다.

 이마가 따끔거렸다. 해가 뜨겁다는 생각을 할 때마다 바늘 끝처럼 첨예한 생각들이 뒤따라왔다. 피곤할 수록 생각은 낮은 곳으로 흐르기 마련이다. 너는, 과연, 어떤, 사람이. 인술학원에 들어온 지도 3년째였지만 그는 여전히 그 물음에 답을 찾지 못하고 있었다. 성실한 사람이 되는 것은 쉬웠다. 꼬박꼬박 품을 팔아 학비를 부쳐주는 고향의 부모님을 생각하면, 그건 더 쉬운 일이 되었다. 주어진 일을 부지런히 하다보면 누구보다 모자라거나 뒤쳐지지는 않는다는 자족을 얻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것이 남과 자신의 키를 겨루는 일일 뿐, 온전히 자신의 것이 되지는 않는다는 사실 역시도 잘 알았다.

 그래, 굳이 말하자면……


 "아야베 키하치로 선배."


 깊은 땅밑으로 고개를 수그리자 문득 머리가 핑 돌았다. 너무 덥기 때문인 것 같았다. 토나이는 소매자락으로 관자놀이에 흐르는 땀을 훔쳐내며 아래를 쳐다보았다. 아야베는 뒷산의 안쪽, 나무들을 벌목해놓은 공터에 있었다. 그의 삽끝이 흙을 헤쳐나가는 소리가 귓전을 두드렸다. "아야베 선배." 토나이가 거듭 그의 이름을 부르자 그제야 아야베가 고개를 들었다. 우연히 마주친 길고양이처럼 생각을 알 수 없는 표정이었다. "위원회의 일이 있다는 거, 까먹은 건 아니죠?" 아야베는 대답 대신 성의 없이 손을 내저었다. 까먹은 것은 아니지만, 까먹었든 그렇지 않든 그에게는 중요하지 않은 듯했다. 토나이는 한숨을 내쉬며 무릎을 모아 앉았다. "빨리 나오시라구요." 그 말이 효력이 없다는 것은 그 자신도 잘 알았다.

 해가 그의 정수리 위에 있었다. 무릎 위에 올려 놓은 손등에서 땀이 배어나왔다. 눈을 감았다 뜨는 간격이 점점 길어지고 있었다. 깜빡, 깜빡. "……오늘." 혓바닥 위에 올려놓은 단어가 생소한 것은 그 때문인 것 같았다. 어떤 말을 해야한다는 생각 같은 것 없이도 말은 다른 세계의 언어처럼 어물어물 흘러나왔다. "선생님한테 뭐가 되고 싶은 거냐는 질문을 받았어요."

 텁텁한 흙 냄새가 났다. 아야베 키하치로에게 대답이나 맞장구 같은 것을 바라는 일은 어불성설에 가깝다는 걸 그도 알았다. 나는 왜 이런 얘기를, 이 사람한테 하고 있는 것일까. 바짝 마른 땅 위로 점점이 자국을 남기고 있는 땀방울처럼, 생각도 점점이 맺혔다. "아무 대답도 할 수 없었어요." 혀와 이빨이 부딪혀 내는 진동의 감각은 여전히 낯설었다. 그는 점점 더, 어지러워졌다.


 "그래도 만약에 될 수 있다면, 선배 같은 사람이 되고 싶어요."


 말이 생각보다 앞서고, 입 밖에 내고서야 그는 그렇구나, 하고 납득했다. 이상한 감각이었다. 세상에 아야베 키하치로 같은 사람은 또 없을 것이다. 누구나 다 그걸 알았다. 이 땅 위의 그 누구도 그와 같을 수는 없어서, 그는 굳이 자신의 자리를 찾을 필요조차 없었다. 그는 함정을 파는 것을 좋아했지만, 그 일이 그를 이루고 있다기보다는 그가 그 일을 선택했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것이 그에게 가장 자연스러운 생습이었다.

 문득, 흙이 사각거리는 소리가 멈춰 있었다. 토나이는 아야베가 자신의 얘기를 듣지 않고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지만, 그렇지도 않은 모양이었다. 토나이는 자신의 그림자를 쳐다보았다. 그의 무릎에서 시작한 그림자는 뻗어나가다 말고 함정 속으로 떨어졌다. 떨어진다…….

 깊은 지하에서부터 올라온 대답은 정방형의 상자처럼 덤덤하고, 그럼에도 모서리를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사람은 다른 누군가가 될 수 없잖아?"


 그 대답과 함께 후둑, 무언가가 입가를 적셨다. 처음에는 땀인줄 알았는데 혀를 내어보자 비린 맛이 났다. 코피였다. 그제야 토나이는 자신이 한여름, 아직 쨍쨍한 오후에 한참 산 속을 헤매인 것도 모자라 볕 아래에 머리를 오래 내어두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누군가가 뒷목을 잡아당기는 듯 뻐근한 감각이 그제야 밀려왔다. 열사병이었다. 정말로 단지, 열사병 때문에 어지러운 것일까? 코피가 날 때는 어떻게 해야하더라. 고개를 젖혀서, 이렇게…….

 머리를 들자마자 세상이 한 바퀴 거꾸로 뒤집혔다. 정신을 차려보니 그는 뒤로 넘어져 있었다. 뒷통수가 아팠고, 그와중에 풀썩 일어난 흙먼지가 매캐했다. 일직선으로 내리꽂히는 햇빛 때문에 눈을 제대로 뜰 수가 없었다. 어지러웠다. 어지러웠다. 눈꺼풀이 무거웠다. 그는 눈을 감았다. 캄캄했다.


 눈을 떴을 땐, 아주 오랜 시간이 지난 것 같았다.

 어느새 지상으로 올라온 아야베가 그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해를 등진 채 그를 응시하고 있는 이목구비가 어두웠다. 가장자리만 빛나고 있었다. 혼곤한 가운데, 토나이는 오랫동안 그 찬란한 윤곽을 올려다보았다. 정말로, 오랫동안.









글에 대한 변명이 칠만오천가지쯤 떠오르지만 하지 않는다...

나는 이 둘의 전혀 다름이 너무나도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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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도이/ 거리4



 비가 온 다음 날에는 공기가 마치 하나의 덩어리처럼 느껴지곤 했다. 습기를 머금은 옷소매가 팔뚝에 스치는 것이 따끔했다. 저녁이라고 하기에도 오후라고 하기에도 아직 애매한 시간이었다. 불그스레한 빛이 역의 계단에 비스듬하게 내리꽂히고 있었다. 리키치는 계단을 올라가다 말고 그 자리에서 멈추어섰다. 역 입구에서 익숙한 뒷모습을 본 탓이다. 흰 색 셔츠에 서류 가방을 든 것이 지하철 안에서 열다섯 번은 보았을 법한 평범한 직장인의 모습이었지만, 그가 알아보지 못할 리가 없었다. 도이는 한 손에 핸드폰을 쥐고서 전화기 너머로 무어라 말하고 있는 중이었다. 잘 들리지는 않아도 짐작컨대 학부모의 전화인 것 같았다. 리키치는 바지 주머니에 양 손을 넣은 채 그 자리에 서서 그 통화가 끝날 때까지 기다렸다. "그럼, 다음에 봬요." 도이가 전화기를 내리며 크게 숨을 내쉬었다. 셔츠 아래의 어깨가 가라앉는 것이 눈에 보였다. "지금 퇴근하는 거에요?" 말을 거는 목소리가 스스로도 천연덕스럽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제야 도이가 그를 돌아보았다.

 역광이 비치고 있었다. 얼굴의 윤곽이 선명했다. 표정은 잘 보이지 않았다. 그의 어깨 너머로 보이는 건물들의 정수리가 천천히 노을에 젖어가고 있었다. 이 시간의 풍경은 현실 감각이 없었다. 그 순간, 왜 그런 생각이 들었는지는 모를 일이다. 조금 떨어진 거리에서 그를 올려다보면서, 리키치는 지금까지 그와 자신의 관계를 구성했던 어떤 순간들에 대해서 생각했다. 그런 때에 도이의 표정을 떠올려보면, 이상하게도 잘 떠오르지 않았다. 그가 기억하지 않으려 한 것인지, 아니면 보여주지 않으려 한 것인지 알 수 없었다. 중요한 순간들은 그렇게 아리송한 상태로 존재했다. "아, 리키치 군." 반 박자 늦게 대답이 돌아왔다. 리키치는 느리게 눈을 깜빡였다. 그의 안에는 항상 충동이 존재했다. 그와 그가 이루고 있는 얼음팍 같은 균형을 걷어차고 부수고 산산조각내고 싶은 충동이었다. 모든 것을 명확하게, 그리고 비참하게 만들고 싶은 충동이기도 했다.


"좋아해요."


 말하고 나자 입 안이 따끔했다. 그는 한달음에 계단을 마저 올라가, 손을 내밀어 도이의 손목을 잡았다. 더 이상 도망가게 내버려두지 않을 것이다. 손바닥 안에서 동맥이 파득거리는 것이 미미하게 느껴졌다. 리키치는 그의 손등을 내려다보았다. 손마디가 불거져나온 평범한 남자의 손. 하지만 그는 그 손이 그의 머리를 쓰다듬던 감촉을 기억하고 있다.

 셈을 하듯 대답을 기다렸다. 침묵이 길었다. 너무 길어서, 도이가 그의 말을 이해하지 못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나도 좋아해."


 그리고 나온 대답은 그의 예상 안에 없던 것이었다. 아니, 사실은, 이런 대답을 상상해본 적이 있기는 있었다.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상상의 범주에 머물렀지 근거 있는 예상이 되지는 못했다. 리키치는 불에 데인 것처럼 화들짝 고개를 들었다. 도이는 웃고 있었다. 차분한 얼굴이었다. 누그러진 눈썹 아래의 눈동자가 선명하다. 리키치는 직감적으로 알아차렸다. 그것은, 긍정의 표정이 아니었다.






 도이가 편의점에서 맥주 몇 캔을 사서 나왔을 때는 이미 어스름이 내리고 있었다. 걸음을 걸을 때마다 비닐봉지 안에서 캔이 잘그락거리는 소리가 났다. 한적한 인가를 빙 돌아 공원으로 향했다. 빈 벤치에 자리를 잡고 앉을 때까지 그들은 아무런 대화도 하지 않았다. "맥주니까, 안주는 없어도 되겠지." 도이가 건넨 맥주캔은 아주 차갑고 축축했다. 툭, 캔을 따자 알싸한 소리가 났다. 리키치는 물처럼 맥주를 들이켰다. 뒷덜미가 단숨에 서늘해졌다.

 캔 하나를 거의 다 비웠을 때쯤, 그가 먼저 입을 열었다.


 "농담이나 거짓말이라면…… 아주 질이 나쁜 거라고 생각해요."


 도이가 손으로 빈 캔을 우그러트렸다. "그런 농담은 안 해." 그렇게 말하는 그는 어쩐지 조금 피곤해보였다. 그는 비닐봉지에서 새 맥주캔을 꺼내면서 한 박자 대답을 망설였다.


 "그러면 안되는 거잖아."

 "뭐가요?"


 자신도 모르게 조금 울컥해서 곧바로 대답이 나갔다. 도이가 문득, 한숨처럼 웃었다. "알면서 왜 물어." 말마따나 아집을 부릴 나이는 아니었지만, 리키치는 똑같이 빈 캔을 우그러트리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와작, 금속이 구겨지는 소리. 도이가 손으로 자신의 눈가를 쓸어내렸다. 말을 고르고 있는 것 같았다.


 "일단은…… 너네 부모님이 상처를 받으시겠지. 아주 힘들 거야. 누구한테도 말할 수 없을 거고, 당당해질 수도 없을 테지. 잘못한 게 없어도, 죄진 것처럼 느끼게 될 거야. 무엇보다 자기자신이 가장 많이 상처받게 되겠지."

 "그런 게 중요한가요?"

 "중요해."


 그 대답은 단호했다. 그는 여전히 손으로 눈을 가린 채였다.

 

 "내가 상처받는 건 상관없지만 네가 상처받는 건 무서워."


 귓속이 먹먹해졌다. 그 말은 너무 의외여서, 리키치는 자신도 모르게 쥐고 있던 캔을 놓칠 뻔 했다. 흘러넘친 맥주가 그의 손등을 서늘하게 적셨지만 닦을 생각은 들지 않았다. 여러가지 말이 입과 목 안에서 와글거렸다. 그 중 한 가지를 고르는 것은 아주 힘든 일이었다. 결국 입밖으로 나온 것은 아주 단순한 말이었다.


 "……당신, 절 정말로 좋아하나봐요."

 "그러게. 그런가보다."


 대답 역시 단순했다.







 공원 쓰레기통에 빈 캔을 버리고 걸어왔던 길을 되짚어갔다. 평소라면 겨우 맥주 두 캔에 취할리가 없는데, 너무 빨리 마신 탓인지 걸음을 내딛을 때마다 몽롱하게 술기운이 올라왔다. 그것은 도이 역시 마찬가지인지 모퉁이를 도는 걸음걸이가 묘하게 불안정했다. 돌아올 때는 역시나 말이 없었다. 침묵은 원래부터 그 자리에 있었던 것처럼 자연스러워서, 리키치는 어쩐지 좀 전에 나눴던 대화들이 모두 멀게 느껴진다고 생각했다.

 마침내 빌라 앞에 도착해 나란히 계단을 올랐다. 3층에서, 도이는 열쇠가 잘 맞지 않는 듯 연신 문고리를 잡고 덜걱거리기를 반복했다. 리키치는 그 모습을 지켜보다가 말고 입을 열었다. "앞으로도 당신 집앞에서 담배를 필 거예요." 달칵, 열쇠가 맞물리는 소리가 들렸다. 도이가 고개를 드는 기척이 느껴졌다. 리키치는 반대로 시선을 바닥으로 끌어내렸다. "한동안은." 문이 열렸다. 그래도 도이는 그의 말을 가만히 듣고 있었다. "어쩌면 앞으로도 계속."


 "……잘 가, 리키치 군."


 리키치는 그의 표정을 보지 못했다. 문이 닫혔다. 그제야 시선을 들었다. 머리 위의 전조등의 불이 꺼졌다. 그는 어둠속에서 오랫동안 닫힌 문을 노려보고 있었다.









(((캐붕으로 뚜드려맞아도 할 말이 없다)))

끝! 끝! 끄읕! 끝! 하지만 천천히 수정할 수도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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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도이/ 거리3



 고등학교에 입학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무렵이었다. 바뀐 교복에 몸이 적응을 하자마자 곧 춘추복에서 하복으로 갈아 입을 시기가 왔다. 교복 가게에 여러 번 드나드는 것이 귀찮아서 그때까지 리키치는 아직 긴 팔 셔츠를 입고 있었다. 셔츠 팔꿈치를 걷어붙이고, 넥타이는 둘둘 말아 셔츠 앞주머니에 넣어둔 것을 보고 도이는 그래도 교복은 제대로 입어야지, 하고 말했다. 리키치는 그에 적당히 대답했던 것 같지만, 그 이후로도 딱히 교복을 단정하게 입었던 기억은 없다. 빌라 뒤편에는 그리 크지 않은 벚꽃 나무가 있었는데 그가 입학할 무렵 꽃이 만개하더니 이젠 지저분하게 바닥에 뒹구는 꽃잎을 쓸어내는 것이 일이었다. 운동화 밑바닥에 흙빛 꽃잎이 달라붙어 도이네 집 현관까지 따라왔다. 익숙한 원룸. 그가 들어오면 도이는 차나 음료수를 꺼내고 앉은뱅이책상 앞에 리키치가 자리를 잡고 앉아 교과서와 공책을 꺼낼 때까지 기다렸다.

 그 날은 책상 위가 조금 어수선했다. 가위와 풀, A4 용지와 여러 개의 펜이 이곳저곳에 흩어져 있었다. 도이는 팔로 책상 위를 쓸어내며 말했다. "이력서를 쓰고 있었거든." 그때 그는 대학교 4학년이었다. 좀 전까지 사진을 자르고 있었던 듯 잘라낸 흰 귀퉁이가 조각조각 나뒹굴었다. 리키치는 여러 장 균일하게 찍혀나온 그의 증명사진을 들여다보았다. 조금 어색하고 긴장한 것도 같은, 그러나 웃고 있는 얼굴이었다. 도이가 필통에 가위며 펜을 던져넣는 동안 내내 리키치는 그 사진을 보았다.

 곧 도이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냉장고로 다가가는 그 뒷모습을 보며, 리키치는 자기도 모르게 책상 위로 손을 뻗었다. 똑같은 것이 이렇게 여러 장 있으니 한 개쯤 없어져도 알지 못할 것이다. 태연한 생각이 들었지만 그 행동에 대한 당위 역시 태연하지는 않았다. 손가락 끝에서 심장이 뛰는 듯 파득거렸다. 사진은 매끄럽고 작았다. 서늘했지만 마치 작은 생물처럼 손 안에 쏙 들어왔다. 그때, 바지 주머니 안에 있었던 것이 학생 수첩이었던 탓에 그 사진은 학생 수첩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줄곧 거기에 자리를 잡았다.


 "보리차가 다 떨어졌네."


 학생 수첩이 그의 손 안에서 미끄러져 다시 바지 주머니 속에 들어가자마자 도이가 말했다. 리키치는 곧장 대답했다. "말차 있지 않아요?" "있긴 한데, 차 좋아해?" "별로 상관 없어요." 목이 뜨거웠다. 이런 식으로 거짓말을 하는 것은 오래간만의 일이었다. 풀 줄 아는 문제를 모른다고 거짓말할 때와는 전혀 다른 기분이었다. 도이가 주전자를 달그락거리는 소리가 어렴풋이 났다. 물 소리, 찬장을 여는 소리. 리키치는 안방다리를 하고 있던 다리를 바꾸어 겹쳤다. 이내 물이 잘게 끓는 소리가 났다. 처음으로 긴 팔 교복이 덥다고 느꼈다.







 어떤 순간들은 기점으로 존재하는데, 그때가 딱 그런 순간이었다.

 대화의 소재가 하필이면, 진학한 학교가 갈려 단숨에 멀어진 전 여자친구였다는 것 또한 절묘하고 이상스러웠다. 한참 수학 문제 몇 개로 골머리를 앓다가 잠깐 풀이를 멈추고 쉬던 와중이었다. "그 애, 머리가 길고 얼굴 희던 애. 이제는 연락 안 해?" 도이는 딱히 조심스럽지도, 그렇다고 마냥 여상하지도 않은 목소리로 그렇게 물었다. 그 물음에 저절로 몸이 뒤틀렸다. 그 즈음의 그는 그런 식으로 울컥하는 일이 잦아졌다. 출구가 없는 무언가가 신물처럼 목구멍으로 자꾸만 울컥울컥 올라올 때가 있었다. 이유는 대개가 한 사람에 대한 것으로 좁혀졌다. 그는 대답 대신 상체를 앞으로 수그렸다. 그 순간에 교복 자켓의 안주머니에 꽂아두었던 학생수첩이 밀려올라가 바닥으로 떨어진 것은, 순전히 우연이었다.

 수첩은 정면이 위를 향하게 떨어졌고 덕분에 그 사이에 끼워두었던 사진이 자연스레 반쯤 비져나왔다. 그 순간은, 야마다 리키치가 인생에서 최고로 당황했던 순간이기도 했다. 리키치는 손을 뻗는 것과 변명하는 것, 둘 중 어느 것을 먼저 해야할 지 몰라 오히려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너무 당황하면 아무런 생각이 들지 않는다는 것을 그때 처음으로 알았다. 

 아주 짧은 정적이 있었는데, 도이가 모든 것을 이해하기에는 충분한 시간이었던 것 같다.

 도이가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났다. 그의 손이 가까이 다가와 저도 모르게 긴장했지만 그 손은 리키치의 앞에 있던 컵을 들고 일어났다. 리키치는 그의 표정을 보지 못했다. 곧 물 소리가 들렸다. 불현듯 정신이 들었다. 그는 학생 수첩을 집어 갈무리하고 이번에는 가방 속에 깊숙히 집어넣었다. 잠시 뒤에 책상 앞으로 돌아온 도이는 차 주전자와 새 컵을 든 채였다.


 "뜨거운 차 괜찮지?"


 이런 순간을 상상해본 적이 없었기 때문에, 리키치는 그의 차분한 물음을 뭐라고 생각하면 좋을지 알 수가 없었다. 차는 밍밍하고 뜨거웠다. 리키치는 잔을 입에만 가져갔다가 도로 내려놓았다. 문제집 위를 내려다보는 그의 시선에서는 생각을 읽어내기가 어려웠다. 피차 익숙한 사이에, 침묵 같은 것은 아무렇지도 않았는데 좀 전의 상황이 단숨에 침묵을 여러 겹으로 얽어 불편하게 만들었다. 정적은 온갖 생각들을 제멋대로 불어나게 만들었고 머릿속이 왁자한 와중에도 차마 입이 떨어지지는 않았다.

 도이는 천천히 차를 마셨다. 연필 자국이 남은 손의 측면을 쳐다보다가, 문득 리키치는 무언가를 생각해냈다. 예전에 같은 반 여자아이가 그러는 것을 본 적이 있었다. 별로 친했던 아이는 아니었는데, 어쩌다보니 음악실까지 같이 가게 된 적이 있었다. 앞서 가던 그 여자애가 문을 한 뼘쯤 열었을 때 문득 교실 안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ㅡ정말 별로지 않아? 저번에는 어땠냐면…… 어째서 여자아이들은 뒷 얘기를 할 때는 목소리부터 달라지는지 모를 일이다. 그것이 누구의 뒷담화인지는 금세 알아차릴 수 있었다. 리키치는 그 애가 문을 박차고 들어가서 화를 내거나, 따지거나 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녀는 문을 닫았다. 잠시, 그 자리에 멈춰서 있던 그녀는 단호한 걸음으로 문에서 멀어졌다. 그녀는 리키치가 그녀의 이름을 부르기도 전에 바로 옆에 있던 여자화장실로 들어가버렸다. 리키치로서는, 잘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이었다. 그는, 어린 남자애들이 으레 그렇듯 어떤 것을 외면하거나 없던 일로 하는데 능숙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그렇구나, 이건 없던 일로 하는 것이구나.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러자 시큰하던 목 안쪽이 일순 먹먹해졌다. 그 생각은 차갑기도 했고 뜨겁기도 했다. 왁자하던 머릿속의 생각들이 물을 끼얹은 듯 단숨에 잦아들었다. 리키치는 손으로 뺨을 쓸어내렸다. 살갗이 손바닥에 달라붙는 것 같았다. 도이는 여전히 문제집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말 대신 말하지 않은 것들이 따끔따끔하게 살갗을 찌르고 있었지만, 한사코 침묵이었다.







 도이가 그를 리키치 군, 이라고 부르기 시작한 것도 아마 그 무렵이었을 것이다. 가까워진 것이 자연스러웠던 것처럼 멀어지는 것 역시 자연스러웠다. 마치 때가 되면 해가 지고 밤이 길어지는 것처럼 자연스러워서, 미처 거기에 이의를 제기할 틈도 없이 시간이 흘렀다. 아무것도 결정되지 않은 채로 켜켜이 쌓인 시간은 모든 것을 아리송하게 만들었다. 혼자서 생각을 하다보면은 그때의 일이 자신만의 착각인 것처럼 느껴지기도 했고, 또 어느 때는 속앓이를 할 정도로 따끔하고 명징한 사실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어쨌거나 분명한 것은 그는 곧 어른이 될 것이고, 모든 것이 전과 같을 수는 없으리라는 사실이었다.

 도이가 그를 대하는 태도는 별로 달라진 것이 없었다. 차라리 혐오나 거절 같은 것이라면 알기 쉬웠을 것이다. 호칭이 바뀌고 집 안에 들이지 않을지언정 말을 거는 어투나 대하는 몸짓 같은 것이 변하지는 않았다. 그래서 그들의 거리도 멀지도 가깝지도 않은 채 그대로였다. 조금 더 나이를 먹으면서, 그 순간이 침잠하고 그 모호하고 막막한 거리감을 받아들이게 되면서부터는, 그것이 답답하고 야속해서 바늘처럼 툭툭 속내를 뱉어내는 일이 있었다. 그래도 변하는 것은 없었고, 일정한 궤도를 그리며 공전하는 행성처럼 그들 사이의 거리도 언제까지나 일정했다.

 리키치는 한계가 가깝다고 생각했다.










짧지만 이 뒤를 한 호흡으로 쓰고 싶어서 여기서 자름. +뒷부분 추가 수정...

나는 정말로 완급 조절이라는 걸 끔찍하게 못 하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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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도이/ 거리2



 처음으로 여자친구가 생긴 것은 중학교 2학년 때의 일이었다.

 그 여자애의 이름은 사오리였다. 어깨까지 오는 반질반질한 머리카락과 흰 이마가 인상에 남는 아이였다. 반대로 말하자면, 그 이외의 것들은 잘 기억이 나지 않았다. 고작 열서너 살 먹은 어린애들의 연애가 깊이가 있으면 얼마나 있고 심각하면 또 얼마나 심각할는지. 리키치 역시 딱히 그녀를 엄청나게 좋아한 것은 아니었다. 옆 반이었고, 가끔씩 체육 수업을 같이 하는 일이 있었고, 오며 가며 마주치다가 예쁜 애네, 라고 생각을 했을 뿐이다. 그가 그렇게 생각한 만큼 그녀도 딱 그렇게 생각한 것 같았다. 옆 반의 걔가 널 좋아한대더라, 라는 말을 들었을 땐 싫은 기분은 아니었다. 오히려 좀 으쓱하기도 했다. 그에게 그런 말을 전해준 아이는 일종의 떠보는 역할이었던 것인지, 얼마 지나지 않아 하교길에 고백을 받았다. 가지런한 어깨와 가는 팔다리.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연애라는 것이 뭘 해야하는 것인지는 어림 짐작으로만 알았다. 등교와 하교를 같이 하고, 집에 가는 길에 맥도날드나 서점에 들르고, 주말에는 시간을 내서 영화를 보고 밥을 먹었다. 그녀가 늘어놓는 사소한 사담은 다소 지루했지만 못 참을 만한 것은 아니었다. 그가 기억하는 몇 안되는 것 중 하나는 처음으로 손을 잡았을 때의 일이다. 겨울이었는데도 그녀는 장갑을 끼지 않았다. 소매 자락 밑으로 보이는 손끝이 발갰다. TV나 영화에서 보면, 이럴 때 손을 잡는 거라고 했는데. 손을 뻗어 잡아채자 화들짝 놀라다가 손끝만큼이나 얼굴이 붉어지는 것이 보였다. 쑥스러운 기분이 들었다.

 하지만 그런 것보다도.


 "어, 리키치."


 집 앞에서 마주친 것은 우연이었다. 도이는 우유와 자질구레한 생필품이 가득 든 비닐봉지를 손에 들고 있었다. 리키치에게 손을 흔들던 그의 시선이 자연스레 나란히 선 그녀에게로 옮겨갔다. 상황 판단은 빨랐고, 그의 눈가에 미묘하게 웃음기가 실렸다. 낯선 반응은 아니었다. 연애라는 것은 항상 주위의 그런 반응을 동반했다. 리키치는 비교적 그런 것에 개의치 않는 편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어쩐지 꺼림칙했다. 아마 꺼림칙하다고 느낀 것은 그 자신 뿐일테지만. "여자친구?" 그 물음에 사오리는 어정쩡하게 웃었고 리키치는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구나. 리키치도 벌써 그럴 나이네."


 도이는 왠지 모르게 감개무량해보였다. "뭐예요, 그런 말투." 리키치는 저도 모르게 송곳처럼 뾰족한 어조로 대답했다. "아니, 엊그제만해도 내 허리께까지 밖에 안 오던 애가 연애를 한다고 하니까." 그렇게 말하며 도이는 넉살 좋게 웃었다. 그가 움직일 때마다 비닐봉지가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귀를 간지럽혔다. 리키치는 어쩐지, 안절부절 못하고 있는 자기 자신을 발견했다. "하지마요, 그런 거." 성급하게 말을 받으면서도 스스로도 뭘 하지 말라는 소린지 아리송했다. 바늘을 머금은 것처럼 입천장이 따끔따끔했다. 그건 명백하게, 친구들 앞에서 예쁘장한 여자친구를 내어보이던 때와는 다른 기분이었다.

 "그래, 그래." 도이는 적당히 대답하고 그의 머리를 슥 쓰다듬었다. 일순간 머리카락 속을 헤집던 손가락이 차가웠다. 그도 장갑을 끼지 않고 있었다…… 계단을 올라가는 소리가 타박타박, 멀어졌다. 리키치는 멀거니 계단 쪽을 올려다보았다. "싫어하는 사람이야?" 문득, 사오리가 옆에서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뭐?" 리키치는 얼빠진 목소리로 되물었다. "왠지 모르게 불편해 보여서……." 리키치는 순간 말을 잃었다. 싫어하는 사람이냐고? 전혀, 그럴 리가 없었다. 오히려…….

 정신을 차려보니 어느새, 잡았던 손은 놓은 채였다.







 좋아하는 사람과 싫어하는 사람을 대할 때 행동이 비슷해지는 것은 묘한 일이다. 벨을 누르기까지 십여 분, 문 앞에서 서성이면서 리키치는 그런 생각을 했다. 초인종은 새 소리와 비슷한 소리를 냈다. 오래간만에 듣는 소리였다. 리키치는 왜인지 문 너머의 발자국 소리까지 들을 수 있을 것 같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가 생각한 타이밍에 문은 열렸다. "어어, 리키치 군." 도이는 편한 옷차림에 조금 졸려 보이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아이들 숙제 채점이라도 하고 있는 모양인지 한 손에는 빨간색 펜을 든 채였다. 상대의 행동의 자취를 그렇게 쉬이 쫓을 수 있다는 것이 스스로도 신기할 지경이었다. 확실히 밤이 조금 늦긴 했지만, 그의 용건은 간단한 것이었다.


 "어머니가 고기 감자 조림을 너무 많이 했다고 해서요. 가져다 드리라고."


 그가 불쑥 문 안으로 락앤락 통을 집어넣었다. 도이는 양손으로 그것을 받아들었다. "참, 이렇게까지 신경 안 써주셔도 되는데……." 도이가 직장을 가진 후로 그의 집에 와서 저녁을 먹는 일은 없어졌지만 그의 어머니는 여전히 혼자 사는 아랫집 총각의 영양상태를 종종 신경쓰곤 했다. 조림은 그릇에 담아 식히긴 했지만 만든 지 얼마 되지 않아 아직 미지근하게 따듯했다. 도이가 그릇의 아랫부분을 만지며 머쓱하게 웃었다. "맛있겠다. 항상 감사하다고 전해드려." 리키치는 그의 어깨 너머로 방 안을 보았다. 형광등을 켜놓지 않아 한쪽 벽면에 스탠드 불빛만 어룽거렸다.


 "오늘은 들여보내 주지 않는 건가요?"


 가끔 어떤 질문들은 머리가 아니라 혀끝에서 나온다. 마치 줄곧 그 자리에서 튀어나갈 준비를 하고 있었던 총알 같다. 도이의 시선이 한 번, 그의 얼굴로 올라왔다가 다시 락앤락 통 위로 떨어졌다. 불시에 상대를 찔러 보고 나면, 자신도 모르게 상대의 반응을 살피게 되었다. 생각을 읽어낼 수 있다면 좋고, 그럴 수 없다면 실망하기 마련이다. 도이는 그럴 때면 항상 모호한 얼굴을 했다. "음ㅡ" 그가 콧등을 긁적였다.


 "그릇은 나중에 내가 씻어서 돌려줄게."


  거절보다는 완곡했지만 역시나 모호한 대답이었다. 단절 앞에서는 공격도 방어도 무의미해진다. 리키치는 매번 그의 생각을 읽어내는 것에 실패했다. 떨어진 거리에서는 얼굴을 볼 수 없는 것처럼. 그건 나이를 몇 살을 먹어도 좁혀지지 않는 나이차와도 비슷했다. 그가 아무리 나이를 먹어도, 도이는 그보다 어른이었다.

 불이 꺼진 계단을 거슬러 올라가다가, 또 문득 담배 생각이 났다.







 그 무렵, 그러니까 중학생 때의 그는 혼란했고, 혼란한 것이 당연한 나이였다. 주변의 모든 또래들이 저마다 노력하고, 시투하고, 좋아하고, 미워하고, 동경하고, 싸우는 와중에 그라고 다를 것은 없었다. 사춘기라는 명명은 많은 것들을 합리화시켰다. 누구나 물러 터진 감처럼 제멋대로 툭툭 터져나가는 시기였으므로. 그래서 오히려 깨닫는 것이 늦었을 수도 있었다. 그것, 이 언제부터 시작했는지 묻는다면 리키치는 대답할 수가 없었다. 여름이 되면 해가 길어지는 것만큼이나 소리소문 없이 당연했다. 생각해보면 그 자신이 그렇다, 라고 인정하기 전부터도 그는 책상 앞에 나란히 앉았을 때 스치는 발목이나, 교과서 위로 가지런히 놓여진 손가락 따위에 신경이 쓰였다. 시작을 찾는 것은 의미 없는 행위였다.

 그러므로 언제 그가 그것을 깨달았는가를 따져보는 것이 더 나을 것이다. 중학교 3학년 때의 여름이었다. 장마가 막 지나간 뒤여서, 창문을 열어 놓아도 방 안은 습하고 후덥지근했다. 창을 닫고 커튼을 치고 나니 열이 외부에서 오는 것인지 자기 안에서 오는 것인지도 구분이 가지 않았다. 집에는 사람이 없었지만 문을 열어 놓고 싶지 않았다. 이제 막 익힌 은밀함은 닫힌 공간을 요구했다. 손아귀가 단숨에 끈적해진 것이 손바닥 안에 차오른 땀 때문인지 다른 것 때문인지 알 수가 없었다. 책상에 뺨을 기대고 몸을 옹송그렸다. 처음에는, 잡지에서 본 그라비아 모델의 젖가슴이나 허벅지를 떠올리며 시작했던 것 같다. 그러나 방 안은 너무 더웠고 손을 움직일 때마다 차츰차츰 정신이 몽롱해졌다. 상상은 고삐를 놓친 말처럼 그의 머릿속을 내달렸다. 손이 점점 빨라졌다. 그는 눈을 감았다.


 리키치.


 눈을 떴을 때, 빛이 망막 안으로 단숨에 쏟아져 들어오는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눈가에 맺힌 땀 때문에 눈꺼풀이 따끔따끔했다. 갑자기 모든 게 풀어졌다. 손이 몹시 축축하고 기분 나빴지만 그는 상체를 일으켜 티슈를 집고 싶지 않았다. 리키치는 그대로 닫힌 창문 쪽을 쳐다보았다. 얇은 커튼을 뚫고 배어나오는 빛이 선명했다. 매미가 울고 있었다. 빛과 소리가 모두 낯설었다. 그건 누구의 목소리였지? 그 무렵 갑자기 사이가 소원해졌던 여자친구의 것은 분명 아니었다. 좀 더 낮고, 담백한 목소리. 그러니까 그건……

 손가락을 움츠려 손바닥 안쪽을 할퀴었다. 생각이 먹먹했다. 그는 이미 정답을 알고 있었다. 여름은 무언가를 기만하거나 외면할 수 없는 계절이었다. 모든 것이 너무나 선명했다. 창을 닫고, 커튼을 치고, 문을 닫아도 소용이 없었다. 그는 오랫동안 책상에 엎드려서 매미 울음 소리를 들었다.








나는 이걸 끝까지 쓸 수 있을 것인가~ 투 비 컨티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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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을 뭐라고 해야할지



아야베는 안 나오는데 아야토나라고 생각하고 썼지만 3하 글인 것도 같은 이상한 짧은 글





"카즈마, 나 머리 좀 잘라 줘."


 토나이가 그렇게 말을 꺼낸 것은, 6학년이 되고도 얼마 지나지 않았을 무렵의 일이었다. 계절은 봄에 접어들었지만 아직 낮이 짧아 이른 시간에도 바깥이 어둑했다. 카즈마는 등잔의 심지를 돋우다가 말고 고개를 들었다. 방 안까지 파랗게 밀려들어온 어둠에 상대의 윤곽이 희미하게 보였다. 그 손에 들린 날붙이의 희뜩한 빛에 문득 눈길이 갔다. 카즈마는 일단 등불을 켜기로 했다. 심지 끝에 불을 밝히자 노랗고 작은 빛이 어둠을 조금 몰아냈다. 토나이가 자연스럽게 그의 앞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같은 눈높이에서 마주본 얼굴은 약간 침울한 것도 같은, 아리송한 낯이었다. 몇 해 전만 해도 생각하는 것이 죄다 낯에 드러나는 편이었는데, 나이를 허투루 먹은 것은 아닌지 최근 들어 토나이는 표정을 읽기가 어려워졌다. 그래도 그런 표정은 익숙했다. 요 몇 달 간 토나이는 줄곧 그런 표정으로 어떤 생각에 골몰하는 눈치였다. 무슨 생각인지 캐어묻지는 않았지만, 그 생각이 계절의 변화와 관련이 있다는 것 정도는 알았다. 학교라는 곳은 어디까지나 일시적으로 머무는 장소였고, 겨울과 봄 사이에는 으레 떠나가는 사람이 있기 마련이었다. 매 해마다 생기는 이별에도 이제는 나름대로 익숙해진 참이었다. 그러나 익숙해졌다고 해서, 개개의 상실까지 어떻게 되지는 않는 법이다.


"왜 갑자기 머리를 자르게?"

"음, 그냥."


 대답은 길게 이어지지 않았다. 이유를 정확하게 말할 생각이 없다는 뜻이었다. 토나이는 1학년 때부터 지금까지 한 번도 머리를 자르지 않았다. 머리가 자라는 속도는 더디었지만 꾸준했다. 이제는 올려 묶어도 허리께까지 올 정도로 길고 치렁했다. "아깝잖아. 그렇게 오래 길렀는데." "그래도, 너무 길어서 불편하기도 하고, 좀." 말하면서 그는 시선을 슬그머니 아래로 떨어트렸다. 고개를 숙이자 길게 늘어진 머리카락이 얼굴 앞으로 몇 가닥씩 흘러내렸다. 그는 짧은 칼의 손잡이를 만지작거리던 손으로 제 머리카락을 쥐었다. 불현듯, 그 손끝에 와락 힘이 들어가는 것이 보였다. "이렇게 긴 건 이제 싫어." 그가 쓴 것을 뱉어내는 것처럼 말했다. 고집스럽게 떨어지는 말끝에서 단호한 진심을 보았다.

 카즈마는 그가 건네어주는 날붙이를 받아들었다. 발치에 천을 하나 깔아두고 돌아 앉은 그의 머리카락을 일단은 아무렇게나 한 웅큼 쥐었다. "너는 항상 머리 끝이 뻗치더라." 손가락 사이로 비져나오는 머리카락을 보며 입을 열었다. "잠버릇 때문에 그래." "그래, 내가 잘 알지." 그 말에 그제야 토나이가 조금 웃었다. 어깨 위에서 머리카락을 모두 걷어올리자 뒷목이 드러났다. 오랫동안 길러온 것을 아는 탓인지, 이상하게도 선뜻 손이 가지 않아 카즈마는 칼 손잡이를 고쳐 쥐며 어물어물 망설였다. 그러나 그런 그의 망설임과는 상관 없이 날을 가져다 대자 머리털은 썩둑썩둑 손 쉽게도 잘려 나갔다. 금세 발밑에 터럭이 뭉텅뭉텅 쌓였다.

 머리 끝을 일정하게 다듬는 데 집중하던 와중에, 토나이가 문득 입을 열었다. "그래서 안됐던 걸까." 그 말은 지칭 대상이 모호했다. 가리키는 것을 알 수 없는 말에 대답을 찾을 수 있을 리가 없어 카즈마는 잠시 망설였다. 그러나 토나이는 아랑곳 하지 않고 말을 이어갔다. "사실, 머리 기르는 것도 별로 의미 없다는 걸 알고 있었는데." 사각사각, 날이 스치는 소리가 말과 말 중간에 대답 대신 끼어들었다. "그런다고 내가 그 사람이 될 수 있을리도 없고……." 그 말에서, 그제야 카즈마는 이것이 대답이 필요한 말이 아닌 일종의 혼잣말이라는 것을 알았다. 그는 묵묵히 잠옷 자락에 붙은 머리카락을 털어냈다.


"이제는 볼 일 없겠지."


 그의 뒷목에 달라붙은 머리카락을 집어 내다가 문득, 그 목이 뜨겁다는 것을 알았다. 카즈마는 저도 모르게 그 등에 손바닥을 대었다. "이제는……." 목소리는 점점 작아지다가 침묵이 되었다. 침묵은 조용히 맺혀서 흘러내렸다. 카즈마는 그의 얼굴을 보지 않고도 그가 울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는 가져다댄 손으로 그대로 천천히 쓸어내렸다. 윽, 하고 울음을 삼키는 소리가 터져나오다가 잦아들었다. 반쯤 잘려나간 머리카락이 그들 사이에 어지럽게 쌓여 있었다. 가닥이 너무 많아 개수를 셀 수도 없었다. 꼭, 그런 마음임을 묻지 않아도 알 수가 있었다. 6년이나 보아왔으므로, 모를래야 모를 수가 없었다.

 그는 오랫동안 울었다. 카즈마는 그 동안 내내 그의 등을 쓸어내리고 있었다. 한 계절의 끝이었다.









센조<아야베<토나이가 좋다. 토나이가 센조를 좋아하는 아야베 때문에 줄곧 머리를 기르다가 아야베가 졸업하고 나서 머리를 자르는 것을 보고 싶다... 라는 생각을 반쯤 희석해놓은 듯한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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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사쿠/ 끝과 시작




 처음으로 길을 잃어버린 것은 11살 때의 일이었다.

 정신을 차려보니 매미가 울고 있었다. 산노스케는 쥐고 있던 옷자락을 툭, 놓았다. 그의 손길에 딸려 올라왔던 누군가의 멱살이 맥없이 아래로 가라앉았다. 뒷통수가 바닥에 부딪히면서 제법 둔탁한 소리가 났지만, 매미울음이 그 소리를 지웠다. 하기사, 고통은 산 사람의 전유물이었으므로 이제는 상관없는 일일지도 모르겠다. 그런 생각을 하며 산노스케는 팔뚝으로 관자놀이에 흘러내리는 땀을 닦았다. 손목에서 쿰쿰한 땀 냄새와 쇠비린내가 함께 났다. 문득 펼쳐본 손바닥이 붉고 흥건했다. 흰 담벼락 위로 푸르게 드리워진 나무 그림자와 그 사이로 보이는 불그레한 손바닥. 어딘가 비현실적이었다. 벌어진 손가락 사이로 어렴풋이 보이는 시체는 목이 기묘한 방향으로 꺾여 있었다. 입에서부터 흘러내린 게거품이 얼굴 옆의 흙을 검게 적셨다.

 굳이 변명을 하자면, 애초부터 죽일 생각은 아니었다.

 2학년이 되어서, 처음으로 받은 개인 실습 과제였다. 그와 동급생들은 제각기 불안과 흥분으로 조금씩 들떠 있었다. 닌자에게 비밀 엄수는 중요한 일이었지만, 갓 신입생 태를 벗은 아이들은 아직 자기 자신에게 엄격해지는 법을 배우지는 못한 것 같았다. 그들은 저마다 제가 받은 과제에 대한 이야기를 알음알음 흘리곤 했다. 산노스케가 받은 과제는 어느 성의 담벼락 안에 표식을 남기고 오는 일이었다. 아무에게도 들키지 않고, 가 당연한 전제로 따라왔다. 어려운 과제는 아니었다. ――그렇게 생각해서, 조금은 방심을 했던 것도 같다. 수풀 속에 숨어 보초들이 지나다니는 시간과 사각지대를 파악한 것까지는 좋았다. 기대했던 것보다 경비가 삼엄했지만, 하려면 못 할 것도 아니라는 생각이 좀 더 앞섰다. 그는 최대한 한적한 곳을 골라 담을 타고 넘었다.

 표식을 남기는 일은 어렵지 않았다. 문제는 그 다음이었다. 늦은 오후, 해가 지는 방향의 반대편을 고른 것은 성의 그림자 안으로 숨어들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 때문이었다. 그러나 성 내부의 경비를 대략적으로만 파악한 것은 명백한 그의 실수였다. 아직 앳된 티가 남은 얼굴의 보초는 동작이 날래고 성급했다. 남자는 산노스케를 발견하자마자 민첩한 동작으로 그를 쫓았다. 그가 미처 담을 다시 오르기도 전에, 발목이 붙잡혔다. 산노스케는 반사적으로 거칠게 발을 털어냈다. 쿵, 등 뒤에서 묵직한 소리가 났다. 억, 하는 단말마가 따라왔다. 불온한 소리들이었다. 산노스케는 담벼락 위에서 숨을 몰아쉬며 뒤를 돌아보았다. 남자는 머리부터 땅에 떨어진 모양이었다. 그가 보았을 때, 남자의 눈은 이미 허옇게 뒤집혀 있었다. 남자의 몸이 뭍에 나온 생선처럼 간헐적으로 퍼뜩거렸다. 명백한, 죽음 직전의 순간이었다.

 산노스케는 잠시 고민했다. 남자는 지나치게 고통스러워 보였다. 그는 다시금 담장 아래로 뛰어내렸다. 어차피 죽을 사람이라면, 빨리 끝내주는 것이 좋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사람을 단번에 죽일 수 있는 급소를, 그는 이미 여러 군데 배워서 알고 있었다. 이런 식으로 처음 사람을 죽이게 될 줄은 몰랐지만, 어차피 언젠가는 하게 될 일이라는 것을 스스로가 잘 알고 있기도 했다. 품 안에서 항상 지니고 다니는 날붙이가 잘그락거리는 소리를 냈다. 그는 몸을 수그려 남자의 옷깃을 쥐었다. 손아귀에서 퍼뜩퍼뜩, 진저리치는 감각이 진동처럼 전해졌다.

 생각보다 어렵지는 않았다. 남자의 목에 퍼렇게 돋아난 핏줄에 날을 대며, 그는 수업 시간에 배웠던 것들을 상기했다. 목과 손목, 정수리와 가슴팍. 선생님은 사람 몸의 곳곳을 마치 지도처럼 짚어가며, 여기를 찌르면 단숨에 죽는다는 말을 했다. 그것은 덧셈 뺄셈이나 다름 없이 무감했다. 딱 그만큼 무감한 느낌이었다. 손에 힘을 주자 날이 살갗 아래로 파고들었다. 단숨에 피가 솟구쳤다. 동맥을 자르면 이렇게나 피가 많이 나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야말로 경험해보지 않으면 알 수 없는 것이었다.


 남자의 시체를 뒤로하고, 성에서 멀리 벗어날 때까지 한참을 걸었다. 나무 등걸이나 수풀에 손을 비벼보았지만 손금을 따라 잎맥처럼 배어든 핏물은 쉬이 지워지지가 않았다. 그가 숲의 중간에서 우물을 찾았을 때는 이미 해가 다 진 저녁 무렵이었다. 깊은 곳에서 퍼올린 물은 유난히 차가웠다. 손을 담그자마자 단숨에 손마디가 빳빳해졌다. 그는 오랫동안 손을 씻으면서 별 다른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러나 문득, 건져올린 손에서는 여전히 비린내가 났다. 그것은 생선 비린내나 물 비린내와는 몹시 다른 냄새였다. 그것들이 전부 비린내, 라는 말로 엮인다는 것이 이상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그는 불현듯 남자의 목을 찌르던 감각을 떠올렸다. 퍼득거리던 감각이 단숨에 거짓말처럼 멎는 감각. 손을 미적지근하게 적시던 감각. 그제야 산노스케는 제가 그 감각을 계속해서 곱씹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고개를 들었을 때 깜빡, 등불을 끈 것처럼 숲이 어두워졌다. 해가 완전히 산 너머로 넘어갔다. 희미한 어둠 속에서 본 나무들은 전부 비슷비슷해 보였다. 어느 쪽이…… 길이었더라. 이상하게도 갑자기 길이 기억나지 않았다. 걸어온 길을 머릿속으로 되짚어보아도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그는 옷자락에 젖은 손을 닦으면서 멀거니 숲을 쳐다보았다. 차게 식은 손끝이 문득 저렸다. 그는 앞으로도 몇 번이나 더 얼음장처럼 차가운 우물물에 손을 담궈야할지도 몰랐다. 아니, 어쩌면 다음에는 손에 피를 묻히지 않고도 사람을 죽일 수 있을 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그의 인생은 이미 그런 식으로 결정지어졌다. 그는 그 순간 불현듯, 그것을 깨달았다.

 숲이 조용하게 술렁거리고 있었다. 얕은 어둠 속에서, 숲은 한 덩어리의 그림자처럼 보였다. 어떻게 보면 검은 물결처럼 보이기도 했다. 아니, 거대한 생물의 아가리처럼 보이는 것도 같았다. 그는 그 안으로 걸어들어갈 수 없었다. 도무지 그럴 수가 없었다. 그는 우물 앞에 천천히 쭈그리고 앉았다. 허공은 점점 어두워지고 있었다.

 그때 오른편에서 바스락, 소리가 났다. 산노스케는 멀거니 고개를 돌렸다. 수풀을 헤치고 나온 사람은, 어딘가 지금 상황에서 비현실적이게 느껴질 정도로 친숙한 인물이었다. 사쿠베는 시선이 마주치자 잘게 눈을 깜빡였다. 그가 성큼성큼 산노스케에게 다가왔다.


"여기서 뭐해?"

"어……."

"길이라도 잃은 거야?"


 물어오는 목소리가 명확했다. 그렇구나, 이건 길을 잃은 거구나. 산노스케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제야 사쿠베의 실습지가 제가 간 곳과 그리 멀지 않았다는 사실이 기억이 났다. 사쿠베가 그에게 손을 내밀었다. 산노스케는 그 손을 잡으려다 말고 문득 손끝을 움츠렸다. "왜?" "아무것도 아냐." 성기게 맞닿은 손바닥이 따뜻했다. "너 손이 왜 이렇게 차냐." 사쿠베는 가벼운 핀잔투로 말하고는 그 손을 좀 더 단단히 잡아 그를 일으켰다.

 그들은 숲 속을 나란히 걸었다. 이미 완연한 밤이었고, 앞서 가는 사람의 뒷통수나 간신히 보일 정도로 어두웠다. 산노스케는 사쿠베의 등을 보면서 걸었다. 사쿠베는 신중하면서도 보폭이 큰 걸음으로 밤길을 헤쳐나갔다. "저기 있잖아." "어?" "내 손에서 무슨 냄새 나지 않았어?" 그 물음에 사쿠베는 뒤를 돌아보지 않으면서도 고개를 갸우뚱했다. 그는 마주 잡았던 손을 들어올려 냄새를 맡아보고는 대답했다. "잘 모르겠는데." 그 간결한 대답에 어쩐지 마음이 놓였다.


"역시 밤의 숲은 좀 무섭네."


 사쿠베가 말했다. 그 말에 산노스케는 그의 등에서 시선을 떼고 고개를 들어올렸다. 숲이…… 여전히 술렁거리고 있었다. 어둠에 시야가 까마득해진다. 숨이 차고 머리가 어지러웠다. 그렇구나, 이게 무섭다는 느낌이었구나.


"그러게…… 무섭다."


 말하며, 산노스케는 좀 더 사쿠베에게 바짝 붙었다. "걷기 불편하잖아." "무서워서 그래." 사쿠베는 한숨을 내쉬면서도 가까이 붙어선 그를 밀어내거나 하지 않았다. 산노스케는 그의 목을 보았다. 목과 손목, 정수리와 가슴팍. 사람이 죽는 것은 정말로 쉽더라, 하고 말을 해볼까 했지만 어쩐지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그 대신 산노스케는 뒤에서 그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나, 어쩌면 앞으로도 계속 길을 잃어버릴 지도 몰라." "뭐?" "왠지 그런 느낌이 들어." 사쿠베는 잠시 대답이 없었다.


"그럼 내가 찾으러 올 수 밖에 없잖아."


 사몬으로도 충분한데. 그가 나직하게 투덜거렸다. 산노스케는 말을 잃었다. 그는 갑자기 어깨에 올려 놓은 손끝이 간지러워지는 것을 느꼈다. 술렁거리던 마음이 천천히 부풀어올랐다. 그게 손등에 낮게 스치는 머리카락 때문인지, 아니면 다른 이유 때문인지 구분이 가지 않았다. 그가 그 감각이, 사랑스럽다, 는 것임을 깨달은 것은 한참 후의 일이다. 물론, 그가 정말로 계속 길을 잃어버리는 것은 조금 더 가까운 미래의 일이었다.









길=인생이라는 모티브를 쓰고 싶었는데 은유를 명징하면서도 우아하게 드러내는 일은 정말 어렵다...

제목은 대충 (사람을 죽여본 적 없는 유년시절의) 끝과 (사랑의) 시작 같은 의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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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도이/ 빛나는 밤



* 너 나 우리가 모두 아는 그 츠도이 주의





 오래 이어진 임무가 좀처럼 끝나지를 않고 있었다.

 날에 스친 상처가 붕대 아래에서 욱신거렸다. 그것은 좋지 않은 징조였다. 지금 상처가 덧나거나 곪는다면 곤란해질 것이다. 리키치는 피가 굳어 딱딱해진 붕대 위를 손으로 꾹 누르며 짧은 한숨을 뱉어냈다. 깊은 한숨은 내쉬면 안된다. 딱 그 깊이만큼 절망해버릴 수도 있었으므로. 통증을 다스리는 일은 어렵지 않았다. 그는 숨을 고르게 들이마시면서 눈을 감고 밤길을 걸어가는 상상을 했다. 한치 앞도 보이지 않는 어두운 밤. 자신의 발자국만을 보며 걷는 일은 반복적이고 단순했다. 그 규칙적인 박자가 마음을 편안하게 했다. 나무가 많은 길…… 그 길끝에서 그는 불빛을 본다. 얇은 미닫이문을 뚫고 비치는, 노랗고 희미한 빛.

 그는 눈을 떴다. 등을 기대고 있는 바위가 문득 차가웠다. 바람이 등 뒤에서 불고 있었다. 머리카락이 자꾸만 부풀어 헝클어졌다. 그는 손을 들어 눈앞으로 쏟아지는 머리카락을 걷어내면서 앞을 보았다. 숲 속은 바다의 밑바닥처럼 푸르고 어두웠다. 낙엽이 이쪽에서 저쪽으로 쓸려가며 시끄럽게 버석거리는 소리를 냈다. 리키치는 한쪽 무릎을 세워 팔로 끌어안았다. 문득, 등 뒤에서 나뭇가지가 서걱서걱 부딪히는 소리를 냈다. 그것은 꼭 인기척처럼 들렸다. 그는 쿠나이를 붕대를 두른 쪽 손에서 다른 손으로 바꿔쥐면서 기민하게 뒤를 돌아보았다. 아무것도 없었다. 숲은 조용하고도 요란했다. 그는 바람이 멎을 때까지 오랫동안 어둠을 노려보았다. 그렇게 한참을 허공을 노려다 본 후에야 어깨에서 힘이 빠졌다. 손끝까지 빠듯하게 차올랐던 긴장이 풀리자 저절로 몸이 가라앉았다. 방심을 했다기보다는, 지친 기분이었다. 스르륵 얼굴을 팔에 기대자 피 냄새가 났다.


"갈까……."


 말은 머리를 거치지 않은 것처럼 자연스럽게 흘러넘쳤다. 입 밖에 내고 보니 바로 이 근방이라는 것이 새삼 기억났다. 몇 날 며칠을 쫓고, 쫓기고, 숨고, 도망쳐 다니느라 떠올리지 못하고 있었을 뿐이다. 깨닫고 나니 문득 손 안쪽이 간지러워졌다. 이런 꼴로 가면 놀라려나. 꽤 오랫동안 제대로 씻지를 못했다. 손톱 아래에 새까맣게 낀 것이 흙먼지인지 굳은 피인지 알 수가 없었다. 마지막으로 본 것이 계절이 바뀌기 전이었으니, 이제는 예고 없이 찾아가기 뭣한 사이일지도 모른다. 무엇보다도 임무 도중이었다. 그러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은 했지만, 누군가가 아직 그의 뒤를 밟고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위험을 감수하는 것이 그 혼자만이라면 좋았을 테지만 그렇지가 않았다. 깊이 생각하지 않아도 가지 말아야할 이유는 그렇게 수십 가지는 줄줄이 풀려나왔다. 줄줄 풀려나오는 족족 머리 한 구석으로 흘러가기만 해서 문제였다. 그는 이내 손바닥으로 세차게 얼굴을 문질렀다. 이미 마음이 기운 것을 외면하기가 어려울 정도였으므로, 리키치는 고민하는 것을 그만두기로 했다. 웅크리고 있던 몸을 일으켰다. 고개를 치켜들자, 나무들의 꼭대기 위로 밤하늘이 어지러울 정도로 까마득했다.







 예상했던 대로 도이 한스케는 그를 보자마자 놀람과 경악 그 중간쯤에 있는 얼굴을 했다. 그것이 갑작스러운 불청객의 방문 탓인지 아니면 그 몰골 탓인지는 가려내기가 어려웠다. 리키치는 두건을 풀어내며 간지러운 턱을 긁적였다. "꼴이 좀 그렇죠?" "아니까 다행이다." 객쩍은 물음에 단호한 대답이 돌아왔다. 도이는 여러 가지 하고 싶은 말이 더 있는 것처럼 입을 우물거렸지만, 그러다가 나온 말은 결국 단순한 것이었다. "일단은, 씻을래?"

 나무로 된 마루 위를 발소리가 나지 않도록 조심해서 걸었다. 어린아이들은 이미 잠자리에 들었을 시간이었다. 반쯤 식은 물에 몸을 담그면서도 리키치는 뜨뜻하고 물컹한 무언가에 감싸여 있는 듯한 기분을 지울 수가 없었다. 좀 전까지는 그렇게 추운 곳에 있었는데. 김이 서린 천장의 나뭇결이 다른 세계의 그림인 것처럼 신기해 보여서 저도 모르게 넋을 놓았다. 조금만 정신을 놓으면 어쩐지 그대로 잠이 들 것 같아 그는 눈을 부릅 뜬 채로 묵은 때를 벗겨냈다. 욕탕에서 나와 도이가 쓰는 방을 찾는 일은 어렵지 않았다. 욕실과 가장 멀리 있는 맨 안쪽 방에만 불이 켜져 있었다. 미닫이문 너머로 배어나오는 불빛이 노랗고 희미했다. 리키치는 어쩐지 문밖에 서서 오래오래 그 불빛을 쳐다보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그 충동을 간신히 이겨내고 문을 열었을 때, 도이는 무언가를 읽고 있는 중이었다. 그의 기척에 도이가 고개를 들었다. "방이 몇 개 없어서, 이불은 여기에 깔았어." 방이 좀 좁아도 어쩔 수가 없어. 도이가 나직하게 덧붙였다. "가릴 처지가 아닌 걸요." 리키치는 그와 조금 떨어진 곳에 앉으며 대답했다. 도이는 들고 있던 두루마기를 좀 더 풀어내며 말을 이어갔다. "임무 중이었던 거 아니야?" 왜 이곳에 왔느냐는 물음일 것이다. 대답할 말을 찾기가 어려웠다. 리키치는 대답 대신 그의 얼굴을 가만히 쳐다보았다. 등잔의 기름이 거의 다 된 것인지 불빛이 자르르 흔들리고 있었다. 그에 따라 도이의 얼굴선도 얕게 흔들렸다. 보고 싶었다는 말은 간결하고 쉬웠다. 하지만 그 말이 입천장에 딱 달라붙은 것처럼 입이 떨어지지가 않았다. 조금 더 어렸을 때는 생각한 것을 말하기가 쉬웠던 것 같은데, 이제는 어떻게 그럴 수 있었는지 잘 기억이 나지 않았다.

 후, 도이가 문득 웃었다. 어느 새 도이는 몸을 돌려 그와 마주보고 있었다. "잠을 잘 못 잤지?" 리키치는 멍하니 고개를 끄덕였다. 도이는 어린아이를 대하는 것 같은 얼굴이었다. 아주 어렸을 때, 열두세 살 쯤에나 보았던…… 그런 얼굴. 그 얼굴을 지금 보고 있으니 영문을 모르겠으면서도 간지러웠다. 그리고 말마따나 몹시 졸리웠다. 눈을 깜빡이는 것이 느려지고 있다는 게 스스로도 느껴질 정도였다. "먼저 자도 돼. 나는 이걸 마저 봐야해서……" 그렇게 말하며 도이는 등불을 비스듬히 옮겨 이부자리까지 빛이 닿지 않도록 했다. 리키치는 그 말을 순순히 따르기로 했다. 그는 무릎걸음으로 천천히 걸어가 정돈해놓은 이불 밑으로 파고들었다. 베개에 머리가 닿자마자 몸이 바닥 아래로 꺼질 것처럼 무거웠다.

 그대로 까무룩하게 잠들 줄 알았는데, 너무 졸리운 탓인지 되레 잠이 깊이 오지를 않았다. 그는 선잠이 든 상태로 종잇장이 스치는 소리를 들었다. 옷자락이 구겨지는 소리, 간간히 팔꿈치가 탁상에 닿는 소리. 불빛이 흔들리고 있었다. 꺼질 것처럼, 꺼지지 않을 것처럼. "선생님." 나직하게 부르는 소리는 문밖에서 들렸다.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드르륵 이어졌다. "왜 그래, 쇼코." "무서운 꿈을 꿨어요……." 아이는 낮게 울음이 깔린 목소리로 칭얼대었다. 반쯤 잠에 취한 귓가에 목소리가 띄엄띄엄 고였다. 아이는 커다란 개에게 발을 물어뜯기는 꿈을 꿨다고 했다. 도이가 아이의 어린 손바닥을 주무르면서 어르는 목소리가 들렸다. 가물가물한 잠결에도 능숙한 목소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어렸을 때는 저도 무서운 꿈을 꿨던 적이 있었던 것 같다. 무슨 꿈인지는 잘 기억나지 않지만, 그때 불 앞에 발을 내밀고 어머니가 불러주던 자장가를 들었던 기억은 어렴풋하게 남아 있었다. 그래, 그랬던 적도 있었다. 아주 어렸을 때…….

 아이는 얼마 후에 방을 나갔고, 도이는 문앞에 서서 아이를 내보냈다. 그는 탁상 앞으로 돌아오다 말고 문득 리키치를 내려다보았다. 리키치는 모로 누워 목 위까지 이불을 덮고 있었다. 몸을 수그리는 기척이 있더니, 도이의 손가락이 문득 그의 눈밑에 닿았다. 그제야 리키치는, 자신이 조금 울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눈꺼풀이 축축했다. 이상한 일이었다. 울어본 것이 이미 몇 해 전 일인지 기억이 나질 않는데, 알아차리지도 못하는 새에 눈물이 새고 있었다. 얼굴을 숨기고 싶었지만 몸은 생각을 가둬둔 물주머니처럼 꼼짝을 하지 않았다. 도이는 그의 눈가를 오래 훑지 않았다. 떨어진 손은 그의 관자놀이 부근에 닿았다. 그 손이 아이를 어르는 것처럼 그의 옆머리를 토닥였다. 오래, 오래 토닥였다.









쓰다가 한 번 날렸더니 다시 쓴 문장의 흐름이 마음에 들지 않아 죽겠다♨ 잘 쓰는 것을 포기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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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야토나 단문




 마루에는 볕이 잘 들었다. 정좌를 하고 앉아 있으려니 무릎에 떨어지는 햇볕이 따뜻했다. 약재를 싸 놓았다던 종이는 말마따나 펴자마자 약초 냄새가 물씬 올라왔다. 무릎 아래에 잘 펼쳐두고 손톱깎이를 꺼내들었다. 희게 돋아난 손톱 아래에 날을 대고 누르자 또각거리는 소리가 차례로 났다. 엄지부터 새끼손가락까지. 종이 위에는 잘려 나간 파편들이 가지런히 쌓였다. 토나이는 잠시 손톱을 자르는 일에 집중했다. 마루바닥 위를 가로질러오는 발걸음 소리를 듣기 전까지는 그랬다. 맨발과 나무 바닥이 닿아서 차박차박, 하는 소리를 내고 있었다. 익숙한 걸음걸이였다. 그림자가 어깨 위에 드리워져 고개를 들자 아야베 키하치로가 그를 물끄러미 내려다보고 있었다. 어디에선가 또 흙바닥을 헤집고 온 모양인지 둘둘 걷어부친 소매 아래로 드러난 팔뚝이 지저분했다. "뭐해?" 이 사람이 3학년 기숙사 쪽에는 무슨 일이지, 고민하는 사이 아야베가 먼저 입을 열었다. "손톱을 깎고 있어요." 대답하며 다시 고개를 숙여 시선을 숨겼다. 아야베 키하치로는 기묘한 사람이었는데, 드러내지 않고 싶은 국면에 시기적절하게 찾아온다는 점이 특히 그랬다. 동물 같은 면이 그런 방면에서도 작용을 하는 것인지는 알 수가 없는 노릇이었다. 그대로 저를 지나쳐 갈지도 모른다는 생각과는 달리 아야베는 그의 옆에 털썩 주저앉았다. 마른 흙 냄새가 났다. 그는 한쪽 다리를 세우고 앉아 머리를 기대었다. 이쪽을 쳐다보는 빤한 시선이 느껴졌다. 토나이는 그 눈길을 신경쓰지 않도록 노력하며 손톱깎이를 다른 손으로 바꿔들었다.

 왼손에 손톱깎이를 쥐자 그새 날이 무디어지기라도 한 것인지 손톱이 잘 잘려나가지가 않았다. 어색하게 손톱깎이와 고군분투하고 있는 것을 보고 아야베가 물었다. "내가 해 줄까?" "됐어요……." 대답을 하자마자 헛손질과 함께 손톱 밑의 여린 살이 픽, 베어나갔다. 금세 살 아래에서 붉게 핏물이 올라와서 절로 아픈 소리가 튀어나갔다. 아야야, 눈을 찌푸리며 손끝을 오므리고 있자니 흙이 묻은 손이 눈앞으로 다가왔다. 그 손은 자연스럽게 손톱깎이를 받아들었다. 건네려고 한 것은 아니었지만 그 동작이 몹시 자연스러워 엉겁결에 손을 놓았다. 피가 나는 상황에서 거듭 거절하기도 뭣해 손을 끌어다가 제 앞에 가져가는 것을 밀어내지는 않았다. 아야베는 반쯤 잘려 덜렁거리는 그의 손톱에 손톱깎이를 가져다댔다. 또각, 또각. 규칙적이고 무덤덤한 소리가 이어졌다. 문득, 그가 생각났다는 듯이 입을 열었다. "좀 잘라야할 것 같긴 하더라." 아야베는 그렇게 말하며 손톱깎이를 쥐지 않은 손을 뒤로 돌려 등을 한 번 긁었다. 그 동작에 토나이는 일순간 얼굴이 화끈해지는 것을 느꼈다. 좀 전까지 손끝에 두었던 시선이 바닥까지 떨어졌다. 뒷목에 잘게 땀이 맺히는 것이 느껴졌다. 보지 않아도 얼굴이 엉망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손톱을 다 깎는데는 그리 오래 걸리지가 않았다. 아야베는 손톱깎이를 바닥에 내려놓고 그제야 그의 얼굴을 보았다. 시선이 숙인 고개 아래의 얼굴을 천천히 훑어내렸다. 제 얼굴을 응시하고 있는 것을 알아서 토나이는 더 눈을 들기가 어려웠다. 아야베는 손톱을 다 깎았는데도 손가락을 쥐고 있던 손을 풀지 않았다. 무슨 생각인지, 그의 손이 이내 손아귀 안으로 들어와서 손 전체를 감싸쥐었다. 토나이가 화들짝 고개를 든 것은 그 손끝에 뭉근한 것이 닿았기 때문이었다. 피가 맺힌 검지에 혀가 닿았다. 축축하고 뜨뜻했다. 눈이 마주쳤다. 아야베는 여전히 그의 얼굴에서 시선을 돌리지 않고 있었다. 색이 옅은 홍채에 맺힌 잔상이 어지러웠다. 토나이는 새빨개진 얼굴로 손을 움찔거렸지만 아야베는 그의 손을 놓아주지 않았다. 혀가 손가락 사이로 천천히 얽혔다. 그대로 손가락과 손가락 사이까지 핥을 것 같았다.

 그러나 아야베는 금세 손가락을 뱉어냈다. 여전히 감흥이 없는 얼굴이었다. 그가 억양 없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비려." "……." 토나이는 허벅지에 벅벅 침 묻은 손가락을 닦아냈다. 달아오른 얼굴은 쉽사리 열이 떨어지지가 않았다. 이상하게 숨이 찼다. 그러나 그 다음 말을 들었을 땐 아예 목이 콱 막혀버리는 것 같았다. "좀 있다 방으로 올래?" "……." 토나이는 대답 대신 고개를 약간, 끄덕였다. 그제야 아야베가 조금 웃었다.








짧게 쓸랬는데 생각보다 길어짐

저스트 욕망 손톱을 깎는다는 상황을 야하게 쓰고 싶었다 <그리고 실패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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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사쿠/ 성장통




"키가 크려고 그러나보다."


 의무실에 찾아갔을 때, 젠포우지 이사쿠 선배가 한 말이었다. 이사쿠는 세심하고 노련한 손길로 그의 발목과 무릎을 몇 번 만져보고는 곧장 결론을 내렸다. 옆에서는 카즈마가 무릎 위에 약 상자를 가지런히 올려놓고 그를 지켜보고 있었다. 산노스케는 그제야 허벅지까지 둘둘 걷어올렸던 바지를 양손으로 끌어내리면서 물었다. "원래 이런 건가요?" "음, 다 그런 건 아니지만 종종 그런 사람이 있어. 인대가 늘어나거나 뼈에 손상이 간 건 아니니까 크게 걱정하지 않아도 될 거야." 그 조곤조곤한 말씨에 어쩐지 마음이 놓였다. 그래도 뒤이어 몸을 일으킬 때 무릎에 가늘게 꽂히는 고통은 변함이 없었지만. 자연히 내딛는 걸음이 반 박자씩 어긋났다. "괜찮아?" 카즈마가 등 뒤에서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어어, 잘 모르겠어." 빈말로도 아프지 않다고는 할 수가 없어 대충 대답을 얼버무리고는 문밖으로 나섰다.

 오후에 실습 수업이 없는 것은 다행인 일이었다. 마루에서 내려와 신발을 꿰어 신는 동작 하나하나에 몹시 신경이 쓰였다. 무릎을 굽혔다 펼 때마다 뼈 사이로 가는 철사를 여러 번 박아 넣는 듯한 가늘고 시큰거리는 통증이 이어졌다. 그는 구겨진 신발 뒤축을 펴기 위해 몸을 수그리다 말고 그대로 무릎 사이에 고개를 묻었다. 충동적인 동작이었다. 드러난 뒷목으로 아직 저물지 않은 오후의 햇살이 간지럽게 쏟아졌다.


"아…… 아프다."


 정말이지 신경이 쓰였다.







 통증은 어느 날 밤 시작되었다. 잠에서 깨었을 때 가장 먼저 보인 것은 옆에 나란히 누운 사람의 얼굴이었다. 나쁜 꿈을 꾼 것도, 화장실에 가고 싶은 것도 아닌데 왜 갑자기 자다 깼는지는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시야는 서서히 어둠에 익숙해졌고 그에 따라 이목구비의 윤곽도 천천히 선명해졌다. 산노스케는 숨을 죽이고 그 얼굴이 명료해지는 것을 지켜보았다. 모로 누워 무방비한 낯으로 잠들어 있는 얼굴과 베개 위로 한 움큼씩 흩어져 있는 머리카락. 손을 뻗으면 닿을 만한 거리에 있었다. 이불 아래에 넣어둔 손끝이 움찔거렸다. 이상한 느낌이었다. 잠이 덜 깨서 그런가. 산노스케는 그 얼굴을 쳐다보며 여러 번 눈을 깜빡였다.

 그때, 불현듯 무릎이 욱신거렸다. 산노스케는 무의식중에 이불 밖으로 뻗으려던 손으로 제 무릎을 움켜쥐었다. 손 안쪽이 금세 뜨뜻해졌다. 작은 벌레를 손 안에 가둔 것처럼, 통증은 손바닥 아래에서 가늘게 그러나 끊임없이 퍼득거렸다. 손바닥으로 무릎을 누르고 쓸어내리고 있자니 마치 작고 사나운 짐승을 길들이고 있는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왜 이러지, 생각하는 와중에도 그는 그 얼굴에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그는 그 얼굴이 지어내곤 하는 표정이나 눈짓을 시선으로 덧그려보았다. 화를 내거나, 짜증을 내거나, 종종 다정해지는 얼굴……. 그러다가 까무룩하게 선잠에 들었던 것 같다.

 하루 밤 자고 나면 괜찮아질 줄 알았던 통증은 그 다음 날에도 이어졌다. 산노스케는, 잠들 수 없는 밤이 오래되리라는 것을 예상했다.







 문제 없을 것이라는 말에 걱정은 가셨지만 통증까지 가신 것은 아니었다. 전날 밤 제대로 잠을 자지 못한 탓에 몹시 졸리웠다. 그러나 잠에 들려고 할 때마다 뼈마디가 아려 눈을 감기가 어려웠다. 이런 류의 고통은 마치 꺼지기 직전의 등불 같았다. 꺼질 것 같으면서도 꺼지지 않고, 신경을 끄려고 하면 요란하게 깜빡이며 성가시게 구는 빛. 바른 자세로 누워 잘 보이지 않는 천장의 무늬를 세던 산노스케는 끄응, 앓는 소리를 내며 몸을 옆으로 옹송그렸다.

 자고 있으리라는 예상을 깨고 몸을 옆으로 돌리자마자 눈이 마주쳤다. 놀랐지만, 쭉 자지 못하고 있던 그와는 달리 사쿠베는 자다가 깬 듯 졸리운 얼굴을 하고 있었다. 반쯤 가라앉은 눈꺼풀이 금세라도 아래로 떨어질 듯 아슬아슬해 보였다. "왜 이렇게 뒤척거려." 목소리는 잠에 취해 낮고 거칠었다. 산노스케는 어떤 변명을 할까, 고민했지만 생각보다 말이 먼저 튀어나갔다. "아파서." "어디 아파?" 되돌아오는 목소리가 조금 높고 명확해졌다. 안 그래도 걱정이 많은 성격이었다. 괜히 자던 사람을 깨우는 것 같아 산노스케는 성급히 대답했다. "근데 괜찮대. 아까 의무실 가봤는데, 별 거 아니라고 그랬어." 그래, 하고 대답 소리가 다시 잦아들었다. 사쿠베는 길게 하품을 하며 베개에 얼굴을 좀 더 파묻었다. 산노스케는 어두워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졸리고 아파 몽롱한 와중에도 그 얼굴에서 시선을 떼지 못하고 있다는 걸 들키고 싶지 않았다.

 불쑥 손이 이불 속에서 튀어나와 얼굴 앞으로 다가왔다. 산노스케는 생각을 읽힌 것 같은 기분에 지레 움찔했지만, 그 손은 역시나 잠에 취해 맥아리 없이 그의 어깨나 뺨 같은 곳을 보지도 않고 툭툭 두드리고는 떨어졌다. "너무 아프면…… 말 해. 약 같은 거라도……" 사쿠베는 눈을 감은 채 중얼거리고는 말을 끝맺지 못한 채 다시 잠들었다. 툭, 손은 그의 얼굴 근처에 떨어졌다. 눈앞에 가지런히 놓인 손가락들이 다정했다. 그 손을 쳐다보고 있자니 잠시 잊고 있었던 무릎이 다시 아파오기 시작했다. 통증과 생각들이 번갈아서 깜빡거렸다. 산노스케는 그를 걱정시키고 싶다고 생각했다. 걱정시키고 싶지 않다고 생각했다. 그 손가락들을 만져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결코 만질 수 없다는 생각을 했다.

 그는 조금 간절해졌다. 이 통증이 끝나기를 바라는 건지, 아니면 걱정시키기를 바라는 건지 잘 알지도 못하면서 그랬다. 











이건 덕글이 아니라 산노스케라는 캐릭터로 사쿠베한테 쓰는 짝록 같다^^;

성장통이라는 소재를 좋아해서+산사쿠가 좋아서... 잘 써보고 싶었는데 안 써져서 포기함 퉽텥

사쿠베는 이러니저러니해도 아주 다정한 아이일 것 같아서 좋다.


+다시 읽다가 아주 중요한 문장이 빠져 있어서 수정... 부들부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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