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코이즈마코


* 모브 여캐 주의





 유우키 마코토가 그 여자애의 손끝을 오랫동안 쳐다보고 있는 것을, 세나 이즈미는 마코토 본인보다 먼저 알아차렸다. 그 여자아이의 이름이 타케다 리코라는 것도 그가 마코토보다 더 먼저 알았다. 일반과의 1학년이라고 하는 그 여자아이는 키가 작았다. 모델 일을 하면서 보았던, 몸 선이 길죽길죽하고 세련된 여자아이들과는 느낌이 전혀 달랐다. 그래, 이런 타입의 아이를 좋아하는구나. 그 깨달음은 그다지 의미 있는 것은 아니었는데, 어찌됐든 세나 이즈미는 그의 이상형과 전혀 상관이 없는 사람이기 때문이었다. 눈에 띄지 않게 투명 매니큐어를 발라 놓은 복숭아색 손톱을 집요하게 쳐다보는 눈길이, 자신이 그의 모양 좋은 눈동자나 옆얼굴을 오래 쳐다보던 때와 비슷하다는 것을 깨닫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그때의 그 이상하고 불쾌한 느낌을 아직까지 기억하고 있다.

 이즈미는 어깨 부근을 손바닥으로 누르며 목을 오른쪽으로 꺾었다. 간밤에 잠을 설친 탓인지 목 언저리가 단단하게 뭉쳐 있었다. 그날 그날의 컨디션에 예민한 그는 어깨를 몇 번이나 주무르는 일을 그만두지 못했다. 그럴수록 오히려 뭉친 것이 점점 단단해질 뿐이라는 것을 알아도 그랬다. "짜증나." 라고, 씹어뱉듯이 말하자마자, "어머, 왜 또?" 하고 묻는 소리가 되돌아왔다. 나루카미 아라시는 천연덕스럽게 그의 뒤에 서서 어깨 위에 양 손을 올렸다. "요즘 저기압이네~ 안 그런 적이 있었나 싶긴 하지만서도." 이즈미는 그 손을 떨쳐내듯이 고개를 홱 반대 방향으로 돌렸다. "이유는 알 것 같기도 하지만?" 그렇게 덧붙이고 나서 아라시는 그의 머리꼭지를 흘끗 내려다보았다. 욕을 하거나, 자리에서 일어나거나 둘 중 하나의 반응을 보일 것이라고 예상했던 것과는 달리 그는 신경질적으로 어깨를 으쓱할 뿐이었다.

 그가 앉아 있는 교실에서는 바깥이 잘 내다보였다. 반쯤 열어놓은 창문에서 열기 어린 공기가 배어들어왔다. 해가 잘 드는 오후였다. 남향으로 난 창가에는 시종일관 선명한 햇빛이 머물러 있었다. 세나 이즈미의 얼굴에도 음영이 선명했다. 아라시는 그가 부활 도중도 아닌데 모자도 쓰지 않은 채 볕 아래에 있는 것에 조금 의아해졌다가, 창밖을 내다보고는 이내 납득했다. 유우키 마코토는 한껏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키가 작은 여자아이와 눈을 맞추기 위함이었다. 얼굴이 보이지 않았지만 이즈미가 그의 인영을 알아보지 못할 리가 없었다. 그는 아마도 웃고 있는 것 같았다. 어깨가 조금씩 들썩거리는 것이 보였다. 무엇을 보고 웃고 있는 것일까? 생각하다가, 아라시는 이내 좀 전보다 더 의아해졌다. 세나 이즈미가 저 모양을 그냥 보고만 있다니. 그, 세나 이즈미가?


 "이즈미쨩, 괜찮은 거야?"

 "뭐가?"

 "저거 말이야 저거. 사랑하는~ 유우군이…… 응?"


 이즈미가 턱을 괸 채로 그를 돌아보았다. 불쾌한 것 같았지만, 불쾌한 것만은 아닌 듯한…… 외국어로 쓰인 책처럼 아리송한 표정이었다. 그는 무언가를 말하려고 입을 열다가 이내 그만두었다. 아라시가 재차 그에게 물으려는 찰나, 레오가 뒷문을 열고 들어왔다. 들어왔다, 는 너무나 부드러운 표현이었고 말하자면 들이닥쳤다. 츠카사가 리더를 부르는 소리가 저 먼 복도 건너편에서부터 아련하게 들려왔다. 뒤이은 일상적인 소동에 아라시는 그 질문을 잊었다. 그가 그 이상한 표정을 다시 떠올린 것은 한참 뒤의 일이었고, 그때는 이미 때가 지나가버린 후였다.






 몇 가지에 대해 이야기하자면,


 또각, 손톱이 부러지는 소리가 났다. 그 소리는 무언가 중요한 스위치를 누르는 소리 마냥 유독 또렷하게 귀에 들어왔다. 그때 부실 안에는 그와 마코토밖에 없었다. 이즈미는 반사적으로 그를 돌아보다 말고 들고 있던 수건과 스포츠 드링크를 던지듯이 내려놓았다. 그가 성큼성큼 다가가 마코토의 빈 손을 낚아채자 마코토가 고개를 홱 들었다. 그 표정이 전에 없이 살벌해서 이즈미는 엉겁결에 쥐었던 손을 놓칠 뻔 했다. 도리어 힘을 주어 손가락을 누르자 그제야 마코토가 "아," 하고 짧은 소리를 냈고, 무표정하던 얼굴이 와락 구겨지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뭐야, 너!" 이즈미가 그의 손끝을 내려다보았다. 부러진 손톱 아래로 붉은 핏물이 구물구물 스며나오고 있었다. "예쁜 손끝을 이렇게 다루면 어떡해!" 그가 왼손을 마구 쥐고 흔드는데도 마코토는 조금 얼이 빠진 낯을 하고 있었다. 그 모습이 마치 제가 뭘 하고 있었는지 전혀 모르는 사람 같아 더욱 이상했다. 이즈미는 그의 반대편 손에 들린 핸드폰을 빠르게 쳐다보았다. 라인 창 위의 이름이 일순 눈에 들어왔고, 그 다음으로 보인 것은 아직 답이 오지 않은 메세지였다. 이즈미가 한쪽 손을 손수건으로 동여매도록 내버려두면서도 내내 그는 휴대폰 액정을 응시하고 있었다.


 ……그런 일도 있었고,


 필통 안에 분홍색 펜이 들어 있었다. 펜 뒷축에 꽃 모양 장식이 달려 있는 팬시한 물건이었다. 마코토가 으레 쓸 법한 물건은 아니어서 의아하게 쳐다보자 그는 머쓱하게 웃으며 숨기듯이 필통을 닫았다. "네 물건이야?" "아뇨, 그……" 말하기를 조금 주저하는 것을 보며 이즈미가 문득 떠올린 것은 언젠가, 아직 마코토가 모델 활동을 할 적의 일이었다. 겨울이었고, 며칠 내내 눈이 내리고 있었고, 마코토가 대기실에 벗어둔 장갑 두 짝은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그것을 앞에 두고 서성거리던 일이 있었다. 결국 그 중 한 짝을 급하게 코트 안주머니에 밀어넣고는 내내 모른 척하던 기억이었다. 한 번 그렇게 시작한 일은, 두 번이 되고 세 번이 되자 가책이 무뎌지면서 공공연한 것이 되어버렸다. 그때, 장갑을 주머니에 넣고 고개를 들었을 때, 거울에 비치던 약간 상기된 자신의 얼굴을 잊지 못한다. 죄책감과 자의식과 미묘한 흥분을 감추지 못한 표정. 유우키 마코토가 지금 꼭, 그런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랬다.


 사랑에도 방식이 있다면 그것은 수학 공식이나 영어 단어처럼 학습되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렇게 생각하자 목 아래가 열이 오른 것처럼 간질거렸는데, 조금 나중에서야 세나 이즈미는 그 느낌에 영향욕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유우키 마코토에게 가장 길고 끈질기게 사랑의 방식을 보여준 것은 세나 이즈미였다. 이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것이 옳은 항과 계산 결과를 가진 식인지는, 어쩌면 그렇게 중요한 것이 아닐지도 모른다. 그는 천천히 눈을 깜빡였다. 여전히 그는 바깥이 잘 보이는 자리에 앉아 있었다. 눈을 감았다 떴을 때,  변함 없이 모든 것이 선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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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이모브/ 책상 밑 어둠


1


 낮부터 공기에서 축축한 냄새가 났다. 막 세탁기에서 나온 빨래나, 젖은 수건에서 날 것 같은 그런 냄새였다. 아침에 일기예보를 볼 적만 해도 그래, 비가 오는구나, 했던 것 같은데, 집에서 나설 때는 까맣게 잊어버렸다. 학교가 끝날 무렵까지 오후 내내 날씨가 맑았다. 조금 더운 것도 같았다. 그러나 저녁 무렵 사무실에서 막 나왔을 때는 하늘이 거무죽죽했다. 금세라도 거꾸로 쏟아질 것 같이 어둡고 낮은 하늘이었다. 그러고보니 오늘 비가 온다고 했어요. 그래? 그거 큰일이네, 우산 없는데. 같은 대화를 나눈지 5분도 되지 않아 빗줄기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초여름의 전형적인 변덕스러운 날씨였다. 빗물이 운동화 바닥에 차올라 양말까지 적시는 것은 금방이었다. 라면을 먹으러 가려던 발걸음을 급히 틀었다. 레이겐의 원룸은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었고, 모브의 집보다 훨씬 가까웠다.

 모브는 문 앞에 서서야 그의 집에 와보는 것은 처음이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그렇게 생각하자 불현듯 긴장이 되는 것도 같았다. 모브는 젖은 옷깃을 살에서 떼내듯이 잡아당겼다. 레이겐은 물 묻은 손에서 열쇠가 자꾸 미끄러진다고 불평을 했다. 문은 조금 뒤에 열렸다. 레이겐의 방은, 남자 혼자 사는 집치고는 그다지 더럽지는 않았지만 아주 깔끔하다고 말하기도 어려웠다. 전날 밤 깔아두었던 이불이나 옷가지 같은 것들이 몇몇 바닥에 널려 있었고, 책장의 책들은 제각기 높낮이가 다르게 꽂혀 있었다. 레이겐은 방 안으로 들어가면서 세탁소에서 찾아온 지 얼마 안된 것처럼 보이는 양복 겉옷을 자연스레 집어 들어 책상 위에 올려놓았다. "먼저 씻어도 돼." 그 말을 듣자마자 갑자기 축축한 목덜미가 의식되었다.

  걸을 때마다 발바닥과 타일 사이에서 처벅처벅 소리가 났다. 젖은 셔츠와 교복 바지를 변기 뚜껑 위에 대강 놓아두었다. 샤워기의 물은 제일 뜨거운 쪽으로 돌려 놓아도 줄곧 미지근했다. "갈아입을 옷 여기 있어." 문의 바깥에서 목소리가 희미하게 들렸다. 모브는 하마터면 타일 위에서 미끄러질 뻔했다. 차가운 벽에 어깨를 쿵 찧고 나서야 문득 정신이 들었다. 손바닥으로 얼굴을 세게 문지르자, 살갗이 화끈거렸다.


 "뜨거운 물 잘 나와?"


 그 말에 모브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근데 왜 이렇게 얼굴이 빨개." 레이겐은 그의 뺨을 한 번 툭 치고는 욕실로 들어갔다. 모브는 화들짝 그를 돌아보았다. 이내 물소리가 들렸다. 레이겐이 건네준 티셔츠는 반팔인데도 소매가 팔꿈치까지 내려왔다. 소매 아래로 손을 집어넣어 머쓱하게 맨 팔뚝을 쓰다듬다가 손을 들어 느리게 뺨을 문질렀다. 손등에서는 낯선 샴푸 냄새가 났다. 물소리, 그리고 물소리. 뱃속이 이상하게 부글거렸다. 이건, 어떤, 느낌이었더라. 그는 어렵게 발을 떼어 책상 앞으로 다가갔다. 마치 발바닥이 바닥에서 2cm쯤 떨어져 있는 것처럼 걸음이 어색했다. 털썩 의자에 주저앉자 등받이가 거세게 삐걱거렸다. 책상 옆에 난 쪽창으로 밖을 내다보았다. 바깥에서는 여전히 비가 오고 있었다. 툭, 툭, 툭. 창틀을 두드리는 소리가 규칙적이다.

 이건 들떠 있는 게 아닐까.

 ……. 확실하지는 않지만 그런 것 같았다. 스스로 들떠 있다는 걸 자각하는 느낌은 이상한 것이었다. 모브는 의자 위에서 무릎을 모아 팔로 한껏 끌어안았다. 엄지발가락이 다른 쪽 엄지발가락과 가만히 맞닿았다. 책상 위에는 다 식은 커피가 반쯤 담긴 머그컵이 놓여 있었다. 심이 닳은 볼펜과 노란색 메모지, 현관 앞의 슬리퍼, 구두, 모아둔 재활용 쓰레기 봉투, 먼지가 얇게 쌓인 선반, 머리맡의 자명종과 모서리가 뒤집힌 얇은 여름 이불.

 타인의 흔적이 가득한 공간에 들어와 있다는 것은 묘한 일이었다. 모브는 무릎에 턱을 대고 눈을 감았다. 눈을 감자 시계 초침 소리가 크게 들렸다. 누군가의 심장소리처럼 규칙적이고 안정이 되는 박자였다. 심장이 두근거리는 한편 알 수 없이 졸리웠다. 깜빡, 잠이 들 것 같다고 생각했을 때였다.

 쾅, 창밖에서 벼락이 내리쳤다. 바깥의 거리가 일순 하얗게 밝아졌다. 모브는 화들짝 고개를 들었다. 반사적으로 놀란 동작을 하자 아직 덜 마른 발이 의자 위에서 미끄러졌다. 미처 중심을 잡기도 전에 의자에서 자빠지는 것은 한순간이었다. 바닥에 엉덩이를 찧고 나서야 정신이 들었다. 천둥이 어두운 하늘 저편으로 우릉거리며 잦아드는 것이 희미하게 들렸다. 고개를 들자 창문 너머는 여전히 깜깜했다. 엉덩이가 아팠고, 얕은 졸음은 어딘가로 사라져버렸다. 그는 세게 부딪힌 엉덩이를 문지르며 아쉽게 침을 삼켰다. 무엇이 아쉬운지는 잘 모를 노릇이었다.

 그러다가 눈을 돌렸을 때, 책상 아래에서 무언가 반짝이는 것을 본 것은 순전한 우연이었다. 비스듬한 각도에서만 보이는 무언가였다. 모브는 어정쩡한 자세로 앉아 있다가 책상 밑에 손을 슬그머니 집어넣었다. 팔을 몇 번 휘젓자 매끄럽고 작은 것이 손끝에 달각 걸렸다. 구슬? 커프스 버튼일까? 어렴풋이 짐작하며 손을 꺼냈다.

 그가 꺼낸 것은 귀걸이 한 짝이었다. 희끄무레한 진주알의 표면에 먼지가 묻어 있어 엄지로 문질러 닦았다. 리본 모양의 은색 금속이 작은 진주알을 감싸고 있었고, 좁쌀만한 비즈가 알알이 박혀 있었다. 누가 보아도 절대, 레이겐의 것이라고는 착각할 수 없는 물건이었다. 한 쌍이 아니라 한 짝만 있다는 점이 더욱 그러했다. 이리저리 돌려보다가 침 끝에 손가락이 살짝 찔렸다. 피는 나지 않았지만 제법 따가웠다.

 누구의 것일까? 아마도 여자의 것일테다. 진주 귀걸이가 잘 어울리는, 귓불이 둥글고 목이 흰 여자일 것 같다는 생각이 아무런 근거도 없이 들었다. 스승님은 지금 여자친구가 있으신 걸까? 아무리 생각해봐도 그런 것 같지는 않았다. 여자친구가 있다면 주말이나 밤에도 그렇게 한결같이 한가할 리가 없었다. 그렇다면 전 여자친구의 것일까. 스승님은 전에 애인을 사귄 적이 있으신 걸까. 그렇겠지. 그럴 것이다.

 그의 연애는 어떤 것이었을까?

 레이겐의 방에 귓불이 둥글고 목이 흰 여자가 앉아 있는 것을 상상하자 속이 아주 이상해졌다. 그녀와 레이겐이 나눌 대화 같은 것은 쉽게 상상이 되지 않았다. 알 수 없는 것을 상상해내려고 애쓰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었다. 유통기한이 한참 지난 우유를 잘못 마신 것처럼 속이 울렁거렸다. 모브는 한참동안 귀걸이를 손 위에서 동그랗게 굴렸다. 매끄럽고 차갑고 따끔했다. 창밖이 점점 더 어두워지고 있었다. 생각이 자꾸만 따끔거렸다.







2


 레이겐은 졸린 것처럼 보였다.

 모브는 베개에 뺨을 대고 비스듬하게 그를 올려다보았다. 체모가 옅은 그는 수염 자국이 잘 보이지 않았다. 손을 들어 얼굴에 가져다 대자 땀이 배인 살갗에 손바닥이 달라붙는 것처럼 느껴졌다. 왜? 하고 물어보는 목소리가 평소보다 조금 낮다. 그게 조금, 야한 것 같다고 생각하면서 모브는 고개를 저었다. 손은 뺨과 턱을 한 번 쓰다듬고는 맥없이 내려왔다. 레이겐이 나직하게 하품을 했다. 그가 느리게 눈을 깜빡이며 동작을 따라하듯 손을 들어 모브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 머리카락 안쪽 두피를 헤집는 손가락의 감촉이 부드럽다. 섹스 후의 공기는 언제나 뭉근하고 간지러웠다. 맞닿은 맨 팔뚝의 감촉이 더 간지러운 것 같기도 했다. 모브가 여러 번 눈을 깜빡이는 사이, 레이겐은 잠이 든 것처럼 보였다. "……스승님, 자요?" 귓속말을 하는 것처럼 작은 목소리로 물어본 것에는 대답이 없었다.

 모브는 턱을 괸 채로 창문을 올려다보았다. 그가 알아차리지 못한 사이 비가 오고 있었다. 간신히 구멍을 뚫어놓은 것처럼 작은 창을 타고 빗물이 길게 흘러내렸다. 툭, 툭, 툭. 단조롭게 창틀을 두드리는 소리.

 모브는 멀거니 창문을 올려다보다가 불쑥 이불 밖으로 손을 내밀었다. 팔을 있는 힘껏 뻗자 책상 아래까지 간신히 닿았다. 손끝에 덜컥 걸리는 것이 있었다. 귀걸이는 여전히 거기에 있었다. 모브는 그것을 버리거나 치우지 않았다. 그러지 못했다는 표현이 조금 더 정확하다. 그는 그의 상상의 바깥에 있는 것을 질투하거나 싫어할 수는 있어도 감히 어떻게 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이제는 자신도 그에게 흔적을 남길 수 있다는 것을 안다.

 말갛고 흰 귀걸이를 손가락으로 만지작거리고 있자니 조금씩 몽롱해졌다. 졸린 것 같기도 했다. 그는 귀걸이를 손에 꼭 쥔 채로 다시 이불 안으로 파고들었다. 반쯤 몸을 돌린 자세로 누워 있는 레이겐의 품 속으로 어물쩍 파고들자 점점 더 졸리워졌다. 잠들어 있는 몸은 따뜻하고 익숙했다. 모브는 그의 팔을 벤 채로 눈을 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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쇼우리츠/ 바다


↑뭔 제목을 붙여도 후질 것 같았다...





 고등학교와 중학교 사이에 있는 도서관에는 언제나 책을 읽는 사람보다 공부를 하는 사람이 더 많았다. 참고서에서 나는 빳빳한 종이 냄새와 오래된 소설책에서 나는 냄새는 사뭇 달랐다. 쇼우는 들고 있던 소설책을 처음부터 읽는가 싶더니, 이내 몇 장을 넘겨 중간쯤을 보다가, 마지막 페이지를 한 번 들춰보고는 덮었다. "재미없네." 그의 어설픈 총평이었다. 리츠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답이 필요한 말은 아니었을 것이다. 리츠는 종이 위를 손으로 짚어가며 푼 문제들을 채점했다. 대부분 맞았고, 가끔 틀린 문제는 눈여겨 보았다. 쉬운 일은 아니었는데, 그가 문제에 틀린 표시를 할 때마다 쇼우가 그의 어깨에 턱을 기대며 "이런 걸 틀렸어?"라든가, "어떻게 푸는 건지 알 수가 없네." 같은 말을 한 마디씩 거들었기 때문이었다. 말하자면, 성가셨다.

 리츠가 채점을 다 마쳤을 때 쇼우가 은근히 팔에 팔을 기대왔다. "저기, 놀러 가고 싶지 않아?" "별로." 리츠는 곧장 대답하고는 다 푼 참고서를 가방에 집어넣고 새 문제집을 꺼냈다. 쇼우는 잠깐 실망하는가 싶었지만 쉽게 굴하지 않았다. "한 시간 반이나 도서관에 있었잖아." "공부 중이야." "기왕 학교가 일찍 끝난 날에 도서관에 오다니 너, 생각보다 되게 재미없다." "너한테 재미있으라고 공부를 하는 건 아니지." 리츠는 모서리를 접어 표시해둔 부분을 펼쳤다. 깨끗하게 정리가 되어 있었다. 그러나 쇼우는 기어이 그를 방해하려고 작정한 듯 싶었다. "노래방 좋아해?" "안 좋아해." "쇼핑은 어때." "관심없어." "영화 보러 갈래?" "아니."


 "그럼 가고 싶은 곳 없어?"


 리츠는 자를 대고 파란색 볼펜으로 중요한 부분에 밑줄을 그었다. 파란…… 어제 TV에서 봤던, 관광지의 수평선이 꼭 그런 색깔이었던 것 같다. 오키나와였던가, 벳부였던가. 햇볕에 젖어드는 물빛이 선명했던 것이 문득 떠올랐다.


 "바다라든가……"


 대답은 생각보다도 더 먼저, 어물쩡 흘러나왔다. 섣불리 물 거리를 던져줬구나, 하는 생각이 뒤이어 들었다. 스즈키 쇼우는 이상한 행동력의 소유자였다. 아니나 다를까, 리츠가 말을 끝맺기도 전에 덥썩 손목을 잡아왔다. 안 좋은 예감이 들었다. "갈까? 바다." 아마도 사실이 될 예감이었다.







 리츠에게 바다, 라는 것은 그렇게 쉽게 갈 수 있는 곳은 아니었다. 어렸을 적 휴가철에 몇 번 물놀이를 갔던 기억만이 희미하게 남아 있다. 그나마도 초등학교 고학년이 되고부터는 간 적이 없다. 친구들끼리 놀러갈만한 나이도 아직 아니고, 수학여행도 아직은 이르다. 카게야마 리츠는 이러니저러니해도 정해진 길만 걷는 모범생인 것이다. 그래서, 어느새 기차표를 들고 텅 빈 플랫폼에 서 있으니 다소 생경한 기분이 들었다. 손에 들고 있는 것이 문제집과 참고서와 필통이 든 책가방이라니 더욱 이상하다. 그런 그의 혼란스러움을 아는 것인지 모르는 것인지, 쇼우는 자판기를 두드리며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이었다. "녹차가 좋아, 커피가 좋아?" 둘 다 싫어, 라고 대답하려다가, "녹차." 라고 대답하고 말았다.

 평일, 늦은 오후의 기차역에는 사람이 적었다. 도시에서 나고 자란 사람들이 으레 그렇듯 리츠는 사람 없는 공간이 낯설었다. 그가 녹슨 벤치의 등받이와 역 이름이 쓰여 있는 간판을 번갈아서 쳐다보는 사이 쇼우가 녹차가 든 페트병을 장난스레 던지듯 건넸다. 가볍게 받아든 병 표면에는 작은 물방울들이 송글송글 맺혀 있었다. 차가웠다.

 어쩌다가 이렇게 되었는지 생각해본다. 바다, 라고 말은 했지만 실현 가능성이 희박했기 때문에 쉽게 나온 말이었을 것이다. 사실은 말했다, 보다 모르는 사이에 흘러나왔다, 라는 표현이 더 정확했다. 그러나 쉽지 않다고 생각했던 것은 아마 리츠 본인 뿐이었던 것 같다. 쇼우는 곧장 거리낌 없이 기차역으로 향해 노선을 확인하고는 가장 이른 시간의 표를 샀다. 그 일련의 과정이 너무 거침없어서, 리츠는 현실 감각이 없다고 생각했다.

 십 여 분 후에 기차가 왔다. 쇼우는 녹차를 마시며 어정거리는 리츠의 어깨를 떠밀듯이 기차에 올라탔다. 기차 안에도 역시 사람이 적었다. 구석 자리에서 꾸벅꾸벅 졸고 있는, 나이 든 여자 한 명이 있을 뿐이다. 가운데 좌석에 자리를 잡고 앉자, 기차는 느릿느릿 출발했다.

 기차가 흔들릴 때마다 몸이 덜컥거렸다. 쇼우는 꽤나 기꺼이 창가자리를 리츠에게 양보했다. 리츠는 턱을 괴고 앉아서 창밖을 쳐다보았다. 간간히 쇼우가 던지는 말에 대답을 하거나 안하거나 하면서, 줄곧 빠르게 지나치는 풍경들을 지켜보았다. 듬성듬성 늘어서 있는 집들의 모양새와 지붕들을 구경하다가, 이내 그마저도 뜸해졌다. 산등성이와 다리 위를 거쳐 점점 땅의 가장자리로 밀려가고 있는 것이 느껴졌다. 기계에서 부속품이 하나씩 빠지듯 시야의 빈 자리가 점점 넓어진다.

 한참 말이 없는 것 같더니 쇼우는 아무래도 졸고 있는 모양이었다. 눈을 돌리자 고개를 숙인 채 이리저리 흔들리고 있는 그의 모습이 보였다. 리츠는 핸드폰을 꺼내 사진이라도 찍어둘까 생각하다가, 툭 기대오는 머리에 생각을 그만두었다. 어깨가 묵직해졌다. 밀쳐내는 방법도 있었지만, 기차표를 전부 그가 계산했다는 것과 차가운 녹차와, 꽤 밝고 고적한 바깥의 풍경 같은 것들을 생각하고는 이번 한 번만 봐주기로 했다.

 기차는 천천히 바다 쪽으로 나아가고 있었다.





 

 추웠다.

 그것이 리츠의 첫 감상이었다.

 신나게 졸고 있던 쇼우를 깨워 내린 역은 역시나 한적했다. 빈 녹차병을 쓰레기통에 버리고 길다란 플랫폼을 빠져나왔다. 역의 바깥은 바로 모래사장과 이어져 있었다. 바다는, TV에서 본 것과는 많이 달랐다. 희끗하고 낮은 하늘이 수평선과 곧장 맞닿아 있었고, 물빛은 푸른색보다는 회색에 가까웠다. 아직 이른 봄이었고 춘추복을 입기도 전이었다. 무엇보다 물이 가까이 있어서 그런지, 어마무지하게 바람이 불었다. 백사장에 발을 디디자마자 리츠는 반사적으로 팔짱을 끼고 몸을 웅크렸다. 숨을 크게 들이켜자 짠 냄새가 찬바람과 함께 사정없이 밀려들었다.


 "춥잖아."

 "어, 그러게."


 "뭐가 그러게, 야." 리츠는 볼멘 소리를 하면서 모래를 발로 슬쩍 걷어찼다. 걸을 때마다 발바닥이 푹푹 잠겼다. 모래 위로 발자국이 깊게 패였다. 리츠는 쇼우를 내버려두고 성큼성큼 바다쪽으로 걸었다. 파도가 신발코까지 다가올 정도로 가까이 다가가자 희미한 수평선이 좀 더 잘 보였다. 젖은 땅이 바로 발치에 있었다. 쇼우가 서두르지 않고 그의 뒤를 따라왔다.


 "근데 왜 하필 바다야?"


 리츠는 흘끗 쇼우를 돌아보았다. 그는 좀처럼 대답을 하지 않았다. 옆구리에 끼고 있는 손이 시려서 몸을 좀 더 옹송그렸다. 쇼우는 그의 대답을 기다리는 대신 입고 있던 겉옷을 훌쩍 벗었다. 그에게 쑥 내밀자 리츠는 다소 질색하는 기색으로 말했다. "여자애 취급하지 마." "뭐? 아닌데." 쇼우는 천연덕스럽게 말을 이었다.


 "좋아하는 사람한테는 원래 이런 거 하는 거야."


 그 말에 리츠는 한참, 그를 쳐다보았다.

 옆구리에 끼고 있던 손을 대신 바지 주머니에 넣었다. 파도가 좀 더 거세졌다. 운동화 밑바닥을 적실 정도로 물이 밀려와서, 리츠는 몇 발자국쯤 뒷걸음질을 쳤다. 수평선은 여전히 희미했다. "형이." 그렇게 입을 열 때면 항상 속이 이상하게 울렁거렸다. "바다가 가고 싶다고 했거든."

 지난 날 저녁에, 소파에 나란히 앉아서 TV를 보다가 문득 그랬다. 영 볼 만한 게 없어 채널을 돌리다가 불쑥 얻어걸린 여행 프로그램에서, 화면을 꽉 채운 바닷가의 풍경을 보았다. 길게 이어진 수평선을 경계로 하늘과 바다가 나뉘어 있었다. 잔잔한 수면 위로 요트 한 대가 유유자적하게 떠다니는 것이 보였다. "나도 가고 싶다, 바다." 시게오가 문득 말했다. 리츠는 그를 돌아보았다. 그는 그렇게 말했을 뿐이다. 정말로, 그것만 말했을 뿐이다.


 "그래서야."


 리츠는 어깨를 한 번 작게 으쓱했다. 바람이 자꾸만 쓸고 지나가서 목덜미에 잘게 솜털이 돋았다. 쇼우는 겉옷을 손에 쥔 채로 그를 마주보았다. 리츠는 그의 반응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 다음에 그는 한 걸음에 성큼 다가와서, 들고 있던 겉옷을 리츠의 어깨에 둘러주었다. 예상하지 못한 일이었다. 멀뚱히 쳐다보고 있으니, 크게 한숨을 쉬었다. 연극배우처럼 어딘가 과장된 동작이었다.


 "너 말야……"


 그는 잠시 말을 고르더니 이내 빠르고 큰 목소리로 말했다. "난 말이지, 네가 날 대용으로 쓰는 건 아무렇지도 않거든?" 그리고는, 약간 작아진 목소리로 덧붙였다. "아, 아무렇지도 않다는 건 좀 거짓말이지만, 아무튼."


 "하지만 네가 널 상처주는 일은 그만두는 게 좋아."


 리츠는 팔뚝으로 스르륵 흘러내리는 겉옷을 추어올리다가 문득 손을 멈췄다. "무슨 말인지 알겠어?" 그 말은 대답하기가 어려웠다. 젖은 발이 축축하고 차갑다는 것을 그제야 생각했다. 차갑고 큰 쇠구슬을 입에 물고 있는 것 같았다. 미지근하고 푹신한 온도의 겉옷 때문에 더 그랬다. 품이 비슷하고, 열은 자신보다 조금 높은 것 같다.


 "……네가 뭘 안다고."


 결국 나온 것은 딱딱하고 상투적인 말이다.


 "잘 알지."

 "웃기지 마."


 리츠는 보폭이 큰 걸음으로 백사장 위를 가로질러 걷기 시작했다. 바닥에 닿을 때마다 젖은 발이 절그럭거렸다. "뭐야, 어디가?" 쇼우가 한사코 그의 뒤를 따라왔지만, 리츠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답하지 않은 질문들이 많이 있었다. 앞으로도 오랫동안은 그럴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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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이모브/ 개종



 어렸을 때 레이겐 아라타카가 살던 동네의 서쪽에는 큰 성당이 하나 있었다. 성당의 높은 첨탑은 뒷산에 올라가면 더욱 잘 보여서, 거리를 가늠하는 일종의 지표로 쓰이기도 했다. 그가 아직 신성神聖이라는 단어를 모를 때였다. 종교 같은 것에 관심이 없었고, 있을 리도 없었다. 한처음에 하느님께서 하늘과 땅을 창조하시니라……  같은 구절로 시작하는 구약 성경의 내용은 모호했고 나이가 두 자릿수를 채우지 못한 어린아이들의 흥미를 끌기에는 부족했다. 덕분에 그와 동네 아이들은 미사 때가 아니어도 열려 있곤 하던 대강당을 곧잘 놀이의 장소로 쓰곤 했는데, 몇 번쯤 보좌 신부에게 쫓겨나는 일도 있었지만, 그는 그런 것에 굴하지 않았다.

 대강당의 단상은 붉은 천으로 덮여 있었고 그 아래에 숨어드는 것은 레이겐의 버릇 중 하나였다. 몇 개씩 늘어선 긴 의자 밑이나 두꺼운 커튼 뒤로 숨는 것은 다른 아이들도 자주 하는 일이었으나 누구도 감히, 높다란 단상까지는 생각하지 못했던 것 같다. 덕분에 요 며칠 숨바꼭질 때면 레이겐은 누구에게도 잡히는 일이 없었다. 그날도 마찬가지였다.

 술래가 크게 숫자를 세는 소리가 점점 멀어졌다. 레이겐은 보폭이 큰 뜀박질로 성당 안에 뛰어들었다. 대강당에는, 언제나 그렇듯이, 아무도 없었다. 불이 꺼져 있었다. 낮은 계단을 단숨에 뛰어오르자 덜그럭거리는 소리가 났다. 단상에 드리워진 천은 언제나 부드러웠다. 그 촉감은 어머니가 책꽂이 위쪽에 보란듯이 꽂아 놓은 오래된 서양 소설에 나오는 실크, 공단, 레이스 같은 단어들을 연상시켰다. 레이겐은 단상 아래의 빈 공간으로 쑥 들어갔다.

 천이 다시 덮이자 시야가 어두워졌다. 소리들은 아주 멀어졌다. 레이겐은 반사적으로 숨을 참다가 이내 지루해졌다. 술래는 아주 오랫동안 그를 찾으러 오지 않았다. 바닥은 차가웠고 먼지들이 드문드문 떠다니는 공기는 바싹 말라 있었다. 얄팍한 인내에 지친 그는 천을 조금 걷어 바깥을 쳐다보았다. 그래봤자, 보이는 것은 그의 정면에 걸려 있는 커다란 십자가 뿐이었다. 그는 턱을 조금 들어 십자가의 꼭대기를 올려다 보았다. 예수의 형상이 양각되어 있었다. 시선을 더 올리자 창문 위쪽을 장식하고 있는 모자이크에서 바깥의 햇볕이 희미하게 비쳐들어오고 있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어둑한 천장 위로 불빛이 얼룩덜룩했다. 보라색, 노란색, 초록색…… 빨간색과 파란색.

 적막했다.

 전날에는 TV 애니메이션을 보다가 잠을 설쳤다. 그래서인지 몽롱했다. 대강당 안은 소리가 울리는 구조로 되어 있었고 아주 작은 발소리도 반사시켰지만 그를 제외하고는 아무도 없었다. 오직 그와, 십자가 뿐이었다. 바깥은 봄이었지만 실내는 서늘했고, 어두웠기 때문에 마치 아주 다른 세계의, 다른 공간인 것처럼 느껴졌다. 묘한 부유감에 발바닥이 간지러웠다. 그는 검고 긴 옷을 입고 다니는 신부들과, 머리카락을 가리고 다니는 수녀들에 대해 생각했다. 그들의 금욕적인 낯이 무엇을 추종하는지에 대해 어렴풋이 고민해 본 적이 있다. 구체적이고 명민한 생각은 아니었다. 그러나 만약 종교가 이런 것, 적막, 서늘함, 빛, 침묵, 외따로 떨어진 것……으로 이루어져 있다면, 그걸 이해하지 못할 것도 없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그러다가 잠이 들었다. 그가 잠에서 깨었을 때는 이미 한밤중이었다. 그의 부모가 다섯 시간 가까이 그를 찾아다녔다는 얘기는 하루가 더 지난 뒤에야 들었다. 집에 가자마자 영문도 모르고 혼쭐이 났기 때문이었다. 그 일로 한바탕 작은 소동이 일어난 탓에, 후에 대강당의 문은 쓸 일이 없을 때는 잠기게 되었고 더 이상 레이겐은 그곳에 들어갈 일이 없었다. 초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종종 그때 느꼈던 이상한 기분을 생각하곤 했지만, 중학교에 들어가고나서는 이내 잊었다.

 신성이라는 단어의 뜻은 나중에 알았다.






 의뢰인의 집에는 파란 유리로 만들어진 작은 화분이 있었다. 레이겐은 화분 아래쪽에 빛이 뭉쳐 테이블 위로 푸른색을 반사시키는 것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의뢰인의 말은 길고, 이런저런 곳으로 튀기 일쑤였기 때문에 좀처럼 집중하기가 힘들었다. 그의 옆에서 덩달아 얘기를 듣고 있는 모브는 별로 지루한 기색도 없어 보였다. 그 흰 뺨에서 표정을 읽어내는 것을 포기한 레이겐은 이번에는 의뢰인의 긴 머리카락 끝을 쳐다보기 시작했다. 사십 분 넘게 이어진 그녀의 이야기를 요약하자면, 아무도 건드린 적이 없는데 집의 구조물이 자꾸 바뀌고, 아마 유령이 있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는 것이었다. 머리카락이 길고, 체구가 작고, 적잖이 나이가 있는 의뢰인은 심약해 보이는 얼굴이었다. 레이겐은 집을 살펴보는 척 고개를 틀며 작게 하품을 했다.


"어때, 모브. 뭔가 느껴져?"


 모브가 눈을 깜빡였다.


"네. 음…… 하지만 나쁜 느낌은 아닌데……"

"지금은 어디에 있는 것 같아?"

"이 방 안에는 없어요."


 레이겐이 자리에서 일어나자 의뢰인도 주춤거리며 따라 일어났다. 미닫이 문을 열고 나서서 좁은 계단을 올라갔다. "아무도 없네요." "바깥 양반은 지금 일을 나가서요. 아이들은 출가한 지 오래고." "혼자 집에 계시는 일이 많으신가보군요." "네, 그래서 더, 무서워서……" 나무로 된 계단은 밟을 때마다 삑삑거리며 낡은 소리를 냈다. 천장이 낮아 계단 위쪽에서 레이겐은 고개를 조금 숙여야만 했다. 2층 역시 오래되었지만 깔끔하고, 사람 사는 흔적이 꼴사납지 않게 묻어나는 모양으로 정돈되어 있었다. "이 위층도 있나요?" 올라오는 내내 줄곧 입을 다물고 있던 모브가 불쑥 물었다. "위에는 다락방이 있는데……" "있는데?" "사다리가 있어야지만 올라갈 수 있어요."

 의뢰인은 방 안쪽에서 나무 사다리를 들고 왔다. "네가 먼저 올라가." 모브는 군말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체구가 작은 그는 느릿느릿 사다리를 타고 올랐다. 레이겐이 그 뒤를 따랐다. 다락방에는 해가 잘 들었다. 그리고 먼지 냄새가 났다. 움직일 때마다 삐걱삐걱 소리가 났고, 요즘에는 좀처럼 볼 수 없는 고풍스러운ㅡ혹은 촌스러운ㅡ 디자인의 커튼과 의자, 서랍장 같은 것들이 질서 없이 놓여 있었다. 레이겐은 의자 등받이 위로 늘어진 커튼을 한 번 만져보았다. 부드러웠다.

 해가 정면에서 들고 있어서 눈이 시렸다. 레이겐이 눈을 길게 감았다 떴을 때 모브는 장롱 뒤쪽을 쳐다보고 있었다. 의뢰인이 막 다락방으로 올라왔다. 그녀의 치맛자락에 먼지가 자욱하게 일었다. 콜록, 낮은 기침 소리. "왜 여기에 있어?" 그렇게 말한 것은 모브였다. 레이겐이나, 의뢰인에게 한 말은 아니었다.

 의뢰인이 합, 숨을 한 번 들이켰다. 레이겐이 뭐라고 말을 하기도 전에 모브가 먼저 덧붙였다. "악령은 아니에요. 그냥…… 지박령 같은 건데." 레이겐으로서는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 것인지 알 수 없었으므로 그는 대답 대신 딸꾹질을 하기 시작한 의뢰인의 등을 두드려주었다. 모브가 무릎을 굽혀 자리에 쪼그리고 앉았다. 그러자 안 그래도 몸집이 작은 그가 더 자그마해 보였다. 그는 누군가와 눈을 맞추고 얘기를 하는 듯, 한 곳을 응시했다. 그는 이따금씩 고개를 끄덕였다. 여전히 표정은 없었다.

 모브는 이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가 무릎에 묻은 먼지를 털며 말했다. "요 앞 큰 길에서 오토바이 사고로 죽었대요. 어린앤데…… 성불하려고 했는데, 이 집을 지나가다가 너무 쓸쓸해보여서, 아, 그러니까, 의뢰인 분이요." 그가 고개를 돌려 의뢰인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그래서 그냥, 여기 있고 싶었대요. 물건들을 옮겨 놓은 건 혼자 있는 게 아니라는 걸 알려주고 싶었나봐요."

 잠시 놀란 얼굴을 하던 의뢰인이 딸꾹, 다시금 딸꾹질을 했다. 딸꾹, 딸꾹.


"그, 그런 건…… 아니, 물론, 요즘엔 애들도 더 이상 없고…… 쓸쓸했던 건 맞지만요. 그래도 그런 건 별로 반갑지 않아요. 네? 무섭다구요."


 그녀가 목에 걸린 사탕처럼 말을 뱉어냈다. "그거, 없애줄 수 있죠?" 그 말에 모브는 이상할 정도로 오래 의뢰인의 얼굴을 보고 있었다. 레이겐이 뭐라고 한마디 하려 할쯤, 그가 고개를 돌려 시선을 아래로 끌어내렸다. 마치 바닥을 쳐다보는 것 같았지만 그게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레이겐은 볼 수 없는 것을 보려고 노력하는 대신 그의 눈꺼풀을 보았다. 무덤덤한 낯이었지만 간혹가다 눈꼬리가 잘게 움직였다. 그는 레이겐도, 의뢰인도 볼 수 없는 것을 보고 있었다.


"응, 그러네…… 미안해."


 그가 작게 말했다. 너무 작아서 속삭이는 것 같은 목소리였다.

 그가 느리게 창문으로 다가갔다. 오랫동안 손대지 않은 창틀은 뻐근한 쇳소리를 내며 열렸다. 열린 문틈으로 바람이 바깥으로 불었다. 창문을 열었는데 안에서 밖으로 바람이 불다니, 이상한 일이었다. 허공을 어지럽게 돌아다니던 먼지들이 바람에 쓸려 빠져나갔다.


"나갔어요."


 모브가 짧게 말했다. 그는 창문을 등지고 서 있었다. 빛이 그의 등 뒤에서 들고 있었다. 햇빛이 그의 어깨의 윤곽을 덧그리며 손끝까지 떨어졌다.


 "정말이에요?"

 "정말로요."


 문득 눈이 마주쳤다. 조용했다.






 사례비를 받아서 돌아오는 길에 타코야끼를 샀다. 뜨끈한 비닐봉지를 손에 들고 강변을 따라 역까지 걸었다. 어느새 해가 지고 있었다. 수면이 붉게 젖어 있었다. 레이겐은 한쪽 손을 주머니에 넣고 있다가, 옆에서 걷고 있는 모브의 얼굴을 문득 살폈다. 여전히 아리송한 무표정을 하고 있었지만 눈썹이 약간 내려가 있는 것 같아 저도 모르게 손을 들어 그의 눈가를 매만졌다. "왜요?" "그냥." 도드라진 눈썹 뼈를 만지다가 뺨을 한 번 쓸고 손을 내렸다. 부드러워서 실없는 웃음이 나왔다.


 "아까 말야. 왜 사과했어?"

 "네?"

 "그, 영한테 말야."


 모브는 잠시 말을 고르는 듯 눈을 굴렸다. 그는 항상 천천히, 신중하게 말했다.


 "슬퍼하는 것처럼 보였는데, 제가 아니면 아무도 그 애한테 미안하다고 말해줄 수 없을 것 같아서요."


 그 애, 였다. 레이겐은 들고 있는 비닐봉지를 빙빙 돌리며 그 말에 대해서 생각했다. 카게야마 시게오는 다정했다. 그를 잘 모르는 사람들을 알지 못할 사실이었다. 남들은 볼 수 없는 것을 보고 남들은 할 수 없는 것을 하면서 다정하기란 쉽지 않은 일일 것이다. 그의 세계는 레이겐의 그것보다 몇 걸음쯤 더 멀었고, 레이겐은 가끔 그 거대함에 대해서 생각해볼 때가 있었다. 그럴 때면 이상하게도, 어렸을 적 살던 동네의, 성당의, 해 질 무렵마다 들리던 종소리가 떠올랐다. 길고 낮게 울리던 소리, 적막, 서늘함, 빛, 침묵, 외따로 떨어진 것. 그런 것들.

 신성이라는 것은 그런 것들의 통칭이었다. 그는 여전히 종교가 없었지만, 만약 무언가를 믿는다면 그의 다정함을 믿어도 좋을 것 같았다.


 "……손 잡을래?"


 불쑥 그렇게 말하자, 모브는 문득 수줍은 낯을 하고 눈을 내리깔았다. 그래도 가만히 와닿는 손바닥의 감촉은 부드럽고 따뜻했다. 천국은 아마 그런 온도일 것 같았다.







신성 (神聖)

[명사] 1. 함부로 가까이할 수 없을 만큼 고결하고 거룩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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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츠모브



 잊어버릴 수 없는 기억이라는 게 있다. 카게야마 리츠에게는 그날의 기억이 그런 종류의 것이었다.

 저녁 밥을 먹고, 그릇을 닦아 놓고, TV 앞에 앉아 있는 시게오와 몇 마디 말을 나눌 때였다. 리츠는 소파 뒤에 서 있었다. 부엌에서 반찬들을 정리하던 엄마가 문득, 거실 쪽을 쳐다보더니 이렇게 말했다. "얘, 리츠. 키가 좀 큰 거 아니니?" 리츠와 시게오가 동시에 고개를 돌렸다. 리츠는 들고 있던 리모컨을 무심코 내려놓았다. "잘 모르겠는데." "아니야, 큰 것 같아. 소파 등받이가 아래에 있잖아." 그런가, 하는 탄식 같은 대답은 시게오의 입에서 나왔다. 그가 리츠를 물끄러미 응시하고 있었다. 그의 시선은 종종 투명하다. 리츠는 그를 한 번 쳐다보고는, 문득 소스라치듯이 눈길을 물렸다.


 "시게, 한 번 일어나봐."


 시게오는 순순히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가 소파 팔걸이를 돌아 다가왔다. 성큼 가까워지는 걸음걸이에 망설임이 없다. 리츠는 반사적으로 어깨를 뒤로 뺐다가 문득 천장을 쳐다보았다. 하얀 전등 불빛이 어지러웠다. 뺨이나, 이마 같은 곳이 스칠 것 같은 거리를 의식하자 더욱 그랬다. "어머, 리츠가 더 큰 것 같네." 그 말에 시선이 반 바퀴를 돌아 제자리로 돌아왔다. 시게오가 제 정수리에 대고 있던 손을 리츠의 앞머리께에 대고는, 부스스 웃었다. "그러네……" 아주 조금, 그의 눈동자가 자신보다 아래쪽에 있었다. 유심히 들여다보지 않으면 알 수 없을 정도의 차이였지만, 확실히 그러했다. 그런 생각들은 그의 좁고 마른 어깨와 그 아래의 가는 팔, 흰 손등, 굳은 살이 없는 손바닥…… 같은 것들에 대한 생각으로 이어진다. 그런 흐름을 끊는 것은 어려웠다. 리츠는 눈을 한 번 감았다 떴다.


"형이 동생한테 추월당해서 어떡해?"

"괜찮아."


 리츠니까. 아무렇지도 않게 덧붙인 말 역시 투명하다. 이럴 때면 가끔씩 리츠는, 아주 어릴 때 가 보았던 아쿠아리움의 수족관을 떠올렸다. 푸른 물빛을 투과시키던 유리창들. 가까이 붙어서서 가오리나 고래 같은 것을 보다 보면 유리 위로 하나 둘 씩 손자국이 남았다. 그럴 때의 희미한 죄책감 같은 것들, 그런 것들.

 리츠는 그런 기분으로 시게오의 어깨를 꾹 잡았다가 놓았다. "형도 금방 크겠지." 손바닥이 차갑고 얼얼했다.






 밤은,


 리츠는 눈을 떴다. 눈이 서서히 어둠에 익숙해졌다. 천장 모서리의 윤곽을 눈으로 구분할 수 있을 때쯤 그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주 어두워서, 발걸음을 옮길 때마다 어둠이 발에 채일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자던 도중에 깼는데도 졸리다는 생각은 전혀 떠오르지 않았다. 시게오의 방까지는 눈을 감고도 걸어 갈 수 있을 것 같았다. 리츠는 망설이지 않았다. 망설이는 것은 그의 몫이 아니었다.

 방문을 열고는 잠시 문간에 서 있었다. 가만히 있으면 숨소리를 들을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러나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리츠는 천천히 침대 가장자리로 다가갔다. 시게오는 몸을 조금 웅크리고 잠들어 있었다. 이불 위로 드러난 실루엣이 얄팍했다. 좁은 어깨도, 가는 팔도, 마른 목과 손목도, 그의 상상과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아주 가까이 다가서도 시게오는 좀처럼 잠에서 깰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리츠는 그의 머리 옆을 손으로 짚었다. 삐걱, 소리가 크게 났다.

 아쿠아리움에서는 손을 잡고 다녔었다. 리츠는 모서리를 그때 수족관 안의 유리창이 모조리 깨어지는 상상을 했다. 그럴 수도 있었다. 카게야마 시게오는 그럴 수 있었다. 무서운 한편, 잡은 손이 무척이나 따뜻했다. 그 두 가지가 몽롱하게 뒤섞여서 투명한 눈동자를 가진 열대어들처럼 떼지어 물 속을 떠돌고 있었다. 투명하고, 파랗고, 어지러웠다. 리츠는 그런 것들에 사이에서 여러 번 눈을 깜빡였다. 어떤 고래나 상어도, 카게야마 시게오보다 크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이렇게 작았다.

 리츠는 한참동안 그를 내려다보았다. 






 다음날에는 열이 났다.


 "성장통인가보다."


 오랫동안 침대를 짚고 있던 손목이 아팠다. 그런가보다,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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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이모브/ 마지막에 대하여



 운동화 뒤축으로 모래 바닥을 긁자 성가신 소리가 났다. 모브는 운동장 가장자리에 서서 멀거니 사람들을 쳐다보았다. 저마다 사진을 찍거나, 꽃다발을 들고 웃거나, 울거나, 떠들거나, 소리를 지르거나, 그랬다. 올해의 봄은 유난히 추웠다. 때 늦은 꽃샘추위가 한바탕 바깥을 쓸고 다닌 탓이다. 며칠 동안 바람이 많이 불었고, 기껏 돋아난 꽃봉오리들이 죄다 떨어진 탓에 올해는 꽃 구경을 하기가 힘들 것이라는 얘기를 뉴스 앵커가 열심히 떠들어댔다. 계절에 어울리지 않는 두꺼운 목도리를 코 밑까지 두르고 현관으로 나서자 엄마가 종종걸음으로 따라 나왔다. "시게, 정말로 엄마가 안 가봐도 되겠니?" 모브는 대답 대신 목도리 안쪽으로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엄마는 오늘 중요한 약속이 있다고 그랬다. 아버지는 회사 일을 뺄 수가 없었다. 리츠는 졸업식을 주관하는 학생회의 일로 바빴다. 그가 혼자 집을 나선 이유였다.

 딱히 섭섭하다거나 쓸쓸한 것은 아니었다. 빈 손으로 혼자 서 있는 것이 조금 어색할 따름이었다. 종종 얼굴이 익은 동급생들이 그에게 말을 건넸지만 금세 지나갔다. 모브는 언제쯤 슬그머니 사라져야 남들 눈에 띄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 한 가지 생각에 골몰하면 다른 것을 잘 보지 못하는 것은 그의 오랜 버릇 중 하나이다. 덕분에 옆에서 다가오는 인기척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뭐야, 혼자 있어?"


 익숙한 목소리였다. 손이 먼저 다가와 모브의 어깨를 두드렸다. "와보길 잘했네." 레이겐은 옆구리에 커다란 꽃다발을 끼고 있었다. 그가 움직일 때마다 와삭거리는 소리가 났다. 모브는 순간 아연해졌다. 얼마 전, 슬슬 졸업식 할 때가 되지 않았냐는 그의 말에 지나가듯이 다음 주 목요일이라고 말했던 적이 있다. 정말로 지나가는 대화였기 때문에 레이겐이 그것을 기억하고 있을 줄은 몰랐다. 레이겐은 그가 대답을 하거나, 혹은 인사를 하기도 전에 들고 있던 꽃다발을 그에게 건네주었다. 분홍색, 노란색, 그리고 흰 색. 답지 않게 소녀스러운 꽃다발이었다.


"그, 어떻게……"

"오전에는 일도 잘 없고, 뭐, 시간이 비니까."


 라면이라도 사줄까? 아직 밥 안 먹었지? 그의 말들은 언제나 모브의 생각보다 한 박자 빠르다. 모브는 간신히, 라는 말이 어울리는 기분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레이겐이 한 번 웃었다.






 날이 추워서인지 때가 일러서인지 길에는 사람이 적었다. 졸업식 날 이렇게 빨리 빠져나오는 사람도 드문 모양이었다. 모브와 레이겐은 한적한 등교길을 거슬러 올라가며 걸었다. 모서리가 닳은 표지판과 때 묻은 담벼락, 꺾인 나뭇가지와 튀어 나온 보도블럭처럼 익숙한 것들이 오늘따라 눈에 잘 들어왔다. 모브는 천천히 걸었다. 레이겐은 평범하게 걷다가, 이따금씩 걸음을 늦춰 그를 기다렸다. 모브는 레이겐이 빨리 걸으라는 소리를 하지 않는 점을 좋아했다. 좋아하는 점은 그외에도 아주 많았다. 모브는 그것들의 개수를 세어보는 대신 담장 위로 드리워진 꽃나무의 가지를 보았다. 떨어지지 않은 꽃송이를 손으로 받치듯 만져보다가, 어느 새 두어 걸음 훌쩍 멀어진 그를 쫓아 잰걸음으로 걷는다. 어느 새 사무실 근처였다. 낯 익은 간판을 올려다 보았다. 이곳을 향해 걸어온 것이 몇 번이나 되었다.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과거의 습관과 미래의 예감이 한 가닥으로 겹쳐졌다. 이상한 기분이었다. 졸업이라서 그런 걸지도 몰랐다. 레이겐은 여전히 조금 앞서서 걷고 있었다. 모브가 문득 입을 열었다.


 "약속한 거 기억해요?"


 레이겐이 돌아보았다. 그는 천연덕스러운 표정이었다. 모르는 척하는 얼굴이라는 것을 모브는 알지 못했다.


 "무슨 약속?"


 그의 대답에, 갑자기 모든 것이 모호해지는 것 같았다. 그러고보니 그 자신은 약속을 했다고 생각했지만, 레이겐이 그것을 명확하게 말한 적은 없었던 것 같다. 그의 발걸음이 조금 더 느려졌다. 곧 횡단보도 앞에서 멈춰섰다. 빨간 불이었다. 택시가 그들 앞을 빠르게 지나쳤다. 모브는 발치로 시선을 떨어트렸다. 모래가 묻은 운동화 앞축을 쳐다보다가, 이내 눈앞에 있는 구두 뒷굽으로 옮겨갔다. 발목, 손끝, 허리, 등. 양복의 재봉선을 따라 시선을 올렸다. 등이었다. 이렇게 익숙한 이유는, 몇 십 번을 보아왔기 때문만이 아니라, 그보다 더 많은 횟수를 머릿속으로 그려봤기 때문이라는 걸 알고 있다. 모브는 무심결에 그 등에 손을 얹었다. 레이겐이 흘긋 그를 돌아보고는 다시 앞을 쳐다보았다. 뭐라고 말을 하지는 않았다. 신호가 바뀌었다. 손바닥이 달아오른 듯 뜨거웠다.

 또 한참을 걸었던 것 같다. 육교가 나왔다. 계단을 오르는 사이 모브는 몇 번 주먹을 쥐었다 펴기를 반복했다. 육교 위에는 아무도 없었다. 맞바람이 불고 있었다. 레이겐의 밝은 색 머리카락이 양복 옷깃 위로 파득거렸다. 그들의 발밑으로 차들이 요란하게 바람 소리를 내며 지나갔다. 모브는 작게 말하거나, 혹은 침착하게 말할 자신이 없었다. 지금이 아니면 말하기 어렵다는 뜻이었다.


 "키스해주세요."


 약간 크고, 높은 목소리였다. 음악 시간에 합창을 하다 삑사리가 나면 꼭 이런 기분이었던 것 같다. 얼굴이 삽시간에 붉어졌다.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이마에서 식은땀이 나기가 무섭게 싸늘하게 식어갔다.


 "……약속했잖아요."


 레이겐의 표정은 묘했다. 웃음을 참는 듯 부러 찌푸린 표정이었지만 타인의 기색을 읽어내는 것이 서툰 모브는 그의 생각을 짐작하지 못했다. "키스 해본 적 있어?" 레이겐이 물었다. "없어요." "그럼 첫키스네. 첫키스가 나로 좋아?" 모브는 여러 번 눈을 깜빡였다. 한 번 눈을 깜빡일 때마다 오랜 시간이 지난 것 같았다. "스승님이니까 좋아요." 말하자, 목 아래가 뜨뜻미지근해졌다.


 "스승님이 좋아요."


 눈을 감는 편이 나았다. 여러 번 이런 식으로 걸었다. 하지만 레이겐이 그에게로 다가온 것은 처음이었다. 손가락이 턱 아래에 닿았다. 가늘게 눈을 뜨자 시선이 마주쳤다. 그 다음에 마주친 것은 입술이었다. 아, 작은 탄식이 저절로 나왔다. "왜 그래?" "아무것도 아니에요." 다시 한 번. 무언가가 끝나가고 있었다. 그것은, 무언가가 시작되고 있다는 말과도 동일했다.







전력을 하면 글을 급하게 써서 항상 쉬운 묘사만 쓰게 되는 것 같아서 아쉽다ㅠ_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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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소쵸로/ 이상한 이야기



 쵸로마츠는 최근, 한밤중에 자꾸만 잠에서 깬다.

 여섯이 나란히 하는 이부자리가 새삼 불편할 리도 없는데 그랬다. 토도마츠가 같이 화장실을 가자고 보채는 일도 없었고, 쥬시마츠의 잠꼬대도 없었다. 여섯 중에는 제일 예민한 성격이긴 하나 20년을 형제들에게 부대끼며 살다보면 모난 부분은 으레 마모되기 마련이었다. 그런데도 그가 잠을 설치는 이유는 사실, 명백했다. 자정을 한참 넘긴 어딘가쯤, 정신없이 잠에 빠져 있을 때면 옆자리의 누군가가 스르륵 이불 밑을 빠져나가는 것이 느껴졌다. 부풀었던 이불이 가라앉는 감각이 이상하게 생생했다. 딱 여섯이니 더하거나 덜한 것은 곧장 티가 났다. 그러고나면 뒤따라오는 것은 누군가의 눈길이었다. 쵸로마츠는 매번 반쯤 잠에 취한 채로 그 시선을 느꼈다. 희미하게 배어나오는 창 밖 가로등의 불빛이 사람 그림자에 지워지고, 그 위에 누군가의 시선이 얹힌다. 눈을 감고 있어도 시선이 느껴지는 것은 이상한 일이었다.

 이상한 일이지…… 하고 생각하다가 다시금 까무룩하게 잠에 드는 일이 반복되었다. 다음 날 아침에 일어나면 그게 헛꿈인지 실재인지 잘 구분이 가지 않았다. 그들이 눕는 자리는 항상 정해져 있었고, 그것이 만약 그의 착각이 아니었다면, 한밤중에 일어나 그를 쳐다보고 있는 것은 언제나 그의 오른편에 눕는 오소마츠였다. 그렇게 결론을 내리고 나면 이번에는 왜? 하는 물음이 따라왔다. 좀처럼 답을 찾을 수 없는 물음이었다. 아침에 일어난 오소마츠가 평소와 전혀 다름이 없는 것 역시 그를 아리송하게 만들었다. 여느 때처럼 느즈막히 일어나 보는 사람 같은 것은 신경쓰지 않고 잔뜩 뻗친 뒷머리를 긁적이고 있는 모습을 보고 있으면 한밤중에 깨어 있는 조용함은 그에게 어울리지 않는 것처럼 느껴졌다.

 하지만 그 일은 계속해서 반복되었고, 반복되는 것은 관성을 만들었다. "쵸로마츠, 최근에 눈밑이 검군." 그렇게 말한 것은 카라마츠였다. 쵸로마츠는 손바닥으로 눈가를 문지르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잠을 설쳐서 그래." "안 좋은 꿈이라도 꾸는 거야?" "그게, 꿈인가……" 대답하며 흘긋, 곁눈질로 쳐다본 오소마츠는 소파에 기대어 잡지를 뒤적이며 아무런 표정도 짓지 않고 있었다. 생각들은 점점 더 모호해지고 있었다. 팔락, 책장이 넘어가는 소리가 무심했다.







 그날도 쵸로마츠는 반쯤 잠에서 깨어 있었다. 사위가 조용한 가운데 형제들의 숨소리만이 나직하게 방 안을 메웠다. 어두운 밤이었다. 내일 비가 온다더니 달이 뜨지 않은 모양이었다. 눈을 감고 있으면 마치 어둠 속에 짓눌려 있는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솔직히 이제는 꿈이라도 별로 상관없다는 생각이 들 즈음이었다. 갑작스레, 눈가에 무언가가 느껴졌다. 그것은 시선보다 훨씬 명백하고 두터웠다. 꿈이라고 착각할래야 착각할 수가 없는 감각이었다. 눈 아래의 뼈 부분을 매만지다가 눈꺼풀을 쓰다듬는 손길. 손. 그것은 손이었다.

 더 이상 자는 척을 할 수가 없었다. 쵸로마츠는 어렵게 눈을 들어올렸다. 마치 녹슨 자전거의 페달을 밟는 것처럼 눈꺼풀에서 삐걱삐걱하고 메마른 소리가 날 것 같았다. 빛 없이 캄캄해서 잠시 그를 내려다보고 있는 얼굴을 알아볼 수가 없었다. 아니, 알아볼 필요가 있을까? 어차피 여섯이 같은 얼굴이었다. 그것은 거울을 보는 것과 다름이 없는 행위였다. 그럼에도 쵸로마츠는 그 얼굴을 유심히 올려다보았다. 한참만에 그는 그 사람이 정말로 오소마츠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똑같은 얼굴을 하고 있어도, 똑같은 표정을 짓는 일은 없다.


"깼어?"

"……뭐해?"


 목이 깔깔했다. 지나치게 원론적인 질문이어서 말해놓고도 기묘했다. 오소마츠가 턱을 괸 채로 웃었다. 여전히 그의 얼굴 어딘가쯤에 닿아 있던 손이 떨어졌다. "네 얼굴을 보고 있지." 대답 역시 단순했다. 그 말투는 조금 경쾌한 것도 같았다. 너무 단순해서 쵸로마츠는 이것 역시 꿈이 아닌가 하는 생각마저도 들었다. "계속……" 그가 다시금 행간을 명확히 하려고 입을 열자마자, 뒷말을 먼저 읽어낸 마냥 대답이 돌아왔다. "응, 계속."


"……대체 왜?"


 창밖으로 차가 한 대 지나가고 있는 모양이었다. 헤드라이트의 불빛이 천천히 방을 훑고는 사라졌다. 순간 오소마츠의 이목구비가 밝아졌다가 다시 어두워졌다. 그 표정은, 뭐랄까, 한 번도 본 적 없는 종류의 것이었다. 웃는 것도 같았고, 무표정한 것도 같았다. 스무 해 넘게 보아온 얼굴이 낯설다는 것은 정말로 이상한 일이었다. 쵸로마츠는 왠지 무서워졌다. 무엇이 무서운지도 모르면서 그랬다.


"글쎄? 생각해보는 게 어때?"


 오소마츠가 그렇게 되물었다. 깜깜했다.







 마법처럼 그대로 다시 잠에 들어버렸기 때문에 그 뒤의 기억은 없다. 쵸로마츠는 왠지 그 질문에 대해 생각하는 것이 조금 자존심이 상한다고 생각했다. 출처를 알 수 없는 기분이었다. 그런 그의 느낌과는 상관없이 생각은 계속 한 방향으로만 흘렀다. 하지만 아무리 고심해도 좀처럼 답을 찾을 수가 없었다. 돌부리에 걸린 물살처럼 계속해서 생각이 턱턱 막혔고 어떤 결론도 내리기가 어려웠다. 무언가 놓치고 있는 것도 같은데, 그때의 그 표정을 되새기다보면 무얼 놓치고 있는 것인지 알아차리기가 어려웠다.


"……사람의 자는 얼굴을 계속 쳐다본다는 건, 대체 뭘까?"


 결국에는 누군가에게 물을 수 밖에 없었다. 오소마츠는 파칭코에 간다고 몇 분 전에 집을 나갔고 방에는 토도마츠와 이치마츠가 있었다. 이치마츠는 그 주제에 대해 별로 흥미가 없는 것 같아 보였다. 그는 어디서 데려온지 모를 고양이 한 마리에게 공을 굴려주며 쵸로마츠의 말을 못 들은 체 하고 있었다. 결국 그에게 되물은 것은 토도마츠였다. "뭐야, 무슨 얘기야?" "어, 아니, 소설책 얘기." "로맨스 소설도 읽어? 신기하네." 쵸로마츠는 덜컥, 들고 있던 책을 놓쳐버렸다. 바닥에 떨어진 책의 페이지가 제멋대로 넘어간다. "……뭐? 왜 로맨스 소설이라고 생각해?" "그야 그렇잖아~ 남의 자는 얼굴을 쳐다본다니, 사랑이네." "뭐어? 아니, 절대 아냐." 절대로…… 말을 끝맺지 못한 것은 불쑥 그 얼굴이 또 떠올랐기 때문이다. 갑자기 뱃속이 덜걱거렸다. 마치 모난 돌을 삼킨 것 같았다.


"뭐야 왜 물은 거야 그럼. 어떻게 되는 소설인데?"


 토도마츠가 볼멘 소리로 물었다. 쵸로마츠는 자신도 모르게 배를 움켜쥐었다. 왜 이런 기분이 드는 걸까.

"……글쎄, 나도 잘 모르겠어." 대답은 한참 후에 나왔다.







 해가 빠르게 지고 있었다. 낮이 짧아지는 계절이었다. 쵸로마츠는 어쩐지 그대로 방에 앉아 있을 수가 없어 밖으로 나왔다. 편의점에 들러서 몇 십 분을 어슬렁어슬렁 잡지와 음료수를 고르다가, 아르바이트 생의 눈치가 보여 더 이상 있을 수가 없을 때쯤 계산을 했다. 온장고에 넣어두었던 커피는 뜨거웠다. 주머니 속에 넣어두자 손끝이 따뜻해진다. 어둑한 길목마다 가로등이 하나 둘 씩 불을 밝히고 있었다. 쵸로마츠는 세 번째 골목에서 오소마츠를 마주쳤다. 어떤 식으로 말을 걸어야할지 몰라서 잠시 망설이다가 불쑥 커피를 내밀며 물었다.


"좀 땄어?"

"아아니, 아ㅡ 중간까지는 잘 되더니, 나중가서 다 잃었어. 나 돈 좀 빌려주라, 쵸로마츠."

"안 갚을 거잖아……"


 오소마츠가 커피를 받아들며 말했다. "미지근하네?" "좀 걸었더니 그래." "왜 걷고 있었어? 이런 시간에, 혼자." 발걸음이 무심결에 우뚝 멈췄다. 오소마츠가 두어 걸음 앞서가다가 뒤를 돌아보았다. 그 등 뒤로 한 줌 남아 있던 노을이 깜빡, 어두워졌다. 시간이 다른 시간으로 옮겨가는 때에는 이상하게도 현실감각이 없었다. 그래서, 그 말은 생각보다 쉽게 나왔다. "나한테 할 말 없어?" 오소마츠의 대답은 한없이 가볍다. "할 말이 있는 건 너겠지."


"……토도마츠가 그런 건 사랑이라고 말하더라."


 최대한 돌려서 말한다는 것이 그것이었다. 몇 걸음 떨어진 곳에서 오소마츠가 그를 쳐다보고 있었다. 모호한, 웃는 것 같은, 아닌 것도 같은 표정. 그제야 그 표정이 왜 낯설었는지를 알았다. 그것은 형제를 보는 얼굴이 아니었다. 그것을 깨닫자마자 오소마츠가 성큼 그에게로 다가왔다. 그의 행동은 언제나 쵸로마츠의 생각보다 빠르다. 손목이 잡히고 나서야 소스라치며 주먹을 꽉 쥐었다. 날은 점점 더 어두워지고 있었다.


"밀어내려면 할 수 있잖아. 그렇지?"


 오소마츠가 아주 가까운 거리에서 말했다. 그 다음에 닿은 것은 입술이었다. 입을 다물기도 전에 이빨이 부딪혔다. 아프다, 눈을 찡그리자 상처를 핥는 것처럼 혀가 앞니 뒤쪽에 닿는다. 아, 정말로 이상한 느낌이다.


 몇 초, 혹은 몇 분이 지났는 지 짐작이 가지 않았다. 입이 떨어지자마자 쵸로마츠는 크게 숨을 뱉어냈다. 한참 동안 숨을 참고 있었다. 얼굴이 붉어져 있다는 것을 보지 않아도 알 수가 있었다. 여전히 손목이 잡힌 채였다. 쵸로마츠는 담벼락에 반대쪽 손을 짚다 말고, 뒤늦게 여기가 집 앞 골목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불쑥 큰 소리로 외쳤다.


"아니, 지금 길에서 뭐하는 거야?"

"앗, 길가가 아니면 괜찮고?"


 "그런 얘기 아니거든?" 입을 맞댄 것이 무색하게도 언제나의 회화였다. 오소마츠가 키득거리면서 웃었다. 그는 생각보다 쉽게 쵸로마츠의 손목을 놓아주었다. 그러나 손바닥이 닿았던 곳이 몹시 간지러워서, 쵸로마츠는 손목 안쪽을 몰래 긁으며 그의 뒤를 따라 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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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문 정리2



트위터에 올렸던 것들

순서 맞추기가 귀찮았다...






     마고헤이







    타케야





    산사쿠






    아야토나






   리도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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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야토나/ 꽃과 졸업



 그 해 겨울은 유난히 길었다. 아침에 눈을 떴을 때 발이 시리지 않은 것이 몹시도 낯설게 느껴질 정도였다. 봄방학은 이미 반절도 넘게 지나간 시점이었다. 알람이 울리기도 전에 눈이 떠지는 일은 근래에는 거의 없었다. 토나이는 핸드폰 액정으로 시간을 한 번 확인하고는, 눈을 감았다. 아직 바꾸지 않은 두툼한 겨울 이불이 그의 어깨를 짓누르고 있었다. 그는 이마께에 희끄무레하게 번져오는 햇빛을 무시하며 이불 아래에서 몸을 옹송그렸다. 조금 더 잘 참이었지만, 그럴수록 정신은 더욱 또렷해졌고 결국 십 여 분 뒤에 알람이 울릴 때까지 조금도 자지 못했다. 요란하게 자기 주장을 하는 핸드폰 알람을 한 손으로 밀어 끄면서, 고개를 들었다. 환절기의 공기는 버석버석하고 미지근했다. 숨을 내쉴 때마다 마른 사포를 삼키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는 조금, 죽고 싶다고 생각했다.

 물론 그것은 생각뿐으로, 그는 이내 유감스러울 정도로 멀쩡한 상태로 찬 바닥에 발을 디뎠다. 세수를 하고, 옷을 갈아입고, 아직 잠들어 있을 동생을 생각해서 발뒤꿈치를 들고 미끄러지듯이 현관으로 나섰다. 밤새 싸늘하게 식은 낡은 운동화가 그의 발을 품었다. 현관문을 열자마자 그를 다시 문 안으로 욱여넣듯이 밝은 햇빛이 밀려들어왔다. 그는 숨을 참은 채 문밖으로 나섰다.


  버스정류장까지 가는 길은 그리 멀지 않았다. 주택가의 담벼락을 따라 천천히 걷다보니 정원수의 꽃가지들이 눈에 들어왔다. 목련, 산수유, 진달래와 반쯤 진 매화…… 그가 집 안에서 계절을 흘려보내고 있는 사이 봄은 이미 확실하게 찾아와 있었다. 토나이는 시종일관 느릿느릿 움직였다. 그는 타야하는 버스가 보여도 달리지 않았고, 내려야하는 곳보다 한 정거장 먼저 내렸다. 오랜만에 타는 버스라서, 살짝 착각한 것이라고 자위하기는 했으나 스스로도 그다지 신빙성은 없었다. 

 그의 학교는 오르막길에 있었다. 중간밖에 오지 않았는데도 벌써 숨이 찼다. 그의 발걸음이 멈춰선 것이 길목에 있는 꽃집 앞이었던 것은 순전히 우연이었다. 졸업식 꽃다발 팔아요, 하고 유성매직으로 쓰여진 피켓이 가판대 위에 붙어 있었다. 토나이는 저도 모르게 한참 그 자리에 멈춰서서 꽃들을 들여다보았다. 줄기가 잘린 꽃들은 형형색색의 포장지에 싸여 가지런히 누워 있었다. 곧 점원인 듯 보이는 젊은 여자가 앞치마에 손을 닦으며 그에게로 다가왔다. "꽃다발 사시게요?" 물어오는 목소리가 높고 쨍하다. 곧장 아니요, 하고 대답하면 되는 일인데 토나이는 엉겁결에 입을 다물었다. 그는 한참 동안 제 손끝을 매만지며 가판대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그 모습이 몹시도 어리숙해 보일지도 모른다는데까지 생각이 미쳤을 때, 그는 가까스로 입을 열었다. "이…… 보라색 포장지로 된 건, 얼마에요?"


 조심스레 손에 쥔 꽃다발은 걸을 때마다 바스락거리는 소리를 냈다. 교문이 가까워질 수록 소란스러운 소리가 났다. 졸업식 예식은 이미 끝난 모양인지, 웅성거리는 소리는 운동장 쪽에서 들려오고 있었다. 토나이는 교문 앞에서 잠시 망설이다가, 흰 장미와 분홍색 장미가 안개꽃과 어지러이 섞여 있는 꽃다발을 내려다보고는, 성큼 교정으로 발을 내딛었다. 운동장에는 졸업하는 사람과, 그들의 가족과, 후배들과 선생님들이 어지러이 섞여 있어 매우 번잡했다. 우는 사람도 있었고, 후련한 듯한 표정을 짓는 사람과, 못내 아쉬움이 떨어지지 않는 듯한 표정의 사람과, 마냥 즐거워보이는 사람, 또 아주 복잡미묘해보이는 표정의 사람들이 그를 스쳐지나갔다.

 아야베 키하치로는 그 중 누구도 아니었다.

 토나이는 그를 매우 쉽게 발견했다. 조금은 어려웠어도 좋았을텐데 그러지 않아서 다소 실망스럽기까지 했다. 아야베는 그가 가까이 다가갈 때까지 그를 알아차리지 못하고 있었다. 그의 곁에는 가족도, 친구도, 후배도 없었는데도 그랬다. 토나이는 두어 걸음 떨어진 곳에서 그를 불렀다. "선배." 하고 부르자, "오." 하고 돌아오는 대답이 평소와 다름이 없었다.

 그는 졸업장은 어디에 둔 것인지 달랑 빈 손으로 있는 아야베에게 말없이 꽃다발을 내밀었다. "내 거야?" "그럼 누구 거겠어요." 보라색 포장지가 그의 머리카락과 비슷하다고, 문득 생각하며 그의 품에 꽃다발을 밀어넣었다. 아야베와 꽃은 이상하리만치 어울리지 않았다. 그가 흙을 파는 것은 여러 번 보았어도 뭔가를 심는 것은 한 번도 본 적이 없으니, 어쩌면 당연한 일일지도 몰랐다. 졸업식임에도 교복 자켓의 팔을 걷어붙이고 단추는 죄 풀어 놓은 것이 과연 그다웠다.

 토나이는 항상 아야베에게 뭔가를 말하는 것이 어려웠다. 그는 아야베의 앞에 서서, 머릿속으로 열심히 할 말을 찾았다. 졸업 축하해요, 대학은 어디로 갈 거에요? 아쉽네요, 이제는 학교에서는 못 보겠어요. 상투적인 말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었지만 무엇 하나 말이 되지 못하고 침잠했다. 말이 되지 못한 것들이 목 아래에 쌓여 먹먹해졌다. 아야베는 손끝으로 꽃잎을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그 손아귀에서 꽃송이는 금방이라도 튿어질 것처럼 보였다.


 "저는 선배한테 꽃이 받고 싶었어요."


 그런 얘기를 하려던 것이 아니었는데, 그 말은 열심히 외운 수학 공식처럼 자연스레 입밖으로 튀어나왔다. 그리고 그건 매우 비참한 일이었다. 문득 눈동자가 시큰거렸다. 그는 어금니를 지그시 깨물며 운동장의 흙을 신발 뒤축으로 괜시리 짓뭉갰다. 시선이 바닥까지 떨어졌다. 상대의 표정을 확인하는 것이 조금 무서웠던 탓이다.


 "너도 나한테서 졸업할 때가 됐잖아?"


 반 박자쯤 늦게 돌아온 대답에는 억양이 없었다. 그 말에, 갑자기 목 아래가 뜨거워졌다. 말하지 못했던 것들과 말하지 않아도 좋았을 것들, 없어도 됐을 시간들과 있으나 마나 한 기억들이 모두 어지럽게 뒤섞였다. 그는 숨을 참았다. 별로 소용이 없었다. 그가 원하지 않았던 것들은 언제나 그의 생각보다 성큼 앞섰다.


 "……그런 건 선배가 정하는 게 아니에요."


 눈물이 났다. 정말로, 울고 싶지는 않았는데, 마지막까지 그의 생각대로 되는 것은 하나도 없었다. 며칠 째 비 소식이 없던 마른 흙바닥에 물 자국이 점점이 남았다. 그는 손등으로 눈가를 누르며 서러운 소리를 삼켰다. 금세 눈꺼풀이 축축해졌다. 아야베는 그를 위로하지 않았다. 봄이었다. 그를 빼고는 그 누구도 서럽지 않은 계절이었다.








마무리 고자는 불치병인가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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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이와 키리마루

 


 키리마루는 이따금씩 자리에서 멈춰설 때가 있다.
 그런 순간들은 길가를 걷는 도중이나 저녁을 먹고 난 뒤 빈 접시들을 치울 때, 다 마른 빨래를 거둬들일 때나 삭은 나뭇가지를 꺾을 때 등 아무런 개연성도 없이 찾아들었다. 그는 넉살이 좋은 아이였으므로 그 찰나의, 맥락에 맞지 않는 공백을 대개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넘길 수 있었다. 누군가가 왜 그래? 하고 물으면 손바닥에 벌레가 붙었어, 라든가, 옷소매에 먹이 묻었네, 하고 말하면서 씨익 웃으면 되었고, 그러고 나면 그 순간은 정말로 아무 것도 아닌 일이 되었다. 그의 또래 아이들은 대개 그 공백의 원인을 알 수 없었으므로, 그다지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겨울의 창백한 햇살이 그의 무릎 위에서 어룽거리고 있었다. 키리마루는 가만히 무릎을 꿇고, 방의 구석에 앉아, 아주 잠깐 무언가를 기억해냈다. 도이와 시답잖은 대화를 나누던 와중이었다. 새 책은 빳빳하고 냄새가 좋았다. 글씨를 눈에 담지 않고 책장을 후루룩 넘겨 보던 와중에 날이 서 있는 종이의 가장자리에 손끝이 스쳤다. 따끔했고, 피가 가늘게 배어나오는 손가락을 반사적으로 입에 넣다가 문득, 그랬다. 바로 옆에 앉아있던 도이가 그를 돌아보는 것이 느껴졌다. "……아, 종이에 베였어요." 손끝을 입에 물고 말하자 소리가 이 뒤쪽에서 뭉개졌다. 괜찮아? 하고 바로 물어올 줄 알았는데, 아무런 말도 돌아오지 않아서 키리마루는 멀거니 고개를 들었다. 도이는 의아해하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의 의심이 책의 가장자리나 가느다랗게 벌어진 상처 따위에 머물고 있지 않다는 것을 순간 알아차렸다. 사람과 사람이 나누는 소통의 박자는 아주 기민해서, 때로는 사소한 것으로도 많은 것을 말할 때가 있다. 그런 순간이었고, 키리마루는 혀끝에서 비릿한 맛을 느끼며 손가락을 입에서 빼냈다.

 

 "왜 그래?"

 

 도이가 물었다. 키리마루의 시선이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한 번, 굴러갔다가 다시 돌아왔다. "……상처가 나면요." 그런 류의 말을 할 때 그는 이상할 정도로 덤덤해졌다. "바로 입에 넣곤 했거든요. 소독해야한다고." 그는 무의식중에 젖은 손끝과 손끝을 비볐다. 얄팍한 상처가 싸르르해서 어깨가 흠칫했다. 그는 느리게 말을 골랐다. "어머니가요." 어머니, 와 엄마, 사이에서 조금 망설였다. 말의 끝을 무겁게 누르기라도 하듯, 그가 입을 다물자마자 침묵이었다.

 

 "그냥 그랬다고요."

 

 얇은 종잇장처럼 가볍고 바삭거리는 말투로 덧붙였다. 키리마루는 그런 종류의 침묵을 좋아하지 않았다. 누군가가 그를 불쌍히 여기는 것도, 어렵게 해야할 말을 찾아내는 것도 딱 질색이었다. 도이가 그를 마냥 불쌍하게 여긴다면, 조금은 비참하게 느껴질 것도 같았다. 키리마루는 좀 전에 나누던 실없는 대화의 끝머리를 떠올리려고 애를 썼다. 그런 그의 머리 위로 불현듯 툭, 손바닥이 올라왔다.
 "그랬구나." 도이는 딱 그 말만 했다. 그는 딱히 해야할 말을 찾은 것 같지는 않았다. 그 손은 머리카락을 헤집지 않고 정수리만 가볍게 쓸어내렸다. 키리마루는 목구멍 아래에서 왁자하던 것들이 잠잠해지는 것을 느꼈다. 젖은 손끝을 옷자락에 문질러 닦으며 시선을 내렸다. 숨을 내쉴 때마다 내려가는 어깨가 점점 무거워졌다. 어쩐지 몸이 그대로 앞으로 쏟아질 것만 같았다.
 그가 고개를 완전히 떨어트리기 전에, 도이가 다시 입을 열었다. 그가 그랬던 것처럼 아주 덤덤한 말투였다.

 

 "나는 이제 그런 게 기억이 잘 안 나."

 

 키리마루는 벽에 부딪혀 튕겨나간 공처럼 퍼뜩 고개를 들었다.
 도이의 옆얼굴에도 희뿌연 햇살이 조금씩 스몄다. 키리마루는 저도 모르게 그 얼굴을 찬찬히 들여다 보았다. 마치 처음 보는 사람의 얼굴을 쳐다보는 것처럼 그랬다. 한 해 내내 숱하게 보아온 그 얼굴이 낯설어서, 키리마루는 문득, 제가 알지 못하는 것들을 되짚어보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누군가가 감히 그를 짐작할 수 없는 것처럼, 그 역시도 눈앞에 있는 사람을 짐작할 수 없을 것이다. 그는 눈앞에 있는 사람이 어떤 식으로 살아왔는지 전혀 알지 못한다.
 나는 만약ㅡ 이 얼굴을 계속 기억할 수 있을까?
 키리마루는 암기하는 것처럼 계속해서 그 얼굴을 응시했다. 숱이 많은 곱슬머리와, 얄쌍한 눈썹과, 둥근 얼굴선. 그의 시선이 오랫동안 한자리에 머물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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